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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청자의 발생과 발전 과정
線(선)은
가냘핀 푸른 線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신한 어깨여
四月 薰風(사월 춘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중략)
上工(상공)이요 畵家더라
진흙 속 彫刻家다.
그러나 이것은
千年(천년)의 꿈 高麗 靑磁器!
1. 개요 2.신비로운 비색(翡色) 3.쇠퇴 이유 4.현대의 재현 5.청자기와 6.기타 7.현대 창작물에서 8.관련 역사기록
9. 고려청자 고미술품 목록
9.1. 국가 지정 문화재
9.2. 시도 지정 문화재 9.3. 일반 동산 문화재 9.4. 해외 소재 문화재
고려청자(高麗靑磁)는 청록색 계열의 빛을 띠는 고려시대의 청자를 말한다. 영어로는 Goryeo Celadon[2]이라 한다.
이름대로 고려시대에 주로 제작되었지만, 그 시작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보고로 대표되는 서남해 무역집단이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당나라의 도자기를 꾸준히 수입했고, 한동안은 중국 수입품으로 수요를 감당했지만 이에 자극을 받아 전라남도 강진군, 전라북도 부안군 지역 등의 가마터에서 자체제작 청자의 초기 형태인 해무리굽청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3] 여기에 따라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인물이 장보고다."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기사1기사2 다만 명지대 윤용이(미술사학) 교수 등 고려청자가 10세기 이후에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본격적인 청자의 발전은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중국 오대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아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2세기 무렵에는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고려 시대 미술품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세계 도자기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품이다. 당대에도 국제적으로 최고급품 취급을 받았고, 남송의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袖中錦)이라는 책에서는 "고려의 비색[4]은 천하제일"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도경>에서 고려 전반을 묘사하면서 비판적, 때로는 조롱적으로 고려를 바라본 서긍조차도 고려 청자의 비색은 딱 집어서 칭찬하였다. 기타 사서에는 '중국 대륙 어느 지역 청자와 비슷하다.' 정도로 언급되어 있다. 당시 남송황실을 비롯하여 티벳과 베트남, 필리핀 등지 그리고 일본전역에서 유물이 발굴 되었다. 상감청자, 宋 아닌 거란 공예 힘입어 탄생
특히 고려청자는 은은한 푸른 빛깔-비색(翡色)과 상감(象嵌) 기법으로 유명하다. 보통 비색과 조형을 강조한 순수청자 시기, 상감 기법을 중시한 상감청자 시기, 그리고 몽골 제국의 침입 이후 쇠퇴기로 나눈다. 고려 초는 순청자가 유행했고, 인종대 이후 기법이 발달하면서 상감청자도 나타나 무신정권 시기 절정에 이르렀으며, 몽고 치하에서 점차 쇠퇴하고 조선 초까지 분청사기가 민간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상감청자의 기법은 칠기나 동기 등의 기술과도 상통하는 고급 기술로 고려 공예의 뛰어난 기술을 잘 보여준다. 상감청자의 장식이 갈수록 화려해진 것에 대해서는 단정한 문신들에 비해서 무신정권기의 무신들은 청자를 보는 눈이 깊지는 못해서 겉으로 금방 보기에 화려한 무늬가 많은 상감청자를 선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이 수준이 높고 낮고의 문제는 아니고 시대상과 기술력의 발전을 반영했다는 의미이다.2. 신비로운 비색(翡色)[5]
고급 청자의 푸른 빛은 따로 푸른 색소를 넣은 것이 아니다. 비색 청자는 유약층 안에 수많은 기포가 들어차 있는데, 유리질 속에서 빛이 산란되어 푸르게 보이도록 만든다
도자기에는 태토와 유약의 수축률 차이로 인해 균열이 발생된다. 근대기 화학의 발달로 수축률, 열팽창계수 등을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전근대시대의 도자기 대부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약에 균열이 존재한다. 이렇게 생긴 상감청자의 균열을 '빙렬무늬'라 한다. 본래 이 빙렬은 결함이지만, 일종의 장식으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빙렬을 만드는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마친 상태에서 도자기를 꺼내면 바깥의 찬 공기와 가마 속 따뜻한 공기가 반응해 유약층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 가마에서 빙렬이 생기면서 나는 쨍쨍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렇게 보면 별거 없는 그저 결함같아 보이지만 이 빙렬을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규칙적이고 일정한 크기로 나도록 일부러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빙렬은 단순 기술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종래에는 청자의 품질이 낮아지면서 이를 커버하기 위해 상감 기법을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계속된 발굴 조사로 순청자의 전성시대부터 이미 상감 기법이 시도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부정되었다.
