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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때 읽는 책 [알버트 엘리스]
우리는 분노를 느껴야만 하는가?
우리의 현실은 때때로 비정하여 우리가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날마다 겪게 되는 이 "끔찍함" 앞에서 매번 화를 내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가? 우리가 화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들이 생후 최초의 몇 시간 동안에 분노와 비슷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시대이건, 어떤 세기를 막론하고 인류는 거의 매일 자신과 많은 주변 사람들의 분노와 마주치게 된다.
사람들이 분노에 대처하는 일상적인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써, 다음의 두 가지 방안 중의 하나를 택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분노를 느끼되 그 감정을 감추고, 억누르고, 부인하고, 억압하라.
--분노를 느끼고 그 감정을 자유스럽게 표현하라.
화를 내지 않고 억압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으며, 표현되지 않은 분노는 오히려 분노를 솔직하고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해롭다. 수압의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노와 같은 감정은 끓고 있는 주전자 속의 수증기처럼 압력을 받으면 더 강력해지고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당신이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기만 하고 자유롭게 발산시켜 주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해를 입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위암이나 고혈압 등의 신체적인 질병이나, 여타의 심각한 정신신체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당신 속에 가두어 놓기만 하면, 그 분노는 전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당신의 감정은 더욱 악화된다. 그것은 당신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당신의 "내장이나 창자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이제는 당신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자신에게서마저 혹심하게 비판받을 우려가 있다.
이와 반대로, 당신이 느끼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표현한다면, 위의 경우와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적대적인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며, 아마도 당신과 가까이하려 하지 않거나, 한층 더 심한 적대감으로 방어적인 대응을 할 수도 있다. 당신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의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하여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게 되면 득보다는 손실이 더 많다.
나의 "몰지각한" 행동을 노골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당신은 나의 자기방어를 부추기는 셈이 된다. 만일 당신이 나의 몰지각한 행동에 대하여 나 스스로 비판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허용했더라면,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비호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공정하게 대할 수 있는 단계로 비약할 수 있게 되어 참된 성장의 단계로 나아가서, 나의 행동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강한 자기비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약 당신이 남의 성격에서 잘못된 점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찾아 지적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더 깊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당신의 비판적인 발언이 아무리 훌륭하고 창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죄의식이나 자기비난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며 "반격"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의 표현을 장려하는 두 가지 접근법에 이러한 문제점이 모두 다 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당신이 지닌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예로, 우리는 잔인한 범죄의 희생이 된 사람들이 경찰이나 법원과 협력하여 그 가해자를 엄벌하려고 하는 대신에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경우를 종종 전해 듣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가해자가 구속되지 않도록 돕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만일 똑같은 범죄로 해를 입은 100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본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의 반응이 각각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위의 경우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은 가해자를 고소하고 구속시키기 위해 안달을 하기도 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사물에 대한 자기의 감정이나 견해를 자기 스스로 혹은 사회의 요구에 의하여 변화시키려고 하게 된다. 모든 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협력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지켜야 할 일련의 신념, 가치, 규범들을 제정하며 부모, 교사,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은 우리들 각자의 개인적 신념체제를 발달시키는 데 기초가 될 가르침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인적인 신념체제가 순전히 우리 자신의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우리의 생각은 성인들에게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비록 당신의 신념체제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하여도, 신념체제에 관한 일관성 있는 기준이나 보편적 규범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나 사람이 그 자체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우리의 판단기준은 변할 수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그 사람과 행동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사고방식 또는 신념체제에 따라서 당신의 감정(정서)이 좌우된다
