[160.12]
살며 생각하며
대신사, 대사모 묘소 합장과 대사모 순도비
- 전국 동덕님 뜻을 모으자
박동산_ 수운살기 대표
• 대신사가 하늘이니 사모님이 땅
1873년 음력 12월 9일, 강원도 정선 싸내에서
대신사 사모님이 49세 젊은 나이로 순도 하셨다.
평생 거룩한 순도의 길 걸으신 대신사 사모님에 대해
오늘날까지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해 온 내 자신이
죄송스럽다. 무릎 꿇고 고개 숙여 참회한다.
대신사를 후천개벽 세상을 열어주신
한울님 스승님으로 모시듯이 사모님도
대신사님과 똑같이 스승님으로 모셔야 한다.
대신사님은 도를 받으신 후
가장 먼저 사모님을 포덕 하셨다.
그리고 사모님을 같은 자리에 앉게 하시고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후천개벽은 남성 중심의 선천종교와 달리
하늘과 땅이 함께 열려 시천주 진리와
새 세상을 열어가는 진리이다.
대신사가 하늘이고 사모님이 땅이시다.
부화부순이 천도의 뿌리고 종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박씨 부인”은 지나가는 동네부인의 호칭
대신사 순도 이후에
사모님이 계신 주변에는 항상 해월신사님과 도인들이
사모님을 보살피고 모셨다.
그 시절 무극대도의 정신적인 중심은
사모님과 해월신사님이었다.
해월신사님은 사석에서도
박씨 부인이라고 호칭하시지 않고 사모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교단에서는 ‘박씨부인’, ‘박씨부인 환원’으로
글을 쓰고 말하고 있다.
지나가는 동네 부인처럼 아무렇게나 대접한 것은
시천주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
사모님을 ‘박씨부인’이라 호칭해온 것을
이제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불살라 버리자.
대신사님과 똑같이 사모님으로 모셔
후학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사모님은 대신사와 17세에 결혼하시어
평생을 대신사님을 지키시고
무극대도의 외길을 걸으시다 순도하셨다
.
대신사님은 주유천하를 하시면서
새 세상을 열어갈 천도를 찾으셨다.
사모님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근 20여 년간,
집 한 칸도 없이 추운 겨울에
어린 자식들 입힐 옷도 먹을 양식도 궁핍한
처절한 살림을 묵묵히 꾸려나가셨다.
사모님이 묵묵히 어려운 살림을 버티어 오신 것은
대신사 새 세상을 여는 시천주 진리를
한울님으로부터 받아 득도하시는 데
함께 하신 것과 같다.
대신사님와 사모님, 두 분은 힘을 모아
기쁜 마음으로 시천주 진리의
새 역사 새 세상을 열어가셨다.
용담정으로 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30, 40여 명씩 모여들자
대신사님은 그들에게 수행 지도를 하시게 되었다.
그때가 사모님이 36~38세 때였다.
구름같이 몰려오는 도인들을 접대하시느라
사모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셨지만,
아마도 이 때가 사모님께서는
제일 행복하셨고 보람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활도 얼마 못 갔다.
조선왕조는 동학을 뿌리 뽑기 위해
정운구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여
10일 새벽 1시경 잠자리에 들었던
대신사와 제자 및 사모님과 아들 세정 등
23명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대신사님은 대구 감옥에서 혹독한 신문을 당하시다
3월 10일 대구 관덕정 뜰에서 참형을 당하셨다.
세상 사람들을
한울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고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도를 지키시다
정부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죽임을 당하신 지 3일이 지나자
관은 사모님과 아들 세정을 방면하면서
대신사의 시신을 수습해가라고 했다.
대구 감옥에 잡혀갈 때
당당한 모습이셨던 대신사 사모님은
효수된 대신사를 보시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고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셨지만,
왜 대신사님이 41살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지 잘 아셨기에
제자들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않으셨다.
묵묵히 대신사 시신을
용담 구미산 기슭에 모실 때까지 기도하셨다.
• 대사모님의 고행은 순도의 길
40여 년 전, 사모님 둘째 딸
최완 할머니 증손녀의 환원 때 들은 이야기다.
사모님은 늘 정성껏 청수 모시고 기도하며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역적의 마누라라는 지탄과 관의 지목도 심하였다.
사모님은 도인들 도움으로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문두재 바로 너머 깊은 산골인
문두곡에 은신하셨다.
‘네가 걸어가는 길이 바로
한울님이 걸어가시는 길이다. 네가 걸어가는 길이
대신사가 걸어가는 길이다.
그 길은 사람을 살리고 우주의 모든 생명을 살리고,
풀벌레 삼천도 한울님으로 모시는
후천개벽의 길임을 잊지 말아라.
힘들 땐 힘들게,
고생이 심할 때는 고생을 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사모님은 아들 둘 딸 넷을 데리고
한울님을 위하고 살려내는
험난한 고생길을 시작해야 했다.
해월신사님은 대신사님 순도 후,
사모님 주변에 머물며 도인들과 형편 닫는 대로
사모님 가족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해월신사님, 사모님, 도인들은
함께하며 서로를 위하였다.
잡히면 참수형이나 귀양살이 감옥살이를
면치 못하는 신세지만, 사모님, 해월신사님 도인들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시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쉬지 않고 걸어가셨다.
집도 없고 먹을 밥도 없었으나,
내가 이 길을 걸어가면 한울님이
재워주고 먹여주시겠지 하는 믿음 하나로
낙엽 속에서 도토리 한알 한알을 줍듯이
사람을 만나시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이
사모님, 해월신사님의 피신 생활에 관심을 가지지만,
그분들은 그저 하늘이 정해준 외길을 다니시며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어가셨을 뿐이었다.