고려청자만의 특유의 색이나 상감기법을 이용한 문양표현 같은 동시대 중국에는 없던 한국 특유의 면이 있는 점과, 송나라때 세계에서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하던 나라는 고려뿐이었다는 점은, 고려 도자기 기술의 우수성의 증거다. 당시 한국의 도자기 기술이 중국을 따라잡던 수준을 넘어서 중국시장에서 자체적인 특산품이라 인정받고 세계 상품인 중국 도자기들과 당당하게 경쟁하며 수출하는 수준까지 올라왔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송, 원, 명대 초기까지의 한국의 청자와 백자 도자기는 세계 도자기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로 자리잡고 있다.
1159년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국보 제115호 청자 상감당초문 완이 있다.
한국 도자기에 대해 가장 많은 과학적인 연구를 하는 곳중 한 군데는 미국의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이다. 여기서는 한국 도자기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를 골라 과학적인 연구에 대한 사례로 살펴본다.
고려청자의 비색에 대해서는 북송 대의 『고려도경』과 남송 대의 『수중금(袖中錦)』을 반복 혹은 조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남송 태평노인의 『수중금』에는 “건주·촉 지방의 비단, 정요 백자, 절강의 차, 고려 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모방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하여 천하의 명품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하였다. 특히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북송의 여관요(汝官窯) 청자의 비색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는 점에서 이러한 평가는 매우 의미가 깊다.
당대 중국인이 "우리 물건 세 가지와 함깨 세계 최고에 속하는 고려비색"이라고 했다는 것에서 '고려비색 세계최고론'이 퍼졌다. 간혹 '한국 내에서만 세계최고 취급이라더라.' 또는 '고려 청자는 부장품용으로 소수생산된 물건'이라는 주장 역시 최근 당시 난파된 무역선에서 고려청자가 대량 발견되면서 '고려청자 내수용설' 역시 근거가 없어졌다. 2013년 중국에서 개최한 고려청자 국제학술대회에서 빈약한 문헌기록을 뒷받침할 유물이 많이 발굴됐다는 보고가 나와 소수 특정인의 기록에만 의존하던 '고려비색 세계최고'론의 실체가 어느정도 밝혀졌다. 특히 『수중금』의 기록이 태평노인의 개인적 감상이었는가 보편적 인식이었가 하는 문제제기는 '남송황실의 유물'로 대변된다. 기록자 개인취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청자 종주국이 고려청자 역수입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은 상감청자의 유통 문제였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수도를 항저우로 옮기면서 남송시대(1127~1279)가 시작된다. 상감청자는 남송시대인 12세기 중반 이후 제작되는데, 남송 이후 송과의 교류는 고려사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학계는 두 나라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를 중심으로 상감청자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고려청자가 발굴된 사실이 이번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의 완제품이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티베트 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선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생산된 청자가 나라 전역에서 발굴됐고, 상감청자를 포함한 많은 고려청자가 멀리 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도 발굴됐다는 사실도 보고됐다. 어떤 중국인 학자는 "중국은 남송 때 고려의 상감청자를 역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의에 때맞춰 항저우에 있는 '중국 관요(官窯) 박물관'에서 고려청자 특별전이 열렸다. 남송 때 항저우 인근에서 발굴된 고려 상감청자편[6]이 대량으로 전시됐다. 특히 상감청자로 제작된 황실의 제의(祭儀)용 물품과 황제의 비(부인) 및 궁전의 명칭이 표면에 새겨진 상감청자편도 있었다. 상감청자가 송나라 황실에서 수입돼 사용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중반부터 제작된 상감청자가 남송은 물론 동아시아 일대에까지 대량으로 유통·소비된 사실은 기록상 나타나지 않은 고려의 활발했던 대외교류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의 명품 청자는 『고려사』 『고려도경』 등 몇 편에 불과한 빈약한 문헌기록의 공백을 메워주고 고려의 가려진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한 고려 문화의 아이콘인 셈이다.