당신이 취하는 행동이나 반응이 겉보기에 자동적인 행동이나 반응처럼 보일지라도 자세히 따져 보면 그것은 당신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고에 뒤따라서 취해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상황을 불쾌하고, 해롭고, 역겨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곳을 피해 도망가고 싶어할 것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우리 각자의 신념체제들이 다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건이나 경험도 그 자체만으로 가치기준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 신념이 지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사고 형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취하고 있는 어떤 행동이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인 줄은 뻔히 알지만, 감정상으로는 계속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그 행동을 지속하고 싶은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감정이 배우 강렬하고 급격하게 일어났다면, 당신 자신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나마 개인적인 신념을 약간 변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와 같은 행동으로 감정을 만족시키고 난 후에는 다시 예전의 신념으로 되돌아가게 되며, 진심으로 신념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잠깐 옆으로 밀쳐 두었다는 점에서 당신은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신이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감정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네 가지의 비합리적인 진술문은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가지기 쉬운 비합리적 생각들을 정확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그같이 부당한 행동을 하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당신의 무책임하고 부당한 태도를 나는 참을 수 없다"
--"당신은 나에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행동한 것을 보면, 당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벌을 받아 마땅한 엉터리 같은 사람이다"
이 네 가지 문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문장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며 또한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행동을 사람과 동일시하는 것, 혹은 그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에 대한 평가를 그 사람 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이와 같은 흑백 논리적인 판단이나 과잉일반화의 형태를 우리는, “죤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 ” 이처럼 "사람"과 그가 한 "행동"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어떠 어떠한 행동을 한 사람은 반드시 이런 사람이고, 또 그런 행동은 반드시 그러한 부류의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지게 마련이다"라고 단정짓는 것과도 같다. 이 말을 좀 더 구체화시켜 보면, "누군가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나쁜 사람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좋은 행동을 한번 하게 되면, 그는 결코 나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과 같다.
이상의 논의는 법률적인 논리에서는 옳다. 그러나 법률적 진리와 현실에서의 실질적 진리는 엄연히 다르다. 위의 진술문의 논리는 얼핏 보기에 확실한 것 같으나, 기실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참으로 볼 때, '착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이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반대로 사회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 아주 훌륭하고 좋은 행동을 보여주는 경우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 사고라는 것이 법률에서는 맞을지 모르나 인생에 있어서는 때때로 틀리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만약에, A라는 사건에 대해 당신이 불편함과 실망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불편을 일으킨 사람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한 평가와 당신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비합리적이고 부적절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 구분을 하지 못하며, 지겨운 행동과 지겨운 사람을 혼동함으로써 부질없이 자신을 화나게 만든다. 당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실망하고 불편해 하고 의기소침하게 되는 것은 수긍이 갈 만하다. 그러나 그 행동을 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사람이다"라고 가정함으로써, 분노하고 적개심을 느끼는 것은 분명히 비합리적이다.
당신은 화를 냄으로써 어떤 손해를 맛보는가?
우리는 여기서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의도와 실제적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내는 행동으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1) 분노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은 그 사람 자체와 같다"는 당신의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신념에서 비롯된다.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일방적이고 부정적으로 내림으로써, 당연히 그 사람에 대한 반응도 그러한 식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비합리적인 단정을 내림으로써 상대방의 모든 인격을 매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자기의 이미지와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방어적으로 나올 것이 자명하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매도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한, 사태에 대한 모든 관점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는 좋은 태도를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당신이 화를 내게 되면 당신이 처한 문제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중대한 장애가 될 것이다.
2) 분노는 비교적 격렬한 감정으로써, 다른 생활영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대개 사람들이 화가 났을 때에는 자기와 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적대적인 행동을 나타내기 쉽다. 이로 인하여 때때로 불필요한 긴장을 느끼게 되고, 당신 스스로도 비생산적인 기분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3) 당신은 화를 냄으로써 긴장감을 느끼게 되어 우울과 불안이 수반되고, 당신의 여타의 생활에 있어서도 활발하지 못하게 된다.
4.) 2와 3의 상태가 결합되어, 당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얻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하여 다시 당신은 자신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으로 되기 쉽다. 이러한 자기비판이 심화되어 자기비하로 발전하며, "점차 내가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하는 존재적 불안감으로 확대되어 간다.
5) 당신은 반복되는 분노로 인하여 당신 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심각한 긴장감을 초래하게 된다. 당신은 화가 나 있는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분노를 느끼게 되며, 그러한 당신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사태를 악화시킨다. 따라서, 분노가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키며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어 간다.
위와 같은 사실을 볼 때에, 우리는 분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차적인 이익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비합리적 신념에서 비롯된 분노반응을 통하여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분노와 관련된 비합리적인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분노에 관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의 비합리적 상념을 다시 한번 적어 보자.