시천주 진리, 천도의 길, 하늘의 길은 외길이다.
이제 사모님의 고행길 일부를 조명하고자 한다.
해월신사님이 소미원으로 사모님을 찾아갔다.
사모님은 병석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식량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된 해월신사가
박용걸의 형에게 부탁하여 쌀을 가져다드리게 하였다.
1872년 1월 25일에 뜻밖에도 일행이 달려왔다.
세정이 방금 관에 체포되어
양양 옥에 수감되었다고 했다.
사모님 큰아들 세정이 옥에 수감됨으로
사가師家에 검은 구름이 드리운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해월신사, 강수 선생은
소미원으로 달려왔다.
양양 관아에서 사모님 가족을 체포하러 오기 전에
사모님 가족을 피신시키기로 하였다.
갈 곳은 직동 박용걸의 집뿐이었다.
1872년 음력 1월 28일 저녁,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날, 어둠이 깔리자
여자들은 남장을 했다.
해월신사, 강수 선생, 전성문 등 일행은
아이들을 업고 끌고 산길을 더듬어
박용걸의 집에 이르렀다.
사모님은 아들이 감옥에 수감된 고을로 달려가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모님은 옥에 잡혀 심문을 받는 세정이 걱정이 되어
밥을 넘기지 못하시고 밤잠을 설치셨다.
세정은 해월이 어디 숨어있는지,
네 어미와 자식들은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
풀어주겠다는 관의 효유를 끝까지 거부하다
1872년 5월 12일에 양양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선왕조는
대신사의 아들까지 죽임으로, 세정은 순도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사모님은 온종일 통곡하였고
해월신사는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남편이자 스승인 대신사가 죽임을 당하고,
큰아들 세정까지 매 맞아 죽임을 당했으나
죽은 아들을 찾아볼 수 없는 사모님.
우러러 한울님께
‘어찌해야 합니까 어찌해야 합니까’ 몸져누우셨다.
그해 9월에 이르자 영춘 관아에서
장간지에 계신 사모님을 지목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강수 선생은 사모님을 모시고 아이들을 업고 앞섰다.
해월신사님과 세정은 짐을 수습해 짊어지고 뒤따랐다.
아! 사모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난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사모님은 걷기가 힘드셨다.
뒤돌아보면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걸으셨다.
골짜기를 건너면 쓰러지고 고개에 이르면
숨이 차서 걸음걸이는 더욱더 더디었다.
곁에서 이 모습을 보게 되면 차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강수 선생의 처지는 어떠했을까,
해는 이미 기울어져 간다.
걷기를 재촉하지만 치마를 짧게 걷어 올리고 걷는데,
힘을 다했으나 심하게 발이 부르텄다
중도에서 소리 내어 한울을 부르며 통곡하셨다,
하늘은 실로 무지하구나,
어째서 나를 통곡하게 하는가,
강수에게 이르기를 무은담은 어디 있는가.
대답하기를 산을 따라 물을 따라 이른다고 하였다.
저녁 늦게 무은담 유인상의 집에 당도한 사모님은
몸살이 나서 누워버렸다.
기운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채
3일 후, 깊고 높은 민둥산을 넘어
정선군 동면 화암리 싸내로 갔다.
적조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치신 해월신사는
1873년 12월 10일에
정선 무은담 유인상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모님의 안부를 묻자 유인상은
바로 어제(음력 12월 9일)
사모님이 순도 하셨다는 부고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해월신사는 도인 김계악과 같이
싸내를 너머가 시신을 수습하였다.
도인들에게 부음을 전할 형편이 못되어
정식 장례는 다음으로 미룬 채 가매장하였다.
사모님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영양실조와 병을 얻어 49세 나이로 순도 하셨다.
한울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사모님 마지막 가는 길을
해월신사님이 직접 모시었으니 천은이 망극합니다.
사모님 대신사 순도 후 무극대도 조직의
구심점으로 역할을 다하시고 순도 하셨다.
• 대사모를 대신사님 곁으로, 부화부순
포덕 158년(2017)
그동안 성지순례를 함께해 오신 동덕님들과
정선 무은담 유인상 접주 생가터에서
민둥산을 넘어 사모님 순도하신 싸내까지
도보순례를 하기로
함백산 아래 적조암에서 기도 후 정했다.
적조암에서 49일 기도를 마무리 하시고
무은담 유인상 집에서 사모님 순도 소식을 들으시고
싸내로 달려가신 해월선생님의 심정,
사모님의 기운을 느껴 보기 위해
한번에 4~5명씩 5회에 걸쳐 순례를 갔다.
8시간 정도 걸어야 싸내에 도착할 수 있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나와 싸내를 걸어 보았다.
순도 하신 대사모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 성령으로 살아계신
대사모의 간절한 소원이 계신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용담 골짜기에 외롭게 모셔진 대사모님은,
대신사님과 합장하여 함께 계시고 싶으시고, 그러면
대신사님도 기뻐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총부와 전국에 계신 교인님들께 간절히 원합니다.
절차를 밟아 앞으로 대신사, 대사모 묘소를 합장하고,
대사모 당호를 추서하고, 순도비도 마련하여
교인들이 추앙하는 마음이
하루하루 높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전국의 교인들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이루면
한울님도 즐겁고 기뻐하시고
한울님이 감응하시어 교단이 새롭게 신나게
다시 태어나 좋은 세상이 올 것입니다.
한울님 은덕과 은혜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심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