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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후손 예수의 사역
A.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함
[마태복음 4:1~11]
“0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0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0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0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0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0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0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0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0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창세기에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해서 목적과 그리고 사탄이 개입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고, 방해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은 이러이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 대책 중 가장 중요한 대책이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는 것이 가장 첫 번째 복음이다. 맨 처음 우리는 실패했으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한다고 했으니 승리의 소식이 아닌가! 이것이 복음이다.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예수다. 우리는 지금 예수라고 해석하는 것이지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에 따라 여자의 후손을 기다렸다. 그 여자는 사라인가? 이렇게도 생각했을 것이다. 리브가 인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여러 가지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다 맞질 않았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가면 그때 급박한 상황이 왔으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사7:9)이라는 예언이 나왔다. 이것도 창세기 3장 15절의 맥락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그 아들이 정사를 잡을 것이라고 이사야서 9장에 나온다.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이는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에 지금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창세기 3장15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바로 이 사람(예수)이 여자의 후손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도 아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여자의 후손은 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여자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들은 유대교가 아닌 지금 예수를 믿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 사람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라를 회복할 메시야를 찾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 사람이 마귀를 정복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마귀를 정복한 분이다. 사람을 유혹에 빠뜨려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나가게 했던 바로 그 원수를 제압한 사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다.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들이다.
여자의 후손인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했는가? 이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이야기한 것이 신약 성서다. 이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있는 말씀이다. 신약성경은 완전히 이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구약성경은 어떤 한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아직 못 만났다는 말이다. 이 사람인가? 했더니 아니고, 이 사람인가? 했더니 아니고 자기들의 기대에 맞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구약 사람들이 기대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 다른 사역에서 이 사람이 메시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구약적인 사역에서는 지금도 보면 예수는 메시아가 못 된다. 이스라엘을 회복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을 회복해서 세계를 지배해야 되는데 그런 메시아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통곡의 벽에 가서 왜 벽을 두드리며 우는가?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당장 현실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해야 되겠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지금 마호멧 성전이 들어서 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여호와의 성전이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모슬렘 사원이 서 있다. 이스라엘로서는 그 사원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저기에 우리 여호와의 성전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엉뚱한 놈이 들어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벽을 치고 통곡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성전은 지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우리는 거기 가서 통곡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들로서는 아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거기가 여호와의 성전이 회복되어야 될 자리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은 통곡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역사적인, 사상적인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의미의, 다른 의미의 메시아가 된 것이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고,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 그런 의미의 메시아다. 국가를 회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이런 의미의 메시아가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는 그런 사상을 아직도 갖고 있다.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면 기독교 왕국이 되지 않겠는가. 기독교 왕국이 되면 옛날 캐톨릭보다 뭐가 달라지겠는가. 꼭 마찬가지다.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예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구나.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구나.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나라는 이미 벌써 해봤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럼 이제는 다시 또 그런 정치적인 나라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다른 인류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메시아라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신약의 기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자의 후손! 이 사람의 첫 번째 사역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맨 첫 번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요단강에 가서 세례를 받으신 일도 있지만 그분의 사역으로 우리가 생각한다면 첫 번째 사역이 마귀(사탄)와의 전쟁이다.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이 전쟁이 첫 번째 발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온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마귀는 속이는 자
1-1.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고 속임 (최고의 사기)
마귀는 누구인가?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고 속였던 자다. 성경에 보면 속이는 자, 살인자, 거짓말 하는 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고 속이는 것처럼 사기는 없다. 이런 사기는 없다. 세상에 많은 사기는 있지만 이렇게 큰 사기는 없다. 개를 놓고 개가 사람 된다고 속이는 것과 똑같다. 이것이 얼마나 큰 사기인가. 엄청난 사기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 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괜히 그걸 뒤집어쓰고 있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인데 나에게 했다는 것이다. 절대로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어떻게 인간이 신이 되겠는가? 내 블로그에 오면 정확하게 설명해 놓았다. 나는 절대로 사람이 하나님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주장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써놓았다. 혹시라도 어디 가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도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겠는가?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지방교회에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구호가 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은 다시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결국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됐다는 이 말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변화 산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요한일서에 보면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다.”는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가. 결국 이것을 말하려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이 와전되고 오해되어 내가 지방교회의 아류로 그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를 신인합일주의자라고 말한다. 신인합일주의라는 말이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서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개는 개이고, 소는 소다. 개와 소가 합해서 다른 것이 되는 수는 절대로 없다. 말과 당나귀가 합해서 노새가 되는 그런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아니고 당나귀도 아닌 제 3의 노새가 나왔다.
그런데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져서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될지는 몰라도,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져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혹시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확실하게 이야기 해 주시기를 바란다.
1-2.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자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초월)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자더라. 얼마나 간교했으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했겠는가. 여기서도 하나님이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지 하나님이 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더라. 이 가장 간교하다는 말의 뜻은 나쁜 말로는 간교하다는 말이고, 좋은 말로 하면 지혜롭다는 말이다. 왜 이 말을 썼는가?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인간도 굉장히 지혜와 지식이 많은 존재다. 우리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 이만큼 발달할 줄은 하나님도 몰랐을지 모른다. 그 정도로 인간이 지금 변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 들짐승만큼 그렇게 지혜롭지 못하다. 그렇게 지식이 충만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간교하다는 것이다. 마귀는 속이는 자인데,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고 속였다. 그것이 얼마나 큰 사기꾼인가 하면 아주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더라고 할 정도로 표현되었다.
