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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남경대(攬景臺)는 용담(龍潭) 권지(權誌, 1567~1637)가 1615년(광해군7) 영해도호부사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1569~1631)의 권유와 건축비 부담으로 반변천 강안 남경대 절벽 위에 대지를 마련하여 정자를 짓고, 좌우 산수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여 남경대라 하였다. 권지는 임진왜란 때 이곳 이웃 마을인 북면 후평리에 피난하여, 용담정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한 적이 있으므로 남경대 주변은 익숙한 지형이었다. 아들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과 손자권태시도 이곳을 별장으로 활용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817년(순조17)경 권태시의 6대손 권상도(權尙度)가 사림에 폐허 참경을 알려서 1827년 (순조27) 권지, 권창업, 권태시 3대의 학행을 추모한 영남사림에서 남경대 중건계(重建契)가 조직되고, 이로부터 약 100년 후에 사림대표 정건모(鄭建模), 조진용(趙晉容), 권한모(權翰模), 신익호(申翼浩), 오석준(吳錫浚) 등이 주도하여 3년간의 건축공사로 훼철된 봉람서원 (鳳覽書院)의 기와와 목재로 1916년 남경대를 중건하고 춘추로 계회를 하였다. 그 뒤 1993년에 후손에 의하여 남경대가 새로 건축되었다. |
건축 구성 |
남경대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을 연접시킨 중당협실형이다. 하층은 모두 개방시켰으며, 상층에는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인 우물마루를 두었으며, 퇴칸의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시멘트 기단 위에 다듬돌 주초를 놓은 후 12본의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오량가구의 홑처마집이다. |
현판 |
남경대(攬景臺) |
산택재(山澤齋) |
영모당(永慕堂) |
당 안의 동편 벽면에 걸려있다. |
남경대기(攬景臺記) |
1920년 9월 하한(下澣)에 진성(眞城) 이만규(李晩?, 1845~1921)가 쓴 기문이고, 기문 뒤에는 1992년에 중건한 사실을 기록한 추록(追錄)이 적혀있다. |
산택재운(山澤齋韻) |
영모당운(永慕堂韻) |
차운(次韻) |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각각 쓴 2수의 시문이다. |
차운(次韻) |
난은(懶隱) 이동표(李東標)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각각 쓴 2수의 시문이다. |
시판(詩板) |
종후생(宗後生) 권재강(權載綱)이 쓴 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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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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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정이야기 |
권태시는 1684년(숙종10) 남경대를 중건하고 이곳이 반변천에 위치하여 경치와 지형이 『주역(周易)』의 산택손괘(山澤損卦)와 같다고 하여, 남경대에 산택재라고 편액하였다. 산택손괘는 못의 흙을 파서 산에 올리면 못은 깊어 좋고 산은 높아 좋아진다는 것인데, 자기 수양을 철저히 하면 스스로 좋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찾아와 권태시가 지은 「산택재 원운(山澤齋原韻)」에 차운하면서 수려한 산천의 풍광을 격찬하였다. |
관련인물 | |
- 권예(權?, 1495~1549) | |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崖)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16년(중종11) 식년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마애실기(磨崖實記)』가 전한다. | |
- 권지(權誌, 1567~1637) | |
자는 중명(仲明), 호는 용담(龍潭)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문인이다. | |
- 권창업(權昌業, 1600~1663) | |
자는 자기(子基), 호는 번곡(樊谷)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권지(權誌)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언필(朴彦弼)의 딸이다.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다. 박호(朴豪),이엄(李儼) 등과 교유하였다. 효종 때에 재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왕명에 향리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추천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
