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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산책
김붕래
1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단군이 언급된 자료 중에서 시기적으로 앞서고 내용적으로도 가장 풍부한 자료는 <삼국유사>(1281. 충렬왕 7)>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1287. 충렬왕 13)에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등장하는데 이 두 책이 단군의 이야기를 가장 충실하고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저술 시기로 볼 때 10여년 미만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두 책의 많은 내용이 비슷하면서 꽤 많은 부분이 서로 달리 기술 된 점도 있어서 이 두 책의 내용을 상호 보완하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의 모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환인 - 환웅 - 단군의 전승 과정이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홍익인간) 천부인 세 개를 지니고 삼위 태백에 하강하였다는 큰 줄기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단군의 탄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두 책의 서술 내용이 서로 다르다.
<삼국유사>에는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3·7일의 금기를 잘 지켜 웅녀가 되고, 그녀가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자 환웅이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달리 <제왕운기>에는 호랑이와 곰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단웅천왕(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박달나무, 광명의 뜻)과 결혼하게 해서 단군이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는 제단을 뜻하는 壇君으로 <제왕운기>에는 박달나무, 즉 밝음 광명을 뜻하는 檀君으로 단군의 이름도 서로 달리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신화의 해석 방법에 대입해보면 서로 같은 형식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환웅이 선진 문명을 지니고 나타난 도래인(渡來人)인데 반하여, <삼국유사>의 ‘웅녀’나 <제왕운기>의 ‘단수신’은 토착 원주민의 개념을 띠고 있다. 단군은 이 두 세력이 합쳐진 상징적인 존재라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신라의 혁거세와 6촌장, 김수로왕과 9간의 관계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단군조선의 강역 문제는 <삼국유사>에 비해 <제왕운기>가 보다 구체적이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이 세운 강토가 요동을 중심으로 사방 천리가 모두 조선의 땅이라고 알기 쉽게 적어 놓은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평양, 백악산 아사달, 장단경, 아사달의 4곳에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네 곳의 현재 위치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야기되고 있다. 일연 스님이 평양이란 지명을 ‘지금의 서경’이라 주석을 단 것에 기초하여 이 네 곳이 모두 한반도 안이라는 주장부터, 북쪽으로 하얼빈(신채호 등)이 등장하는가 하면 서쪽 중국 대륙 쪽으로 요서 지방의 조양(朝陽)시까지 비정되는 등(윤내현 등) 참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인데 <삼국유사>의 애매한 표현을 <제왕운기>가 정확히 매듭을 지어주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50년, 경인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고기(古記)를 인용해 적어 놓고도 일연 스님 자신이 이 자료가 정확한지 의심스럽다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에 비해 <제왕운기>는 “(단군은) 요임금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임금을 지나 하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다.“고 적고 있다. 이 ‘무진년’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BC 233년이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단군’이란 단어도 삼국유사의 ‘壇君이 아니라 <제왕운기>의 檀君이란 점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전통은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에도 조선건국 4252년이라 적혀 내려온다. 제헌 국회시절 우리의 연호는 단기로 쓸 것이 통과된다. 그러다 1962년에 와서 세계화의 물결 속에 서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제왕운기> 하권 머리말에는 ‘이 글은 삼가 ’국사‘를 살펴 각각의 본기와 수이전에 실린 글’을 취하여 적었다‘는 내용이 있다. 현존하는 <삼국사기>에는 ‘단군조선’조가 등장하지 않으니 이승휴 가 참고한 ‘국사’는 ‘구삼국사’였을 것이란 추측도 하게 된다. ‘각각의 본기’라고 했으니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국사>(신라), <신집>(고구려), <서기>(백제) 같은 삼국시대 편찬된 역사 서적도 이승휴 당시에는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함께 가능하게 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만 동떨어져 나와 후대 계승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 대신 고조선 위만조선 다음에 마한을 기술하고, 북부여, 동부여 다음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기술하여 이 나라들의 연결 관계를 유추하게 한다. <제왕운기>에는 <삼국유사>에 빠진 기자조선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는 후기 왕조 조선 학자들이 단군 - 기자 - 위만의 3조선 체제를 주장하게 하는 빌미를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제왕운기> 본문에는 “단군은 조선 땅에 근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시라(신라), 고례(고구려), 북옥저, 북부여, 예국, 맥국의 후손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고 설명하여 부여 삼한 삼국이 모두 단군의 후손임이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제왕운기는 이규보의 동명왕편(1193, 영종 23)과 조선조 세종대왕 때 저술된 용비어천가(1145, 세종 27)와 함께 3대 민족 서사시로 꼽히며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로 이용된다.