기독교의 관점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마귀의 계교로부터 시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관점이다. 이것이 인생관이고 우주관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는 사람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그 말이다. 밖으로부터 왔다.
여기서 불교와 차이가 생긴다. 불교는 모든 원인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므로 나만 지혜로우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 왜? 밖의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고 마귀도 물론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도 귀신은 많이 있는데 이런 마귀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생 문제의 해답을 어디서 받을 것인가? 불교에서처럼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는 여기서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마귀가 간교해서 그렇다는 여기서 출발할 것인가? 이에 따라서 문제 해결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공식이 다르니까 해결하는 방식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말도 전혀 안 맞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보면 왜 저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 좀 지혜롭게 하면 될 텐데 하는 이런 일들이 많다. 또 어리석어서 망신당하는 사람도 많고, 어리석어서 망한 사람도 많다. 자기는 지혜롭다고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것이 많다. 그것도 사실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이나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가 부족하다고 해서 다 그런가? 그렇지도 않다. 성경의 관점은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혜는 마귀의 지혜만 못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 사기꾼도 1급 사기꾼을 만나면 2급 사기꾼은 안 된다. 사기꾼들끼리 경쟁을 한다고 가정해 보라. 거기에도 등급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마귀만큼 그렇게 지혜롭고, 그렇게 간교하게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밖에서 왔다는 것이다. 인간도 지혜로우면 편리하게 잘 살 수 있다. 지혜롭게 하면 많이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귀만큼 지혜로울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밖에서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초월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하고 모든 지혜를 동원해도 내가 안 되는 데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아무리 잘났고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안 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밖에 있는 요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도 병이 나는 원리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밖에서 들어오는 원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안에서 나오는 원인이 있다. 내인과 외인이 있다. 건강한 사람은 내인이 없는 것이다. 너무나 건강하기 때문에 안에서 병이 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바깥에서, 예를 들어 지독한 균이 들어온다면 병이 나는 것이다. 어지간한 것은 다 이겨내지만 너무 강한 것이 들어오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인만 없다면 절대로 병이 걸리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완전히 내인이 없어도 외인에 의해서 정복당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어느 것이 맞는가는 여러분이 판단을 내리고 우리가 판단할 일이다. 과연 사람은 사람 속이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보다도 더 크게는 바깥에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 문제가 우리에게 딱 잡혀야 인생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것인가를 알 것이다. 내인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해결해야 되고, 외인이라고 생각되면 나보다 큰 자를 의지해야 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때는 내 힘으로 안 되니까 남의 힘을 빌려야 한다. 여기서 원인을 어디에 두고 찾는가에 따라서 방법이 달라지게 된다.
내 안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절로 가야 한다. 절로 가서 자기 안의 원인을 찾아서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불교의 말을 들어보니까 해결 방법이 너무너무 많다. 왜냐하면 다 자기 안에서 찾았으니까 찾는데 대한 대책이 있을 것이다. 너무너무 지혜로운 방법들이 많이 있다.
거기에 비하면 성경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성경은 사람이 지혜를 다 깨달아서 된다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만큼 지혜로운 말이 그렇게 많이 없고, 모두 믿어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도와줘서 이렇게 되었다거나 하나님께 의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이 볼 때는 어리석다. 세상이 볼 때는 불교의 말이 훨씬 더 매력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공감이 되면 매력이 있는데 믿음이 있으면 매력이 없다.
옛날에 내가 하나님을 몰라서 해맬 때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쓴 책을 보면 고민할 때까지는 다 같은데 해결했다는 곳에 가면 훌쩍 넘어가서 비행기를 탔는지 배를 탔는지 모르겠는데 저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몰랐다. 이 사람이 어떻게 저쪽으로 건너갔느냐는 것이다. 배가 있으면 그 배를 나에게 소개시켜 주어야 그 배를 타고 갈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배가 없다. 그것이 비행기라면 비행기를 소개해 주어야 비행기를 탈 텐데 비행기가 없는 것이다. 비행기나 배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다 믿음이다. 그러니까 안 믿어지면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신기하게 믿음이 생기면 그것이 이상하게 된다. 어떻게 믿음이 생기는지 신기한 일이다.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안 된다. 강은 깊고 넓은데 배는 없다. 그런데 건너갔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도저히 이성으로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에게 그 믿음이 생길 때가 온다. 그러면 나도 건너가게 된다. 이것을 세상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이다. 저것은 엉터리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것이다. 능력이요, 지혜인 것은 분명히 있다. 건너간 사람을 보면 분명히 능력과 지혜가 있는데, 나는 분명히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능력과 지혜가 없다. 못 건너갔기 때문이다. 이 차이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상 비약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냥 1 더하기 2 더하기 3 더하기 이렇게만 해서는 도저히 모르는 세계가 나온다. 어디 가다 보면 딱 막혀버린다. 그래서 강을 건너야 될 때가 온다. 히브리인이라고 하면 강을 건넌 사람들이다. 그들이 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가나안까지 올 수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건너올 때 유브라데와 티그리스라는 두개의 큰 강을 건너서 왔다.