- 권태시(權泰時, 1635~1719) | |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선중기의 뛰어난 예학자이다. 그는 고려조 개국공신인 태사공 행(幸)의 25세손이며, 중종시 이조판서를 지낸 권예가 고조부가 된다. 부친은 문행으로 널리 알려진 숭정처사 권창업이다. 권창업과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당시 명사들과 도의로 사귀었다. 어려서 경당 장흥효의 수문인이었던 아버지에게 글을 읽었고, 장성하여 졸재 유원지 문하에서 성리, 상수, 예설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문해리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라 자호하여 현판을 달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주부를 거쳐 충청도 회덕현감이 되었다. 이곳에서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퇴임 때 회덕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주변경관 |
- 주변경관 |
영양군 입암면에서 2번 군도를 타고 오다가 산해교를 건넌 뒤 바로 도로변 오른쪽에는 건물이 남경대(攬景臺)임을 알리는 꽤 큰 석비가 세워져 있다. 석비 오른편에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있고, 30여 그루의 소나무가 둘러가며 심겨져 있다. 건물 뒤로도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 있다. 마당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반변천이 흐르는 산해교가 옆으로 바로 보이고, 산해리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건물 앞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으며, 대 앞뜰에는 반타석이 있다. 있다. 이곳 산해리에는 국보 제187호로 지정된 봉감모전오층 석탑이 있다. 입암면 산해2리에 위치한 이 탑은 건축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로 추정되며, 탑의 기단은 자연 편평석(偏平石)으로 부설한 한 변이 약 5m이고, 그 뒤에 방형지대석 (方形地臺石) 위에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이 구성되었고, 높이는 약 8m이며 각 부재(部材)는 전형(塼形)을 모방하여 수성암(水成岩)으로 만들어진 전(塼)으로 축적하였다. 독산(獨山)같이 보이고, 또 큰물이 지면 섬 같기도 하다. 상부가 평평하여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으며, 풍치가 아름답다. 그 아래는 여러 사람들이 풍유와 천렵으로 많이 모여 노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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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입암면 산해리 | |
- 두 개의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이 큰 내를 이룬 마을 ‘산해리(山海里)’ | |
산해리는 안동시 임동면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마을에 속한 자연부락을 지나는 마을이다. 낙동강의 동쪽원류인 반변천과 소하천인 동산천의 두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은 큰 내를 이루었으니 마치 산 속의 바다를 연상하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동산(東山)과 문해(汶海)의 이름을 따서 산해라고 한 것이다. 삼산동의 일부와 안동군 임동면의 동산리를 합하여 영양군 입암면에 들게 하였다. 수습발굴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정해졌다.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많아 문해라고 하였다. 속했을 때, 동산령 너머 마을이라 하여 동산동으로 불리워졌으며, 윗마을을 동산태, 아랫마을을 아랫동산태라고 한다.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모양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는 가득차면 가라앉는다고 해서 살림이 일면 사람들이 이곳을 떠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아래로는 문해가 이어지고 있다. 주파와 동산동 그리고 문해를 잇는 세 갈래 길이 있으며 현재는 산해3리이다.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약 500년 전인 1599년(선조32) 이곳에 서원을 창건하여 옥동서원(玉洞書院)이라 하였으나 그 후 봉감서원(鳳鑑書院)이라 개칭되었다. 지금은 봉감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으며,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이 자리 잡고 있다. 남경대(攬景臺)와 봉감사(鳳鑑寺) 터에 남아있던 벽돌로 쌓은 봉감모전오층석탑, 그리고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1599년(선조32) 이곳에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창건하여 퇴계를 배향하다가 뒤에 터만 남은 서원터가 남아 있다.
