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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⑦ 《개벽신문》제68호(2017.10.) 8-10면
토착적 근대화와 개벽사상
- 한국근대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지난 10월 20일-21일에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주최로 한일공동학술대회 <한·일 전통사상의 근대화 과정과 비판적 성찰>이 열렸다. 이 학술대회는 19세기말~20세기초에 인도, 아프리카, 동아시아 등의 비서구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토착적 근대화 운동’(indigenous modernization movement)의 구체적인 사례와 그것이 지니는 사상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자리로, 일본의 이슬람연구의 권위자인 이타가키 유조 명예교수(동경대학)와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그리고 ‘토착적 근대’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기타지마 기신 명예교수(욧카이치대학) 등이 참여하였다. 이 세 명의 발표의 공통점은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한 비서구적 근대화 운동”에 주목함으로써 ‘서구적 근대’ 개념을 상대화시키고, 나아가서 서구중심적 역사관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의 사티아그라하와 전통의 근대화
일본을 대표하여 기조강연을 한 이타가키 유조(板垣雄三) 교수는, 「‘전통과 근대’를 다시 묻는 진리파악(satyāgraha) ― 병든 서구적 근대성의 말로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전통과 근대’라는 종래의 이분법적 사고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20세기 초에 간디를 중심으로 인도에서 전개된 비폭력 정치투쟁인 ‘사티아그라하(satyāgraha)’ 운동이 인도의 전통적 윤리규범인 ‘야마스(yamas)’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가령 ‘사티아그라하’(=진리 붙잡기)가 제시한 9가지 행동양식 중에서 처음 세 개인 “비폭력·진리·훔치지 않기”는 야마스의 10개의 항목 가운데 처음 세 개와 완전히 일치하고, 나머지도 야마스의 다른 항목들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이타가키 교수는 이 유사성이 지니는 사상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부정・억압에 맞서 자유・정의・존엄・연대를 추구하는 20세기 정치화(政治化) 운동에서, 기원전 1500년 경부터 기원전 500년 경에 걸쳐 성립된 《리그베다》(인도의 성전聖典)에서 시작하여 《우파니사드》에 이르는 문헌이나, 시편(詩篇) 《바가바드 기타》 등이 지시하고 시사해 온 가치관들이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근대성을 획득하고 성취할 힘을 뒷받침한 것이 전통적 가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근대성은 이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인 제국의 식민지주의를 뒷받침했던 서구적 근대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되지 않을 수 없다.”(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 분석에 의하면 20세기 초에 일어난 인도의 독립운동은 일종의 ‘근대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뒷받침한 것은 인도의 전통사상이며, 이 전통사상에 뿌리를 둔 근대화 운동이 서구적 근대에 대항하여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전통과 근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통사상에 근대성의 ‘방해’나 ‘좌절’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동력’이나 ‘토대’라는 적극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전통과 근대를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제시대에 탄생한 ‘실학’이라는 사상사 서술 범주이다. 그러나 실학사관은 어디까지나 서구적 근대에 기준을 둔 역사관이다. 즉 홍대용이나 정약용 등을 ‘전통’에, 그리고 실증이나 과학 등을 ‘근대’에 각각 등치시켜, 유학자들에게서 서구적 근대의 맹아를 찾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에 반해 이타가키 교수가 말하는 ‘근대’는 오히려 그러한 서구적 근대의 ‘폭력’에 대항한 反서구적 근대였다. 그리고 그것의 정신적 토대는 서구적 세계관이 아니라 전통적 세계관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근대’는 실학적 근대라기보다는 동학적 근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동학은 “척왜양(斥倭洋)=서양과 일본을 배척한다”라는 슬로건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리고 ‘동(東)’이라는 명칭이 말해주고 있듯이, 서구적(西) 근대와 싸운 한국적(東) 근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당시의 위정척사파, 즉 “유교의 정통(正)을 보호하고(衛) 서양의 이단(邪)을 몰아내자(斥)”는 유학자들과 달랐던 것은, 동학이라는 새로운 ‘학’을 만들어냈다는 점인데, 동학의 근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간디가 인도의 전통적인 야마스 윤리에서 서구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찾았듯이, 최제우는 한국의 전통적인 하늘 사상에서 서구와 일본에 대항할만한 새로운 “보국안민”의 계책을 세웠기 때문이다(“西洋戰勝攻取, 無事不成, 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患. 輔國安民, 計將安出!”《동경대전》「포덕문」).