처음에는 합리적인 것 같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딱 막히는 데가 생긴다. 그것은 강이 와서 그렇다. 이 강을 건너고 못 건너는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그때 눈을 감겨서 끌고 가는 것같이 그렇게 하시는 것 같다. 눈을 뜨고서는 무서워서 강을 못 건너갈 것이다. 그때 눈을 감겨서 끌고 가는 것 같다. 건너와서 보면 아이쿠 내가 다른 세계에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에는 아무래도 안 믿어지더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이 믿어지는지 너무도 신기하다. 나도 아무래도 안 믿어졌는데 어느 날 딱 믿어지는 날이 왔다. 그것은 내가 합리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었다.
지혜가 부족한 것도 물론 문제이기는 하지만 지혜가 부족해서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도 문제이지만 나만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남이 문제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다. 나만 문제가 아니고 나를 조종하는 사탄도 있을 수 있다. 외부 세력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마귀가 간교해서 그렇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길을 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혜, 지혜라고 아무리 하지만 길이 없는 딱 막힌 곳에 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그런데 그때 누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마귀가 그래서 그렇다면 길이 열린다.
마귀가 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마귀보다 큰 자가 있다면 내가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는 못 이기지만 우리 형님이 힘이 세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학교에서 만날 얻어맞는데 우리 집에 형님이 있다. 우리 형님이 나보다 크다면 형님 힘을 한 번 빌려야 되겠다고 해서 어느 날 형님을 데리고 학교에 가서 전시만 해도 다음부터는 안 때린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형님마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버지도 없고 형님도 없어서 해 줄 사람이 없으면 절망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형님이 있으면 든든하다. 네가 날 때려? 그래 우리 형님하고 한 번 해봐. 이렇게 될 게 아니겠는가?
오늘 마태복은 4장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이야기다. 알기 쉽게 말하면 우리 형님이 이겼다는 이 말이다. 우리 형님이 마귀를 이겼다는 이런 문맥이다.
2.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생기를 받았듯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지어졌음
인간의 목표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생기를 받았듯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할 존재로 지어졌다.
2-1. 자녀로서 하나님 생명과 성품을 표현하고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함
자녀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고,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할 존재로 지어졌다. 지어지기를. 그러나 마귀는 다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주었다.
마귀와 사람은 어떻게 틀린가? 마귀는 원래 천사였다가 이탈한 것이 마귀인데, 천사와 사람은 무엇이 틀린가?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이고,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이다.
천사와 사람은 만들어지기를 다르게 만들어졌다. 목표가 다르니까 만들어진 구조도 다르다. 우리가 만일 사람의 본분을 모르고, 성품과 생명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우리도 능력으로 하나님을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천사의 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가 우리보다 월등하게 능력이 많으니까. 천사는 아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기구를 보면 포크레인(Poclain;굴삭기)이라는 것이 있고 페이로다(payloader)라는 것이 있다. 포크레인은 땅을 파는 기계고, 페이로다는 흙을 올려다가 싣는 기계다. 포크레인을 가지고 땅을 파는 것은 아주 좋지만 흙을 실으려면 여러 번 해야 된다. 반면 페이로다는 한번 해서 올리면 된다. 8톤 트럭이 두어 번 해버리면 다 들어간다. 같은 항목에서 경쟁을 한다면 누가 이기겠는가? 흙을 싣는 데는 페이로다가 이기고, 흙을 파는 데는 포크레인이 이긴다. 그런데 괜히 포크레인이 자기를 모르고 흙 싣는 곳에 가서 경쟁하고 있으면 질 수 밖에 없다.
왜 아담이 마귀에게 졌는가? 바로 자기 주제를 모르고 다른 일을 하려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빼놓고 내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 당연히 지게 된다. 내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남과 경쟁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경쟁해야 된다.
인생은 잘하는 것이 딱 한가지뿐이다. 자녀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그것을 표현하는 것과 그 백성이 되는 것만이 사람에게 아주 딱 맞는 본분이다. 이것은 누구나 어떤 사람도 할 수 있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도 할 수 있고, 아무리 약한 사람도 할 수 있다. 인간이면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능력을 가지고 하는 일은 어떤 사람은 좀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못한다. 그래서 능력의 세계에 가면 차별이 생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세계, 소위 선교나 목회 하는 곳에 가 봐도 능력의 차이가 엄청나게 있다.
조용기 목사와 나는 천지차이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나 믿음이 없다. 여의도에 순복음교회를 시작한다고 할 때 그 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국회의사당도 안 들어올 때였는데 거기다가 땅을 사서 교회를 짓겠다고 했으니 사람들이 다 놀랐다. 아무도 없었고 그때는 지금처럼 자가용이 많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스도 안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교회를 세워서 결국은 성공했다. 교회신도수가 현재 5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 능력과 우리하고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고 아예 상대가 안 된다. 그런데 내가 젊었을 때 한참동안은 나도 그렇게 하면 될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해봤지만 영락없이 실패하는 것이다. 안되도록 지어졌는데 되겠는가? 아무나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렇게 된다고 하길래 그러면 나도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되겠구나 했다. 그래서 좇아다녀 보았더니 아하 이게 아니로구나! 사람의 능력의 한계가 있구나. 차이가 있구나. 이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라도 내가 그것을 알았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몰랐으면 평생 그러다 말았을 것이다. 그
천사와 사람은 쓰일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다르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우리가 천사가 하는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다.
3. 마귀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 할 목적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줌
마귀는 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방해하려는 것이다. 자기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주권(主權)을 주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이니까 시기가 나고 한편으로는 멸시가 되었다. 능력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주권을 잡는다고 하니까, 사람이 주권을 잡으면 주권을 잡은 자 밑에서 또 일을 해야 되나? 이 생각이 들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옛날 옛날 먼 나라 이야기로 듣지 말고 지금 이웃 나라 이야기로 들어야 된다. 말은 창세기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사실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야기다. 자기는 이만큼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은 다른 곳에 있으면 안 되니까 자연히 시기가 나서 방해를 한 것이다.
