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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55
요한계시록 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복
요즘 교회들은 물티슈나 휴지에 전도지를 붙여서 나눠주거나 아니면 호떡이나 어묵, 붕어빵을 만들어 무료로 주는 것으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전도한다. 이제는 전도지 한 장 나눠주는 것을 받거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시절을 지나 뭔가 필요한 것을 줄 때 관심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하는 내용을 보면 대부분 예수님을 통해 질병을 고치고 이 땅에서 물질의 복을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다니면 물질의 축복을 받으며 질병도 고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그것이 곧 영생이고 천국인 것처럼 전한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영생,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메시지가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몸이 된 성도들이지 인간이 지은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의 전도 방식은 교회에 나오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전도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결국 죄인들의 관심사는 ‘복음’이 아닌 ‘복’에 있다는 것이 드러날 뿐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5:3-10). 이렇게 살면 복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천국이 된 자들에게서 이런 복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 애통하는 상태, 온유한 상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 긍휼히 여기는 상태, 마음이 청결한 상태, 화평하게 하는 상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상태가 복이다. 세상에서 말씀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런 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땅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고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복이다. 그 복은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는 표현은 세상에서 잘사는 복이 아니라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상태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율법이 즐거울 수 있는가? 613개의 계명으로 본다면 무거운 짐이기에 결코 즐거울 수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인다면 오실 메시아 안에 있는 것이기에 즐거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다. 그래서 복이 어떤 것인가를 잘 이해하였기에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이런 고백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주신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라고 하신 복이 언약의 후손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의미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이 복의 원천이시기(시 16:2) 죄 사함을 받아 그 하나님 안에 하나 되는 구원이 복이다(시 32:1, 3:8). 신약에서 말씀하는 복은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구약에서 말씀하는 바를 실제적인 삶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지는가를 보여준다. 하늘로부터 음성이 주어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들었다.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음성을’이라는 말이다. 요한 사도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뜻인데 그 말씀은 “기록하라”라는 것이었다. 이미 여섯 번째 강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에서 이 표현은 12번이나 나온다(1:11, 19, 2:1, 8, 12, 18, 3:1, 7, 14, 14:13, 19:9, 21:5). 구약에도 하나님께서 기록하라고 하신 표현이 많이 나오데(출 17:14, 신 11:20, 사 30:8, 렘 30:2, 36:2, 합 2:2)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출 34:27)
하나님께서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신 것은 언약을 확증하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록된 책으로 주셔서 확실한 증거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말씀으로 주시고 그것을 기록된 책으로 주셨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서 표현한 “기록하라”라는 것은 요한 사도가 기록된 책을 먹어 말씀이 된 자(10:8-11)였다는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1:3)라고 하였는데 요한 사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전해져 “지키는 자”, 즉 말씀이 마음에 품고 새겨진 자는 요한 사도와 함께 말씀이 된 자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후로”라는 표현, 즉 ‘지금부터’란 독자가 본문을 읽는 지금이라는 시점에서가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종말의 상태에 있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는 종말의 삶을 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 요한 사도와 같이 언약의 증거로 기록된 책을 먹어 ‘말씀이 된 상태’라는 의미이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직역하면 ‘주 안에서 죽은(헬, 네크로스), 죽은자들(헬, 아포드네스코)은 복 있다’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씀이 되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죽은 존재는 ‘죽은자들’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죽은자들’이라는 명사화를 시켜 ‘죽은’을 중복 사용으로 강조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죽은자들이 된다는 것은 말씀이 된 자라는 의미에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의미로 그것 자체가 복이라는 표현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7번의 “복”(헬, ‘마카리오스’)을 말씀하였는데(1:3, 14:13, 16:15, 19:9, 20:6, 22:7, 14) 그중에서 오늘 본문은 두 번째로 언급한 말씀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9)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결국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란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겨진 자’(1:3. 22:7)이고,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16:15)이며, ‘어린 양의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19:9)이며,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왕 노릇하는 자’(20:6)이고,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22:14)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 믿다가 죽으면 천국 가니까 복이라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대해서조차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 다니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천국 가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믿음을 단지 교회 다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 간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예수 믿고 죽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 주심의 은혜를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주님 께서 살려주시는 것이 있기에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음성에 대해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는 성령의 답변을 볼 수 있다. 즉 하늘의 음성으로 주어진 말씀에 대한 강력한 동의를 표현한 말씀이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는 말씀은 11절에서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라는 말씀과 대조된 표현이다. 짐승에게 속하여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끊임없이 계속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헌금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자들에게는 쉼이 없지만 주 안에서 죽은자들은 그 모든 율법적인 행위를 그치고 쉬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들의 일들이 그들과 함께 따라가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단순히 우리의 행위를 강조한 표현이 아니라 12절에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한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새겨져 그 가운데 사로잡혀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드러난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가르’(왜냐하면)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그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다. 즉 하늘의 음성으로 주어진 말씀에 대해 성령께서 성도의 죽음으로 그 말씀에 대한 응답을 이루어 내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세상의 힘을 믿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머물러 있도록 부르심의 은혜를 입은 존재이다. 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등장한 짐승을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경배하고 섬기는 이 땅에서 짐승의 힘을 거부하고 땅적 원리와 방식을 거부하고 말씀이 되어 날마다 죽은 자들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구원의 완성을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셔서 날마다 이렇게 만들어 내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202310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