--"당신이 나에게 이처럼 대하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당신의 무책임한 행동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당신은 부당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벌 받아 마땅한 엉터리 같은 사람이다"
이러한 말 속에는 분명히 분노의 감정이 들어 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화가 치미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체험하고 있다면 또 다른 각도에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불안과 관련된 비합리적인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불안이란,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곧 일어날 것만 같이 느낄 때에 발생하는 내적인 위험신호이다. 분노가 타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 상념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하면, 불안은 자신에 대해서 지니는 비합리적 상념들에 의해서 발생한다.
우울과 관련된 비합리적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일이 그처럼 나쁘게 꼬이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이냐!"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불편하게 되다니 이래서는 안돼!"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본 적이 없어. 인생은 나에게 언제나 불공평하단 말이야. 이래서는 안돼!"
위의 상념들은 분명히 비합리적인 것들이다. 우리가 울적할 때는 대부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분노, 불안, 우울과 관련된 비합리적 상념의 일반적인 특성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비합리적 상념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불안이나 분노나 우울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타인을 비하하는 것, 자신을 비하하는 것, 이 세상을 혹평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비합리적 상념의 특징은 무엇인가?
수년간 나와 동료들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비합리적 신념들과, 그로 인해 분노하고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자세한 분석을 통하여 본 결과, 수많은 비합리적 신념들은 모두 위 네 가지의 주요한 부류 중의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많은 비합리적 신념들을 대표하는 위의 네 가지 신념에 대하여 그 특성을 분명하게 잘 표현해 주는 명칭을 다음과 같이 붙여 보았다.
'터무니없다' 주의
'견딜 수 없다' 주의
'해야만 된다' 주의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비난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거나 타인을 비난하고, 세상을 비난한다. 위의 모든 신념이 "해야만 된다"는 주의와, 사람이나 상황이 "어떠 어떠하니 참으로 끔찍하고 두렵다"는 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위의 사상은 세상과 타인과 자신에 대하여 무력감과 절망감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삶에 대한 무의미감과 숙명론적인 생각은 비합리성의 극치를 이룬다. 때때로 인간은 자기가 마치 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와 변덕에 장단을 맞춰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당신 자신의 처지와 타인의 처지를 항상 배려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바람직한 태도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을 화나게 하고 불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항상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 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어떤 생각이 작용했기에 화가 나는가를 이해하라
건강한 성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먼저 각자는 자신의 과거의 경험에 충분한 주의와 관심을 가져 보도록 요구한다. 초기의 카타르시스적인 치료이론들에서는 당신의 어린 시절에 깊이 박혀 있는 거대한 고통에 대한 통찰을 강조한다. 그리고 당신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당신의 현재 생활에까지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유쾌한 초기 경험의 고통을 재경험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견딜 수 없다"주의
이제,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주의에 관하여 토론을 해 보자.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내가 그것을 견딜 수 없는가?" 그 상황을 끔찍하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이 너무나 많은 불편을 겪었고, 그 부당한 행동 때문에 너무나 많이 고통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너무나 많은 고통과 불편"이라고 상승시킨다. "너무나"라는 단어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지만 약간의 마술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의 불편과 곤란은 허용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어느 지점 이상을 넘어서면 당신은 그것을 "너무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나의 행동이 부당하였다고 판단하고 타인들도 여기에 동조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다음과 같은 태도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나의 부당한 처우를 참을 수 없다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참을 수 있다고 믿을 것인가?
--그 부당한 대우를 끔찍하다고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끔찍하다고는 판단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것인가?
--나를 전적으로 끔찍한 인간이라고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의 경우에 좋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인가?
당신은 나의 그와 같은 행동이 너무나 지나치고, 해서는 안될 행동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당신의 가설을 반박하고 도전해 볼 의사가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도전해 본다면 당신은 그때서야 비로소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을 극복해 볼 수 있게 된다.