남경대攬景臺 모습
2.개암가皆岩歌에서 살펴 본 남경대팔경이야기 청춘에 병이 들어 공산에 누었더니 일편 잔몽에 호접의 나래 빌어 장풍을 경마 들고 남포로 나려가니 초선도가 어디메뇨 개암정이 여기로다. <제1경:초선도> <제2경:동취병 서취병,골립암> <제3경:영등산,봉수산> <제4경:반변천 =동변수, 동사티천=서변수> <제5경:화개산, 자양산,하풍산> <제6경:남이포 비파담>
<제8경 선바위>
개암가皆岩歌【해설】 조선 후기에 조성신(趙聖臣)이 지은 가사(歌辭). 필사본. '개암정가(皆巖亭歌)'라고도 한다. 창작연대는 본문 중에 "임술추(壬戌秋) 명년이라 이날 다시 노새"라는 내용으로 보아, 작자의 나이 36세 때인 1801년(순조 원년)으로 추정된다. 개암정은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의 개암에 있던 정자이다. 작자가 이 정자의 경관을 실명(失明) 이전에 유람하였는데, 실명 이후에 그때를 회상하며 지은 작품이다. 4음보 1구로 계산하여 77구이고, 음수는 3ㆍ4조와 4ㆍ4조가 주이며, 한문성구가 많다. 내용은 개암정을 중심으로 하여 이름 그대로 기암절벽이 병풍을 둘러놓은 듯한 자연경관 중에 구축한 정자와 그 주변의 아름다운 산천의 풍경을 노래하고 즐기며, 동류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던 일을 되새겨봄과 동시에, 청춘에 병이 든 자신의 회포를 토로한 작품이다. 이 가사는 한글 사본으로 전한다. 음수는 3ㆍ4조와 4ㆍ4조가 주이며, 형식은 4음보 1구로 계산하면 77구, 2음보 1구로 계산하면 152구이다.
【개관】 ▶작자 : 조성신(1765∼1835) ▶연대 : 1801년으로 추정 ▶갈래 : 가사(歌辭), 강산유람회상가(江山遊覽回想歌) ▶형식 : 4음보 1구로 계산하여 77구이고, 2음보 1구로 계산하면 152구. ▶주제 : 강산 유람 회상과 회포를 토로
【가사 내용】 청춘에 병이 들어 공산에 누었더니 일편 잔몽에 호접의 나래 빌어 장풍을 경마 들고 남포로 나려가니 초선도가 어디메뇨 개암정이 여기로다 어주를 흘러 타고 백구에 길을 물어 굽이굽이 돌아드니 수석도 명려하다 계변에 누운 돌은 석국이 벌어 있고 석간에 솟은 물은 박잔이 띄워 있다 등라를 후려 잡고 석국을 더디 밟아 운창을 바삐 열고 주인영감 배읍하니 확삭할사 선풍도골 거룩할사 수고강녕 세가지 상체화는 춘당이 함께 놀고 오색의 영아희는 노래자를 부럴소냐 금슬 시서는 안상에 들어 있고 옥수 방란은 정전에 빌어있다 한훤을 맞은 후에 헌함에 비겨 앉아 원근 산천을 일안에 굽어보니 동취병 서취병은 봉만도 수려하고 기암괴석은 천학도 기절하다
일월산 일지맥은 남록으로 뛰어 나려 곡곡용반하고 준준호거하여 청산벽계 굽이굽이 백리에 연했거늘 외로이 부용봉만 무슨 일로 독립하양 버려 흩어 잘나져서 학의 나래 솟았는듯 수충대 나려앉아 요조동탁 터가 되니 좌우제산 모든 봉이 너를 위해 삼겼던가 하우씨 큰 도계에 석문이 갈라지고 진시황 성난 채에 이 바위 걸어왔다 아름다운 옥녀봉과 옷드름한 화선봉이 장엄하고 기이하여 울울창창 벌여 있고 기화요초 잦은 곳에 귤자 바두 흩었는듯 분벽사창 밝은 방에 운모병풍 둘렀는듯 산경은 이러하니 수세는 어떻던고
약산당 동변수와 서석정 서변수와 남북에 흐른 물이 함께 모여 드난지라 황재여울 둘러오고 병풍바위 돌아들어 만장창벽 깨뜨리고 양수합금 소이 되니 은홍이 뛰었는 듯 옥홍이 들었는 듯 석판에 흐른 물은 들오는 곳 보건마는 중담에 잡힌 물은 나가는 곳 못 볼어라
남경대와 화개산은 팔경을 도와 있고 서호양 봉람호는 수문을 잠갔으니 백색풍경과 층층수석은 말로다 뉘 전하며 아니 보아 어이하리 하목은 제비하고 수천은 일색이라 금파에 야적하니 뛰노나니 금잉어요 경사에 캐월하니 잠자는 게 백구로다 남북촌 모든 집과 상하촌 넓은 들은 벽전에 암암하니 가지 가지 기경일다 뭉을뭉을 저녁 연기 동정호에 피어나고 아른아른 새벽 별은 은하열수 썩 돋았다 제명구폐 잦았으니 태평성대 기상이오 어가목적 화답하니 여강구 풍화로다 연적봉에 날이지니 도로행인 돌아가고 비파담에 달이 뜨니 강촌어부 나려간다 무심출수 저 구름은 너는 어이 떠 있으며 천비지환 이 새들아 너는 어이 날았던고 조운모우 만만상과 춘화추엽 물물홍은 어나 아니 뉘 차지며 어나 아니 뉘 물을고 천간지비 이런 곳에 선인폐려 옮겨두고 효자효손 기 아니며 긍구긍당 빛이렸다 층층물색 다 던지고 일당성회 더욱 조타 심팔군선 모인 곳에 남극성 비취었다 거룩할사 우리 일문 고년대질 하고 할사 개개히 백발이오 면면히 환구로다 향산구로 못 보거든 낙중기영 예 왔도다
