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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공의 장자인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 후손들의 행적
묵재일기(默齋日記)- 嘉靖二十四年 (1545년)歲在乙巳 季冬臘月(12월) 小 己丑 初二日辛卯 : ○前訓導宋天柱居明間村云來見, 言甲寅年三月丁酉日甲辰時生同甲也, 遺以鴨卵·黑太等物, 小酌送之.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는 족보에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성주(星州) 작촌(鵲村 - 현재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으로 되어 있으나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이 쓴 묵재일기(默齋日記)를 참고할 때 1545년 12월 2일에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는 성주 명간촌(明間村 -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매수리)에 이거하여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을 찾아간 것으로 확인이 되고 성주 이거 후인 가정병오(嘉靖丙午 : 1546년)에 진사 3등 14인으로 입격하였다.
묵재일기 중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에 관련된 기록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9년간 25번이 기록되어있고 확실하지 않지만 당초에는 명간촌(明間村)으로 이거하였고 그 후손들이 작촌(鵲村)으로 옮겨 살지 않았나 생각이 되며 후손들의 묘소 위치를 볼 때 新村亭上으로 기록이 되어 알수 없으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고 척재(惕齋) 성변규(成辨奎)의 사위이며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의 증손자인 생원(生員) 휘(諱) 송주빈(宋周賓 - 자[字] 자경[自敬])의 호(號)가 신촌(新村)인 것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신기촌(新基村-고촌) 지명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여진다.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의 6대손 연정(延禎)과 그 후손들은 성주에 정착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서로 연락이 닫지않고 있어 족보를 간할 때에도 수단이 되고 있지 않으며, 그 동생인 연희(延禧)와 그 후손들은 묘소가 黃澗去瓢洞楸木洞, 黃澗秋風黃建面 普峴里 楸谷, 德谷洞, 檜谷洞 등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와 계룡리 일대에서 이거하여 생활하였으며 다시 추풍령면에서 상주시 모동면 정양리로 이거하였다.
현재는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할아버지의 후손들 중에 종친회와 연락이 되는 후손은 서울에 거주하는 23세손 춘산(春山), 춘기(春基) 두 형제분들만 되고 있으며, 10여년전 부산에 거주하는 21세손 광월(光月)이라는 풍산에 와서 종친과 조상에 대해 문소문하기에 문중시제 때 오라하였더니 왔기에 가첩과 족보를 확인하고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였으나 그 후 연락이 되지 않고 있으며 광월(光月)에게는 만수(萬洙), 기수(基洙), 해수(海洙), 천수(天洙) 4형제의 아들이 있었다.
앞으로 진사(進士) 휘(諱) 천주(天柱)할아버지의 후손들과 지속적인 연락과 연락이 되지 않는 후손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노력과 여건이 조성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明間村 - 성주군 벽진면(碧珍面)
벽진면은 星州郡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성주군의 뒷벽인 斐旨山(一名 乞手山:784m)과 그 북쪽 능선의 별뫼고개(星山峴:별티)로 이어진 金泉市와 접경하여 동쪽은 草田面, 남쪽은 星州邑과 大家面, 서남은 金水面과 인접한다.북부는 산악지대이고 그 곳 비지산에서 發源한 伊川이 중남부의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며 동남으로 貫流한다. 교통은 面所在地를 중심으로 동서로 國道가 남부를 관통하고, 남북의 중앙부위에는 地方道가 金泉으로 이어져 있다. 面積은 62.41㎢ 이며, 법정 9개리, 행정 24개리, 1,500여호에 4,700여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산악의 峻嶺과 溪谷, 비옥한 농토 등의 天惠의 조건은 기원전 2∼3세기부터 星州 人類文化의 發源地로, 일찍이 별뫼 部族城邑國이 형성되어 차츰 碧珍伽倻同盟國으로 발전했다.서기 562년 대가야국이 新羅에 병합될 때까지 가야동맹국의 一員으로 깊은 역사의 역할을 다한 곳이다.碧珍伽倻城邑國은 3,000년 이전부터 梅水里 수남마을을 근거로 해서 梅積山(483)과 紫山(360)에 山城을 두고 발전해서 고령 星山面의 이리(一利), 수륜면의 뒷뫼(都山), 가천면의 기불(斯火;기화), 덕곡면의 가슬(加尸兮), 칠곡 기산면의 한솔(大木 ) 등의 성읍국과 동맹관계를 맺게하여 고령의 대가야와 대등한 동맹종주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서기 562년(신라 진흥?12)에 복속되어 벽진군이 되었다. 서기 923년(신라 경명왕 7;고려 太祖 6년7월) 碧珍將軍 良文이 고려에 歸附키로 하고 그의 생질 主煥을 王建에게 보냈던 바 太祖가 반겨서 주환에게 元尹의 관직을 주었다.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년 3월) 碧珍郡과 星山郡(고령군 성산면)이 통합되었다. 이때를 전후로 벽진 땅에는 粥谷(풀곡)·明間(밖간)·巖回(마회)의 3坊이 있었는데 粥谷坊은 伽巖, 雲亭, 紫山, 龍巖里, 明間坊은 海平, 鳳溪, 梅水里이고 巖回坊은 外基, 鳳鶴里이다. 서기 1546년(명종 1) 목사 李閏慶이 미합방을 운곡이라 했다. 서기 1555년(명종 10) 목사 盧慶麟이 명간·암회방을 합방해서 明岩坊이라 했다. 서기 1895년(고종 32) 5월 坊을 面으로 하여 雲谷面·明岩面이라 했다. 서기 1914년 3월 운곡·明岩面을 통합하여 碧珍面이라 했다. 서기 1914년 7월 성주면의 택정과 대가면의 家谷이 편입되었다. 서기 1988년 5월 各洞을 里로 고쳤으며, 서기 1990년 4월 海平里를 樹村里로 개정했다.
