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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導論]
제1절 역사상의 중국동북지구
중국 동북지구란 현재의 3성 (요녕, 길림, 흑룡강) 및 내몽고 자치구의 3시1맹 (적봉시, 통요시, 호륜패이시, 흥안맹)을 한데 묶은 지리개념이다. 관습상 또한 ‘동북(東北)’. ‘동삼성(東三省)’, ‘동성(東省)’, ‘관외(關外)’, ‘관동(關東)’ 등의 여러 호칭이 있다. 중국 동북지구 지리개념은 역사상 변화가 있었고, 오랜 시기에 걸쳐 지금의 조선반도 대부분, 일본해-오오츠크해 좌안(左岸)지구, 그리고 사할린섬 등까지도 아울렀었는데 또한 다 중국 동북의 범위에 속한다. 따라서 명백히, 이러한 지구에서 생활한 고민족(古民族)은 다 중국의 역사민족이며 다 중국 동북고민족사 연구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동북지구는 태고이래 중국영토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였다.
고대 사료를 근거로, 요순시대 조기부터 이미 지금의 요녕성지구는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2주의 관할이 되어갔다. 당시 정황은 이러하다.: “남으로 교지와 북발을, 서로 융, 석지, 거수, 저, 그리고 강을, 북으로 산융, 발, 그리고 식신, 동으로 장(長)과 도이를 어루만지니 사해(四海) 안은 다 순(舜)임금의 공을 덮어썼다.(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 四海之內咸戴帝舜之功, 《사기·오제본기》)”. “옛날 순임금[虞舜]이 하늘의 덕으로써 요임금[堯]의 뒤를 이었을 적, …… 해외의 숙신, 북발, 거수, 저, 그리고 강이 찾아와서 (신하로서) 복종했다. (昔虞舜以天德嗣堯, …… 海外肅愼•北發•渠搜•氐•羌來服. 《대재례기·소한편》)”. 이 시기의 숙신족(肅愼族)은 지금의 요서지구에 거주했고 발족(發族)은 지금의 길림 남부에 있었다.
하•상(夏商)시기엔 동북지구에 대한 관리를 더욱 강화하여 유주•영주 2주를 분할해 기주(冀州)•청주(靑州) 2주의 관할에 들어가게 하였다. 숙신, 고죽(孤竹), 고조선(古朝鮮) 등으로 대표되는 동북민족과 중원왕조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는데, 사료가 말하는 것과 같다 — “성탕(成湯)이 마침내 천명을 받고……해외의 숙신, 북발, 거수, 저, 그리고 강이 찾아와서 (신하로서) 복종했다. (成湯卒受天命 …… 海之外肅愼•北發•渠搜•氐•羌來服.《대재례기·소한편》)”.
주(周)대에 이르러, 무왕(武王)이 상(商)을 꺽자 숙신족이 가장 먼저 축하하러 왔고, 이후 또 많이 찾아와 “호시석노(楛矢石砮, 자작나무(?) 화살과 돌촉)”를 조공했다. 이 시기 숙신족은 지금의 목단강(牧丹江)과 흑룡강(黑龍江) 유역으로 이주해 있었다. 또한 주 초기의 “성주지회(成周之會)”에서 동북지구의 무릇 10 민족이 다 중원에 방물(方物, 토산물)을 헌납하여 신복(臣服)함을 표시했었다. 그래서 주왕조는 명확하게 선포했다 — “숙신, 연(燕), 박(亳)은 내 북녁 땅이노라(肅愼•燕•亳, 吾北土也). (《좌전·소공9년》)”. 주대가 관할한 동북지구의 그 동부는 이미 지금의 흑룡강 유역에 달했고 남부는 지금의 조선반도 대부분을 아울러 동북강역의 기초를 어느 정도 다졌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동호(東胡)를 격퇴하고 고조선을 통치하게 되자 동북지구에 요동(遼東), 요서(遼西), 우북평(右北平) 3군(郡)을 설치했는데, 이로부터 동북지구에 군(郡)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 3군의 관할범위는 지금의 조선반도, 요녕 전부, 길림 남부 등의 지역을 포함했다. 이는 고대 중국정권이 첫 번째로 이 지구를 정식으로 관리한 것이다.