사람이 지어지기 전에는 마귀가 이렇게 방해를 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말씀을 해석할 때 이미 벌써 부정적인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고 있기는 해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한 것은 사람이 지어진 후이다. 사람이 지어졌기 때문에 마귀도 주권이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이런 우주적인 사건이 생기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다 똑같다. 일본역사를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그렇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아들을 늦게 낳았다. 아들이 어린데, 풍신수길이 갑자기 죽었다. 생전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내 아들을 너희가 왕으로 세우겠느냐고 묻고 모든 신하들이 그렇게 하도록 맹세케 하고 서약을 받았다. 그런데 풍신수길이 죽고 나니까 이 다섯 사람 중에서 생각해보니까 아닌 것이다. 이제 8살인가 9살 먹는 놈한테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는가. 그래서 도쿠가와가 나온 것이고, 배신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볼 때는 그 어린 아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들은 풍신수길 밑의 장수들로서 자기들이 넉넉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인데 아기에게 맡기라고 하니까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서 도쿠가와 시대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도 똑같은 이치이다.
사람을 보니까 능력이 없고 자기는 보니까 능력이 있는데 왜 주권이 사람에게 넘어가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각이 달랐다. 자기의 성품을 표현해야할 존재가 있고, 자신의 일을 할 존재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다. 높아지려했기 때문에 뭘 했는가? 바벨을 건설하게 되었다. 바벨탑. 바벨론. 고대 그 시대에 가장 강대한 제국이 바벨론이었다. 그래서 바벨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바벨을 건설하게 되었고, 판단하므로 뭐가 되었는가? 연합이 안 된다. 지식이 들어왔으니까 판단하게 된다. 판단하게 되면 연합이 안 되어, 결국은 교회건축이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은 교회건축이지만 영원한 세계 안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다. 그 하나님 나라의 건축이 안 된다. 판단하면 건축이 안 된다.
마귀의 이와 같은 성질을 사람에게 주입시켰기 때문에 사람은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도 바벨을 건설하게 되고, 또 서로 판단하기 때문에 서로 연합이 안 된다. 교회도 안 되는데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사탄의 계략에 사람이 말려들어가 있는 것이고, 사탄의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4.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마귀에게 지식, 지혜, 능력에서 멸시를 받음으로 완전해 지려고 땀을 흘림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사탄에게 멸시를 받기 때문에 늘 완전해지려고 노력한다. 땀을 흘리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창3:19)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땀 안 흘리고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하루에 통장으로 몇 억씩 그냥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보험회사를 창설했던 사람은 지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통장으로 하루에 몇 십억씩 들어오는지 모른다.
땀 흘리고 먹고 산다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니다. 인간은 왜 땀을 흘린다고 하는가? 자기가 헛된 노력을 하기 때문에 땀이 난다. 왜 노력을 하는가? 사탄에게 항상 조롱과 멸시를 받으니까 그것을 해결해보려고 완전해져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극복해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보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 불완전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땀 흘리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정해지기를 딱 정해졌는데 그것을 벗어나서 다른 것을 하려니까 땀이 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개가 짖는 것은 우리가 볼 때는 대단히 피곤한 일이고 목이 쉬지 않겠나 생각하지만 개는 짖는 것이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처럼 풀을 먹고 살라고 하면 자기가 못할 일이니까 죽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할 일,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 쉬울 텐데 맡은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니까 일을 해도 헛것이 되고, 헛것이 되니까 또 수고롭고 땀이 흘러야 된다. 네가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완전해지려고 수고를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이 있는데 어떤 면으로든지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다보니까 땀이 흐르게 된다.
4-1. 생존문제가 해결되면 완전해지려고 함
생존 문제가 1차적인 문제다. 우리가 동물로 태어났으니까 먹고 살아야하니까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수고가 된다. 그런데 이 먹는 문제는 1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다 해결하는 문제다. 짐승도 해결하는데 사람이 해결 못하겠는가. 정신만 제대로 되면 밥은 먹고 산다. 부자되는 것은 맘대로 안 되지만 밥 먹고 사는 것은 구걸하더라도 겸손하게 정성껏만 구걸하면 다 밥을 주지만 왜 밥을 못 얻어먹는가 하면 거만하게 구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굶어죽게 되어 있지 않고 살게 되어 있으므로 생존문제로 너무 죽느니 사느니 할 것이 아니다. 자존심만 버리면 다 살 수 있는 일이다.