봉계리(鳳溪里)
碧珍面의 남부로 伊川을 동쪽에 두고 大家面과 인접하여 솟질, 발간이, 집실, 종자골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明間坊에 속해 坊의 중심지였던 이곳 솟질마을은 高麗初 星州人 李堅守가 世居했고, 연산조 때 昌原人 兪良弼이 金陵에서 입향하였다. 조선초 學圃 兪益明은 慶尙右道 都節制使와 明나라 正朝使로 활약했고, 그의 壇碑가 있으며 四美亭 兪遠을 향사하는 亭舍가 있다. 肅宗 때 안동에서 光州人 卓善儀가 입향 世居해 그 후손이 살고 있다. 宣祖 때는 淸道 栢谷에서 金海人 金豊이 입향하여 이곳과 우복실에 後孫이 거주하고 있다.
발간이 마을에는 1630년경 李惟亨이 入居했다. 집실마을에는 高麗 때 참지문하사 南陽人 洪彦脩가 입향 世居했고, 조선시대 해평군 김수의 아들 金寬尙과 참의 趙元壽가 입향했다. 선조 때는 인동인 翁 張鳳翰(1566-1644)과 그의 아들 知分軒 張以兪(1598-1660)는 충절과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씨 집성마을이다. 종자골에는 昌原人 兪遂가 토호로 있으면서 種穀의 창고를 지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전한다. 姓氏별 분포는 仁同張氏 70호, 星州李氏 55호, 昌原兪氏 35호, 光山卓氏 13호, 他姓 56호이다.
솥질·鼎谷
약 800년전 李堅守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이룩하였으며 지형이 솥과 같이 생겼고 마을 앞 도랑에 너비가 1.2m, 길이 3m정도의 솥 모양 돌이 있어 마을 이름을 솥질이라 했으며, 그 뒤 李堅守가 鼎字를 붙여 鼎谷이라 불렀다.
발간이·明澗
1630년경 李惟亨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앞 들이 넓고 달이 뜨면 다른 마을보다 밝다 하여 발간이라 부르다가 30여년전 이유형의 아들 李寶林이 鼎谷과의 사이에 있는 마을 앞 들이 넓고 밝다 하여 明澗이라 불렀다고 한다.
집 실
高麗末 判中樞府事를 지낸 洪彦修가 不事 二君의 忠節로 杜門洞에서 집실로 移居하여 고을 사람들은 서울에서 大家집이 왔다 하여 大家谷이라 했으며, 1600년경 兪遂가 만석거부로 있었다. 임란 때 兪遂가 死亡하고 仁同에서 張鳳翰이라는 선비가 이주하여 家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種 子 골
부자였던 兪遂가 종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하여 종자골이라 불렀다. 이 마을의 지형은 낮은 산들이 삼면을 오목하게 둘러쳐서 마을이 아늑하고 인심이 좋으며 주민들이 모두가 잘사는 부촌을 이루고 있다.
海東淸風碑 - 仁同人 紫下 張基奭(1860∼1911)의 충절을 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에 비유한 비명이고 높이는 3.2m이다. 1946년 광복이 되어 유림의 뜻으로 쇠조각으로 부서진 빗돌을 붙여서 세웠고 그 부인의 紀烈碑도 세웠다1990년 지방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大 卿 亭 - 솟질마을에 흙을 모아 造山해서 나무를 심은 옛날의 동제터인데 지금은 마을놀이터로 쓰이고 있다.
