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누가 말하고 있는가 : 그리스도교의 창립자로 통하는 나자렛 출신 예수란 분이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린다. 예수란 단어는 "하느님이 살리신다"는 뜻인데, 유태교 문화권에서 흔히 쓰이던 사람의 본명(本名)이며, 그리스도란 그리스말은 히브리어 ‘마샤’(메시아)를 번역한 것인데 기름 부음을 받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구약성서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어렵게 된 까닭에 한국에서는 예수를 단순히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지만, 예수의 정체와 역할을 드러내는 호칭(하느님의 아들, 주님, 구세주 등)을 사용하는 교회의 전통은 예수가 단지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주장해 왔다. 다른 종교의 창설자(모세, 마호멧, 석가모니 등)와 달리,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예수는 그분이 계시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 못지않게 신앙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냐 예수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는, 예수란 인물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인간의 신앙적 결단과 증언을 요구한다고 하는 사실을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이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환기시켜 둘 필요를 느낀다.
신앙인으로서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혀 놓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인데 그들은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참된 아들로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고 인간으로서도 살아 계시다는 부할 신비를 통해서, 그분의 지상생활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복음서와 신약성서의 다른 저서를 바탕으로 해서, 그들의 각 문화권의 요구에 따라,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시해야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지상 예수께로 돌아가는 독특한 방법을 고려해야 하고, 삼위일체 교리로 정리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기본 부자(父子)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동양문화권에 진출하자, 그리스도 교인들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명명(命名)해야 하였다. 그들은 전통사상[天사상]을 무시하지 않고 잡신[천지신명]들과 혼동하는 일도 없이 하느님의 초월성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께서 아버지로 모시던 하느님을 천주(天主)라고 불렀다. 천주님이라고 불린 하느님은 철학가들의 신과 민간 종교인들의 이신(理神)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명시했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희미해졌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 역할을 맡은 뛰어난 현인 내지, 불쌍한 중생을 위하여 고생하는 선각자 정도로 생각될 위험이 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선배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예수와의 관계를 밝힐 과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예수의 주장과 정체가 신인(神人)관계를 기본적으로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이외에도 수많은 현대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순수한 종교의 범위를 떠나서도 나자렛 예수처럼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드물 것 같은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부당하게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 사실상 오래 전부터 예수란 인물이 많은 사색가나 철학가들을 매료시켜 왔고, 하느님과 교회를 거부하면서도 예수에 대한 존경과 공경을 표한 사회개혁가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막다른 길에 빠진 공산주의 철학가들도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예수의 진면목을 흐리게 하고 자기네들의 세속적인 싸움터에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들이려는 속셈은 고발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주장대로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이시고 우리 역사 속에 인류의 구원을 마련하시고 온갖 악에서 인류를 해방시켜 주시는 인물이라면 신앙 말고도 예수께 접근하는 다른 길, 즉 역사적인 방법이 당연히 트여야 한다는 견해도 검토해 볼만하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 관한 역사학적인 연구방법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유인즉, 성서의 독특한 성격을 배려하지 않고 부활교리를 제외하고 즉음으로 끝나는 지상생활만 연구한다면, 예수의 신비를 제거하고 예수의 주장과 활동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대립시켜 놓고, 신자들이 모시는 그리스도가 초대 교회의 조작품이라느니 바울로 사도가 그리스 신화를 본떠서 예수를 신격화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비방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헌 분석 방법을 정리한 역사학자들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인들 이 예수에 관한 자료[복음서]를 거의 다 신앙인으로서 전수했다 하더라도 예수는 분명히 가상인물이 아니고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학가들은 19세기에 나돌던 허황한 가설들은 일축하고 예수 시대의 환경을 재발견하면서 예수의 설교, 주장, 활동의 독특함을 잘 드러냈다는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19세기 작가들의 기분에 따라 무기력한 몽상가로, 혹은 예리한 사회개혁자로 통하던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전념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자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종교사회학적으로 간단하게 풀이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그 인물의 언행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전세기의 작가들이 남긴 문제를 떠나서 예수의 역사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있다. 예수의 인간성을 규명하던 전통적인 인간학이 무너지자 우리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으로 전제되는 인간성을 되찾는 길은 역사뿐이다. 예수가 정말 역사적인 인물이라면, 즉 우리 인간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죽음까지 당한 인물이라면 그분일 참된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와 신앙이 서로 상반되기는커녕 역사의 한계성과 신앙의 특징, 즉 역사와 신앙의 차이점과 연관성을 제대로 직시하면 예수에 대한 적절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은 추상적인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독특한 의미를 띠는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2. 역사가 예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 자유주의 선입관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성서의 문학비판을 통해서 예수의 역사성을 뒤흔들었던 19세기의 역사주의를 벗어나서 현대의 성서해석학자들은 사학적인 방법으로 예수의 진면목을 재발견하였다. 역사가 예수의 궁극적 비밀을 드러내보여 주지는 못하고, 모든 삶을 예수께 내거는 신앙생활의 동기를 제공하지도 못하며, 하물며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쪽으로 이끄는 확증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를 이해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역사의 한계성과 신앙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고 신앙의 불가피성을 증명하려는 호교론을 피하며 전근대적 방어태세를 버리면 역사는 그 나름대로 대단히 귀중한 도움을 준다.