두 개의 근대
이상의 고찰로부터 우리는 ‘두 개의 근대’ 개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서구적 근대이고, 다른 하나는 비서구적 근대이다. 비서구적 근대는 말 그대로 비서구지역에서 서구와는 다른 형태의 근대를 추구한 경우를 말한다. 최근에 회자되고 있는 ‘복수의 근대성(multiple modernities)’ 개념도 결국 비서구적 근대의 여러 사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비서구지역이라고 해도 서구적 근대를 지향한 경우는 있다. 가령 메이지시기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와 조선말의 개화파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당연히 서구적 근대의 유형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60-70년대에 진행한 산업화 역시 서구적 근대를 추구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른바 “아시아적 자본주의”를 논했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전통적 가치의 역할에 주목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는 실학사관과 그 발상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에 실심실학사관은 비서구적 근대의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여기에서 ‘실심실학사관’이란 ‘실학사관’에 대항에서 편의상 만든 명칭이다). 전 동경대학의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교수는 홍대용은 단지 ‘실학’(實學)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실심’(實心)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홍대용의 실학은 ‘실심실학’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실심실학’이란 일종의 ‘도덕실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가와 교수에 의하면 근대의 실학은 ‘실심’이 빠진 ‘기술학’으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제창한 실학 역시 ‘실용’과 ‘실업’ 중심의 서구적 실학이었다는 것이다(오가와 하루히사, 「공공하는 철학과 실심실학」). 실제로 카타오카 류(片岡龍) 교수에 의하면, 후쿠자와가 말하는 ‘실학’은 서양의 ‘사이언스(science)’를 의미하고, 이때의 사이언스는 인문과학까지 포함한 학문의 총체를 가리키는 말로, 그 모델은 물리학이었다고 한다(카타오카 류,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
그런데 오가와 교수가 주목한 ‘실심’이라는 말은 홍대용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정제두, 그리고 그 이후의 정약용 등에서도 보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정약용은 대표적인 실학자로 분류되는 사상가이다. 그런데 그가 ‘실심’을 말하고 있다면, 그는 서구적 근대가 아니라 비서구적 근대를 추구한 인물로 자리매김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 ‘실심’이 ‘사천(事天)’이나 ‘사신(事神)’이라고 하는 하늘(天)이나 신(神)을 섬기는(事) ‘참마음’(實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 더더욱 서양 근대와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古人實心事天, 實心事神.”《중용강의보》 제1권)
흔히 다산은 철학사에서, 천주교의 ‘신’을 받아들였다고, 또는 신유학의 이법적 ‘천리’(天理)에서 고대유학의 인격적 ‘상제’(上帝)로 되돌아가려 하였다고 서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서양식으로 말하면 오히려 중세로 복귀한 셈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상가가 한편으로는 근대적 실학자로 평가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적 신학자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실학연구자들이 주장하듯이) 근대를 지향했다고 한다면, 그 근대가 서구적 근대가 아니라 비서구적 근대, 또는 한국적 근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성적 근대가 아니라 영성적 근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울러 다산에게서 서학적 천관과 유학적 천관의 요소가 동시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 동시성이야말로 다산을 다산이게 하는 특징이 아닐까? 그리고 이 특징은 한국철학 내지는 한국적 영성의 “포함적”(최치원) 또는 “회통적”(이능화) 성격과 관련있지 않을까? 그런데 기존의 철학사는 다산을 유학이나 서학, 또는 중국이나 서구와 같이 어느 한쪽에 줄 세우려 했기 때문에 그가 추구한 동시성 내지는 한국적 영성 또는 비서구적 근대성을 놓친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러한 양자택일의 강요는 한국철학사를 중국틀(유학)이나 서구틀(서학)로 이해하려 하는데서 오는 ‘학문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비단 다산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근대 한국사상가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가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존의 한국근대사상사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중국이나 서구라는 외재적 틀을 잠시 괄호에 넣고, 한국이라는 내재적 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을 한국으로 볼 수 있는 자체적인 틀을 갖는 것이다.
