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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 사 기 행 스크랩 사도세자 (思悼世子) ..융릉
목탁소리 추천 0 조회 208 13.12.04 17: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도세자                   思悼世子

 

 

 

 

 

 

사도세자 (思悼世子. 1735~1762) .. 이름은 선(瑄),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懿齋), 어머니는 영빈 이씨(暎嬪 李氏),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 (惠慶宮洪氏)'이다. 영조 11년 (1735년) 1월 21일, " 삼종(三宗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 "을 잇는 원자(元子)가 축복 속에 탄생한다. 생후 14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된 이 아이가 영조(英祖)의 뒤를 이어 조선의 22대 임금이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17년 후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을 줄은 더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손 귀한 왕의 핏줄인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걸리고 비행(非行)을 했다는 이유로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혜경궁 홍씨의 " 한중록 (恨中錄) "이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지만, 역사는 " 승자(勝者)의 기록 "이며, 패자(敗者)의 기록은 비참하리만큼 왜곡(歪曲)되어 있거나 남아 있지 않다.

 

 

 

                                               택군                   擇君

 

 

 

 

사도세자의 비극은 붕당정치(朋黨政治)와 관련이 깊다. 노론(老論)은 사도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자신들의 세력으로 포섭하려 하였다. 영조(英祖)도 노론(老論)이고,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도 남편을 따라 노론을 택했으며,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外戚)도 노론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소론(少論) 쪽으로 기울며 고립되기 시작했다. 

 

 

효종(孝宗)을 닮아 북벌(北伐)을 꿈꾸고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사도세자와 현상 유지가 최선인 노론(老論)과는 코드가 맞지 않았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신하(臣下)가 임금을 선택하는 " 택군 (擇君) "인 것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가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0세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고 결혼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살 때 효경(孝經)을 읽고 소학(小學)의 예를 실천하였다고 한다.  

 

 

1743년 10살 때 관례(冠禮)를 행하고 나서 부왕인 영조(英祖)가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 여러 당인(黨人)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 "고 대답하여 영조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조가 병이 깊어 1749년에는 15살의 나이에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代理聽政) 기간 중, 여러 지방의 환곡(還穀)에 대하여 덜어내고, 덜 받는 부다익과(富多益果)의 정사를 베풀고, 백성들을 괴롭히는대동(大同), 군포(軍布)의 대전(代錢)과 방납(防納)을 금지시키는 등 아버지 영조(英祖)의 치적에 버금가는 선정을 펼쳤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신임사화(辛任士禍)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여,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의 지지를 받게 되지만, 반면에  영조(英祖) 및 영조의 추대세력인 노론(老論)에 비판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신임사화                   辛壬士禍

 

 

 

 

신임사화란 1721년부터 1722년 사이에 왕통(王統) 문제와 관련하여 소론(少論)이 노론(老論)을 숙청(肅淸)한 사건을 말한다. 이미 숙종(肅宗)시절에 노론과 소론이 분파되어 사문시비(斯文是非...주자학을 둘러싼 異端시비)를 별였으나, 경종 代에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是非)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논지가 바뀌었다.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에 왕통문제가 개입된 것은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인 경종(景宗)이 세자로 책봉되고, 뒤이어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張禧嬪)의 처벌문제를 두고 대립하였다. 노론 측은 장희빈이 정비(正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음해하였으므로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 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경종(景宗)은 숙종(肅宗)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다가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노론은 경종 즉위 후 1년 만에 연잉군(延芿君 .. 후일 英祖)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노론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태도 변화를 보임으로써 소론측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소론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辛丑獄事).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 즉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告變)을 계기로 일어났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고변(告變)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鞫問)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禍)를 입었다. 이 옥사(獄事)는 노론, 소론 간의 대립이 경종(景宗)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忠逆) 시비(是非)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 시절의 문제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英祖代)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엇다.      

 

 

 

 

                            

                                     아버지 英祖와 사도세자의 대립과 갈등

 

 

 

 

 

 

사도세자(思悼世子)는 대리청정(代理聽政)하면서  여러 치적을 쌓았지만, 그는 소론, 남인세력과 가까이 지낸다. 더욱 그는 아버지 영조(英祖)의 즉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신임사화(辛任士禍)에 대하여 아버지 영조의 추대세력인 노론(老論)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소론(少論)이 의리(義理)와 명분(名分) 면에서 옳다고 평가하였다. 

 

 

사도세자는 1749년부터 와병 중인 영조(英祖)를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대리로 정사를 돌보면서 자신을 적대시(敵對視)하는 노론(老論)에 맞서 '사도세자'는 더욱 소론, 남인세력과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 이에 대한 노론(老論)의 위기감(危機感)은 극에 달하게 된다. 장희빈의 아들이며, 영조(英祖)의 형인 선왕(先王)인 경종(景宗)은 소론(少論)의 왕...신임사화(辛任士禍)때, 목숨을 걸고 영조(英祖)를 왕으로 추대하여 장악한 정권이 세자에 의하여 다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절대 고독 , 사도세자

 

 

 

 

비참한 최후 때문에 사도세자는 비운(非運)의 왕자로 불리지만, 그것에 못지 않은 상처가 그에게는 또 있었다. ' 뒤주 '에서 여드레 동안은 비참한 최후이었지만, 지상(地上)에서의 스물여덟 해는 말 못할 고독(孤獨)의 세월이었다. 그는 비운(非運)의 왕자 이전에 고독(孤獨)의 왕자이었다.

 

 

사도세자의 고독은 생후 100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부모의 품을 떠나 보모(保姆)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인 " 한중록(恨中錄)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신 지 백일 만에 집복헌 (集福軒 .. 창경궁 내)을 떠나 보모(保姆)에게만 맡기시어, 오래 비어 있던 저승전 (儲承殿 .. 창경궁 내)이라는 큰 전각으로 옮기게 하셨다.   

 

 

 

 

 

                                                                        

 

 

                       

 

                                                사도세자, 싸이코패스 ?

 

 

  

보통 사도세자는 당쟁(黨爭)의 희생양으로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고 평가받고, 그에 대한 기록의 상당수는 후에 아들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수정되고 덧칠되고 모호해졌다. 그렇지만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이런 저런 심리적 이유로 주변 사람들을 수(數)도 없이 연쇄적으로 죽였다는 사실 자체만은 변하지 않는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 ' 혜경궁 홍씨 '가 쓴 한중록(恨中錄)에는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홍씨'가 '한중록 (恨中錄)'에서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 바로 그 날의 기록에는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언급이 없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사도세자가 살인(殺人)을 저질렀음을 전하는 기록이 훗날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명확하게 사도세자의 살인(殺人)을 전하는 실록(實錄)의 기록은 뒷날 세자를 폐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할 때가 되어서야 등장한다. 기록을 보면 "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다 "라고 짧지만 명확하게 세자(世子)의 살인(殺人)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한중록'에 묘사되고 있는 사도세자의 살인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해 (1757년) 6월부터 경모궁(景慕宮 ..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 여기서 사도세자를 지칭함)의 화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당번 내관 '김한채 (金漢采)'라는 사람을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內人)들에게 효시(梟始)하였다. 내가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내인을 여럿 죽였다.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사람을 죽이고도 별다른 죄책감으로 보이지 않는 남편 '사도세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제 마음 속에 울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을 죽여야 마음이 낫습니다 (사도세자), 어찌하여 그러느냐? (영조), 마음이 상해 그렇습니다 (사도세자) .. 혜경궁 홍씨의 말은 이어진다...... 경진년(1760년) 이후에는 內官과 內人이 상한 일이 많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두드러진 예는 내수사 차지 서경달이다. 소조(사도세자)께서는 내사의 일을 느리게 한 일로 서경달을 죽이고 출입 내관도 여럿 상하게 하고, 선희궁에 있는 내인 하나도 죽이셨다. 점점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이처럼 사도세자가 내관(內官)과 내인(內人)들을 도륙할 때,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모호한 표현으로 사도세자의 칼질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후일의 기록에서 유추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영조 34년 3월6일, 임진일조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실록의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근래에 기(氣)가 올라가는 증세가 때로 더 심함이 있어, 작년 가을의 사건 (내인을 죽인 일)까지 있었는데, 이제 성상(聖上)께서 하교(下敎)하신 처지에 삼가 감읍(感泣)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나간 일을 뒤따라 생각하니 지나친 허물임을 깊이 알고 스스로 통렬히 뉘우치며, 또한 간절히 슬퍼한다. 내관(內官) 김한채(金漢采) 등에게 해조(該曺)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후하게 거행하여 나의 뉘우쳐 깨달은 뜻을 보이라...