"해야만 한다"주의
이어서 "그는 나를 그렇게 부당하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라는 생각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그가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것이 사실이고,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각에 동의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를 그렇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사회적 도덕성의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기준으로 볼 때에 "해서는 안된다"는 어떤 규칙이나 통념을 무시한다면 그 사회는 민주적인 사회로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어떤 것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실지로 결정하는 것이 도덕성은 아니다. 도덕성은 단지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대한 정의와 지침을 설정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문명화된 도덕성이란 우리가 "부적절하게" 행동하기보다는 "적절하게" 행동하기를 권하고, 나쁜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행동으로 나쁜 결과가 발생한다면, 사회의 성원들은 (문명화된 도덕성으로 인하여) 그가 앞으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그 위반자에게 어떤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생각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러이러하게 대해야 되고, 좀더 잘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좀더 나은 행동을 했더라면 내가 훨씬 좋았을 텐데.."
--그리고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그렇게 대해 주어야만 한다"
첫번째의 생각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번째의 생각은 매우 비합리적이다.
당신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생각("그들이 나를 좀더 잘 대해 주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을 고수한다면, 당신이 비록 좋지 않은 대접을 받더라고 단지 유감스럽다거나 불쾌한 수준에서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잘 대해 주었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고집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원한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언제나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고, 사회적인 규칙으로도 사람들이 공정한 태도로 타인을 대하도록 되어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는 우주의 법칙이나 이성의 명령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위의 말에 동의한다면, 타인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분노와 증오를 느끼는 대신에 유감과 실망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행동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과잉일반화의 오류
당신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느끼는 상황이면 거의 예외없이 당신은 분노를 유발시킨 행동과 사람 자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 그는 썩어빠진 인간이다"). 당신은 그가 취한 하나의 행동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내려 버리는 것이다. 사람과 그 사람이 취한 행동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당신은 "오직 어떠 어떠한 사람만이 어떠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또 모든 어떠 어떠한 행동은 어떠 어떠한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여긴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해 본다면, "부당하게 여기는 어떤 일을 저지른 사람은 틀림없이 나쁜 사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좋은 행동을 하였다면, 그는 절대로 나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좋은 사람이고, 그러므로 좋은 행동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보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합리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가늠할 때에는 그 행동이 인간의 기본철학인, "나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욕구나 목표 추구에 도움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에 따라서 평가된다. 즉, 어떤 행동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개인이 취한 한 가지 행동을 가지고 그 인간의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지나친 흑백 논리이며 과잉일반화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존권과 행복권을 거부하는 경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나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좋은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을 더 많이 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선악의 행동을 다 한다. 인간은 한 과정이지 물건이나 행위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쁘기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항상 어떤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인간이 이와 같이 다차원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을 마음 속에 잘 새겨 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는 인류에게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공헌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예술이나 과학분야에서 지대한 공헌을 하여 인류에게 혜택을 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적인 생활을 보면 부당하고 좋지 않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힌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였을지라도 그를 전체적으로 평가하기를 삼가함으로써 그의 다른 면을 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정당하고 공정하게 행동했다 할지라도 때때로 당신은 실패할 수도 있다. 이런 실패의 경험이 생기면 당신은 자신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울하게 되고 자기비하감에 빠진다. 엄밀하게 따져 보면 "자기확신"이란 언제나 자기희생의 대가를 요구한다. 또한 "자존심"은 자기비하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아강도"라는 것도 처음에는 자아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획득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된 말이다.