개벽파의 등장
흔히 구한말에서 일제식민지시대에 이르는 한국사상사는 ‘개화’와 ‘척사’라는 두 가지 틀로 서술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개화’는 서구적 근대를 지향한 그룹을 지칭하고, ‘척사’는 반대로 전통적 유교를 고수한 그룹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도는 “서양이냐 중국이냐?” 또는 “근대냐 전통이냐?”라는 (다산에 대한 평가에서 나타났던) 양자택일식의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출현한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이른바 ‘민족종교’는 철학사나 사상사가 아니라 역사학이나 종교학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가령 역사학에서는 ‘농민전쟁’(동학)이나 ‘독립운동’(천도교·대종교)으로, 종교학에서는 ‘신종교’나 ‘민중종교’(증산교·원불교) 등으로 -.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개벽’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대종교는 개천開天). 그리고 이때의 ‘개벽’은 단순히 우주운행의 변화나 미륵의 출현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저절로 ‘열린다’고 하는 자연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가 지속적인 정신수양과 사회운동이라는 인간적 노력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주체적으로 ‘열어간다’고 하는 과정적 변혁을 의미한다. ‘동학’(東學)이나 ‘천도’(天道)라고 할 때의 ‘학(學)’이나 ‘도(道)’에는 이러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 개화파나 척사파와 동등하게 - ‘개벽파’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즉 구한말에서 식민지시대에 이르는 한국사상사를 “척사파-개화파-개벽파”라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서술의 비중도 개벽파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당시에 개벽파는 개화파나 척사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말의 한국인의 인구는 대략 천만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4분의 1, 또는 3분의 1에 해당하는 조선인이 동학농민혁명에 대거 참여했다고 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이 동학농민군에게 밀서를 보내어 “다시 봉기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달라”고 부탁한 것도 동학농민군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KBS 다큐, <동아시아 뒤집히다, 청일전쟁>).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천도교와 보천교(증산계)는 신자수가 수백만에 달했고, 대종교의 항일독립투쟁은 그 어느 세력보다도 치열했다.
개벽파와 한국적 근대
개벽파의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은 지난 연말에서 올초에 이르는 ‘촛불혁명’이 지식인이나 정치가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개벽파가 보여준 ‘민(民)’의 힘이 21세기초에 다시 한 번 재현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타지마 기신이나 김경재는 동학을 한국 민주주의의 선구로 자리매김하고, 그 흐름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영화 ‘명량’은 이와 같은 풍부한 내용을 지닌 근대 민주화운동을 시야에 넣은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운동의 원점은 동학사상에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동학농민혁명 이래로 지하수맥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공생의식을 현대사회에 부활시켰다.” (기타지마 기신, 「일본인이 본 영화 ‘명량’의 매력 – 한국의 민중사상사적 관점에서」, 《개벽신문》 65, 2017.07.)
“진실로 [동학의] 보은집회[의] 성격은 대한제국시대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로 이어지고, 2016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지속된 민주시민촛불집회의 선구적 사례였던 것이다.” (김경재, 「한국 근대화를 관통하는 변혁운동의 주악상(主樂想) 성찰 – 공동체 삶, 우주·신·인적 영성, 사회정치적 개혁을 중심으로」)
이들 개벽파의 사상적 특징은, 중국(척사파)이나 서양(개화파)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이 새로움을 그들은 ‘후천’(후천개벽)이나 ‘다시’(다시 개벽)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즉 최제우가 말한 ‘다시 개벽’이나 강증산이 말한 ‘후천개벽’은 모두 “새로운 세상을 연다”고 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근대적 세계의 구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근대가 이성과 국가 중심의 근대가 아니라 영성과 생명 중심의 근대였다는 점에서 서구적 근대와는 다른 전통적 또는 한국적 근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학이 추구한 ‘전통적 근대’의 성격은 최시형의 “우리 도는 유도와 비슷하고 불도와 비슷하고 선도와 비슷하지만 실은 유도도 아니고 불도도 아니고 선도도 아니다”(吾道似儒似佛似仙, 實則非儒非佛非仙也.《해월신사법설》「천도와 유불선」)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유도·불도·선도와 비슷하다”는 말은 동학이 지니는 전통성을, “유도도 아니고 불도도 아니고 선도도 아니다”는 말은 동학이 지니는 근대성을 각각 대변하고 있다.