 

 

이렇게 막상 내관 '김한채 (金漢采)'를 죽인 날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가, 다음 해에 이르러서야 '김한채'를 죽인 일을 후회하여 보상금을 후하게 주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도세자의 연쇄살인(連鎖殺人)이 실록에 명확하게 적시되는 시기는 결국 영조(英祖)에 의해 세자가 자리를 잃고 서인(庶人)이 되었을 때이다. 영조 38년 (1762) 윤5월 13일의 실록(實錄)이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 .. 죽을 훙)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里)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들을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실록(實錄)에서 정치적 패자(敗者)이자 목숨까지 잃은 희생양인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평이 좋을 까닭은 없겠지만, 사도세자가 사람을 잇따라 죽인 사실만은 그에 대한 평가를 떠나 부인할 수는 없다. 이들 기록들이 그가 '싸이코패스'이었다고 확증하기에는 부족함이 있고, 자료의 편향성과 모호성 때문에 앞으로도 사도세자가 과연 '싸이코패스'이었는지 여부가 밝혀지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록처럼 사도세자가 양심의 가책없이, 단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습관적(習慣的)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싸이코패스'가 아니었다고 단언하기도 힘들 것이다.   

 

 

 

 

 

 

 

 

 

 

 

 

 

                            

                                       영조실록  .... 영조38년 윤5월13일  1.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세자(孝章世子 .. 英祖의 長子. 세자 책봉되었으나 일찍 죽음)가 이미 몽(夢 ..죽음)하였는데,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낳기를 바랐었다.

 

 

정축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 ..사도세자의 아이를 낳은 첩..세자의 칼에 죽음)와 환시(宦侍 ..내시)를 죽이고,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었고, 또 환관(宦官), 기녀(妓女)와 함께 절도없이 유희하면서(평안도 여행을 말함) 하루 세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나라를 위해 근심하였다.한번 나경언(羅景彦)이 고변(告變)한 후부터 임금이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 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즉 '뒤주'에 가두었다는 얘기이다. 영조(英祖)는 처음에 사도세자에게 칼을 주며 스스로 자결(自決)할 것을 명하지만, 세자(世子)는 거절한다. 그 후 왜  " 뒤주 "이었는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너무 분분하여 그저 추정할 뿐이다. 

 

 

우선 사도세자가 자결(自決)을 거부하자 세자의 장인(丈人) 홍봉한(洪鳳漢)이 뒤주.. 아이디어를 영조(英祖)에게 건의(建議)하였다는 설이다. 이 건의도 홍봉한이 적극적으로 사위인 세자를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설과 또는 아무리 사위가 정적(政敵)이라도, 일단 뒤주에 가두게 하여 시간을 벌어놓고, 차차 영조(英祖)의 눈치를 보아 살려 줄 것을 건의할 생각이었다는 설...등이 있다.반대로 영조가 일단 뒤주에 가두어 놓았다가 , 후일 신하들의 건의가 있으면 마지 못하는척 살려 주려 하였는데, 가두어놓고 보니 그 누구도 살려주라는 상소가 없었다..는 說이다. 

 

 

그러나 여러 상황를 고려할 때 영조(英祖)는 실제로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 누구도 세자의 편은 없었고, 더욱이 영조(英祖)는 사도세자가 자신을 ?아내고 왕위에 오르려는 모반(謀叛)을 꾀하고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생모(生母)조차 그렇게 밀고(密告)하였으니...실록(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는 자리에 영조(英祖)는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네 겹,다섯 겹으로 에워쌌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있던 8일동안 영조(英祖)가 한 일은 세자와 관련된 인물을 죽이거나, 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인물들을 귀양보내는 일 등에 할애하였던  것이다. 영조(英祖)가 후일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하나, 관련 기록이나 정황은 이러한 행위가 그저 의례적(儀禮的)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혐의가 짙다.

 

 

 

 

                                          대리청정                  代理聽政

 

 

 

 

영조 25년, 사도세자는 15살의 나이로 병(病)을 앓는 영조(英祖)를 대신하여 정치를 주관한다. 물론 중요한 사안은 모두 영조가 처리하였지만, 이 때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영조는 사소한 작은 실수에도 세자를 꾸짖기 일쑤이었고 그럴수록 세자는 더욱 실수를 한다.  

 

 

한편 세자는 소론, 남인세력과 가까이 지내면서, 영조(英祖)의 추대세력인 노론(老論)을 비판, 견제한다. 그러면서 영조의 집권과정에서 아버지 영조(英祖)가 노론과 힘을 합쳐 兄인 경종(景宗)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 (경종에게 게장을 멱여 죽게 하였다고 함).  세자 시절의 스승이 소론 출신의 영의정 또는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이었으므로 아마 소론쪽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게 되었던 듯하다. 위기감을 느낀 노론은 집중적으로 영조(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모함, 음해(陰害)한다.  

                                                  

사도세자의 주위사람은 모두 가족까지.. 부인(혜경궁홍씨), 생모(生母)인 영빈 이씨 (暎嬪李氏), 여동생 화완옹주, 영조(英祖)의 계비(계妃) 정순왕후 및 후궁인 숙의문씨(淑儀文氏)..들은 한결같이 노론(老論) 집안이거나 그리로 출가(出嫁)하였으므로 사도세자는 실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영조는 이렇게 사도세자의 몰락을 염원하는 세력들에게 둘러 쌓여있어 냉점함을 잃었고, 그 것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의 정(情)을 넘어섰다. 

 

 

 

 

 

 

 

 

 

 

                                                     나경언의 고변                羅景彦의 告變 

 

 

 

 

 

 

드디어 일이 터졌다.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고변(告變)한 것이다. " 영조실록 "에도 이 사건을 " 경언고변(景彦告變) "이라고 적었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한 달 전, 1762년 5월22일의 일이다. 고변이란 무엇인가 ? 역변(逆變) 곧 반역을 일러바친다는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대권(大權)을 이어받을 세자가 반역을 하다니 이 무슨 말인가 ? 또 누가 감히 임금의 반역을 일러바친다는 말인가 ? 

 

 

 

 

                                             나경언                  羅景彦

 

 

 

 

나경언(羅景彦)은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겸종(慊從 .. 청지기)이라고 한다. 겸종 또는 겸인(慊人)은 노비(奴婢)가 아니면서 대갓집의 일을 돌봐주는 집사 같은 사람이다. 노비처럼 천민(賤民)은 아니지만 양반도 아니며 대개 평민이 맡아보았다. 나경언은 그런 낮은 지체에서 감히 양반도 못 할 일을 했다.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거나, 유력자의 조력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경언은 대궐의 별감(別監)인 나성언(羅尙彦)의 형이다. 그 역시 한때 별감 일을 보았다고 한다. 별감은 궁궐에서 호위, 수송 등 각종 심부름을 맡아보는 직이다. 나경언은 동생이나 예전의 동료들을 통해 대궐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시콜콜 전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다고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말할 수 있다고 모두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자는 나경언 같은 낮은 지위의 사람이 입에 올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고변               告變

 

 

 

 

나경언(나경언)은 사도세자의 반역(반역)을 일러바치기 위해 머리를 썼다. 먼저 궁궐의 내관들이 역모(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의 고변서(고변서)를 형조(형조)에 갖다 바쳤다.  고변서를 본 형조 참의 이해중(李海中)이 놀라서 얼른 영의정 홍봉한(홍봉한)에게 알렸다. 이해중(李海中)은 ' 홍봉한'의 처남(처남)이다. '홍봉한'은 이 사실을 곧장 영조(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영조)는 나경언(나경언)을 직접 심문하겠다고 나섰다. 나경언 같은 지체 낮은 사람의 고변(고변)을 임금이 바로 친국(친국)까지 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안이 워낙 엄중하니 그렇게 했다. 

