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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기도
(An Altar in the World)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 송경용・진영종 옮김
Content
들어가는 말
1 Vision 하느님께로 깨어나는 연습 _ 014
2 Reverence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 _ 032
3 Incarnation 살을 입히는 연습 _ 051
4 Groundedness 땅 위를 걷는 연습 _ 070
5 Wilderness 길을 잃는 연습 _ 089
6 Community 낯선 이들과 만나는 연습 _ 111
7 Vocation 목적을 가지고 사는 연습 _ 132
8 Sabbath ‘아니오’ 라고 말하는 연습 _ 149
9 Physical Labor 물을 나르는 연습 _ 172
10 Breakthrough 고통을 느끼는 연습 _ 188
11 prayer 하느님께 바치는 연습 _ 212
12 Benediction 축복을 드리는 연습 _ 234
주 _ 255
옮긴이의 말 _ 258
3
I n c a r n a t i o n
살을 입히는 연습(2)
큰 고통은 우리를 신학자로 만든다.
주일 학교에서 듣는 하느님에 대한 질문과 병원에서의 질문은 전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환자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고통스럽게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연민’이라는 단어에 담긴 본능적인 정의를 배우는 일이다.
연민은 호감 또는 동정심, 슬픔등의 따뜻한 감정이다.
또한 멸시하거나 웃을 수 없는 감정이다.
큰 고통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진실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왜 내가?
왜 지금?
왜 이렇게?
이 질문들은 당신이 고통 속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묻는 것들이다.
하지만 당신이 기쁠 때도 이 질문들은 적절하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것을 누가 허락하였나?
집에 온 당신을 안아 주는 사람의 따뜻한 냄새를 누가 허락하였나?
잠자는 아이를 안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가르치는 책 열 권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뒷마당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신성한 자연의 신비를 알려줄 것이다.
하느님이 매일 자기 몸으로 육신의 언어를 하신다는 성육신 연습은 복음만큼이나 오래된 가르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그들과 함께 저녁을 드셨을까?
우주의 모든 개념과 진리가 그의 재량에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깊이 생각할 주제가 아니라 현실의 숙제를 주셨다.
바로 그들의 육신이 함께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것이었다.
이말씀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서 그들을 직접 가르칠 수 없을 때 그들을 계속 가르쳤다.
예수님이 떠난 뒤, 그들은 아직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새로운 육신을 필요로 하였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주변에서 그들과 자주 부딪히면서 따뜻한, 그 어떤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아주 실감나지만 그들이 사유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조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에 닿을 수 있는 것을 제자들에게 남기고 가셨다.
그들이 만질 수 있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말이다.
음식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냄새를 맡고, 맛볼 수 있고, 삼킬 수 있는 것을 주셨다.
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몸에 있는, 씻을 수 있는 것을 주셨다.
몸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몸을 구부릴 때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 너는 어쩌다 그런 상처가 났니?
내가 만지면 아프니?
아니, 상처들은 흉하지 않아.
내 상처도 한번 봐.
네가 상처 자국이 조금 더 많을 뿐이야.
너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니?
여기 서서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을 때 말이야.
나는 그럴 때가 있어.
이상하지?
너는 그를 따르고 그러면서 하늘이 갈라지고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하느님은 너에게 대야와 수건을 건네 주셨지.
이 모든 것이 다 발에 관한 거라는 게 드러나는 거지.
발 말이야 발.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지어낸 것이다.
요한복음 해설을 보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승천하기 전에 육신으로 하강하는 종말론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말해 줄 것이다.
수 년 동안 맨해튼의 폭탄 구멍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동굴에서 들려 나오는
시체들을 볼 때, 텔레비전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가자 지구, 이라크에서 쏟아져 나오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들을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이 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깨닫는다.영적인 선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빵과 포도주와 물과 그리고 발을 가르치는 선생을 통해서 말이다.
하느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을 행하라.
나를 기억하며.”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하라는 것이다.
듀크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것에만 너무 많은 관심을 두는 것을 보고 이렇게 지적했다.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은 한 사람을 신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한 사람의 육신을 제대로 만들고, 나쁜 버릇들을 고쳐 하느님을 향한 예배를 하도록 만드는 종교이다.” 11
우리의 구체화된 삶 속에서, 우리의 교리 속 단어들은 육신을 빌린다.
만약 우리 종교의 믿음들에 육체적인 가치가 없다면, 구체화된 삶의 결과를 하나도 모른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하우어워스가 던지는 질문은 저 어딘가에 완벽하게 영적으로 성스러운 것이 있느냐가 아니라, “육신 말고 성스럽게 될 수 있는 것” 12 이 있느냐를 묻는다.
