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덴마크 오픈부터 오늘까지 안세영과 왕즈이가 치른 경기 수는 같았지만, 대진운이 좋았던 왕즈이는 야마구치와 천위페이를 한 번도 상대하지 않은 반면, 안세영은 지난주 4강에서 아직 체력이 남아 있던 야마구치와 제3게임까지 혈전을 벌였고, 어제도 역시 체력이 충분했던 천위페이와 제3게임까지 싸워야 했기에 오늘 경기는 왕즈이가 이기는 게 상식적이었다. 최근 들어 지구력과 수비력 모두 안세영과 동급으로 업그레이드된 야마구치, 천위페이와 싸우는 것은 여타 다른 선수들과의 시합 2~3 경기를 치르는 것과 동일한 체력 소모를 요하는 일이기에, 안세영은 왕즈이보다 4~6 경기를 더 뛰고 오늘 결승에 임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단, 왕즈이는 원래 지구력에 약점이 많았고, 지난주 덴마크 오픈 결승에서 안세영과 대결하며 역시 2~3경기를 뛴 만큼의 체력 소모를 한 탓에 이번주 내내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고전을 한 데다, 어제 준결승에서 랭킹 4위 한유에가 예상 밖으로 제3게임까지 가는 선전을 하며 왕즈이의 힘을 더 소진시켰기에 안세영에게도 충분한 승산은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막상 결승전 경기가 시작되자 안세영은 어제 천위페이와의 준결승 제3게임 후반에 나왔던 좋은 템포와 스텝이 유지된 반면, 끝내 허벅지에 테이핑까지 하고 나온 왕즈이는 그녀를 지금의 랭킹에 올려 놓은 주무기인 강스매시를 전혀 때리지 못할 만큼 스텝이 느렸고, 그 시점에서 이미 오늘 경기의 승자는 정해졌다. 어제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안세영에게 스매시를 때릴 수 있는 천위페이가 간신히 대등한 경기를 한 걸 생각하면, 지쳐서 스매시를 못 때리는 왕즈이는 스트로크 대결만으로는 절대 안세영의 적수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지금 지구상에서 안세영과의 스트로크 대결에서 그나마 승산이 있는 유이(唯二)한 여자 선수는 야마구치와 천위페이뿐이다. 그것도 최근에 두 사람이 실력을 끌어올려 겨우 레벨을 맞춘 것일 뿐, 올 시즌 전반기까지만 해도 안세영의 스트로크 정확성과 경기 운영 능력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비록 안세영의 표정은 지쳐 있었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도 명확한 시합이었기에 필자는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지난 2주간의 대회를 통해 확실해진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1. 안세영의 스매시 파워는 야마구치와 천위페이의 최고 수준 수비를 뚫고 득점을 올릴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 또한 안세영을 상대하는 모든 선수들이 그녀의 스매시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확인되었으니 앞으로 이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더 많이 구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파워 증강은 지속되어야 하고.(조금만 더 힘을 붙이면 천위페이와는 동급의 강도를 갖게 될 것이다. 야마구치는 워낙 대포알 스매시이기에 아직 그 수준까지는 멀었지만.)
2. 이번에 비록 야마구치와 천위페이 모두를 꺾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덴마크 오픈 4강에서 맞붙은 야마구치는 코리아 오픈 결승에서 맞붙었을 때에 비해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제1게임 후반부터 스텝이 급격히 느려진 덕에 안세영이 쉽게 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마구치의 체력이 떨어지기 전인 제1게임 초반에 그녀의 맹렬한 스피드와 완벽한 강약 조절에 안세영이 크게 고전했음을 기억하고 대비책을 세워야 하리라. 현재로선 이번 연말에 있을 월드 투어 파이널이나 올림픽처럼, 서로 충분한 휴식 이후에 맞붙는 큰 대회에서 안세영이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천위페이 역시 아직 발목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엄청난 클래스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경계 대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안세영 역시 피로 누적으로 인해 정상적인 움직임이 아니었기에 어제의 결과를 둘의 경기력을 비교할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천위페이의 지구력과 수비력은 (야마구치도 마찬가지인데) 이제 안세영과 동급으로 올라섰다고 보는 게 냉정한 평가일 것이다....... 결국 이 대단한 베테랑들과의 대결은 앞으로도 안세영에게 계속해서 숙제 거리를 안겨줄 텐데, 부디 안세영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 숙제와 맞서길 바란다.
3. 다시 강조하지만, 안세영의 공격력은 이제 결코 약하지 않다. 원래부터 독보적이던 수비력 역시 파리 올림픽에서 우승할 때에 비해 더욱 강력해졌다. 다만, 다른 선수들도 랭킹 1위인 안세영을 이기기 위해 부지런히 실력을 끌어올린 탓에 업그레이드된 안세영과의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4. 필자가 이미 여러 차례 논했듯, 배드민턴 역사에 길이 남을 세계 최고의 선수로 롱런하기 위해서는 2주 연속 편하게 우승할 수 있는 지구력을 확보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그리고 그 정도 지구력이 있어야지만 야마구치, 천위페이와의 대결에서도 확실한 우세를 점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LQOuFoEknc
https://www.youtube.com/watch?v=MQ-6SxL4he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