 

 

그런데 '나경언'은 영조(영조)를 대면하자 그 자리에서 자기 옷 안에 숨겨둔 다른 고변서(고변서)를 꺼내놓았다. 10여 조항에 이르는 사도세자의 죄상을 고발한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이것을 올릴 길이 없어서 형조(형조)에 먼저 가짜 고변서를 바쳤음을 아뢰었다. 처음부터 세자의 죄상을 담은 고변서를 올렸다가는 그것이 임금에게 닿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죽을 것 같으니, 먼저 미끼를 던져 임금을 만난 다음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진짜 바치고자 한 고변서(고변서)를 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치밀함과 교활(狡猾)함이 느껴지는 수법이다.

 

 

나경언의 고변은 그 절차(절차)와 과정(과정)부터 의혹이 적지 않다. 이해중(李海中)은 나경언의 고변을 알릴 때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의혹을 받았다. 앞뒤 사정을 살피고 나경언을 한 차례라도 심문한 다음 위에 알리지 않고 바로 고변을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국 세자가 화를 입었다는 것이다. 또 임금이 친국(친국)을 하기 전에 피의자의 몸수색을 소홀히 한 것도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의혹 모두 나경언의 배후(배후)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영조(영조)는 고변서를 읽고는 무엄하고 망측하다 하여 당일 그 글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나경언을 죽였다. 하지만 영조(영조)는 물론 여러 신하들이 돌려 읽었기에 그 내용은 두루 알려질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비행(비행)을 영조(영조)는 물론 온 조정에서 알게 된 것이다. " 영조실록 "에서는 영조가 이 고변서(고변서)를 보고는 세자를 폐위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과연  고변서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고변의 내용 .... 사도세자의 허물

 

 

  

 

나경언이 올렸다는 고변서(고변서)는 현재 볼 수 없다. 그 대체적인 내용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영조실록(영조실록)에 이 일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꾸짖으면서 한 말 등이 남아 있어서 몇몇 조항을 유추(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음은 5월22일 실록의 기록이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겠는가 ?

 

왕손의 어미를 네거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면질)하기를 청하였다. (영조실록 5월22일) 

 

 

 

영조(영조)는 네 가지를 들었다. 실제로는 다른 일도 더 말했겠지만, " 영조실록 "에 적혀 있는 것은 이 네 가지이다. 여기서 왕손의 어미란, 후궁 '빙애'를 가리킨다. 사도세자는 1년 전인 1761년 1월 옷시중을 잘 들지 못한다고 '빙애'를 죽였다. 또 여승(여승)은 안암동의 비구니 '가선'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고변(고변)이 있고 한 달 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세자와 함께 내관, 비구니, 기생등이 처벌을 받아 사형 당했는데, 여기에 내관 박필수와 안암동 비구니 가선, 그리고 다섯 명의 평양 기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밖에 영조(영조)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도세자의 평양행(평양행)과 사도세자가 인근 북한산성(북한산성)으로 가서 논 일을 거론하였다. " 영조실록 "에는 이 네 조항 외에도 한 가지를 더 볼 수 있는데, 고변 이틀 후 영조가 내린 명령을 통해서이다. 영조는 고변서에서 세자가 서울 시정인(시정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많은 빚을 졌다는 것을 보았다면서, 호조(호조) 등에 이를 갚아 주라고 명령했다. " 영조실록 "에서 밝힌 세자의 허물은 이상의 다섯 가지이다.

 

 

그렇다면 고변서의 나머지 조항은 무엇일까 ? 왜 절반이 넘는 나머지 조항은 전해지지 않을까? 여영조(영조)가 폐세자(폐세자)를 결심한 단서가 그 속에 있을 것인데, 그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단서 또한 " 영조실록 "에 있다. 먼저 " 영조실록 "은 나경언 사건을 고변(告變)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경언이 처음 형조(형조)에 바친 고변서(고변서에는 "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 "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나중에 영조(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때 했던 말이기도 하다. 사도세자의 혐의 가운데 반역죄(반역죄)가 있음을 시사(示唆)하는 대목이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나경언(나경언)이 영조 면전에서 바친 고변서에는 사도세자의 반역(반역) 혐의가 일부 언급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 영조실록 "에서는 감히 그것을 거론하지 못해 기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경언의 고변서에 적힌 사도세자의 반역 혐의는 구체적인 근거가 약하거나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정말 변란(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었다면 영조(영조)가 사도세자를 당장 처분하지 않고 처소로 돌려보내 반성하게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경언이 거론한 세자의 반역 혐의는 영조(영조)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영조가 나경언의 고변(고변)을 들어 세자를 꾸짖자, 세자는 " 이는 제 화증 때문입니다 "라고 변명하였고, 이에 영조(영조)는 " 차라리 발광을 하라 "고 호통을 쳤다. (영조실록 1762년 5월22일. 영조는 세자를 얕보아서 무엇을 결행할 수 있는 인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자를 창경궁으로 돌려보내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그런데 이로부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더 큰 일이 터졌다.  

 

 

 

                                                     나경언의 배후

 

 

 

 

나경언(나경언)은 남의 집 하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겸종'이다. 그런 사람이 괜히 세자(세자)를 모해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자기 친지가 사도세자의 칼에 맞아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보복을 결심하기에 세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다. 더욱이 설령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유력자의 도움을 생각하지 않고는 결코 실행을 꿈꿀 수 없다. 누구든 나경언의 배후(배후)를 의심하였다.

 

 

그런데 나경언(나경언)의 고변(고변)을 당하고 그 누구도 배후(배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의금부 판사 '한익모'가 나서서 나경언의 배후를 캐라고 청했지만, 영조(영조)는 화를 내며 그를 바로 파직시켜 버렸다. 사도세자만이 적극적으로 배후를 캤다.

 

 

포도청에서 나경언의 처자(妻子)를 심문하여 배후를 알아보도록 했다. 나경언의 처자는 배후가 안성의 경주인(京主人)이라고 했다. 경주인은 지방 관아의 서울 출장소 격이다. 그래서 안성의 경주인을 잡아다 심문하니, "친지 윤광유"가 배후라고 했다. 윤광유(尹光裕)는 우의정 윤동도(尹東道)의 아들이다. 견디다 못해 배후를 대긴 했지만 마땅히 둘러댈 곳이 없어서 정승 아들을 댄 것이다. 다른 곳을 댔다면 바로 그 사람이 죽을 일이었다. 세자는 이를 거짓 증언으로 보았다. 그래서 심문 내용을 듣고 걱정할 '윤동도'를 오히려 위로하였다. 여기까지가 "영조실록"에 보이는 고변 배후에 대한 내용이다. 

 

 

한편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혜경궁 홍씨)'는 나경언이 윤급의 겸종이고, 윤급은 영조(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한편이라는 이유를 들어 정순왕후 친정에서 사주한 것으로 보았다. 정순왕후 측은 사도세자가 폐위되면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쪽이었다. 자신들이 실권을 잡지는 못해도 적어도 왕실의 인척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적(정적) 혜경궁 홍씨 친정의 힘을 약화시킬 수는 있다. 배후로 지목될 까닭이 있었다.