단청을 그려내어 이때를 밝히고져 석벽에 새겨내고 고사를 유전코져 임술추 명년이라 이 날에 다시 노세 소학사 옛 풍류를 손에 옮겨 부쳐두고 일배주 가득 부어 만년축수 다시하니 남산송백 푸르렀다 축수를 마친 후에 군선의 손을 잡고 초선도로 가잤더니 청청한 학의 소리 깨다르니 꿈이로다 꿈 가운데 놀란 경을 혼자 앉아 노래하니 남산에 저 기러기 이 노래 가져다가 우리 성주 용상하에 세세히 들리고져 [출처] 조성신 : 가사 <개암가>| 계욕 이야기 계욕:부정을 쫓는 淨化儀禮정화의례
음력3월 三月上巳상사일(음력3월첫째뱀날)에 동류(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물)하는 물에 멱을 감음으로써 상서롭지 못한 재액을 떨어 버리는 연중행사이다. 소위 음복을 하는데,이것을 계음이라한다. 반변천에 흘러드는 물(동류하는 물)인,남경대 앞 소가 계욕을 하는 적당한 장소이다. 한편 남경대 뒷산은 풍수지리에서 뱀의 형상의 산이어서 더욱 더 계욕에 적당한 장소이다. 여기에서 목욕을 통해 액운을 떨어 버리고 부정을 쫓는 정화의례를 갖졌으리 짐작된다. 경북 입암면 산해리 동사티마을에 있는 남경대앞에 전통민속놀이로 재현해 봄이 어떨는지...?
4.지주중류석/지주중류비/지석암/지주암/백세청풍
황하의 중류에 있는 기둥 모양의 돌을 말한다.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은 모양인데,격류 속에서 우뚝 솟아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곧잘 선비의 지조에 비유하곤 하였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유적으로 중국 은나라 의열이었던 백이. 숙제의 무덤 근처를 흐르는 항류의 '지주중류'라고 새긴 석각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지주석은 경북 봉화 청암정 남쪽 건너편 계곡에 수명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그 앞을 흐르는 계류의 상류에 '지주암'이라 새긴 바위가 있다. 지주중류비는 길재가 죽은 뒤 1587년(선조20년)에 그의 덕을 기리기위해 인동현감 류운룡이 금오서원과 채미정을 건립할 때 세운 비인데,항류의 돌에 새겨진 '지주중류'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겼다. 류성룡에게 '음기'를 부탁하면서 '지주'의 뜻을 설명한 대목이 있다. 아래에 있는 평평한 바위와 외원임천산수경의 하나인,영양군 입암면 흥구리 앞에 흐르는 반변천 가운데에 있는 '문암'도 '지주중류' 를 의미한다. '지석암'도 있다. '봉화인 월은 금계'의 후손인 '동성 금소술'이 남긴 한시에 내용이 노래되고 있다. '지주중류'와 짝을 이루는 글귀가 있다.그것은'백세청풍'인데, 경남 함안 무기연당 방지의 석가산에 세워져 있는 '백세청풍' 표석, 조선의 청절대신 김상용이 살았던 서울 인왕산 옛 청풍계 큰 바위에 새겨진 '대명일월 백세청풍'석각 등에 나타나 있다. 모두 절의와 명분을 중히 여겼던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석각 유적들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고난에서도 올바른 선비의 도리를 지키며. 부귀를 탐하거나 그에 현혹되지 않는 굳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선비들을 지주에 비유했고,그 지주석을 정원 속에 조성해 놓고 정원 주인은 스스로 백이,숙제임을 자처했던 것이다.^-^
*백이숙제(伯夷叔齊) 백이와 숙제는 중국 은(殷)나라의 형제 성인(聖人)으로 백이는 숙제의 형이다.