좀 더 날카로운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평화주의자이자 신부인 다니엘 베리간은 “모든 문제는 이 질문으로 종합된다.
당신은 누구의 육신을 만지고 있으며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의 육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의 육신을 불태우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13 라고 물었다.
이 같은 질문들은 너무 많은 믿음의 질문들과 토론을 벌이는 인간의 지적 레이더를 자극한다.
사람들은 조직화된 종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혹은 그 안의 주류 교회들이 왜 실패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적당한 성직자들, 심술궂은 신도들,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편견을 비판한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의 사유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제일 위험한 문제인데 말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고, 미디어는 한 번에 소화하기 벅찰 정도로 너무 많은 뉴스를 쏟아낸다.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두개씩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더 많은 정보이다.
우리는 성육신의 연습이 필요하다.
성육신의 연습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정보가 먼지처럼 말라 버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
하느님은 먹을 수 있는 생명의 빵에 굶주리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육신을 통해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한 더 많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하느님이 필요하다.
간혹 사람들이 나의 기도에 대해 물어 보기도 한다.
그럼 나는 빨래를 너는 것에 비유한다.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하루를 보낸 날, 집에 온 나는 세탁기를 돌리고 탈수까지 끝난 빨래를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나간다.
바구니는 찡긋찡긋 소리를 내지만 젖은 옷의 무게만큼, 나는 축복 같은 휴식을 얻는다.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빨래를 집기 위해 몸을 숙일 때마다 나는 풀밭의 냄새를 맡는다.
태양의
냄새를 맡는다. 무엇보다 깨끗해진 옷 냄새를 맡는다.이것은 애매한 성취로 얼룩진 내 인생에서 내가 성취한 몇 안 되는 것이다.
빨래는 대부분 내 남편, 에드의 것이다.
그는 일주일 동안 갓난아기보다 더 많은 옷을 내놓는다.
그의 옷을 빨고 너는 일은 사랑의 노동이 된다.
나는 티셔츠를 하나하나 털어 나란히 널고 빨래집게로 고정시킨다.
빨래집게도 내게 기쁨을 준다.
나는 빨래집게를 만들기 위해 희생된 나무들을 위해 기도하고, 플라스틱 대신 나무로 빨래집게를 만드는 펜리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위해 기도한다.
나는 강박관념이 심한 사람이라 빨래를 너는 데도 순서가 있다.
먼저 손수건 그리고 짧은 바지, 티셔츠, 청바지 순이다.
널린 옷을 노래로 부른다면 음계들은 스타카토 표시가 있고, 음이 점차 내려가는 노래가 될 것이다.
양말은 공항에서 수화물 찾는 곳에 있는 짐처럼 한줄로 정렬되어 있다.
빨래를 다 널고 나면 나는 한 발 물러나 빨래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하루 종일 바라본다.
그리고 내 기도들이 나무 위에서 춤추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 기도.
이 기도는 좋다, 이 일은.
이 좋은 일에는 정원과 닭장을 정리하고 감자를 씻고 설거지를 하는 일도 포함된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죽도록 싫어한다.
몸이 무거워서, 바빠서, 늙어서, 고통스러워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들은 인생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내 인생뿐만 아니라 나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만약 내가 물을 나
른다고 하면, 나는 지구 상에서 물을 나르는 모든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룬다.우리는 물을 나르는 일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안다.
마시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목욕하는 물.
우리 근육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목마른 창조물이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는 일.
나는 땀을 흘리는 이런 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좋아한다.
인생에서는 ‘선하거나 나쁜것’이 중요하지만 운동에서는 그렇지 않다.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내 심장은 생명을 주는 운동에 끌린다.
때로는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책상에서 춤을 추는 것이 생명을 주는 일일 수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책상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가장 실감나는 기도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책상과 방을 어지럽히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너무 많이 읽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몸을 등한시하고 선한 것을 규정하는 종교적인 정의에 대해 대항하는 나를 발견한다.
2년 전 신학교에 있는 한 예배당에서 아래의 찬송가를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말씀이 된 육신은 아름답구나,
아이를 낳는 일과 가슴 속에 담긴 모유는 아름답구나.
먹이를 주는 일과 어루만지는 일과 휴식은 아름답구나.
세상을 아는 몸은 아름답구나.
말씀이 된 육신은 아름답구나.
세상을 아는 육신은 아름답구나,
햇빛과 육신의 끌어당김을 느끼는 몸,
느끼고 지각하는 돌고 도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몸은 아름답구나.
말씀이 된 육신은 아름답구나.