 

 

" 현고기 (玄皐記) .. 사도세자의 죽음 전말을 기록한 책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도세자가 영조(영조)에게 불려가서 질책을 받았는데 아무도 나경언의 배후(배후)를 찾으라고 청하지 않았다. 영조가 질책을 끝내고 세자에게 돌아가라 하자, 세자는 나오며 들에 서 있는 신하들을 향해 ' 옛말에도 대신을 공경하라 했으니 대신이야 내 말하지 않으려니와, 여러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배후를 캐소서" 청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역적이라 "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배후를 캐지 않았다 !

 

 

  

당시에도 못찾은, 아니 제대로 찾으려 하지 않았던 배후를 지금에 밝힐 수는 없다. 사리를 보면 가장 의심을 받을 만한 쪽은 '정순왕후' 친정이지만, 역으로 보면 맨 먼저 의심을 받을 수 있기에 가장 행동이 조심스럽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누가 배후냐 하는 것보다, 그 누구도 그 배후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 영조실록 ' 등의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배후(배후)를 밝히고자 한 사람은 유일하게 사도세자뿐 이었다. 나경언의 입에서 언급된 사람들을 불러서 심문하는 과정에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고, 다시 그 사람들을 불러 심문하는 과정에서 또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필시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니, 일단 조사가 시작되면 권력 중심부가 피로 물들 것이다. 

 

 

이 때문에 영조(영조)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이를 두려워 하거나 꺼렸던 듯하다. 그런데 어찌보면 조정에 사도세자의 편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도 세자가 처한 위험을 그것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이제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조정의 ' 뜨거운 감자 "가 되었다.  

 

 

 

                                                         안에서

 

 

 

 

영조가 폐세자할 것을 결심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실록의 표현대로 "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이 매우 놀랐다...."    여기의  " 안에서 "는 사도세자의 생모(生母)인 영빈 이씨 (暎嬪李氏)를 지칭한다. 어떤 내용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중요한 것은 세자의 어머니가 남편 영조(英祖)에게  아들 사도세자의 일을 밀고(密告)하였다는 사실이다.  

 

 

실록에는 그 내용을 짐작케 하는 또 다른 기록이 있는데, 하여튼 아들의 일에 대하여 무언가를 밀고하고, 세자(世子)를 버리고 세손(世孫)을 보호하라는 말을 영조(英祖)에게 한 것은 확실하다. 그럴만큼 중대한 일...결국 모반(謨叛)을 꾀하고 있다고 밀고, 모함한 것 아닐까 ??

 

 

 

 

 

 

 

 

 

 

 

 

 

 

 

                                 

                                       영조실록 ... 영조38년 윤5월13일

 

 

 

 

이에 영조는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고, 이어서 동궁의 대명 (待命 ..사도세자는 며칠전부터 영조의 명에 의하여 대명하고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후 처분을 기다리는 것을 대명이라고 함)을 풀어주고, 휘령전(徽寧殿 ..영조의 첫부인 정성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에 禮를 행하도록 지시하였으나, 世子가 병을 일컬으면서 가지 않으니,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趙榮進)를 특별히 보내어 세자에게 행례(行禮)하기를 재촉하였다.

 

 

 

 

 

                                            英祖 .. 사도세자의 아버지

 

 

 

 

 

 

임금이 이어서 휘령전으로 향하여 세자궁을 지나면서 차비관(差備官)을 시켜 자세히 살폈으나 보이는 바가 없었다. 세자가 집영문(集英門)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御駕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에서 사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황후(貞聖王后..첫 부인으로 이미 죽었는데, 그 혼령이 나타나 英祖에게 무엇을 말했다는 내용)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있다 "라고 하였다.

 

 

 

                        이 변란(變亂)이 바로 사도세자의 모반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이어서 영조는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군사를 동원, 전문(殿門)을 4,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官)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宮의 담장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의 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 ..三 政丞)라도 한 사람도 들어 온 者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사도세자 8살 때의 글씨 

 

 

 

 

 

 

 

 

 

 

 

 

 

 

 

 

 

 

                                                       영조실록 .... 영조 38년 윤5월13일

 

 

 

 

 

임금이 세자에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고두.叩頭)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영의정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藻) 등이 들어 왔으나 미처 진언(眞言)을 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광조 등 네 사람의 파직(罷職)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이 때 세손(世孫 ..후일 정조)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 ..세자를 보필하는곳, 즉 시강원)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 때 신만,홍봉한,정휘량이 다시 들어 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사를 시켜 여러 신하들을 내?게 하였는데,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蹄)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 ? " 하고 사람들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 너 역시 나가 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라는 말이냐 ?" 하고, 이어 전문(殿門)에 나와 춘방(春坊)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사서(司書) 임성(任珹)이 말하기를 " 일이 마땅히 다시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 하니,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영조실록 ... 영조 38년 윤5월 13일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暎嬪 ..사도세자의 생모)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는데, 영빈(暎嬪)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한 자이었다. (※ 실록 첫머리에 유언비어가 안에서 일어나서...이 부분이다. 밀고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世子를 버리고,世孫을 보호하라고 영조에게 말한다)

 

 

이에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 "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 후일 正祖)이 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 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들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 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차마 꺼려하며 감히 쓰지 못하였다.

 

 

이상이 사도세자가 갇힌 날, 실록의 기록이다. 英祖는 다음 날 世子의 문란한 행위에 동참한 환관 박필주와 여승 가선을 참수하고, 또 끝까지 세자를 지키려 한 윤숙과 임덕제를 귀양보내었다. 이러한 일로 세자가 뒤주에 갇힌 8일동안 英祖는 뒷처리를 마무리하였다.

 

 

 

 

 

 

 

 

 

 

 

                                             사도세자, 과연 미쳤나?

 

 

 

 

 

 

 

 

 

 

 

                           

 

                 

 

 

 

                                                        이광현 일기                  李光鉉 日記

 

 

 

 

 

2000년 古文書가 발견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5월 13일 진시(辰時. 오전 7~9시)부터 초경(初更. 오후 7~9시)까지 사도세자가 죽는 과정을 자세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당시 승정원의 주서(註書. 종7품)으로 일하던 이광현(李光鉉)의 일기이다. 

 

 

이 날 英祖는 창덕궁 휘령전 뜰에 널판지를 펴게 한 후, 사도세자를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영조는 칼까지 빼어들고  " 네가 자결하면 조선 世子의 이름을 잃지 않을 것이니 속히 자결하라 "고 외친다.

이에 사도세자는 " 父子關係는 하늘이 정해준 관계인데 어찌 아버지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겠습니까 "하며 궁궐 밖에서 자결하겠다고 맞선다. 이 같은 대립과정에서 사도세자는 허리띠를 풀어 한 차례 자결을 시도하지만 세자궁의 신하들 만류로 실패한다.

 

 

 

 

 

 

 

 

 

英祖는 결국 초경(初更. 저녁 7시경)에 이르러 " 아버지 임금님 저를 살려주소서 "라며 혈육의 정에 호소하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고, 직접 널판지를 대고 대못을 박은 뒤 새끼줄로 다시 묶어 뒤주를 봉한다.

 

 

 

 

 

 

 

 

 

 

 

사도세자(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혜경궁 홍씨)'은 한중록(한중록)이라는자전적 회고록에서 사도세자(사도세자)가 받은 조기교육(조기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두 살 때 글자를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쓰셨고, 세 살 때는 다과(다과)를 받으시자 목숨 "수(수)'나 복 '복(복)'자 찍은 것만 잡수시고 또 천자문(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치)'자와 넉넉할 '부(부)'자가 나오자, 치(侈)자를 손으로 집고 당신이 입으신 옷을 가리키시며 ' 이것이 사치다 '라고 하셨다.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가 결혼하고 10살 때, 장인에게 보낸 안부 편지.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증세가 있는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되어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러한 증세는 의관(醫官)과 함께 말 할 수 없으니, 경은 약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주시면 어떻겠씁니까?