繼 愼 齋 - 仁同人翁 張鳳翰과 知分軒 張以兪를 제향하는 4칸 겹집의 재실이다.
四 美 亭 - 昌原人 兪遠을 위한 정자이다.
惺 石 齋 - 光山人 惺石齋 卓濟麟을 위한 재실이다.
農 窩 齋 - 張鳳翰의 後孫인 擇玉(1639∼1689)의 享祀所이다.
매수리(梅水里)
벽진면 소재지에서 金水面 방향으로 伊川을 건너 30번 국도를 접해 마을 뒤로 매적산(梅積山:483m)이 있는 고대 碧珍伽倻部族城邑의 본원지다. 자연촌은 무나물(樹村), 다징기(加樹村), 새월(新月), 불무골(冶洞)로 분포되어 있다. 이곳은 碧珍伽倻國의 옛터로 알려져 있고, 가야동맹권의 古域에서 볼 수 있는 碧珍伽倻의 王世表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始祖 碧露王은 永元己丑年(서기 89)에 올라 在位는 87년간이었고, 2대 尼次王은 永建戊辰 3년(서기 128)에 올라 在位 50년간이었고, 3대 幼沖王은 光和庚申 3년(서기 180)에 올라 在位는 70년간인데, 嘉平元年己巳(서기 249)에 同盟이 합동되었다는 것이다. 무나물은 碧珍人 李根英이 世居한 곳이며, 다징기에는 星山人 呂巖이 살았으며, 헌종 때 안동에서 宜寧人 余憶燁이 입향하였다. 새월은 광해조 때 안동에서 綾城人 具琮이 입향했고, 불무골의 풀뭇가마터는 벽진국의 병기와 농기 등 생활용구를 생산정비한 것으로 여겨진다. 綾城具氏 35호, 京山李氏 29호, 南平文氏 25호, 密陽朴氏 23호, 金海金氏 16호, 그밖에 他姓이 32호 거주하고 있다.
무나물·水南
조선 초기 洪有河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흐르는 물이 남방에 있다고 하여 무나물, 또는 河南이라 부르다가 300여년전 李光弼이란 선비가 河南을 水南으로 개칭하였으며, 京山人 晩學齋 李夏相의 후손이 마을에 살고 있다.
下 水 南
1700년경 碧珍人 李根英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수남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下水南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징기·加樹村
1700년경 星山呂氏와 密陽朴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징기와 伊川을 사이에 두고 인접하여 있으므로 다징기 또는 加樹村이라 하였다.
새월·新月
약 400여년전 具相舜이라는 선비가 개척한 후 지형이 초생달, 또는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새월이라 하였으며, 그후 具氏의 자손과 金海金氏·南平文氏의 3성 대표가 모여 新月로 개명하여 불렀다.
불밋골·冶洞
약 1600년경에 개척하였으며 마을 뒷산이 불미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불밋골 冶洞이라 하였다. 具氏의 후손들이 20여 가구 살고 있다.
월항면(月恒面)
성주군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漆谷郡 岐山面과 경계하고 서쪽은 草田面, 남쪽은 星州邑과 船南面을 접하고 있다. 懸鈴山에서 내려온 산릉이 角山(468m)으로 뻗은 동북산악지대와 서남부의 白川邊의 비옥한 평야지로 되어있고, 星州에서 倭館으로 통하는 國道와 船南에서 草田으로 이어지는 道路가 면소재지에서 교차하여 생활환경이 좋은 곳이다.통일신라이래 柳東, 唐沼, 非乎石의 3坊으로 구분되어있었는데, 柳東坊은 柳月, 大山, 安浦, 龍角里 일대였고, 唐沼坊은 甫岩, 水竹, 地方里 일대였으며 1914년 星州面에 편제된 鶴山里가 포함되어 있었다.
非乎石坊은 長山·漁山·仁村·龍鳳里 일대였는데 1845년 목사 金榮이 望星坊으로 개명하였다. 1895년 이들 각 坊은 각각 面이 되었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시 面폐합으로 柳東, 唐沼, 望星의 3面이 合面되어 月恒面이 되었다.이때 龍鳳洞이 草田面에 편입되었다. 1914년 7월 행정구역 개편시 洞폐합으로 星州面 三峰洞이 月恒面 大山洞에, 月恒面 踏溪 일부가 星州面 鶴山洞에, 蘆浦 일부가 草田面 東浦洞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각 洞을 里로 개정했다. 1989년 1월 행정구역 개정으로 漁山里가 草田面에 이관되었다.