예수에 관한 문헌을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남긴 기록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밖에서 당대 일반 사학가들이 남긴 글들이다. 후자부터 살펴보면, 유태인 사학가 요셉 플라비우스는 로마제국의 ‘판무관’ 본시오 빌라도시대에 낳은 제자를 가진 현인으로 보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증언[유태교 고대사기 18, 63-64]을 남겼고, 로마제국의 사학가들은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에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다[타치투스, 연력 15.77.3, 수에도니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애 25, 4]. 소(小)프리니우스가 110년쯤 비티니아 총독으로 지낼 때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 처형된 그리스도를 하느님처럼 신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남긴 저서들은 복음서들(마르코 : 70년, 마태오와 루가 : 80년, 요한 : 90년 이후)과 바울로의 서간(50∼60년)과 다른 작가의 서간으로 형성된 우리의 신약성서를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초기 공동체들은 지상에 계시던 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복음서를 작성하였다. 복음서를 구성하는 여러 전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이 사실과 가장 가까운 전승이라는 문학비판의 단순한 주장을 떠나서 보다 확실한 사학적인 원칙에 따라 현대 사학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예수의 모습을 추궁할 수 있다. 예수에 관한 사학적인 연구방법의 원칙이 이른바 ‘차이의 원칙’이다. 초대 공동체가 자기 관심사에 따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조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으나 초기 공동체가 도저히 조작할 수 없는 장면과 발언들은 이를 예수의 지상시대에까지 소급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 유태교의 배경으로 보아서, 당대 사상과 맞지 않는 부분도 역시 배척할 수 없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신약성서가 예수의 일생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서 제공하는 자료들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뜻 깊은 사실을 발견한다. 즉 그분의 죽음을 기점(基點)으로 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 공생활을 거쳐 그분의 탄생에로 소급해 올라갈수록, 역사적 확실성의 정도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짜에 관해서는 우리가 거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요한 복음서를 바탕으로 하여 연대기적 계산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관련하여 최후만찬의 날짜에 있어서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에 따르면 예수의 최후만찬이 유태교 과월제 때에 주행사로 여겼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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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구원을 기다린 누이와 불쌍히 여긴 이집트 공주
이렇게 여인들의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아이가 바로 모세다.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프타모세, 투트모세, 아모세, 하모세) 이름이요, 동시에 ‘~로부터 건지다’는 뜻의 히브리어 마샤에서 나온 이름이다.
모세는 애굽 사람으로 자란 히브리 사람이다. 바로의 자기 지혜는 결국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자기 수하에서 양육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하나님은 여인들의 믿음을 통하여 모세를 물에서 건지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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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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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마케팅 경영자 예수 이동연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 2008.05.22 책본문 나라를 통치하는 초강대국으로 발전시키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메시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마샤(mashia)’에서 나왔다. 마샤란‘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왕들을 가리킨다... 124 페이지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저녁 7시40분 마타사무실에서 방언기도중에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