<제와운기>에는 계속해서 기자조선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없는 이야기다. 이 기자조선에 대해 현재는 거의 사료로 다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사>를 위시한 역사서에는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제왕운기>의 내용을 정리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기자는 주무왕 즉위 원년 기묘년(BC 1046) 망명하여 우리나라에 나라를 세웠다.
2) 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
3) 기자는 예를 올리지 않을 수 없어 무왕을 알현했다.
4) 무왕은 기자에게 홍범구주를 물었다. 이것은 주나라 건국 13년째의 일이었다.
5) 기자의 41대 후손 준은 나라를 뺐기고 백성을 떠났다.
6) 928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니 남겨진 풍속 빛나고 순박해졌다.
7) 준은 금마군(전북 익산)으로 옮겨 살면서 도읍을 옮겨 다시 임금이 되었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1) 한나라 장수 위만은 연나라 태생이다.
2) 한 고조 12년(BC195년) 준왕을 내쫓고 조선을 강탈했다.
3) 그 손자 우거에 이르러 허물이 가득하니, 한 무제 3년(BC 108년) 그를 토벌하였다.
4) 위만조선은 3대 88년, 한을 배반하고 준을 내쫓았으니 하늘의 벌을 당하였구나.
5) 조선이 네 개의 군으로 나뉘어, 진번 임둔은 남북으로, 낭락 현도는 동서로 설치됐다.
6) 풍속이 야박해져 합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세 개의 한(韓)으로 나뉘었다.
* 한사군
1. 낙랑군 : 108 - 313 고구려 미천왕이 수복
2. 진번군 : 108- 82년. 낙랑군에 편입
3. 임둔군 : 108- 82년, 현도군에 편입
4. 현도군 : 107- 407,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수복(창해군자리?)
5. 대방군 : 204년 요동태수 공손강이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시켜 설치(진번의 자리?)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점령
*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고,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갈석산은 만리장선 동남쪽 시발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서술 내용 비교
삼국유사 | 제왕운기 | |
연대 | 1281, 충렬왕 7년 | 1287, 충렬왕 13 |
편찬자 | 일연(경북 군위 인각사) | 이승유(삼척 두타산 천은사) |
개국 | 1. 2천여년 전 요와 동시(위서) 2. 요 50년 경인년(고기) | 요 무진년(BC 2333) |
국명 | 고조선(왕검조선) | (전조선) |
단군의탄생 |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壇君) | 상제 환인이 환웅에게 지상의 삼위태백에 내려가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명했다. (단웅천왕)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관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이다.(檀君) |
단군의치국 | 평양, 백악산아사달에서 1500년 치국. 주 무왕 즉위 원년 기묘년에 (BC 1046?1122?)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아사달에 은거 산신이 됨. 향년 1908세 | 치국 1038년, 은나라 무정 8년(38년?) 아사달에 은거. 신이 됨 (BC1286?), 164년 후 어진이가 개국 |
기자 조선 | 주 무왕 즉위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보냄. | 주 무왕 즉위 원년 기묘년(BC,1046) 개국, 41세 준왕 때 멸망, 928년 치국 금마군(익산)으로 옮겨 다시 개국 |
위만 조선 | 1. 위만이 패수를 건너 왕검에 도읍 2. 진번임둔이 항복하여 땅이 사방 수천리가 됨. 3.원봉 3년 이계상 참이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 | 한 고조 12년(BC195) 연 장수 위만 조선 강탈, 한 무제 원봉 3년(BC108) 우거왕을 토벌. 4개의 군으로 나뉜지 72년 후 신라 개국 |
체제 | 고조선 - 위만조선 -마한 |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 무정(은 22대왕) - BC1325- 1266 무정 8년- 은 22대 무정 38년의 오기?