본래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고 가운데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그 무렵 주(周)나라 무왕 (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5.산해리 봉감모전5층석탑 국보이야기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봉감鳳甘마을은
*이마을에는 남경대攬景臺 와
0.산해리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로서 한변이 약 5미터의 2층 기단위에 축조되었고 수성암을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한 봉감鳳甘에 있는 탑이어서 봉감모전탑이라고 *봉감모전오층석탑은 그 가운데 모전 석재로 1층 몸돌 받침을 탑신은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수성암을 1층 탑신 18단 높이 2.30미터 너비3.26미터 2층 이상은 층마다 중간 부분에 턱을 두었고 지붕은 1층의 받침 수가 8단 위로 올라 갈수록
6.먹거리 약주,약밥,약과 이야기 약봉 ‘서성’ 집의 약주,약밥,약과
약주, 약밥, 약과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까 하고 묻는다면 조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약주에 대하여는 그간 많이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정도이다. 예전 어른들이 드시는 술, 그중 가끔 주전자에 데워 드시던 정종 혹은 청주라고도 하는 술을 약주라고 부른 생각이 난다. 그 약주의 유래는 약현에 살았던 약봉(藥峰) 서성(徐渻)의 모친인 고성 이씨가 만든 술에서 유래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사대부집에서 술을 만들게 된 것일까? 그 뒤에는 많은 연유가 있었다. 아비 없는 아들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조선 3대 현모 중 한분인 서성의 모친이자 서해의 아내인 고성 이씨 부인의 의지가 있었다
박경룡의 <서울 역사이야기>에서 참조하면 서거정의 현손인 가난한 선비 서해(1537-1559)가 고성 이씨 집안의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신부가 앞을 못 보는 청맹과니(겉으로는 정상이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였지만 서해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내를 위하여 정성을 다했다. 아들 서성(1558-1631)을 낳고 서성의 나이 3세 가 되었을 때 서해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에 더하여 부친 이고도 명나라에 사절단으로 다녀오다 유명을 달리하여 가문을 이끌고 갈 사람이 모두 떠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서성의 모친 고성 이씨는 친정에서도 무남독녀 외딸이라 양쪽 집안을 책임지게 된다. 그 때 살던 곳이 안동이었는데 아비 없는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서성의 작은 아버지 서염이 있는 서울로 가야겠다 하며 안동에서 무남독녀로 친정 부친에게 물려 받은 소호헌을 떠나 충주를 거쳐 서울로 가게 되는데 지금의 중림동 성당(약현성당)이 있는 약현으로 이사를 가서 친정에서 가져온 돈으로 집을 짓고 아들은 서염의 집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한다.
생계를 위하여 고성 이씨 부인은 청주를 빚고 찰밥과 유밀과를 만들어 하인들을 시켜 내다 팔았다. 질 좋고 감칠맛 있는 술과 밤과 잣 호두 등을 넣은 찰밥과 유밀과는 질 좋고 맛이 좋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도승지가 고성 이씨 부인이 만든 술을 갖고 들어가 임금에게 진상을 하자 임금은 맛을 보고 천하의 진미로다 하고 약주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만든 곳이 약현이라고 약자를 썼다고도 하며 서성의 호가 약봉이라 이를 땄다고도 한다.