고려청자는 그 당시에 국제시장에서 인기있는 수출품목 중 하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남송 시대에는 청자 중 최고의 완성도로 평가받는 용천청자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고려청자가 남송으로 대량수입되었다는 것은, 송 청자와 다른 고려청자만의 가치와 미술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려청자는 송 청자에 비하면 생산량도 적고, 국제교역품이었으므로 가격대도 더 높아졌을 것임에도 인기가 있었다는 것.
고려 청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송나라 청자는 송 유교의 복고주의에도 영향을 받아서 각광받았는데, 송에서 귀하게 여긴 녹옥과 청자, 그리고 청동기는 모두 녹청색을 띠고 있다. 그런데 사실 청동의 녹청색은 원래 산화한 녹이다.
조선시대때에 청자는 점차 유행에 뒤처지면서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래도 17세기 말엽까지는 조선청자로 불리면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청자 제조의 기술은 거의 실전되고, 대한제국 시대에 가서는 청자의 존재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이를 찾은 것은 바로 일제인데, 고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파다가 청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이미 구한말 때부터 고려 무덤에 대한 도굴이 기승을 부렸다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자 수집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로 희한하게도 덕수궁 박물관에도 가져다놓았다고 한다. 고종이 청자를 보고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묻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도자기라고 대답했고, 고종은 "우리나라에는 이런 거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항목의 맨 위에 언급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도 강화도의 왕릉 혹은 귀족 무덤에서 일본인 도굴꾼이 파낸 물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현재도 강화도에서 고려의 30여개의 이궁과 궁궐중 단 4군데밖에 발굴이 안되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청자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흔히 귀족의 그릇이 청자고 서민의 그릇이 백자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7] 백자가 청자보다 인기 있게 된 이유는 교과서에서 나오듯이 단아한 아름다움, 우아함, 청백의 순수함 등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는 이유가 크다.[8] 청자→백자로의 이행은 중국에서는 원나라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졌고 서양, 중동, 중앙아시아에서도 문화적으로 백색을 더 선호했다.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경우는 백색을 태양의 색으로 여겨 신성시하는 풍습이 있었고[9] 이는 백자로 전환된 이유에 대한 온갖 추측 중 하나이다. 지금도 전 세계 레스토랑에서 청자와 백자 어느 것을 더 많이 사용하는지, 본차이나 등 유럽 명품 도자기들이 청자인지 백자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온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조선시대 초기까지 청자를 만드려고 애쓴 기록들이 있다.