생존문제가 해결되면 또 해결할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생존문제가 해결이 되어도 완전해져야 되는 문제가 있다. 완전해지려고 노력하게 되면 점점점점 뭐가 드러나게 되는가? 연약함과 불완전함이 더 드러난다. 완전해지려고 하지 않을 때는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 몰랐다. 완전해지려고 하지 않을 때는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몰랐다. 그런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완전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연약하고 더욱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욱 갈등이 많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완전해지려는 생각이 좀 적다. 종교 생활을 하게 되면 완전해지려는 생각이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사람은 안 돼.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안 돼. 죽으면 해결 될거야. 천당에 가면 다 해결 될거야. 이렇게 다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완전해지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4-2. 완전해 지려고 하면 할수록 불완전함을 알게 됨으로 사탄의 송사를 피할 수 없게 됨
왜 이렇게 완전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탄의 송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너는 그것 밖에 안 되냐? 너는 돌로 떡을 못 만들어 먹느냐? 너는 성전꼭대기에서 못 뛰어 내리냐? 자꾸 이렇게 송사한다. 거기서 완전해지려니까 되겠는가? 안 된다. 1층에서 뛰어내려서 살면 2층에서 뛰어내려봐라 할 것이고, 2층에서 뛰어내려서 살면 3층에서 뛰어내려봐라 할 것이고, 3층에서 뛰어내려서 어떻게 해서 살면 4층, 5층 계속 올라갈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아무리 연습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언제 깨져도 깨지게 되어있다. 1층에서 뛰어내려서는 살 수 있다. 2층까지도 점프를 잘하면 되고, 3층도 점프를 잘하면 죽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점점 단수가 높아져서 그렇게 하려는 사람에게는 점점 층계가 높아지니까 결국에는 떨어져 죽는 것이다.
사탄의 송사를 계속 받는다. 이 송사를 받으면서 더욱 연약하고 더욱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내용이 로마서를 읽어보면 잘 나와 있다. 죄를 죄로 알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이고,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데 율법이 오니까 죄가 죄로 드러났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바로 자기가 완전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율법이 오니까 더욱더 죄인으로 드러났다는 말이다.
법이 완전할수록 더욱 불완전한 자로 드러나게 된다. 율법이 없고 다른 어떤 도덕법이 있는 세계의 사람과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율법이 있는 사람과 그 죄책감이 다르다. 도덕관념이 적당히 되어 있는 데는 사람이 죄책을 느껴도 적당히 느낀다. 법이 그러니까. 그런데 율법은 고도의 법이다. 고도의 법이기 때문에 더 고도의 죄책감과 불안을 느낀다. 사람은 완전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약해진다. 약하다는 것만 깨닫게 된다.
바울은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네가 바벨탑을 안 쌓지, 안 그러면 계속 바벨을 쌓을 것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역이용해서 더 연약함을 깨닫게 했다고 바울이 해석했다.
4-3. 그러므로 생존문제와 완전문제에 휩싸여 하나님의 문제를 알지 못함
그러므로 생존의 문제와 자기 완전의 문제에 휩싸여 하나님의 문제를 볼 수가 없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은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느냐, 내가 지금 배고픈데 우선 먹어야지 한다. 먹고 살만한 사람한테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자기 문제에 빠져 있다. 자기 완전을 위해서 빠져 있다. 교회에 와도 역시 거기에 빠져 있다. 교회에 와도 하나님 말씀이 제대로 안 들린다. 항상 그 차원에서만 들린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바로 그래서 주어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아니면 율법이 주어질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니까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율법이 주어지지 않는다.
생존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완전 문제로 들어가고, 자기 완전의 문제로 들어가면 하나님 문제는 보이지 않게 된다. 자기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다 자기가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기도도 그렇고 뭣도 그렇고 종교적인 모든 노력이 자기 완전을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문제는 없다. 거기 가보면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문제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있다. 여호와를 그렇게 잘 믿는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 표적은 무엇 때문에 있는 표적인가?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표적을 구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난 후에도 모세는 우리에게 40년간 만나를 줬는데 너는 무엇을 주겠느냐? 이렇게 묻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문제인데, 네가 이것을 주겠느냐? 이렇게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은 지금도 계속 표적을 구하고 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했다. 완전해지려니까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통해서 완전해져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하나님 문제는 어디로 가고 없고, 자기 문제만 남았다. 표적을 구하고는 민족적인 문제고 국가적인 문제이고 자기 육신의 문제에서 나온 문제이고,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자기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가? 그것은 삶이 열악하고 강퍅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문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헬라인은 왜 지혜를 찾는가? 먹고 살만하고 배부르니까 그렇다. 헬라인들은 좋은 부유한 환경, 좋은 여건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을 통과하여 와서 유목민으로 그리고 또 적들이 둘러 싸여 있는 환경에서 생존 자체가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표적이 필요하다. 헬라인들은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뭐가 필요한가? 자기 완전을 추구한다. 그래서 철학이 발달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이 철학이다. 필로소피인데 소피아를 사랑한다는 것이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지혜고 뭐고 배가 불러야 되지 배고프면 소용없다. 이제 하나님 문제는 어디로 가버리고 없다. 자기가 완전해지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나님도 왜 필요한가? 자기가 완전해지려니까 필요하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자기 완전을 위해 구하고 있다.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나는 이런 점이 부족합니다. 이런 것을 채워 주십시오. 방법만 다르지 똑같다. 자기 혼자 명상을 통해서 헛된 것을 다 정리하고 진실만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이나 방법은 다르지만 목표는 똑같다.
하나님 목표가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수없이 많은데 하나님 문제와 관계가 없는 교회가 너무 많다. 하나님 문제와 관계가 없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 이것이 큰 문제다.
5. 여자의 후손인 예수는 하나님 문제인 그 나라를 전파하려고 마귀와 대결하심
예수! 이 사람은 누구인가? 여자의 후손인 예수는 하나님 문제인 그 나라를 전파하려고 왔기 때문에 마귀와 전쟁하는 것이다. 마귀와 전쟁하는 것이 내 시험을 위해서 완전해지려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외부 세력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 외부 세력은 마귀다.