약현은 지금 중림동 성당이 있는 자리라고 전해지며 서성이 태어난 곳은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회리에 소호현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리고 서성의 묘는 포천시 설운동에 있으며 근처에 달성 서씨의 종가와 사당이 있다. 포천의 종가에서는 약봉 모친이 만들어 전해 내려오는 술 약주를 “약봉 약산춘‘이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해 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장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이 이름으로 술을 만들어 상업화 시킬 경우 가문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술의 명맥이 끊길까 우려되기 때문이란다.
서성은 어려서 성균사예로 있던 숙부 서염의 밑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고 독서를 많이 하게 된다. 부인은 여산목사 송영의 딸로 아내와의 사이에 7남4녀를 두게 되고 아들들은 3명은 어려서 잃고 4명이 장성 하여 우의정, 현감, 승지, 부마까지 하게 된다. 스승은 이이, 송익표로 알 려져 있다.
서성은 문과에 급제하여 6도 관찰사와 4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계축옥사(1613)로 단양, 영해(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자양산), 원주로 유배를 갔었으나 인조반정으로 해배가 되어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과 자손들은 6정승과 3제학을 하는 등 명문 일가를 이루었으며 서성의 모친 고성 이씨 부인은 7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서성의 현손 여식은 영조의 정비인 정순왕후가 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명문가는 이어져 한말의 내부대신을 지낸 서재필도 그의 자손이다.
서성이 살던 약현의 집은 1900년대 초에 천주교에 매각하여 약현성당이 들어섰으며 구옥을 철거 중 종가의 반대로 인하여 그 당시 뮈텔주교가 송사에 나서서 그대로 서울 최초의 성당인 약현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위치는 충정로역 5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다.
안동의 소현헌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서성의 3남이 살다가 얼마간 비어 있었으나 그 후 자손들이 들어와서 지금가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후 쓰여진 기록에 의하여 서성을 평한 글이 있는데 서성은 성품이 강직하고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고 미천한 사람들 앞에서도 거만하지 않았으며 소실도 두지 않은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모두가 모친인 고성 이씨의 바른 교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성의 모친 고성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여중군자‘장계향’ (1598-1680)과 더불어 조선3대 현모로 불린다. 참고로 장계향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구계리에서 퇴계 이황의 제자인 경당 장흥효와 모친 안동 권씨 사이에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나 출가하여 10남매를 두고 3남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올라서 정부인이 되기도 하였다. 장계향이 유명한 것은 최초 한글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장계향은 시인, 서예가, 화가, 교육자, 조리가 등으로 다재다능하였던 조선의 여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7.집승정 [集勝亭]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蓮塘里)에 있는 약봉(藥峯) 서성(徐渻)의 정자이다.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선조의 고명칠대신(顧命七大臣)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에 의해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立岩面) 연당리로 유배되어 정자를 세웠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집승정 [集勝亭] (두산백과)
8.태극의 중심인 선바위와 남이포 '선바위와 남이포'는 자연이 만든 하나의 작품이다. 이 곳의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 경북 영양군 입암면 자연환경적으로는 경북내에서 최고 높으며 영산인 일월산 동쪽과 남쪽에서 발원해 흐르는 반변천과 일월산 유학의 경전인 논어에 요산요수樂山樂水, 선바위는 바위가 촛대처럼 서 있어서 선바위라고하며 남이포는 남이 장군이 민란을 일으킨 아룡과 자룡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워서 조선시대 산수화의 거장인 한편 기복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현재에도 여기에 와서 소원을 * 남이포와 선바위 전설 남이포는 조선 세조 때,남이 장군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옛날 석백리(지금의 신사리)에 있는 운룡지에 있는 지룡의 원래 이들은 용의 아들이라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재주를 이리하여 조정에서 무용이 뛰어 난 남이 장군에게 토벌할 먼저 양군의 대장인 남이 장군과 아룡,자룡이 치열한 칼싸움이 역도의 괴수를 물리친 남이 장군이 용마를 타고 유유히 내려 당시 남이 장군이 부근 지형을 살펴보니 청계천 물길을 이곳 선바위 아래 남이포와 자양산끝 석벽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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