청자에서 백자로 바뀐 것은 단아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기보다는, 수천 년 중국 도자 역사에서 당대 취향이 백자로 전환되었을 뿐이라거나, 원나라 특유의 유목민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등이 있지만 그저 수많은 설 중 하나일 뿐이다. 원나라 이전까지 청자가 백자보다 더 유행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까지 기술 부족으로 백자에서 완전한 백색을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중금에서 고려청자와 함께 천하제일로 거론하는 정요 백자를 보면 알겠지만 완전한 백색을 구현하지 못하고 칙칙해서 백색이라기보다는 회색상아색에 더 가깝다.[10] 이런 백자의 기술 부족이 해결된 시대가 원나라 후기로 백자에서 완전한 백색이 구현되자 청자가 밀려나고 도자기의 대세를 백자가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기술적으로 보면 청자보다 백자를 만들기가 더 어렵다. 청자는 유약의 혼합으로 전체적으로 청색을 냄으로써 무늬를 넣을 수 있지만, 백자는 바탕이 하얗기 때문에 희귀 원료가 많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백자에 파란 무늬를 넣는 코발트 안료다. 백자에 많이 사용되는 코발트는 이란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고문헌에는 회청(回靑, 혹은 회회청回回靑)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무역으로 확보할 수밖에 없었던 귀한 안료였다. 이를 대체하고자 조선 세조 때부터 국산 청화안료인 토청(土靑)을 개발하고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토청은 회청처럼 선명한 푸른빛이 나오는 게 아니라 검푸른 색이 나온다.(참조)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온도인 섭씨 1,200도[11]이상에서도 온전히 버틸 수 있는 안료가 코발트뿐이기 때문이다. 생물 안료는 수백 도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광물안료들도 고온을 버티지 못해 변색되거나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그 문양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대신 조선 후기에는 대체 염료로 인해 청화백자 수가 늘어난다. 토청도 비록 색이 좋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대체재로 활용되었고, 18~19세기 들어 서양산인 값싼 양청(洋靑)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값이 확 떨어진다. 양청은 단청에도 쓰일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만드는 것이 더 어렵고 복잡할수록 가격이 높아지고,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사치품으로서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현대에도 명품 백이나 명품 시계 등은 이 핑계 저 핑계 대서 가격을 일부러 높여 받는 것을 생각하자. 현실적으로 당시 서민들은 목기나 도기를 주로 사용했다 한다.
고려청자가 조선백자에 비해서 대체로 무늬와 형상이 정교하고 화려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은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사치를 멀리하는 검약 정신을 강조하였기에 고려의 귀족 문화와 같은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화 영역에서 조선은 고려보다 검소함을 지향한 부분이 많다.
[1] 간송미술관 소장. 현존하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간송미술관의 창립자인 전형필이 이 청자를 구입한 금액은 2만 원으로 당시 서울 시내의 기와집 20채 가격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수집가 무라카미가 그 2배의 가격을 제시하며 팔 것을 권유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이 청자보다 더 훌륭한 자기를 가져오시면 바꿔 드리겠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2] Celadon이라는 단어는 잘 쓰이지 않는 매우 희귀한 단어인데,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의 무지개시티가 Celadon City로 이 단어를 썼다.[3] 백자와 흑유자도 소량이지만 이 시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제작된다.[4] 청자 특유의 푸른 빛깔을 말한다.[5] 緋色이 아니다. 翡色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의 색이다.[6] 상감청자의 파편[7] 서민들도 '녹청자'라는 보급형 청자를 즐겨 썼다.[8] 미적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다.관상용 자기는 금박에 검정색을 입힌 것부터 형형색색의 성운을 표현한 느낌까지 장르나 종류도 대단히 다양하다.흰색에 매료됐다기보다는 음식물을 보관하는 본질적 연관성과 식욕과 색상학과의 연관에서 사용자의 선택과 도태의 문제로 봐야한다. ex)식욕을 떨어뜨리는 색=파란계열색/편의점의 도시락통이나 라면 용기는 검정이나 흰색이나 채도가 낮은색계열이다. 주황색에서 붉은색까지는 식욕을 돋구는 색으로 정의하고 있다.[9] 한민족도 이와 비슷하게 오랜 옛날부터 백의민족 사례와 같이 흰색을 숭상해온 이유가 이것이다. 순우리말로 '해(日)'와 '흰(白)'은 어원이 같다고 한다.[10] 이는 정요백자가 산화번조로 구워졌기 때문에 흙과 유약 속의 미세한 철분이 산화되어 생기는 현상이다. 원대 경덕진요의 초기백자역시 원료의 미세철분 조정이 (비교적)미숙하여 새하얀 백자가 아니라 청백자가 생산되었다.[11] 백자는 태토와 유약의 조합에 따라 구워지는 온도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백자라 하면 1200~1300도 사이에서 구워졌다. [12] 고가의 장비가 아닌 이상, 측정방법 상 오차가 심해서 신뢰하기 힘들다.[13] 조선의 백자는 중국 경덕진이나 일본 아리타보다 상대적으로 Al2O3 함량이 낮고 SiO2 함량이 높기 때문에 1300도가 넘는 온도라면 흙이 녹아 내렸을 것이다.[14] 오전 9시 30분.[15] 이때 서긍이 본 것은 초기 청자시기에 해당하는 순수 청자였다.[16] 서긍의 저서[17] 송나라 태평노인의 저서