한(漢)은 요동, 낙랑, 현도, 진번 4군을 설치하고 군 밑으로 현(縣)을 설치하여 동북지구에 발전된 행정을 완비했는데, 관리의 효력이 미치는 지역 안엔 동북지구의 고구려, 부여, 선비, 오환, 읍루, 예, 옥저, 맥, 두막루 등의 민족이 있었을 것이다. 관할범위는 전대보다 확대된 것이다. 그 후, 비록 중원정권은 끊임없이 바뀌었지만 동북지구에 대한 왕조의 관리는 항상 유효했으며, 역대 왕조는 계속해서 진•한(秦漢)의 군현제를 많이 답습했다.
수당(隋唐)시기, 국력은 강성했고 동북지구의 강역은 한층 더 확대되었다. 당조(唐朝)는 고구려 지방민족정권이 소멸된 뒤에 먼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밑으로 9 도독부(都督府), 41 주(州), 100 현(縣)을 두어 지금의 요녕성 전 경내와 조선반도 대동강 이북지구를 관할했다. 또 지금의 흑룡강 하류지구에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를 설치하여 해당 지역의 부족 수령을 도독(都督) 및 여러 주(州)의 자사(刺史)로 삼았다. 때문에 말갈족의 수령인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홀한주도독(忽汗洲都督)으로 삼되, 조정은 장사(長史)를 두어 그 부락을 감독하게 했다. 또 지금의 우수리강[烏蘇里江] 하구에 발리주(勃利州)를 설치했는데, 지금의 러시아쪽 해변 지구에 월희도독부(越喜都督府)를 두었다. 여기에 이르러, 당왕조는 이미 서쪽 지금의 바이칼호[貝加爾湖]으로부터 동쪽 오호츠크해 및 지금의 사할린섬까지 움켜쥐었으며, 북쪽 지금의 아무르강[勒拿河] 중하류역으로부터 남쪽 지금의 조선반도 한강 유역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구를 직접 관할하에 두었다. 이로부터 고대중국 동북강역의 기본은 쭉 고정되었다.
요(遼)•금(金) 왕조는 동북지구에서 발흥하여 당대(唐代) 동북의 강역을 계승했다.
원조(元朝) 건립 후, 요양(遼陽)에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였는데 따로 영북행성(嶺北行省)을 설치하여 동북의 전 경내를 관할했다. 행성(行省) 밑으로는 또한 로(路), 부(府), 주(州), 현(縣)을 설치했다. 이리하여 동북지구의 행정 설치는 더욱 완비되어 동북의 강역을 더욱 더 견고하게 했다.
명조(明朝)는 몽고족과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홍무(洪武) 14년(1381) 대장(大將)인 서달(徐達)에 명하여 지금의 산해관장성(山海關長城)이 있는 곳에 관성(關城)을 수축했는데, 관성은 산을 등에 지고 바다에 임해 한몸처럼 연결되었기 때문에 “산해관(山海關)”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뒤로부터 산해관은 관(關) 안팎을 잇는 길을 인공적으로 가르는 경계선이 되어 새(塞) 안팎의 경계선이 되었다. 관내(關內)는 내지(內地)로서 관습적으로 “관리(關里)”라고 호칭되었으며, 관외(關外)는 즉 동북(東北)으로서 “새외(塞外)” 또는 “관동(關東)”이라고도 호칭되었다. 이밖에 명조가 강화한 동북지구에 대한 관할은 북으로는 개원(開原)까지, 남으로는 여순(旅順)까지, 동으로는 압록강까지, 서로는 산해관까지 이르렀는데, 대체로 지금의 요녕성 경내이며, 요양에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설치하여 아래로 25위(衛)와 2주(州)를 두었다. 흑룡강 하류 유역의 특림(特林)지방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여 400 여 위(衛)를 두어 개원 이북을 관할했는데, 대흥안령 안팎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구였다.
청조(淸朝) 건립 후, 관리의 편의상 차례대로 동북을 쪼개 3성(省)으로 만들었다. 순치(順治) 6년(1649)에 설치한 봉천앙방장경(奉天昂邦章京)이 요녕성 설치의 시작인데, 후에 “진수성경등처장군(鎭守盛京等處將軍)”으로 개칭했다. 길림성의 설치는 순치 10년에 시작되었는데 “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으로 호칭되어 흑룡강도 관할했고, 후에 치소를 지금의 길림시로 이전하면서 “길림장군(吉林將軍)”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흑룡강성의 설치는 강희(康熙) 22년(1683)에 시작되어 “흑룡강장군(黑龍江將軍)”으로 호칭했는데, 먼저 치소는 아이훈[璦琿]에 있었으나 뒤에 치소를 지금의 치치헐[齊齊哈爾]로 이전했다.
