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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4
창세기 19:12-22
산으로 도망하라
소돔 성의 죄는 단순히 동성애가 아니다. 롯이 천사들을 영접한 것과 소돔 사람들이 천사를 상관하려고 한 것으로 대조하였다. 그렇다고 롯이 천사들을 영접한 행위가 의로웠다는 말이 아니다.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롯은 영접할 수밖에 없고 소돔 사람들은 말씀을 거부하는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의 권세에 매인 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신 것이다.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을 “상관하리라”라는 말의 ‘야다’는 천사가 전하는 심판의 말씀을 알아야 하는데 말씀을 알려고 하기보다 남자가 남자를 알려고 하는 죄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씨 가진 존재로 씨 가진 존재를 알고자 한 것이다. 결국 신부 된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었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들의 죄상을 폭로하시면서 그 본질을 이렇게 밝히셨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2-13절).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라고 한 물음은 롯이 천사들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된 존재라면 그 말씀에 속한 자가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자라면 성 밖으로 이끌어 내는 은혜가 입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란 무슨 말인가? 이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와 앞에”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 앞에”라는 말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앞에서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를 의미하고, 또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대적한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어떤 다른 인격체가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소돔 사람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 천사를 통해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으나 그것을 거부하는 상태 그 자체가 부르짖음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를 보내셨나니”라는 말의 ‘샬라흐’는 3:23에서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라고 표현된 단어이다. 즉 ‘버리다, 갈라서다,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말씀을 드러내신 것은 말씀에 의해 보내심을 입은 자가 있고 그 말씀에 의해 갈라서게 하시는 일을 만들어 내신다는 뜻이다.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을 영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거부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말씀이 갈라내신다는 의미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거부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 그래서 말씀을 영접함은 “혈통”이나 “육정”,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요 1:13).
“멸하리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샤하트’는 ‘멸망시키다, 파멸하다, 부패하다, 망하다’라는 뜻이다. 6:11-12에서 “부패하여, 부패하였으니 부패함이었더라”라는 말이고 6:13에서는 같은 단어를 “멸하리라”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부패하였으니까 하나님께서 멸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상태이기에 하나님께서 멸하심으로 그 부패함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참고 민 32:15, 호 9:9). 소돔 성의 사람들에게 멸하신다는 심판의 말씀이 주어지니 말씀을 거부하는 그들의 부패함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당위성은 분명한 것이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절). “농담으로 여겼더라”라는 말은 단순히 거짓말로 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17:17)라는 말씀에서 살펴본 것처럼 ‘차하크’로 “희롱하려고”(39:17)라는 말과 우상 앞에서 “뛰놀더라”(출 32:6)라고 번역된 단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희롱하고 조롱한 믿음 없는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롯은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이 자기에게 속한 자인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나 그들에게 말씀이 주어지니 롯, 즉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소돔 성에는 단 한 명의 의인도 없었다. 죄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실 때만이 비로소 우리의 눈이 열려 말씀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1-13)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15-16절). “동틀 때”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새벽이 올라올 때’라는 말이다. 새벽, 아침이 된다는 것은 빛의 세계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롯의 구원은 빛의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나 소돔은 여전히 어둠 아래 있는 상태로(11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이것이 종말이다.
그러나 롯은 지체하였다. “지체하매”라는 말의 ‘마하흐’는 ‘머뭇거리다, 지체하다, 머무르다’라는 뜻이다. 롯이 지체하는 이유는 아직 멸망의 상태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사는 이곳이 아직 살만하고 죽음이 두렵기에 멸망의 상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죄인의 심성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천사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라고 말씀한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이고, 그 찾아오심의 의미는 자기 백성들의 손을 잡아 성 밖, 곧 멸망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구원의 자리에 두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멸망, 심판의 자리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구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므라’는 ‘용서하다’라는 ‘하말’에서 유래한 단어로 ‘자비, 인자, 긍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인자”, 공동번역에서는 “불쌍히 여기셨다”, 킹제임스흠정역에는 “긍휼”로 번역하였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헤세드)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라함)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헤세드)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아하바)과 그의 자비(헤므라)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7-9)
하나님의 “자비”(헤므라), “은혜”(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라함, 아하바)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씀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17절). “이끌어 낸”이라는 말 ‘야차’는 ‘나가다, 나오다, 떠나다, 앞으로 가다, 나가게 하다, 이끌어 내게 하다’라는 뜻인데 12절에서 “이끌어 내라”, 14절에서는 “떠나라”, 16절에서는 “인도하여”라고 번역되었다. 명령형으로 보이는 “떠나라”(14절)는 말도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이끌어 내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은 “산으로 도망하여”라는 말씀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야차)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샬라흐) 증거니라(출 3:12)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
산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미 4:7)라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시온산”에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을 말씀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히 12:22-24, 계 14:1). 예수님께서 종말론 강화에서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5-16)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18-20절). 롯은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라고 말하지만 그 은혜에 자기 생각을 더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라는 롯의 말이 맞다.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롯은 “작은 성읍”으로 가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우리의 작은 것을 더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21-22절). “소알”이라는 히브리어 ‘초아르’는 ‘하찮다, 비천하다’라는 뜻을 지닌 ‘차아르’에서 온 말로 ‘작다, 천박하다, 낮아진다, 적은(것), 적다’는 뜻이다. 죄인은 늘 자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그것을 추가하려 한다. 천사들은 이러한 롯의 죄성을 그대로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롯의 요청에 응답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으로 나아가는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는 의미이다. 인간들이 자기 죄성대로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죄성을 이용하여서 결국 자기 뜻대로 말씀을 성취하신다. 마태복음 1장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족보에 포함된 이방인들이며 여자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기 언약에 포함시키신 자들이다. 나에게 주어진 구원도 십자가로 그렇게 이루신 은혜이다(엡 2:16-19)(202309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