마귀와 먼저 전쟁을 해서 결판이 나야 무슨 일이 되지 여기서 안하면 일이 안 된다. 원인이 있는데 원인을 놔두고 아무리 치료해도 되겠는가? 병이 있는데 병은 놔두고 간지럽다고 간지럼 약만 먹으면 되겠는가? 속이 곪아서 밖이 아픈데 진통제만 계속 쓰고 있으면 되겠는가? 진통제를 쓰면 아픈 줄을 모르니까 잘 안 낫는다고 한다. 아픈 줄을 알아야 내 몸에서 방어를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아픈 줄을 모르니까 몸에서 가만히 있어 버린다고 한다. 병이 나면 더 빨리 죽어버린다고 한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 이 사람은 왜 마귀하고 싸웠나? 하나님 문제 때문에 싸웠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려면 마귀는 당연히 방해할 것이다. 그래서 마귀와 대결한다.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라고 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 말과 다른 말이다. 그것은 자기 욕심 때문에 시험에 든 것이고, 자기 생각 때문에 시험에 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능동적으로 시험을 받으러 나갔다고 한다.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성령에 이끌려서 갔다. 마귀에게 이끌린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서 갔다. 그러면 하나님도 이 전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 전쟁을 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새로운 대표자가 하나 나왔으니까, 이 대표자와 원수가 대결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대결해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주도권이 결정되게 되었다.
여기서 만일 예수님이 지면 우리 인간은 다 지는 것이다. 다 지면 뭐하냐? 우리는 하나님 목적대로 성품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게 되고, 우리는 천사처럼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천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전쟁이 이런 전쟁이다. 아주 중요한 전쟁이다.
맥아더가 일본에 상륙해서 승리를 하느냐 못하느냐는 것은 우리가 해방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하는 문제였다. 일본과 둘이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문제였다. 천황에게 항복 받았다. 그것도 무조건 항복받았다고 하는 이것은 우리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만일 일본이 조건부 항복을 해서 한국은 빼놓고 우리 본토만 점령해라. 이렇게 되었으면 한국은 여전히 일본의 수하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항복을 받았다. 전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한국에 있는 일본 사람들까지 전부 무장해제 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싸우는데 우리는 그 싸움으로 인해서 해방되었다. 미국이 만일 졌으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 이겼기 때문에 우리가 해방이 되었다.
예수님이 만일 졌으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해방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전쟁처럼 중요한 전쟁이 없다. 우리의 사사로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겨보았자 소용이 없다.
내가 일본사람과 싸워서 주먹으로 이겨보았자 소용이 없다. 일제시대에는 제일 존경 받는 사람이 깡패였다. 왜 그런가 하면 법으로는 못 이기니까 일본사람을 통쾌하게 주먹으로 한 대 날릴 사람은 깡패밖에 없었다. 깡패를 가다라고 했다. 가다라는 것이 해방 후까지도 힘을 쓰게 된 이유가 일제시대에는 가다가 최고였다. 공부 잘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공부 잘해도 한국 사람은 갈 데가 없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가다가 되어 일본사람을 뒷골목에서 쳤다고 하면 시원한 것이다. 완전히 살판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전부 학생회 같은 것을 다 주관하고 있었다. 해방 후 까지도 그랬다. 어깨들이.
누가 이기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 예수님이 졌다면 큰일 날 뻔 했다.
5-1. 속이는 자는 머리가 간교함으로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해야 함
속이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머리가 간교하다. 간교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된다.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머리. 이것은 간교하다는 말이다.
5-2. 인생의 약함을 공격하고 속였음으로 반드시 인생으로써 승리해야 함
인생의 약함을 공격하고 속였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것을 가지고 이기면 안 된다. 나를 속이고 인생을 속이고 인생을 멸시하던 자가 지금 문제가 됐다. 그러면 이 멸시 받던 것이 그냥 있는 한은 문제 해결이 안 된다. 결국은 이 멸시 받던 자를 들어서 이겨야 그것이 참으로 이긴 것이다. 그래야 이기는 것이지 멸시받던 것이 그냥 그대로 있으면 이겨봤자 다시 또 지배 받을 것 아니겠는가. 다른 것으로 이기면.
만일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마귀와 싸울 때 마귀가 뭘 하면 돌멩이 가지고 불로 이기던지 했으면 그 당시에는 이겼다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못할 것 아닌가. 예수님께서 불로 이겼으면 우리는 불로 못 이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이겼으면 우리는 못 이길 것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이겨 줘도 헛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이겼기 때문에 우리한테 희망이 있다. 사람으로서.
미국은 한국에 와서 일본 사람의 무장을 해제시켜줬기 때문에 우리가 해방이 됐지만은 이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결국은 사람이 멸시받아서 진 문제니까 사람이 승리해야 참 승리한 것이다. 그러려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이겨주어선 소용이 없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이겨야 효과가 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는 우린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은 약하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였는데 이상한 사람이 나와서 우리와 똑같은 것을 가지고 이겼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멸시받고 있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나와 그것으로 이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와서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나와 똑같은 위치에서 이겼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지금도 많이 오해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능력과 권세로 사탄 마귀를 멸하고 어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겨도 우리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이긴 것이 아니고 우리를 가지고 이겼다. 다시 말하면 나와 똑같은 것을 가지고 이겼다.