분노란 비합리적인 감정이며 불쾌의 감정만이 합리적인 분노감정이다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한다. 당신이 나의 부당한 특성에 관하여만 분노를 느낀다면, 당신은 기껏해야 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내가 좀 더 공정하게 행동하도록 그 면의 행동만 개선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부당한 행동을 하는 한, 나는 필요 없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당신이 나의 부당한 행동을 100% 이상으로 전적으로 나쁜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부당한 처사를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보고 나의 그 "행동만을" 미워하면 우리는 당신이 적절하게 또 합리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것이라고 보아줄 수 있다. 나의 부당한 "특성"에 대한 불쾌감, 짜증, 분개, 좌절을 당신이 느끼면서, 나의 그 행동 때문에 당신이 나를 멀리하려는 결정을 내리고, 내가 좀더 공정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합리적인 분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부당한 처사를 끔찍하고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 보고, 나라는 사람 전체를 나쁘게 본다면, 당신은 현실을 과장하여 원한, 적개심 등을 느끼게 되는 비현실적인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나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만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합리적인 경험에 머무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나 당신이 분노를 느끼는 시간에 기실은 "이러한 상황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되며, 삶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절대 안되며,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참으로 끔찍하고, 이 끔찍한 상황의 장본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극도로 분개하고 불쾌해 하면서도, 그런 느낌을 합리적인 분노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당신이 실제로는 잔인한 분노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 비합리적 분노를 직면하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노의 감정이면 어떤 것이든지 모두 다 부적절하고 자기패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내가 어떤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거의 예외없이 내가 사람들이 잘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그와 같은 요구나 강요가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분노라면, 그때 당신은 그것을 '합리적인 분노'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감정을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는 "합리적인 분노"를 "심한 성가심"이나 "심한 짜증"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당신이 만일 나의 어떤 특성(가령,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행동을 한다든가 하는)에 대해 훌륭하다고 평가한다면, 이는 정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바람직한 특성을 지녔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 전체를 훌륭하다고 평가한다면, 이는 부정확하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당신은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함으로써 나의 자존심을 올려 주는 데 공헌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편, 당신이 나의 다른 어떤 특성을 "나쁘다고" 평가할 때는 나는 또한 내 자신을 비하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이란 아무리 좋은 특성을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또 다른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므로, 이처럼 인간을 온통으로 평가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내가 아무리 공정한 행동을 하였더라도 다른 모든 일까지 다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떠한 인간이라도 그렇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가 성취한 어떤 것을 가지고 나라는 사람을 추켜주는 것은 결점투성이인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존심"과 "자기확신"이라는 용어의 오류를 이해하라
"자존심"이라든지 "자기확신"과 같은 말은 여기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 내가 만일 타인의 인정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나 자신을 항상 무엇인가를 잘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자존심을 높여야 한다면,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잘 해내지 못했을 때면 가차없이 나 자신을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잘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자신감을 잃고, 낮은 자존심을 느끼고, 자존감을 잃는다면 나는 자동적으로 "나"라는 사람이 무능력하고 결점투성이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내가 당신이나 타인들에게 부당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나를 장점도 없고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못박아 평가한다면, 이 썩어빠진 인간이 앞으로 좀 더 개선하고 변화할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나 자신을 부당한 사람이라고 보아버린다면 자기 성취적 예언에 빠져서 항상 부당하게 행동하려고 하는 경향성을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자존심과 자기비하는 결코 우리에게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 존재에 대한 기쁨을 느끼기 위하여 자존심을 사용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한단 말인가?
내가 자신에게 "나는 훌륭한 사람이고 그 훌륭함을 나는 정말로 좋아한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나는 무가치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훌륭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고,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면 나를 싫어하고 비하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을 "좋다-나쁘다"로 평가하는 것은 나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나 스스로에게 부과해 놓은 기대치에 내가 항상 맞추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라는 말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내가 이러이러한 좋은 일을 하고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남들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신은 좋은 행동을 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을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보다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느끼며, 그런 나를 진정으로 좋은 인간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보다 훌륭한 인간임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고 더 훌륭한 인간으로 느끼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존심이란 '자기확대'나 '자기과장'과 유사하다.
자신을 가혹하게 평가하는 습관의 오류를 인식하라
당신은 어떤 것을 열렬히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한 특성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인간 전체를 평가지 말라는 말이다. 각 특성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평가하고, 이 모든 특성들을(호감이 가는 것이든, 떨쳐 버리고 싶은 것이든 모두) 다 함께 비교해 보라고 나는 여러분에게 제안한다. 이렇게 검토한 연후에야 비로소 당신이 그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을지 피하는 것이 좋을지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쪽으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이 그가 지닌 좋은 점뿐만 아니라 나쁜 점까지도 아는 상태에서 내려진 것이라면, 당신이 싫어하는 특성까지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다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한 쪽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러한 점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면, 사람이 언제나 어떠 어떠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비합리적인 완벽주의를 고집하지도 않으며, 실망이나 좌절에 직면할 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보다 관용을 가지고 자타의 특성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인 태도로 임할 때에 보다 행복하고 생산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지닌 어떤 부정적인 측면을 수용하고 지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우리는 그들이 지닌 좋은 특성도 즐기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