* 정확한 사기 연표는 BC 846 공화 원년부터 시작
* 기는 나라 이름 자는 작위 이름은 서여 胥餘 - 윤내현
* 청주한씨, 행주기씨 태원 선우씨 기자가 원조.
* 환웅 환인 환 = 희다 밝다
이 두 책보다 150여년 앞서 저술된 <삼국사기>(김부식, 인종 23, 1145년)에는 단군을 직접 언급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두 부분이 행간에 스치듯 나타나는데 이도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가 고려를 대표하는 관찬(官撰)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시조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1년 갑자(B.C.57) 4월 병진일 에 즉위하고 거서간이라 불렀다. 그 때 나이는 23세이다. 나라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았다(遺民 고조선부터 남겨진 백성)
나)《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 동천왕 21년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 여겨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사직을 옮겼다.(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 혹은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하기도 한다.)
2. <응제시주>와 단군
조선 왕조로 들어와서 단군을 이야기한 논저는 권람의 <응제시주>(1462, 세조8)와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1485, 성종 16년)이 대표적이다.
조선 개국 초(태조 5) 명나라 사신으로 간 권근은 명 태조 주원장이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하자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바쳤는데, 권근의 손자 권람이 세조 때 왕명을 받아 이 시에 자세한 주석을 달아 편찬한 책이 <응제시주>이다. 그 중 단군과 연관이 있는 것은 명 태조 주원장이 내린 <고려고경(高麗故京)>이란 시이고, 권근이 지어 바친, (단군이) 처음으로 동이(東夷)를 연 임금이란 뜻의<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란 시다.
此是昔時王氏業(차시석시왕씨업)
檀君逝久幾更張(단군서구기경장)
이곳은 옛날에 왕씨(고려 왕조)가 나라를 일으킨 곳이었는데
단군(檀君) 가신지 오래구나 ! 여러 번 왕조가 바뀌었네
이것이 명태조의 시인데 특히 중국 문헌에 <조선>이란 단어는 여러 책에 등장하지만 ‘단군’이란 단어는 이것이 필자가 접한 최초의 단어이다. 그리고 이 시는 일반 서정시가 아니라 일국의 제왕과 일국의 사신 간에 오고간 역사에 대한 논저이니만큼 객관적인 사실을 담보로 한 것으로 이해되는 만큼 이곳에 등장하는 단군이라는 단어는 각별한 역사적인 뜻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또한 ‘檀君逝久’란 구절도 주목할 만하다. ‘死’가 죽었다는 표현이라면 ‘逝’는 ‘돌아가셨다’ 정도의 존칭이니 한 나라를 연 창업주에 대한 예절도 깍듯이 들어난 셈이다.
聞說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문설홍황일 단군강수변 위림동국토 시재제요천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
전세부지기 역년증과천 후래기자대 동시호조선
전설을 들어보니 먼 옛적에 단군이 신단수 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땅에 이르러 나라를 일으키셨으니 이때가 요임금 때였다네.
전해 내려옴이 몇 해인지 모르나 역년이 천 년을 지났다고 하네.
후에 기자의 시대가 와서는 함께 조선이라 불렸다고 하네.
이 것이 권근이 단군을 노래한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란 시다
권근은 이 시를 짓고 스스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옛날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하자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으로 삼고서 단군이라 불렀으니 이때는 요임금의 원년인 무진년이었다.’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 하강’이야기는 도 동국통감>에도 나온다. 조선조에 나온 문헌은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하강하는 형식이다.
또한 세조의 명을 받고 권람은 <응제시주>를 간행하면서 스스로 또 다른 주석을 이곳이 붙였다. 그 내용은 <삼국유사>와 비슷한데 후반부에 다음과 같은 <삼국유사>에 없는 부분이 첨가되었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단군은 우임금의 하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이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 그 후 164년이 지난 기묘년에 기자(箕子)가 와서 임금에 봉해졌다.”