5-3.그러므로 인생으로써 마귀를 칠자는 여자의 후손뿐 임
인생으로서 마귀를 칠자는 누구인가? 왜 여자의 후손이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는가? 하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면 금방 할 것 아닌가. 왜 못하겠는가. 그런데 사탄의 머리를 상해봤자 천사가 한 두 놈 인가? 또 나올 것 아닌가. 그러니 해도 소용이 없다. 언제까지 계속 하나님이 보호만 해주고 있겠는가? 안 된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바로 네가 멸시하던 자, 네가 무시하던 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할 것이다. 그래야 완전히 정복이 되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밖에 없다. 코끼리를 들어다 이겼다거나 말을 들어다 이겼다고 해서는 안 된다. 호랑이 들어 가지고 이겼다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바로 멸시받던 그 여자의 후손이 이겨야 된다.
⑴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낳은 자가 아님으로 지식으로 대결하지 않음
여자의 후손이 있어야 되겠는데, 어떤 사람이 진짜로 이 성경이 말씀하던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이 되겠느냐? 그 여자가 누구고, 그 여자의 후손이 누구이겠느냐? 이 문제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지식으로 대결할 수 없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 지식있는 사람과 논쟁할 수 없다. 뭔가 좀 아니까 논쟁한다. 나도 논쟁을 하다 보면 뭔가 나도 좀 안다는 것 때문에 논쟁한다. 나는 아주 모르면 논쟁을 아예 안한다. 아예 내가 모르면 논쟁할 생각도 안하는데 나도 뭐 좀 안다는 이것 때문에 논쟁을 한다. 논쟁을 하고 보면 항상 늘 실패를 한다. 논쟁에서 이겨서도 안 된다. 내 생각으로는 틀린 말을 하는 것 같아 이기려고 해보면 안 된다. 막상막하다. 눈으로 빤히 본 일도 안 된다.
우리가 6.25를 격지 않았는가. 피난도 가고 했는데도 요즘 젊을 학생들이 책을 보거서는 우리가 북침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침략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정말 아무리 내가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교정시켜 보려고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안 된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 그래서 논쟁이라는 것은 헛일이구나. 안 되겠구나. 지금 그 책 본 사람들에게 해보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총 맞고 왔다고 해도 안 된다. 우리 교회도 총 맞고 오신 상의군인도 있다. 그런데도 안 된다. 우리는 탱크 한 대도 없었고, 로켓트포 하나가 없었다. 그래서 단숨에 서울로 밀고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해도 안 되고, 별 말을 해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이론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구나. 그러니 100년 후에 가보면 완전히 역사가 달라 질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도 이것이 안 되고 증인이 와서 말해도 안 되는데, 증인도 없고 다 죽어 버리고 나면 역사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6.25세대 참전했던 사람들이 다 없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10년 후면 거의 다 없어져 버린다. 그런 판국에 말해도 안 되니까 앞으로 누가 이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서 역사는 완전히 왜곡될 수 있다.
만주에서 온 우리 형제자매들 이야기가 남한에 와서 들으니까 혼란스럽다고 한다. 지금까지 자기들은 북침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남조선에서 침략해서 망하게 됐는데 중공이 도와주어서 이겼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와서 들으니까 정반대라 머리가 혼란스럽다고 한다. 만두집 자매가 요즘 머리가 혼란스럽다고 한다. 세상에 참 말만 있는 줄 알고 역사의 기록이 참 말만 있는 줄 알지만 아니다. 역사관에 의해 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다 다르다.
그리고 그 이론은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 한번 들어가면 도저히 이론으로 이길 방법이 없다. 이론을 내 놓는 사람에게는 아예 이론을 말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도 나도 버릇이 돼가지고 틀린 말을 하면 그냥 못 봐주겠다. 틀린 말을 하면 못 봐 주겠다고 교정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지난번에 여호와의 증인이 왔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내놓고 막 따지고 대든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 내보낼까 연구하다가 무슨 목적으로 전도 하러 왔느냐, 전도하려면 무슨 목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느냐고 그랬더니 지상 천국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이 안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나도 안 죽고 싶으니까 피조물로 지어진 존재 가운데 죽지 않는 것이 있으면 성경에서 찾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러면 내가 여호와의 증인에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처음 듣는 소리니까 띵 했다. 그 사람들은 사람은 안 죽을 것인데 죄를 지어서 죽었다는 것이다. 회복이 되면 사람은 안 죽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상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할 테니까 피조물로 지어져서 지음 받은 것이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돼 있으면 찾아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아직 안 온다.
이번에도 아줌마들이 전도하려 왔는데 우리 집에 안 들어온다. 남자들이 들어오는데 남자들이 안 온다. 남자들 중에 그 사람이 나이가 제일 많은 수장이다. 언제 또 올지 모르겠지만 그 이론을 찾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 참 어려울 것이다. 하여튼 입을 막아 버리는 수밖에 길이 없다. 계속 하면 계속 해서 끝이 없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어야 된다. 그런 여자라야 안 되겠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어야 된다. 그런데 사람 치고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여야 안 되겠는가. 이런 여자를 찾아야 되는 것이다.
⑵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순수하게 인생만 남음으로 예수는 인생으로 대결하심(위치밖에 없는 사람)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무엇이 남는가? 순수하게 된 인생만 남는다. 예수님은 무엇으로 대결했는가? 순수하게 된 인생만으로 대결했다. 선악을 안 지식으로 대결한 것이 아니고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니까 돌로 떡을 못 만드는 것이 당연하지. 사람이니까. 지식으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도 만들어 먹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 지식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이론이다.