1850년대, 러시아 침략세력이 동쪽을 향해 확장될 때, 함풍(咸豊) 9년(1860) 청왕조는 러시아와 불평등한 협정인 중•러《아이훈조약(璦琿條約)》을 맺어 흑룡강 이북의 큰 조각은 러시아에 의해 강점되었다. 2년 뒤에 또 협정을 강요받아 불평등한 중•러《북경조약(北京條約)》을 맺어 우수리강으로부터 동쪽으로 사할린섬까지 이르는 큰 조각의 영토를 재차 러시아에게 읽어버리고 말았다. 이로부터 중국 동북지구 북부와 동부의 변계(邊界)는 줄어드는 꼴이 되었다.
동북지구 남부인 조선반도는 비교적 특별하다.
고구려 멸망 후 조선반도 한강 이북의 강역은 그 땅이 안동도호부의 관할에 귀속되는 정황에 있었다. 뒤에 와서 부분적으로 신라 김씨왕조에 의해 잠식되었으되, 신라는 당조(唐朝)의 번속(藩屬)이었으므로 잠식된 영토를 당조는 적극적으로 수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도북부에 대한 주권은 당왕조에 있었음은 물리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몽고는 흥기(興起)한 뒤, 조선반도의 고려 왕씨왕조를 통치했다. 몽고칸국은 전대 동북의 강역을 계승하여 1259년에 군대가 조선에 주둔했으며 1270년에 그 땅에 다루가치[達魯花赤, 지방행정장관]를 두어 행정관리를 행사했다. 반도북부는 또다시 중앙왕조에 귀속되어 직접 관할되었다. 그러나 몽고 관원의 민족압박정책 추진에 말미암은 야만적인 통치는 350년대에 조선반도로부터 축출되고 말았다. 왕씨고려 역시 뒤이어 멸망하였다.
명조(明朝) 건립 후, 이씨조선왕국 또한 뒤이어 건립되었는데 명왕조의 번속(藩屬)이 되었다. 명조와 이씨조선왕국은 상의하여 오늘날의 압록강과 도문강(圖們江)의 중심선을 갈라서 남쪽은 조선이 관리하고 북쪽은 명조가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러한 중심선의 목적은 양 지역사람들이 중심선을 넘어 생산에 종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조의 속국이었으므로 당시로부터 청대(淸代) 1712년 목극등(穆克登)이 변(邊)을 조사할 때까지 압록강과 도문강의 한 중심선은 여전히 근현대 이래 국경선이 갖는 의미를 구비하지는 못했었다.
20세기 초, 이씨조선은 청왕조와 철저하게 번속관계로부터 이탈했었는데, 러시아의 종용 하에 조선의 사병(士兵)이 끊임없이 도문강 북안(北岸)의 청조 관할 구역으로 진입하자 쌍방은 교섭을 해서 1904년에 《중조변계선후장정(中朝邊界善後章程)》를 체결하여 “도문강을 경계로 하여 각자 목적지[汛地]를 지킨다. (以圖們江爲界, 各守汛地)”고 규정하였다. 이것이 중국과 조선의 정식 경계 구획의 기초다.
청(淸) 선통(宣統) 원년(1909) 9월 4일,《중조변계선후장정》을 기초로 청과 조선은 정식으로 변계(邊界)를 구획하였다. 경계 조약인《도문강중한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 에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있다. : “도문강을 중국과 대한제국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 이 강이 발원하는 지방에 있는 정계비로부터 석을수(石乙水)까지를 경계로 한다. (以圖們江爲中韓兩國界, 其江源地方自定界碑至石乙水爲界)”. 이렇게 조선반도 한강 이북 지구가 먼저 정식조약의 형식으로 구획되어 조선 소유로 귀속되었다. 중국동북지구의 남계(南界)는 이것을 따라서 압록강과 도문강 중심선 이북으로 고정되었다.
지금까지 논한 것을 종합해 보면, 기나 긴 역사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동북지구 강역의 변화는 매우 컸음을 볼 수 있다. 근대 이래 강역의 발걸음은 작아졌는데, 만청(滿淸)왕조의 부패한 정치 하의 중국사회가 오랫동안 가난하고 약함이 쌓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댓글 오래간만에 또 글 올려주셨군요. 아이디님의 글 늘상 잘 읽고 있습니다. 바쁘신줄 알지만 앞으로도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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