이 도산회맹(途山會盟)은 중국 측, 한국 측 양국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후들을 도산에 소집하니 옥과 비단을 지닌 많은 제후들이 참석했다. 會諸侯途山 執玉帛者 萬國 <淮南子>‘원도훈’ ”비슷한 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전한다. “우 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광 회합시 우왕은 부루에게 금간옥첩(오행치수법)을 받았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단군의 아들이 부루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중국 왕조와 교류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의 내용을 종합 요약한 것으로 생각되는,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 ‘외기’에는 단군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서기 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참고로 단군의 나이에 대해서는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라고 <삼국유사>에 기술된데 비하여 <제왕운기>에는 “102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적혀 있디. <응제시주>에는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 그 후 164년이 지난 기묘년에 기자가 와서 임금에 봉해졌다”고 차이를 보이는 이에 대한 자세한 내력도 검토해볼 일이라 생각한다.
3. <조선왕조실록>과 단군
1)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태조 1권, 1년(1392)
2)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조선왕조실록》태종 31권, 16년(1416 )
3)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사눌(柳思訥)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중략)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구월산)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평양)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세종 75권, 18년(1436)
4) 예조(禮曹)에서 황해도(黃海道) 삼성사(三聖祠)에 있는 단군(檀君)의 축문(祝文)을 평양(平壤) 단군사(檀君祠)의 예(例)에 의거하여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쓸 것 (하략)
— 《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5) 전조(前朝: 고려)의 옛 능(陵)과 단군(檀君)·기자(箕子)·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의 능을 수축(修築)하라고 명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영조 101권, 39년(1763)
6) 예조 판서 심수(沈鏽)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의 고적(故蹟)을 물으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영조 106권, 41년(1765)
4. 단군 사당에 대한 기록
1) 구월산 삼성사
삼성사(三聖祠)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 환인, (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삼성사 옆엔 장장평 혹 장당경이라 부르는 터가 있는데 이곳이 단군의 도읍지였다고 전한다.-《세종실록》<지리지>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셨는데 이를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어떤 이는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 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1428) 6월 14일자 기사. / 황해도 문화현 출신의 우의정 유관(柳寬)의 상소 중
《삼국유사》의 주(註)에서 이른, 환인천제(桓因天帝)는 곧 유관(柳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檀因)이고, 환웅(桓雄)은 천제의 서자(庶子)이니, 곧 이른바 단웅(檀雄)이라 하겠습니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寺宇)를 창립하고 환(桓)을 고쳐 단(檀)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였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단군을 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二聖)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이 토인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즉위년(1452) 6월 28일자
2) 마니산 참성단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3) 전등산 삼랑성
전등산(傳燈山)【일명(一名) 삼랑성(三郞城)이니, 참성(塹城)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한다. - 《세종실록》<지리지>
4) 평양 단군릉
북한은 1993년 발굴한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 양식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측은 고구려 시대에 복원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화의 개념 :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
집단 무의식의 반영, 한 민족의 시작과 성장 과정을 보여줌.
있었던 이야기를 전승 과정에서 신격화시킴.
5. 중국 자료와 조선
1) <산해경(山海經)>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해(海-발해)의 북쪽이며 산(山-갈석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朝鮮 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해내북경
*2북해(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 해내경/ 발해의 모퉁이 - 발해만, 래주만, 요동만
2) <관자(管子)> (BC 636년 경)
가)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관자에게 '내가 듣건대 해내(海內)에 귀중한 물건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에 대해 들을 수 있겠소? 라고 하니 관자가 '음산(陰山)의 유민이 그 한 가지요, 연(燕)의 자산백금이 그 한 가지요, 발(發)과 조선의 문피(文皮)가 그 한 가지요(후략)라고 답했다." - 권 23 규도(揆道)편
나) "발(發)과 조선이 조근(朝瑾)을 오지 않는 것은 문피와 태복(모직 옷)을 예물로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한 장의 표범가죽이라도 여유 있는 값으로 계산해 준다면 8천 리 떨어진 발과 조선도 조근을 오게 될 것입니다." - 권 24, 경중갑(經重甲)편:
다).<사기(史記)>-진시황본기 제6 至遼東. 東至海曁朝鮮.
진시황 26년(BC 221) 진나라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다
라) <사기(史記)> ‘조선열전’의 내용은 위만조선에 관한 것이라 생략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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