 

 

 

보내주신 지도를 살펴보니 팔도의 山河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바 "서너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입니다.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표피 1영을 보내오니 웃으며 거두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나이 이미 15세의 봄을 지낸지 오래인데,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버림을 받았다는 하소연..英祖는 세자의 수행을 거부하였다.

 

 

 

 

 

 

 

 

 

 

 

 

 

 

 

 

 

 

 

 

 

 

 

 

 

 

                                                         뒤주 갇히기 나흘 전 쓴 최후의 친필

 

 

 

 

사도세자 최후(최후)의 친필(친필)로 확인된 화첩(화첩) '중국역사회모본(中國歷使繪模本)'의 서문(서문)에는 금병매(금병매), 육포단(육포단) 같은 연정소설(연정소설) 글고 천주교(천주교) 서적 등 당시 대리청정(대리청정  ... 왕 대신 세자가 정사를 보는 것) 중이었던 왕세자가 드러내 놓고 읽을 수 없었던 책들이 적혀 있다.

 

 

사도세자(사도세자)가 서유기(서유기) 같은 소설을 그림으로 그린 화첩(화첩)을 보면서 서문(서문)으 쓴 시기는 영조(영조)의 어명으로 뒤주에 갇히기 나흘 전인 1762년 윤5월 9일로, 사도세자의 불안(불안)이 극(극)에 달했을 때이다. 당시 영조(영조)는 형조판서 윤급(윤급)'의 청지기 나경언(나경언)에게서 '사도세자'의 비행(비행)을 듣고 크게 분노했으며, 사도세자는 매일 새벽 창경궁 시민당 뜰에 나가 죄를 빌어야 했던 시기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 화첩 " 중국역사 회모본 (中國歷史 繪模本) "의 서문 (위 사진)이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1762년)에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나흘 전인 윤 5월9일에 쓴 최후(최후)의 친필이라고 확인되었다. 이 서문에는 사도세자가 서유기, 금병매 등 여러 소설을 섭렵하였으며, 조선왕조의 박해를 받은 천주교 서적을 읽었던 사실이 담겨져 있다. 지금까지는 이 서문의 저자가 완산(전주) 이씨로 기록되어 있어, 영조(영조)의 딸인 화완옹주(화완옹주) 등이 쓴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이 서문(서문)에서 사도세자는 ' 세상에 책이 많아 그 중 귀감이 되고 경계가 될 만한 것과 웃음을 줄 수 있고 사랑스러운 것을 뽑아 화첩(화첩)을 만들고 서문과 발문을 써서 후손에 전하니 아무렇게나 보지말라 '며 성경직해(聖經直解), 칠극(七克) 같은 천주교 서적, 금병매(금병매) 등 연정소설, 장,단편 및 연작소설 등 83종의 책 제목을 일일이 썼다. 

 

 

 

 

 

 

 

사도세자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여성이 이름을 밝힐 때 쓰는 방식으로 '완산 이씨'라고 서명하였다. 화첩에는 사도세자가 그림마다 직접 단 한자 제목(제목)이 달려 있다. 어린 시절부터 칼고 ㅏ무기를 좋아한 사도세자가 여러 무기(무기)가 등장하는 서유기(서유기) 같은 소설의 환성 세계가 담긴 화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죽음이 턱밑까지 닥친 현실의 공포(공포)를 잊으려 한 것이다.   

 

 

 

 

                                       능허관만고                 凌虛關漫稿

 

 

 

 

 

 

 

 

 

 

 

 

 

 

 

 

 

 

 

 

 

 

 

조선의 성군(성군)으로 꼽히는 영조(영조)와 정조(정조). 세종(세종)과 더불어 후세 사람들로부터 ' 대왕 (대왕) '으로 불린 조선의 왕들이다. 노론, 소론을 가리지 말고 인재를 등용(등용)하자는 탕평책(탕평책)을 내세운 영조(영조)나 조선시대 과학기술을 꽃피웠던 정조(정조)잉기는21세기 대한민국의 발전을 논할 때면 단골 화두로 등장한다. 

 

 

 

                                                       권력과 인간 

 

 

 

하지만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에도 그림자는 존재하였다.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이었던 영조(영조)와 정조(정조) 사이에는 ' 사도세자 (사도세자) '가 있었다. 조선 최고(최고)의 비극(비극)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권력(권력)과 인간(인간)애 대한 매우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궁궐의 여종(여종)에게서 태어난 영조(영조)의 신분(신분) 콤플렉스,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그림 그리기와 음식(음식)에 골몰하였던 비만(비만) 사도세자,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 속에 눈치 백단으로 자라난 정조(정조) ... 이들에 얽힌 여러 사연들 속에는 권력(권력)과 인간(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는 그동안 사도세자(사도세자)가 미쳐서 영조(영조)가 그를 죽였다는 ' 증설 (광증설) '과 사도세자가 우수(우수)한 자질(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나 집권세력인 노론(노론)에 맞서다 죽게 되었다는 ' 당쟁희생설 (당쟁희생설) '이 유력했다. 그러나 최근에 사도세자의 ' 반역설 (반역설) '이 대두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한중록(한중록)'의 내용과 '권력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고찰이 그 배경이 되었다. 즉 영조(영조)의 권력에 대한 사도세자(사도세자)의 도전(도전)을 발견한 것이다.

 

 

한중록(한중록)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직전, 영조(영조)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궁궐로 향했다. 학문에 대한 태도와 성격, 외모도 정반대이었던 부자(부자)는 거의 평생동안 반목(반목)하였는데, 사도세자는 아버지로 인해 우울증(우울증)과 '화병'을 앓았다. 사도세자가 장인(장인) 홍봉한(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겪었던 고통(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가 본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울화증이 있는데 지금 더위까지 먹어 임금을 뵙고 나오니 울화가 더욱 극(극)하여 미친듯이 괴롭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세 번이나 자살(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힘들어 했던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  아내 '혜경궁 홍씨(혜경궁 홍씨)'에게 ' 칼을 차고 경희궁(경희궁)에 가서 마무리 하려노라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소문이 영조(영조)의 귀에 들어가자마자 '역모죄 (역모죄)'로 아버지로 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절대 권력자는 자기 것을 빼앗으려드는 자도 공격하지만, 권력을 뺏을 힘을 가진 자도 미리 싹을 자른다. 권력(권력)의 존립과 유지를 위해서는 한 치 양보도 없다. 권력의 비정(비정)함은 여기서 나온다. 영조(영조)는 종묘(종묘)와 사직(사직)을 위한다면서 자신의 자식에게 죽음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영조(영조)가 말한 400년 종사(종사)는 영조(영조) 자신의 권력이었다. 권력의 핵심인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도전)은 털끝만 한 것이라도 용서하지 않았고 자식이라도 봐줄 수 없었던 것이다. 

 

 

11살 때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버지사도세자(사도세자)를 목격하고 자란 정조(정조) 역시 할아버지 영조(영조)의 비정(비정)함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권력을 위태롭게 하는 외가(외가)를 박살내었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까지 속였다. 권력자에게는 친구도, 집안도 없는 것은 물론 부모자식도 없었던 셈이다. 

 

 

권력(권력)이 내가 되고 내가 권력이 되는 상황, 잠시 주어진 권력을 영원(영원)한것으로 착각하는 상황, 떠날 때 권력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모순된 상황 속에서 성군(성군)이라 불리는 오아(왕)들의 인간성(인간성)은 더욱 피폐해졌다.                         