동학은 유교에서 말하는 효제충신과 같은 윤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친(親)유학적이지만, 그것을 “모두가 하늘이다”는 만인평등관 위에 다시 위치지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탈(脫)유학적이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그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사상에 잘 드러나 있는데, 향아설위는 제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유학적이지만, 그 제사의 대상을 ‘조상’이나 ‘성인’이 아닌 ‘나(我)’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학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동학의 이러한 양면성을 나타내는 말이 ‘도유(道儒)’ “今此吾道, 道儒中, 聖人君子之質, 有幾個員乎!”(141쪽), “道儒好奢之幣, 禁防事.”(142쪽) (《해월문집》「통문(壬辰 正月)」, 박맹수 편, 《동학사료집성I》, 선진출판기획, 2010(재판) 수록)
이다. 여기에서 ‘도(道)’는, 당시 동학교단 내에서 동학교도들을 ‘도인(道人)’이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동학’을 가리키기 때문에, ‘도유’는 “동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를 의미한다. 이것을 풀어서 ‘동학유생’이라고 하기도 한다(「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
이러한 도유(道儒)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전봉준인데, 그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선비(士)’라고 자처함과 동시에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이기 때문에 대단히 좋아한다”고 하였다(박맹수, 「전봉준의 평화사상」). 즉 유학자이면서 동학도임을 자처한 것이다. 그는 마치 다산에게서 유학과 서학이라는 두 개의 아이덴티티가 보였듯이, 유학과 동학이라는 두 개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학은 전통성을, 동학은 근대성을 각각 대변하고 있다.
두 개의 근대의 충돌
그렇다면 개벽파가 추구한 비서구적 근대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도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가령 최시형은 동학이 지향하는 문명을 사람을 살리는[活人] ‘도덕문명’이라고 하였다(“明天地之道, 達陰陽之理, 使億兆蒼生, 各得其業, 則豈非道德文明之世界乎!”《해월신사법설》「성인지덕화」). 이때의 ‘도덕’은, 유교에서 말하는 효제충신과 같은 윤리적 차원의 인도(仁道)나 인덕(仁德)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세계관을 믿고 실천하는 우주론적 차원의 천도(天道)와 천덕(天德)을 말한다.
반면에 당시의 서양은, 최시형과 같은 조선민중의 눈에는, 사람을 살리는 도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앞세우는 폭력으로 다가왔다(“西洋之武器, 世人無比対敵者. 武器謂之殺人器, 道徳謂之活人機.”《해월신사법설》「吾道之運」). 아울러 “탈아입구”를 지향한 일본 역시 도덕이 아닌 폭력을 앞세우는 부도덕한 무리로 인식되었는데, 이 점은 전봉준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문: 다시 봉기(起包)한 이유가 무엇인가?
답: 그 후에 들으니, 당신네 나라(貴國)가 개화를 한답시고, 처음부터 민간에게 일언반구 알리지도 않고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심야에 궁궐을 부수고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고 하기에, 시골의 선비와 백성들의 충군애국의 마음이 비분강개를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인과 싸워서, 먼저 이러한 사실을 따져 물으려고 하였다. (《전봉준공초》. 번역은 박맹수, 「전봉준의 평화사상」 참조)
여기에서 ‘개화’는 침략과 전쟁을 가장하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전봉준은 이 ‘개화’와 ‘문명’이라는 이름하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에 폭력을 가하는 일본에 저항한 의병(義兵)이 바로 동학농민군이라고, 심문에 동석한 일본영사에게 항변하고 있다.