역사의 흐름 속 도자문화
우리나라의 경우,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는 시기는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치는 때로써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정치적으로 왕조가 바뀌는 격변의 시기였으며 사상적으로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는 전환의 시기였다. 바로 이 기간에 도자문화陶磁文化도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려-불교-청자’에서 ‘조선-유교-백자’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러나 도자의 색色은 왕조나 종교와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다. 청자를 대체한 백자는 물리적 화학적 기능은 물론, 장식 및 조형 등 모든 요소에 있어 한 차원 높아진 고품위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청자나 분청에 비해 중국의 새로운 백자가 갖는 여러 장점을 중요하게 보고 고려 말 14세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새로운 왕조가 안정되는 시기인 15세기 전기에 새로운 백자를 적극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다.
새로운 전환점, 변화를 낳다
우리는 라말여초羅末麗初인 9-10세기에 중국의 선진한 청자기술을 적극 수용한 후 12, 13세기 절정기에 이르러 동아시아 세계에서 ‘천하제일 비색翡色청자’라거나 ‘천공술天工術’과 같은 평가를 받았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14세기 전반, 중국 경덕진요慶德鎭窯에서 새로 개발한 경질硬質백자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반면, 중국청자 제작의 중심인 용천요龍泉窯가 위축되기 시작하면서 세계도자문화의 중심이 청자에서 백자로 전환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선진문화 수용에 적극적인 우리나라에서 려말선초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의 백자는 청자보다 고온(1250℃)에서 구워낸 강도와 탄성이 높은 자기질磁器質 경질백자로서 유약과 태토를 포함한 재질이 경덕진요의 경질백자에 가깝게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다. 사실 청자에서 백자로의 전환은 더 순수한 재료, 더 높은 기술, 더 견고하고 청결하며 실용적인 도자를 만들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14세기 말기에 청자의 다량생산 결과 조형적 완성도가 떨어졌던 고려 상감청자는 1420년대에 와서 고려식과는 다른 재질과 조형, 장식기법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하는데, 바로 이것을 고려의 상감청자와 구분하기 위하여 별도로 분粉靑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사실 생산규모로 보면 15세기는 분청의 시대였다. 전국 각지에서 우후죽순과 같은 형세로 분청을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백자는 아주 특별히 제한된 곳에서 중국 경덕진의 상품백자에 가까운 절예품이 왕실 주도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세종 초년인 1425년에는 중국황실에 보낼 정도로 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분청이 관청과 사대부 및 일반 백성에까지 폭넓은 수요층을 대상으로 하는 다량생산의 도자라면, 백자는 왕실의 중심에 있는 특별한 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점차 백자의 장점이 널리 알려지면서 중앙관청과 사회지도층이 백자를 선호하게 되고, 이때부터 중앙관요에서 왕실과 국가의 대의명분을 위한 각종 백자 의례기儀禮器와 생활필수품을 국가차원에서 생산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분청 생산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고급 소비자인 중앙관청과 사대부 등 상류층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백자로 방향을 바꾸었고, 따라서 분청의 생산량과 질적 수준은 급락하게 되었다. 결국 분청의 종말은 청자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백자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예고를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고려의 시호詩豪 이규보(李奎報, 1268-1241)가 아름다운 청자는 “열에서 하나를 뽑을 만큼 어렵다揀選十取一” 라면서 그 솜씨는 “하늘의 조화天工術를 빌린 것”이라 한 말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완성미를 청자에서 발견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치 하늘의 조화를 빌려 만든 것 같은 고려청자의 ‘완성미’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절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청자시대에 한국사회는 물론 중국의 상류사회에서도 고려청자를 향한 동경과 찬사가 높았는데, 이러한 당시 풍조는 청자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 ‘완성미’를 획득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청자에 나타나는 비색 유태釉胎와 조형의장의 특징들은 불교적 이상세계를 동경한 고려귀족사회의 미의식이 반영된 결과이며, 이러한 미적 특징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마음을 정서적으로 순화시켜 안정을 갖게 하는 예술 본래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낌의 미학, 백자