 

 

 

 

 

 

 

 

 

 

 

 

 

 

 

                                사도세자 묘지문               思悼世子 墓誌文

  

 

 

 

 

 

 

 

 

묘지석(墓誌石)은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과 묘소의 위치를 기록하여 돌 상자에 넣어 상석(床石) 아래에 부장하였다. 이 묘지문은 영조(英祖)가 뒤주 속에서 죽은 아들 사도세자를 추도하고 느낀 소회를 쓴 영조의 " 어제사도세자묘지문 (御製思悼世子墓誌文) "으로 재질은 사각형 청화백자이며, 총 5장으로 가로 16.7cm, 세로 21.8cm, 두께 2.0cm이며, 行마다 15字씩 지문(誌文)이 씌여 있다.

 

 

 

 

 

 

 

 

 

이 묘지석은 사도세자의 묘가 양주(楊州)의 남쪽 배봉산(拜峯山)에서 수원의 화산(花山) 현륭원(顯隆園)으로 천봉(遷封)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왔다가 유전(流轉)되었던 것이다. 묘지석의 끝부분에 " 崇禎 紀元 後 133년 壬午 7월 " 즉, 1762년 (영조 38) 7월이라고만 쓰여 있고 구체적인 날짜가 없는데, 정황상 同年 7월23일 경으로 추정된다. 사도세자는 1762년 윤 5월 21일 훙서(薨逝)하였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후 동년 7월23일에 사도세자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날 영조는 사도세자의 묘에 거동하고서 친히 광(壙)에 임하여 어필로 제주(題主)하고, 백관(百官)과 함께 곡림(哭臨)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구술(口述)로 제문(祭文)을 지어서 신하들에게 받아 적게 하였다. 이 묘지석 역시 영조(영조)가 구술(구술)하여 신하에게 이를 적게 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가 추모하고 명복을 비는 글 등이 전해오고 있으나, 영조가 사도세자의 장례식을 전후로 하여 쓰여진 묘지석은 당시 부왕(父王)인 영조(英祖)의 심적 갈등과 소회를 잘 드러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전문             全文

 

 

 

 

사도세자는 이름이 훤이고, 자는 윤관으로, 영조 즉위 을묘년(1735) 1월 21일 영빈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오호라 ! 聖人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太甲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오호라 ! 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

 

 

아 !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 둘이오만, 세자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바는 태갑이 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병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 오하라 !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개탄하는 바를 말하리라. 

 

 

오호라 ! 이는 누구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데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 오호라 !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시직을 위한 일이었겠는가 ? 백성을 속이는 것일지니라. 생각이 이에 미쳐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 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 5월하고도 21일이라.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思悼라 하겠노라. 오호라 ! 30년 가까운 아비의 의리가 예까지 이어질 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겠는가 ? 오호라 ! 신축일의 혈통을 계승할데 대한 교시로 지금은 세손이 있을 뿐이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뜻이니라. 

 

 

7월23일 양중 중랑포 서쪽 벌판에 매장하노라. 오호라 ! 다른 시혜 말고 빈에게는 호를 하사하여 사빈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그치노라.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이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오호라!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세자는 임술년(1742년)에 학문에 들어가고 계해년(1743년)에 관례를 올리고 갑자년(1744년)에 가례를 올려 영의정 홍봉한의 여식이자 영안위 주원의 오대손인 풍산홍씨를 맞아 들였다. 빈은 2남2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의소세손이며, 둘째가 곧 세손으로 참판 김시묵의 여식이자 부원군의 5대손인 청풍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장녀 청연군주, 차녀 청선군주가 있으며 측실로 또한 3남1녀의 자제를 두었다. 

 

 

 

 

 

 

 

 

 

                                                     묘지석의 내용

 

 

 

 

이 묘지석은 서두(서두) 부분에 사도세자의 휘(諱 .. 이름)와 자(字), 생모(生母), 생년월일을 밝히고, 어린 시절의 영특하였던 추억을 언급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태어나 영특했고 장성해서는 문리(文理)가 통달하여 거의 조선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점차 잘못 되어가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토로하였다. 성인(聖人)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방종을 자행했다가 이윤(伊尹)에게 축출되었던 태갑(太甲)을 배우며 욕심과 방종을 일삼으니, 계도(啓導)하려고 하였지만 마침내 제멋대로 소인배들과 어울리니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하였다.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성탕(成湯) 손자 태갑(太甲)은 무도(無道)하여 신하인 이윤(伊尹)에게 동(棟)땅으로 추방을 당했다가 허물을 고친 후에 다시 복위되었다. 하지만 세자는 그렇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 하였다. 영조는 묘지석에서 예부터 무도한 인군(人君)은 많았지만, 세자 때에 이와 같이 무도한 경우는 듣지 못했다고 탄식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한 만고(萬古)에 없던 일을 나이 들어 흰 머리가 된 아비에게 행하게 하였다고 통곡하였다. 그리고 뒤주 속에 죽게 된 잘못은 교도(敎導)를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인 자신에게 있다고 하였다.

 

 

영조(영조)는 지문(誌文)을 작성한 이유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는데, 국가와 왕실을 위해 문장(文章)을 작성하는 사신(詞臣)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라, 입으로 불러 받아 적게 하여 30년 가까운 父子之間의 은의(恩義)를 밝힌 것이라고 하면서, 세자는 이 지문(誌文)으로 부왕인 자신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 " 강서원(講書院)에 여러 날 지키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종묘사직을 위함이고 백성을 위함이다 (講書院多日相守者何  爲宗社也  爲斯民也)라고 언급하였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순의 아비에게 이런 지경을 만나게 한단 말인가 ( 爾何心  使七十其父 遭此境乎 )라는 문구와 함께 이 묘지석에는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이한 아들에 대한 영조의 절절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묘지석의 끝부분에는 사도세자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사도세자는 2남2녀를 낳았는데, 일찍 죽은 첫 번째 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 두 번째 아들은 훗날 정조(正祖)가 되는 세손이다. 세손은 청풍김씨 참판 시묵(時默)의 딸과 가례를 올렸는데, 청풍부원군 김우영의 5대손이다. 장녀는 청연군주(淸衍郡主), 차녀는 청선군주(淸璿郡主)이다. 그리고 측실(側室)에게서  3남1녀를 두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              思悼世子 伸寃 萬人疏 

 

 

 

 

 

 

 

 

 

 

 

선비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기 위하여 집단 상소인 유소를 올렸고,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이 만인소(萬人疏)이었다. 만인소는 말 그대로 만 명의 선비가 서명하여 올린 상소를 말한다. 18세기 후반, 처음으로 등장한 만인소는 모두 7차례 씌여 졌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만인소는 "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와 "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 " 두 가지이다.  

 

 

정치에 참여하는 신료들은 왕에게 자신과 붕당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수 있지만,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유생과 유학들에게 상소는 유일한 정치참여의 통로이었다. 유생들은 스스로 국가의 흥망과 유학의 성쇠에 관련된 일에는 반드시 발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관료가 아니더라도 정치에 참여할 명분은 있었다. 

   

 

 

                                                  謹悉과 만인소

 

 

  

그러나 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빗발치는 상소를 어느 정도 제어할 목적으로 모든 상소는 성균관을 통하여 제출하도록 조치했다. 이때 제출된 상소는 반드시 성균관 유생의 우두머리격인 장의(掌議)의 확인을 받아야 했는데, 이를 근실(謹悉)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균관 역시 정적인 서인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영남 유림으로서는 근실을 받아 상소를 올리는 데에 여러가지 애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 만 사람의 뜻은 곧 천하 사람 모두의 뜻 "이라는 명분을 내건 " 만인소 "이었다. 다시 말해서 만인소는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줄곧 소수자의 처지에 놓여있던 영남유림이 자신들의 장치적 열세를 " 공론(公論) "이라는 형식으로 돌파해보고자 채택하였던 현실대응책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1792년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방 유생들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요구한 상소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난 후, 영남지방의 南人들 사이에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경북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는 길이 99.25m에 이르는 상소가 남아 있다. 1855년(철종 6년) 이휘병을 소수(疏首 .. 상소의 우두머리)로 해서 사도세자 추존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봉헌된 만인소(萬人疏)이다. 