일본이 걸어간 이 폭력적 근대, 反생명적 근대의 길을 코마츠 히로시(小松裕)는 “생명의 서열화”라고 하였다(《생명과 제국 일본》, 2009).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국가권력이 생명을 차별화하고 말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구화된 일본은 문명인이고, 서구화되지 못한 아시아인들은 야만인이라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인식이 작용하고 있었고, 이 의식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한·중·일 젊은 세대들의 대화와 세대간 대화 : 한·중·일 회의Ⅱ -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연다」의 <첫 번째 발제와 관련 대화 : 미야자키 후미히코>,《동양일보》, 2016.10.16.)
또한 일본의 역사학자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에 의하면, 근대 일본은 아시아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최초로 제노사이드(대량학살)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이노우에 가쓰오,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 작전」).
이렇게 보면, 결국 동학이 지향한 ‘개벽’과 일본이 지향한 ‘개화’는 “생명 중심의 비서구적 근대”와 “反생명적인 서구적 근대”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 두 개의 근대 또는 두 개의 문명이 충돌한 것이 바로 동학농민전쟁이었다. 그리고 전봉준과 동시대의 다나카 쇼조가 동학을 “문명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지향하는 살인문명이 아닌 동학이 지향하는 살림문명을 지지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역사책이나 역사수업에서 유교망국론, 실학근대화론을 배우고 자랐다. 최근에는 식민지근대화론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모든 ‘론’들은 서구 중심의 역사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서구화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선취한 “일본 중심의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개화’를 기준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벽’을 중심으로 우리의 근대사상사를 다시 본다면, 그동안 놓쳤던 부분들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아울러 억울하게 생각했던 것들,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 상대국에 대한 피해의식도 상당부분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이나 ‘중국’이라고 하는 정신적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Ngugi wa Thiong'o, Decolonising the mind). 이 ‘성심’(成心)이 제거되고 ‘허심’(虛心)이 회복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이타가키 유조, 「‘전통과 근대’를 다시 묻는 진리파악(satyāgraha) ― 병든 서구적 근대성의 말로에 즈음하여」,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5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발표집,《한·일 전통사상의 근대화 과정과 비판적 성찰》, 2017.10.20.-21.
⦁ 김경재, 「한국 근대화를 관통하는 변혁운동의 주악상(主樂想) 성찰 – 공동체 삶, 우주·신·인적 영성, 사회정치적 개혁을 중심으로」, 같은 책.
⦁ 카타오카 류,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 같은 책.
⦁ 조성환, 「한국에서의 전통사상의 근대화 – 동학을 중심으로」, 같은 책.
⦁ 조성환, 「공공철학의 관점에서 본 동학의 개벽사상 - ‘공공’과 ‘천인’ 개념을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1, 2017.
⦁ 박맹수, 「전봉준의 평화사상」,《통일과 평화》 9-1, 2017.
⦁ 「한·중·일 젊은 세대들의 대화와 세대간 대화 : 한·중·일 회의Ⅱ -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연다」의 <첫 번째 발제와 관련 대화>,《동양일보》, 2016.10.16.
⦁ KBS 다큐1 (광복 70년 기획) “한반도, 운명의 격전”, 제1편 <동아시아 뒤집히다, 청일전쟁> 2015.07.30.
⦁ 이노우에 가쓰오,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 작전」,《동학농민전쟁과 일본 - 또 하나의 청일전쟁》, 모시는사람들, 2014.
⦁ 오가와 하루히사, 「공공하는 철학과 실심실학」,《월간 공공철학》35, 2013.11.
⦁ 정인재, 「실심실학연구서설I」,《신학과 철학》 14, 2009.
⦁ 小松裕,《‘いのち’と帝国日本 : 明治時代中期から一九二〇年代》, 小学館, 2009.
⦁ Ngugi wa Thiong'o, Decolonising the Mind: The Politics of Language in African Literature, James Currey Ltd/Heinemann, 1986. 우리말 번역은 이석호 옮김,《정신의 탈식민지화》, 아프리카,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