우리 육신에 있는 하느님의 기쁨은 아름답구나,
그리워하며 예수님 안에서 머무르는 포옹의 기쁨,
먹는 것과 냄새 맡는 것의 즐거움,
육신은 아름답구나,
선한 것과 하느님을 위해서.
말씀이 된 육신은 아름답구나.
이 찬송가의 작곡가는 재능 있는 음악인으로 평가받는 브라이언 렌이다.
이 찬송가를 보면,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에서 “가슴 속에 담긴 모유” 라거나 “먹이를 주는 것과 어루만지는 일과 휴식은 아름답구나” 라는 가사를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교회에서 내 몸이 좋다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육신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성육신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느님은 살과 피를 믿음으로써 이 땅에 당신의 성스러운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찬송가를 들은 그 에배당에서, 나는 ‘육화된 신성함’이라는 주제로 워크샵을 이끈 적이 있었다.
여자 서른네 명과 남자 여섯 명이 모였다.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모여서 지금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러한 인식의 편견들을 예의 바른 자세로 고백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교회 전통 교리에서,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서 하느님을 알았다고 했다.
최소한 이것들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 것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산상수훈에 나와 있는 팔복에 대해 공부하다 그 가르침을 직접 표현해 보기로 했다.
우리들 대여섯 명은 각자 자기 삶에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구절을 마음에 정해 두고 구석으로 갔다.
이제 자신이 생각한 팔복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몸으로 보여 주어야 했다.
예상대로, 누구도 먼저 나서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팔복의 내용을 잘 때도 외웠고 그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팔복에 관한 세미나에도 너무 많이 참석했다.
모두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두려워했다.
이럴 때 아이들이라면 제멋대로 알아서 행동했겠지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어떤 목사들은 누가 먼저 나가는지 살펴보았고, 어떤 신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으려고 시체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15분 뒤, 첫 번째 지복인 “정의에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들”을 표현
여자 다섯 명이 먼저 나와서 배고픈 어린 새들을 흉내 내며 둥글게 앉았다.
그들은 두 손으로 어린 새의 부리를 만들었고, 그중 한 명은 뭐라도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울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다 부리 가득 음식을 담아온 어미가 새끼들 주변을 맴돌았고 새끼들은 어미 새가 가까워질수록 퍼득거렸다.
어미 새는 새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음식을 먹은 새들의 부리는 날개가 되어 날았다.
이 모습은 너무 감동적이었고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어린 새를 표현했던 사람들은 천천히 문 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슬퍼하는 자들은 행복하다”를 표현할 사람들의 차례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여자였다.
한 명이 중앙에 누워서 죽은 시늉을 했고 나머지 사람들이 주변으로 모였다.
그중 한 명은 죽은 시늉을 하는 여자의 머리맡에 앉아 자신의 무릎에 여자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다른 두 명은 무릎을 꿇고 앉았고 또 다른 두 명은 그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들은 서로가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서로를 만지고 있었을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시늉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사랑과 슬픔으로 가득 찬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지켜보고 있었던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게 끝인가?
그 슬픈 소리는 계획된 것이지만 억지로 내는 소리 같지 않았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연기였을까 아니면 진심이었을까?
보고 있었던 우리는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죽은 시늉을 하던
여자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그녀의 조그만 흐느낌은 점차 커졌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같이 울었다.
그중 한 명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온 사람을 보며 작은 통곡을 했고 또 한 명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이 연극이 얼마나 길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1분? 아니, 1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여자들은 똑바로 일어서서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조용한 박수를 보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전부는 하느님이 육신 속에 현존하고 계셨다는 것이고,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표현한 것은 하느님을 우리네 인생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섯 명의 여자들 모두 말씀에 그들의 인생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될 일들에 말씀을 녹여냈다.
그러자 성령은 더욱 멀리 움직였고 모든 것은 새로워졌다.
이를 표현한 사람들, 지켜보던 사람들, 그리고 말씀들.
육신이 말씀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이 주는 지혜를 무시하려 하는가?
살을 입히는 연습은 너무나 정직해서 참여하는 어느 누구도 이것이 영적인 훈련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눈물과 고통, 신음 소리와 함께 육신은 안다.
우리는 몸으로 명령을 수행하고 몸의 뼈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게 하느님의 뜻이다.
* 주
11. Stanley Hauerwas, “The Sanctified Body”, in Embodied Holiness, ed. Samuel M. Powell and Michael E. Lodahl(Downers Grove, IL:InterVarsity Press, 1999), 22.
12. Samuel M. Powell, “Introduction”, op.cit.,9.
13. Powell, “Introduction”,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