 

 

만인소는 크게 상소문을 적은 부분과 이름과 서명을 적은부분으로 나뉘는데 서명자의 이름 중에는 같은성, 같은 항렬 등이 눈에 띈다. 교통과 통신도 발달되지 않았던 18세기 후번, 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연대서명한 만인소, 이 거대한 상소를 올린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 왜 일까 ? 

 

 

경북 안동의 젊은 선비 류이좌(류이좌)가 쓴 " 천휘록(闡揮錄) ", 그 중 "임자소청일록"에는 정조 16년 영남의 선비들이 첫 번째 만인소 작성에 가담하게 된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일과를 하루 단위로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첫 번째 만인소인 "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 "의 전말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792년 집권세력의 전횡에 맞서 만 명의 선비들이 연대 서명한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한 뒤 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리고 상경을 감행한다. 누구도 생각 못했던 형식의 파괴, 만 명이 넘는 이들의 서명으로 이루어진 만인소는 무엇보다 시대의 금기로 여겨졌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하였다. 만인소 내용의 민감성은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노론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특히 벼슬이 없는 선비는 양반이라는 특권층이기는 해도 국가의 대소사에 대한 발언권은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이 임금을 상소를 접하자 엄청난 인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는 영남 선비들의 목숨을 내건 승부수이었다. 

 

 

영남 선비들의 운명을 바꾼 1792년 윤 4월 27일, "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이틀거리를 하루에 다급하게 달려온 영남 선비들, 그러나 이들의 만인소 봉입 과정은 산 너머 산이었다. 만인소를 막아서고 있었던 거대한 벽은 바로 " 근실(謹悉) "이라는 제도이었다. 이는 무분별한 상소를 막기 위한 장치였지만, 이 시기에는 반대 정파의 의견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이미 노론이 장악하고 있던 성균관. 그들은 유독 영남 선비들의 상소에 회답을 회피하였다.     

 

 

 

 

 

                                     사도세자 신원 萬人疏의 배경과 경과

 

 

 

 

 

영남 선비들은 주로 南人세력들이었다. 당연히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분위기이었다. 그들은 정조가 즉위하자 즉시 유생 이도현(李道顯)이 아들 이응원(李應元)을 시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父子가 같이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1792년 (정조 16) 일어난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의 배경이 되었다. 

 

 

그 발단은 1792년 4월 류성한(류성한)의 상소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류성한은 정조가 경연을 폐기하고 여악을 지나치게 즐기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류성한의 상소를 접한 성균관 거접 영남ㅇ ㅠ생들은 윤 4월 봉화 상계서원(상계서원)에 통문을 보내  상소를 올릴 것을 촉구하였다. 통문을 접한 삼계서원에서는 안동, 봉화, 순흥 등지에 다시 통문을 돌려 4월10일 유소(유소 .. 유생들이 연명하여 올리는 상소)를 규합하였다. 

 

 

상계서원에서 개최된 유림대회에서  

 

 

 

 

 

 

 

 

 

 

 

 

 

 

                            正祖가 아버지 思悼世子를 참배하러 가는 모습.

                            백성들이 길 옆에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는 것.

 

 

 

 

 

 

 

 

 

 

                                                   사도세자의 후손들

 

 

  

정조(正祖) 이후의 조선 국왕들은 이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다. 철종(哲宗)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고종(高宗)의 할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양아버지가 사도세자의 아들 중 한 명인 은신군(恩信君)이다. 즉 영조(英祖) 이후의 국왕들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後孫)이다. 대한제국기에 추존(推尊)된 것도 당시 황실(皇室)의 직계 조상이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정식 명칭은 ,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莊憲世子이다.

사도세자는 영조(英祖)가 손자인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내린 시호이고, 정조는 후에 장헌(莊憲)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대한제국 수립 후 고종(高宗)은 사도세자를 장종(莊宗神文桓武莊憲廣孝大王), 그리고 이후에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증하여다.   

 

 

 

 

 

 

 

 

 

 

 

 

 

 

 

 

 

 

 

 

사도세자가 묻힌 이 곳 융릉(隆陵)은  그 슬픈 이야기와 함께 모든 석물(石物)들의 정교하고, 섬세한..아름답기 조차한 조각 솜씨가 유명하다. 아마도 정조(正祖)가 조선 최고의 석공(石工)을 동원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지극한 효심을 불어 넣은 것 같다. 당시는 아직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陵)이 아니라 원(院)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정조(正祖)는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아버지 무덤을 모신 것이다.   

 

 

문인석,무인석, 장명등 그리고 봉분을 에워싸고 있는 난간석(欄干石), 명풍석(屛風石), 망주석(望柱石)의 조각 그림들을 살펴보면 뛰어난 기능을 넘어선,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이웃에 있는 아들 정조(正祖)의 봉분에는 난간석도, 병풍석도 없이 매우 검소하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惠慶宮 洪氏)

 

 

 

 

혜경궁홍씨(1735~1815)는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9살 되던 1744년  사도세자와 혼인한다. 노론(老論)을 증오하였던 남편 사도세자와는 달리 그녀는 노론(老論)의 집안 출신이었으며, 그는 남편 대신 친정의 입장을 추종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간접적(間接的)으로 관여한다.

 

 

 

 

                                                    남편보다 친정

     

 

 

혜경궁홍씨의 가문을 살펴 보면... 세자빈으로 간택될 정도이면 풍산홍씨(豊山洪氏)는 명문이었다.

적어도 할아버지 대(代)까지는 그러하였다. 판서(判書)를 지냈으므로.. 그러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집안이 쇠락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세자빈을 배출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영조가 비록 탕평책(湯平策)을 추구하여 골고루 인재를 등용한다고 하였지만, 영조의 정치적 기반은 노론이었고, 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세자빈도 당연히 노론(老論) 집안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세력이 강한 집안은 소론(少論)의 경계를 야기시킬 우려가 있었다. 현재는 세력이 미약하면서도 뼈대가 있는 가문(家門)이어야 한다는 기준에  맞추다보니 '홍봉한'이 적격(適格)이었을 뿐이다.

 

 

그는 사도세자의 슬픈 사연과 함께, 그리고 그가 쓴 " 한중록(恨中錄)"에 의하여 비운의 불행한 여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인 것 같다. 노론(老論)의 거두(巨頭)가 된 아버지 홍봉한(洪鳳漢)과 시종일관 입장을 같이 하여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을 모른 척하거나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아들이 왕위에 올라(正祖),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천수(天壽)를 다하여 죽었는데, 그가 말년에 쓴 한중록(恨中錄)은 남편의 죽음을 슬퍼 하는 척하면서, 한편 남편의 죽음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남편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은 아버지 홍봉한과 홍익한의 처사를 합리화하여 당대의 왕인 순조(純祖)에게 그들의 신원(伸寃)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중록                恨中錄

 

 

 

 

한중록(恨中錄)은 '혜경궁홍씨'가 회갑을 맞던 해인 정조19년(1795)에 친정 조카인 홍수영(洪洙映)의 건의에 따라 시작된 자전적 회고록인데, 네 번에 걸쳐 71세 되던 해에 완성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簡擇)된 이후의 생활과 당쟁 등의 권력 투쟁을 그린 것으로, 특히 남편 사도세자가 시아버지 영조(英祖)에 의하여 뒤주에 갇혀 죽은 참변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모든 기록은 영조(英祖)의 지시로 소각(소각)되었으므로, 그 진위(眞僞) 여부를 떠나 ' 한중록(恨中錄) '은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순수한 한글로 집필되어 문학사적(文學史的)인 의의가 크지만, 역사학적으로는 거의 위서(僞書)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요즈음의 정설이다.   

