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①:다산 정약용(상)
40세 수명 시대에 18년
귀양살이...75세까지 장수한 3대 비결
다산 정약용 선생은 어지러운 조선을 치유하기 위해 온갖 방책을 강구하고 수많은 저술을 남겼던 위대한 실학자요, 개혁사상가였습니다. 특히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은 엘리트 관료였던 다산은 정조가 사망하자 대역죄로 몰려 40세부터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은 40세가 되지 못했고, 거의 대부분이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50대에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산은 중년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5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18년을 지내며 75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은 부모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습니다. 천재적인 두뇌는 부계로부터 이어받았는데, ‘나주 정씨’ 가문은 8대에 걸쳐 연달아 옥당(玉堂), 즉 홍문관에 들어간 명문 집안입니다. 홍문관은 관리들이면 누구나 근무하고 싶어 하는 곳이죠. 그러나 다산의 부친은 63세로 별세했고, 모친은 다산이 9세 때 돌아가셨기에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중년의 18년 귀양살이를 이겨내고 75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1.의학적 식견이 대단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34세에 당상관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던 다산은 40세에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정순왕후와 노론들은 남인을 재기하지 못하도록 정계에서 박멸하기로 하고, 그들을 사교집단으로 몰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습니다. 바로 1801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입니다.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과 자형인 이승훈은 사형에 처해졌고, 다산과 둘째 형인 정약전은 의금부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지금의 포항시 장기면)으로 유배를 갔는데, 도착한 직후에 병들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천리 길을 걸어서 왔는데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자식들은 과거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심신이 지쳤던 것이죠. 게다가 낯선 곳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숙소는 일어날 때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낮고 겨우 무릎을 펼 정도의 작은 방이었으니 병이 날 만도 했던 겁니다. 다산은 당시 상황을 “습한 데서 봄을 나니 마비 증세 일어나고 북녘에서 길들인 입맛 남녘 음식 맞지 않네”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똑똑한 선비 한 사람 또 죽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다산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공부한 한의학 지식을 자신의 질병에 요긴하게 썼습니다. 집에서 보내온 의서 수십 권과 약초 한 상자로 약을 달여 먹고는 병석에서 일어섰던 겁니다. 그 당시 마을에는 의원이 없어 병에 걸리면 뱀이나 두꺼비를 잡아먹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다가 대부분 죽고 요행히 낫곤 했는데, 죽을 것 같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본 겁니다. 그래서 객관을 지키고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의 아들로부터 병들어도 치료받지 못하는 궁벽한 고장에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지은 의서가 바로 <촌병혹치(村病或治)>입니다.
다산이 지은 수많은 저서 가운데 유명한 의서를 기억하십니까? 다산은 부인과의 사이에 6남 3녀를 얻었으나 4남 2녀를 천연두로 잃고 말았습니다. 다산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36세에 63종의 의서들을 철저히 고증해서 ‘마진’과 ‘두창’, 즉 홍역과 천연두를 치료하기 위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서를 지었습니다.
마과회통/사진=국립중앙도서관다산은 유학을 공부한 선비인데 언제, 어떻게 의학을 공부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으시죠. 당시의 선비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한의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랬기에 오래도록 공부에 시달리면서도 건강을 돌볼 수 있었고 자신의 질병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질병을 직접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죠. 선비 중에 특히 의술에 조예가 깊었던 분들을 ‘유의(儒醫)’, 즉 선비의사라고 하는데, 고산 윤선도, 미수 허목, 성호 이익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장수했습니다. 또한 선비들은 ‘양생법(養生法)’을 열심히 체험하고 실행하였습니다. 정신적인 면을 비롯하여 음식, 기거, 운동, 휴식 등 모든 방면에서 실천하였고, 요즘의 기공체조라고 할 수 있는 도인법(導引法) 등을 시행하였기에 질병을 예방하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죠.
2.그림에 취미를 가진 걸출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림이나 음악 등에 취미를 가지는 것은 마음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죠. 선비들이 실천했던 양생법 중에 정신 양생법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다산은 건축설계를 잘 했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 사군자화 등을 잘 그렸습니다. 선비들이 사군자를 그리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계절과 때를 같이 하는 매난국죽은 각각의 특성이 덕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고 있어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퇴계 이황 선생이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추사 선생도 항상 매화를 좋아하였으며, 미수 허목 선생도 <묵매도>를 그렸는데, 이 분들의 공통점은 70세 혹은 80세 넘게 장수했다는 겁니다.
다산의 미술 재능은 모계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다산 스스로 외가의 정수(精髓)를 물려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고산 윤선도 집안의 예술적인 유전자가 내려온 것이죠. 다산의 모친은 ‘해남 윤씨’로서 고산 윤선도의 증손녀이자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죠. 윤두서는 국보 240호로 지정된 <자화상>을 그린 문인화가로서 시, 서, 화에 두루 이름을 떨쳤습니다.
3.마음을 잘 다스리다
다산이 중년의 위기를 견뎌내고 장수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만 근면하고 민첩할 수 있으며, 지혜도 생기고 업적을 세울 수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다산은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로서 집념이 강하고 의지가 굳건했습니다. 그랬기에 기나긴 귀양살이를 견뎌내며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암을 비롯한 온갖 성인병이 벌떼처럼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건강이 건강하게 장수하는데 기본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양생법 중에서 으뜸이 ‘정신 양생’인 것이죠. 예로부터 병의 뿌리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육체가 건장해도 정신이 건실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주치의를 두고 건강에 대해 수시로 상담하는 분도 많지만, 마음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E-mail : kyjjc1931@naver.com
1985년에 동국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부속한방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쳐 한방내과 전문의가 되었다.1991년 동 대학원에서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부터 동국대 한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과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동국대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대한한방내과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으로 진료하고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입력 : 2014.03.24 0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