인촌1리
月恒面 北端의 鎭山(742m)아래 산간 마을이며 자연부락은 鵲村, 新基村 2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있다.
鵲村(까치마, 鵲谷村)
鎭山의 서쪽 약 4km 지점의 계곡과 들판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禪石寺로 올라가는 길목마을이다. 고려말 나옹대사가 도망가는 충신 노씨를 데리고 사찰(단석사)로 가던중 까치가 많이 울고 있는 곳이 있어 까치가 우는 곳은 손님을 부르는 곳이라 하여 盧씨에게 그곳에 살도록 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까치마 또는 鵲谷村으로 부르다가 마을이 서편으로 점점 옮겨지면서 작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신기촌(고촌)
조선 영조때 高萬 이라는 사람이 까치마 서편에 입주하여 새마을을 개척하고 新基라고 칭하다가 후일 고촌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지금은 고촌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이 마을은 큰 새뜸과 작은 새뜸으로 이루어져 있다.
黃澗去瓢洞楸木洞, 黃澗秋風黃建面普峴里楸谷, 德谷洞, 檜谷洞
사부리 - 추풍령면 소재지서 황간 방향으로 약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4호선도로변에 괴정.원사부가 있으며 북쪽 방향으로 3-4km가면 황보.금보가 있다.
본래 경상도 금산현(金山縣) 황금소면(黃金所面)의 지역으로서 백사장(白沙場)이 많으므로 사부(沙卑)라 하였는데, 1896년 경북 금산군 황금소면에 속하였다가 고종 광무 10년(1906) 황간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패괴리(締桃星), 보현리(普賢星),은편리(銀片星) 일부와 오곡면(梧谷面)의 보현리를 병합하여 사부리라 해서 영동군 황금면에 편입시켰다.; 충절사가 있기도 하다.;자연부락으로는 괴정(桃亭 浦桃亭), 원사부(元沙夫), 황보, 금보가 있다.
계룡리 - 추풍령면의 서쪽에 위치하고, 인접리는 사부리가 있으며,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음. 본래 황간현 동오곡면(東吾谷面)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오곡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곡리(德谷里), 회곡리(檜谷里), 포촌리(砲村里)와 광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계릉리라 부르고 영동군 황금면에 편입시켰다.
추곡(楸谷) 이야기
상표(上表)와 추곡(楸谷) 두 자연부락 이름은 조선초(朝鮮初)의 중(僧) 무학대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전해온다. 상표마을은 애초에 거표동(去表洞)이라 불리어 왔다고 하는데 이 마을은 본래 황간군 오곡면(梧谷面)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는 이름을 자초(自超)라하여 전국의 풍수지리를 살피기 위해 어느 때 이곳 상표마을을 지나다가 무슨 뜻에 선지 여기에다 표시를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학이 지나다가 표시한 곳'이라 해서 거표동(去表洞)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이 거표동이 오늘날의 상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상표마을과 추곡은 추풍령면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오곡면(梧谷面)의 오(梧)자에서 목(木)자와 추풍령의 추(秋)자를 합쳐 추곡(楸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상표란 거표동 위에 자리잡은 마을이란 뜻이어서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이곳을 지날 때 표시를 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주민들은 지금도 궁금해 하고 있다.
상주시(尙州市) 모동명(牟東面)
수봉리(壽峯里) - 중모현의 지역이었다. 1914년 옥동(玉洞). 일관리(一貫里). 신덕리(新德里). 오도리(五道里). 동산리(東山里)를 합하여 이 곳에 있는 헌수봉(獻壽峯)의 이름을 따서 수봉리라 한다. 본래는 천하리(川下里)라 하여 옥동(玉洞). 일관(一貫). 신덕(新德). 동산(東山). 오도(五道)를 통칭했었다. 1987년 옥동. 일관. 신덕을 수봉 1리, 동산. 오도를 수봉 2리로 했다.
신흥리(新興里) - 본래 중모현 지역이다. 1914년 도리리(桃梨里). 지장리(芝庄里). 화양리(花陽里)를 합해 새로 일어난다는 뜻으로 신흥리라 하고, 신흥 1리(元新興. 桃李園. 馬分)와 신흥 2리(芝庄)로 나눈다. 신흥 2리 사람들은 정월 초사흘 날 가정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기금으로 산신제를 지냈다
정양리(正陽里) - 원래 중모현 지역이었다. 양지바르다는 뜻에서 정양리라 했다고 한다. 1914년 화장리(花庄里). 화림리(花林里). 감현천리(甘玄川里)를 합해서 정양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