 

 

 

 

                          땅이 맞붙고 일월이 희미해지니

                          내 어찌 일시나마 세상에 살아있을 마음이 있으리요

                          칼을 들어 명을 끊으려 했더니 곁에서 빼앗으니 이루지 못하고

                          다시 죽고자 했지만 조그만 쇠붙이 하나 없어 죽을 수도 없고...

 

 

 

 

한중록은 이렇게 시작하지만... 남편인 '사도세자'를 증세가 아주 심한 정신질환자(정신질환자)로 묘사하면서 죽어 마땅하였다고 비판하며, 시아버지 영조(英祖) 역시 비정상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고, 시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도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표독스러운 인물로, 심지어는 아들인 정조(正祖)까지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왜곡(歪曲), 과장(誇張)으로 '한중록'은 일관(一慣)되게 자신과 자신의 친족들은 모두 인격이 훌륭하고 청렴하며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완벽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친정을 제외한 인물들은 남편은 물론 아들까지도 비정성적인, 인격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혜경궁은 스스로 '한중록'에 대하여 사료적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는다. 그는 " 집에서는 내가 보낸 편지를 모두 세초(洗草 .. 종이를 물에 씻어 글자를 지우는 것)하여, 내 필적을 남길만한 것이 없었다 "라고 적어, 60살이 넘은 나이에  한중록을 쓰면서 4~50년 전의 일을 전부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여자 특유의 자기만의  합리화(合理化), 자기만의 정당화(正當化)로 포장하여 기록하였으니...한중록은 조심하여 읽을 일이다.

 

 

 

 

 

 

 

 

 

 

 

 

 

 

                       홍봉한 (洪鳳漢) .. 사도세자의 장인.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영조(英祖)가 노론(老論) 세력인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한 일도 정치행위(政治行爲)이었다. 동시에 영조(英祖)가 펼친 탕평책(蕩平策)의 한계(限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인의 인간사에 있어서는 노론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으로 홍봉한(洪鳳漢)의 딸이 결정되는 사건은... 아버지의 정치행위가 바로 아들의 개인적인 비극으로  연결되는 출발점이었다. 더욱이 영조(英祖)가 아무리 탕평책(蕩平策)을 편다하더라도, 여전히 노론(老論)의 왕이었을뿐.. 그 아버지 경종(景宗)이 소론(少論)의 왕이었듯이.. 

 

 

사도세자 사건에 있어 홍봉한(洪鳳漢)과 ' 혜경궁 홍씨 '의 역할은 인륜(人倫)이 우선이냐? 권력이 우선이냐?를 저울질하는 잔인한 시험대 같기도 하다.  야사(野史)에서는 사도세자가 죽을 뒤주를 홍봉한(洪鳳漢)이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거나, 혹은 사도세자가 죽는 날 홍봉한은 한강에서 뱃놀이 하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는 등 그리고 혜경궁 홍씨가 남편의 죽음에 일조(一助)하였다는 등... 의 얘기가 전해 온다. 실제 '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恨中錄)에서 아버지 홍봉한이 뒤주 의견을 내었다거나, 뒤주를 준비하였다는 말에 대하여 해명(解明)하고 있다.

 

 

 

 

 

 

 

 

 

 

 

 

이러한  얘기들은  감성적(感傷的)인 판단이거나 당쟁(黨爭)의 후유증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을 죽이고, 홍봉한도 처벌하려 하나 '혜경궁홍씨'가 단식(斷食)을 하며 버티는 탓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한중록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친정을 변명하고, 신원(伸寃)을 요구하는 기록이며, 실제 한중록 4권 중 3권은 순조(純祖)에게 신원(伸寃)을 요구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한중록(恨中錄)"에서 '홍씨'는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 홍봉한은 성균관의 학생회장인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으며,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시대의 명신인 윤두수(尹斗壽.1533~1601)에 버금갈 정도로 학식이 대단하였고, 게다가 청렴하기 짝이 없어 관직이 높아질수록 주변을 경계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였다...라고 딸은 아버지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실록의 기록은 정반대이다.

    

 

 

 

 

 

 

 

 

 

 

 

                                     

                                            정조실록. 2년 12월 4일 

 

 

 

 

 

홍봉한이 죽었다. 홍봉한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현손이다. 영조 20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왕실의 인척인 것이 참작되어 특별히 영조(영조)의 위임을 받아 급제한 다음 오영(五營)과 육관(六官)의 판서를 지냈다. 영조 37년에 재상에 올라 지위가 극히 높아졌는데, 그릇이 작은 자(者)가 갑자기 귀하게 되었으므로 모질고 강퍅한 성질을 멋대로 부렸다.

 

 

아들 셋과 아우 둘이 모두 조정에 나서 권력을 농락하여 마구 휘둘렀는데, 권세의 기염이 대단하여 감히 따지는사람이 없었다. 임오년의 화변(禍變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참변)이 있었을 때 뭇신하들은 간담이 무너져 내려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홍봉한이 앞장 서 이르기를 ...신(臣)은 오로지 성궁(聖躬 ..英祖를 지칭)만 알 뿐입니다...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다시 정승이 되어 거리낌없이 방자한 짓을 마구 하였다.영조(英祖) 4년에 큰 잘못을 저질러 파면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으나, 용서하고 억지로 다시 관직에 나섰으나, 이 때에 졸(卒)하였다.』재상까지 역임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나쁠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나쁠 수가 없을 정도의 혹평(酷評)이었다.

 

 

 

 

 

 

                  

 

 

 

 

 

                                     

                                      홍봉한 ...   영조실록 11월 3일

 

 

 

 

 

성균관 유생들의 식점(食點)이 너무 적다고 하여, 임금이 유시를 내려 그들을 책망하였다. 반점(半點)인 자는 2년동안 정거(停擧 ..과거 응시자격의 박탈)하게 되어 있는데, 이규보(李奎報)와 홍봉한(洪鳳漢)은 그 이름이 반점(半點)에 있었으므로 특별히 5년 동안 정거(停擧)하게 하였다  

 

 

 

성균관의 유생(儒生)들은 출석(出席) 여부를 식당(食堂)에 비치된 장부에 동그랗게 원(圓)을 그려 기입하였으며, 그 것을 식점(食點)이라고 하였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끼를 표시해야 1점이 주어졌으며, 최소한 50점을 넘겨야 과거(科擧)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는데, 반점(半點) 즉 하루에 한 끼니만 먹은 자는 2년 동안 응시(應試) 자격을 박탈하는 제재가 있었다. 

 

 

홍봉한(洪鳳漢)은 5년이나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 당했을 정도로 학문에 게을렀었는데, '혜경궁 홍씨'의 말대로 성균관의 학생회장인 장의(掌議)를 역임할 수 있겠는가?  판서를 역임한 부친의 후광으로 성균관에 뒷구멍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것.. 실제로 홍봉한은 과게에 급제하지 못하여 음서(陰敍 .. 높은 벼슬을 역임한 사람의 자제를 특별히 등용하는 것)을 이용하여 벼슬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벼슬이란 것이 경종(景宗)의 능(陵)인 의릉(懿陵)을 관리하는 참봉(參奉)이었다. 이러한 홍봉한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딸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후의 일이었으니, 누가 보아도 사돈인 영조(英祖)가 특혜를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비인 홍봉한을 윤듀수(尹斗壽)에 버금가는 학식과 인격과 도덕성을 갖춘 보기 드문 인물로 우러러 그렸으니, " 한중록 "을 그 시작부터 악취(惡臭)를 풍기고 있다.

 

 

  

 

 

 

 

 

 

곤신지(坤申池)이다. '융릉'을 조성하고, 이듬해인 1790년 조성한 연못으로 풍수지리상(風水地理上) 묘자리에서 가장 좋은 방향인 곤신방(坤申方 ..남서쪽)에 연못을 조성하는데, 이 연못은 묘(墓)로부터 첫 번째 물이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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