조선시대 고급백자 제작처는 관요이며 제작 주체는 왕실과 사대부였다. 물론 실제 제작하는 기능적인 일은 전문 사기장의 몫이었지만 품질과 형태 등 조형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까지 그들에게 모두 맡겨졌던 것은 아니다. 실제 제작 주체이며 소비 주체, 그리고 조형 결정의 주체는 성리학적 교양과 감성을 갖춘 사회지도층인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은 나름의 대의명분으로 조선개국 초기에 수립된 새로운 통치이념과 정연한 질서의식을 이상으로 하고 이것을 엄격하게 계승하는 것이 지식인으로 격조와 품위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치를 배격하고 절제와 지조를 근본으로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닦는 엘리트들의 당연한 입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백자에는 중국과 일본, 유럽제국의 그것과 같이 완벽함이나 호화로운 장식성에 집착하는 어떠한 요소도 눈에 띠지 않는다. 오히려 원료가 정제된 고품위의 재질로 완벽한 경질백자 수준에 도달해 있고, 기종器種은 단순 간결하고, 장식적 요소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준수한 형태를 기준으로 하되, 순백색 바탕을 존중하였다.
꼭 필요한 경우 운룡雲龍이나, 화조花鳥, 산수山水, 사군자四君子와 같은 회화적 소재를 청결을 상징하는 푸른색 안료를 써서 절제節制의 과정을 통하여 함축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정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넓은 백색의 공간은 최소한으로 표현한 조형의 의미를 오히려 확대시키는 동시에 무한의 상상력을 통한 미적 체험의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렇게 다듬어진 백자의 절제된 조형은 감성을 공감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감상자의 지적 상상력을 통해 재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자, 그 창조적 생명의 힘
우리나라의 려말선초 기간은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였다. 청자와 백자가 조형정신에서 큰 차이가 있음은 고려가 귀족중심의 신분사회이며 조선이 사대부 중심에 계급사회라는 말만으로도 쉽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청자에서 보는 초정밀, 고밀도의 요소들은 일품一品 제작에 필수적 요소들이다. 고급 소비자가 극소수의 왕공귀족으로 제한되어 있는 고려적 환경에서 비색청자와 상감청자의 조형정신은 고밀도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은 혁신적으로 개선된 경질백자를 보다 폭넓은 사회계층에서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고, 고급소재의 다량생산이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책의 수행자인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근검절약의 조형정신이 그대로 백자에 반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며,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청자와 백자의 길은 처음부터 달랐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 청자와 백자에서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미의식을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물질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자연의 미’, 제작자에서 감상자로 이어지는 재창조의 힘인 ‘생명의 미’라는 주제에 대한 설명은 가능하다.
우리나라 청자와 백자의 절예품들에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은 유약과 태토는 물론 장식소재가 숨김없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원료 고유의 성질, 즉, ‘대자연의 일부로서’ 흙胎土의 물성物性을 인공적으로 변질시키지 않고 자연 상태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자연의 미’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이와 함께 간결하고 선명한 장식과 넓은 여백을 조형적 특징하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문양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확대되고 여백은 상상력을 통한 미적 체험의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창조적 생명의 힘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미’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글 / 사진 최건ㆍ전 경기도자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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