그러나 지식에 대해서 죽으면 사람이니까 못 만들어 먹는 것이 당연하지. 난 사람이니까 못 만들어 먹어. 이렇게 된다. 아이들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단번에 난 못 만든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지식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래,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정도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야 자격이 있다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지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대결하지 않고 순수하게 인생만으로 대결했다. 지식이 아닌 사람이라는 위치밖에 없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이 나오려면 이런 여자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섯 여자가 선택되었다. 이 여자들도 원래는 선악과가 가득 찬 사람들인데 어떠어떠한 연유로 인해서 선악과로는 못살게 된 사람들이다. 아예 살수가 없게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선악과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된 것이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고 또 세상이 나를 향해 죽었다. 바울이 말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이 또한 나에 대해 죽었던 것처럼 예를 들면 다말은 세상이 자기에게 죽었고 자기도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다. 그 말은 자기도 지식에 대해 죽고, 지식도 나한테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다. 다말에게는 지식이 안 통한다. 지식이 통할 수가 없다. 지식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다섯 여자가 다 똑같다. 그런 사람들을 택해 가지고 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예수의 족보를 따져보니까 그런 족보로 왔다는 것을 안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것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를 먼저 만나서 이 사람이 바로 사탄의 머리를 상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고 나서 그 사람의 족보를 추적해 보니까 그런 여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들을 통해서 물꼬가 돌아서 온 것이다. 이렇게 나가야 될 물꼬가 이 여자들을 통해서 이렇게 돌아서 온 것이다. 이 다섯 여자들 때문에.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성하고 거룩하고 성녀인 여자들이 아니다. 그런 여자들이 어떻게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겠는가? 그런 여자들은 이런 아들을 낳을 수가 없다. 예수 같은 아들을 낳을 수가 없다. 예수를 낳으려면 다섯 여자 같은 여자들이 낳는다. 이런 여자들이니까 예수를 낳은 것이다.
완전히 위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을 낳아놓은 것이다. 아무것도 자랑 할 것이 없는. 우리는 예수님이 굉장히 자랑할 것이 많은 줄 알지만 30살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없다. 30살이면 이스라엘에서는 완전 성년이어서 정치도 하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30살이 되면 성년뿐만 아니라 완전히 성인으로서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무 기록도 없다. 자랑 할 것이 없으니까 없는 것이지 있으면 안하겠는가.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위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인생의 위치는 확실하지만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귀에게 갔을 때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내놓은 것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뭔가 좀 다른 것이 있었으면 다른 것을 내놓을 수 있다. 있으면 도저히 안내놓을 수가 없다. 뭔가 내 속에 아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내어 놓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런 중대한 전쟁에서 무기가 있다면 안 내어 놓겠는가. 무기가 없으니까 못 내어 놓은 것이다. 전쟁할 때는 모든 무기를 있는 대로 다 내어 놓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할 때 마다 새로운 무기가 개발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기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니~”라는 말이 나오고,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위대해서 나온 말도 아니고 연구해서 나온 말도 아니고 아주 놀라운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나온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나온 말이라야 우리말이 되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독특한 점이 있어서 나왔다면 우리는 못한다.
사람들은 마귀를 이기려면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야 이긴다고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신명기 8장 3절에 나온다. 신명기 8장 3절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이겼다고 한다. 그것이 아니다. 신명기 8장 3절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생전 안 읽어본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이 성경 구절을 알아서 이긴 것이 아니고, 사람의 위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겼다. 우리 모든 인간이 아무것도 없어도 위치는 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이렇게 부족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치만 찾고 있는데, 네가 어디 있느냐고만 묻고 있는데, 내가 떡이 없습니다, 밥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묻지도 않는데. 우리는 왜 하나님이 묻지도 않는 것을 대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모fms다. 하나님이 물은 것만 대답해야 되는데, 물은 것은 대답하지 않고 묻지 않은 것만 자꾸 대답하려고 한다.
예수는 그 위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 위치만 가지고 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만약 여기에 조금이라도 보탰으면 승리할 수 없다. 성경을 좀 알아서 했으면 이기지 않겠느냐? 아니다. 성경은 사탄이 더 많이 안다. 우리보다 기억력이 더 좋다.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을 만나면 성경으로 싸우자고 한다. 성경으로 그 사람들을 못 이긴다. 그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싸우면 당신과 나는 끝이 없다. 그러니까 성경을 놔두고 사람과 사람으로 이야기하자고 했더니 안 한다고 한다. 성경으로 이야기해야지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경을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른데 무슨 수로 맞아지겠는가. 그 사람이 보는 성경이 다르고, 내가 보는 성경 다르니까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까 맞아지겠는가? 안 맞아진다. 그런데 계속 그러고 다닌다.
어설픈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대항한다고 하다가 막혀 들어간다. 왜냐하면 자기들보다 성경을 훨씬 많이 안다. 전혀 모르던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십자가를 십자가가 아니고 나무기둥이다. 그런데 십자가라고 알고 있었다. 원문을 찾아 놓고 이것을 봐라. 이것이 십자가냐, 나무기둥이지. 그러면 그냥 지는 것이다. 원래는 십자가가 아니고 나무기둥이다. 그런데 그때 처형하는 방법이 십자가가 가장 잔인한 방법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전달되어 나온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원문에는 나무기둥이다. 구약성경에는 “나무에 달린 자 마다”라고 되어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린다는 말이 아니고 나무기둥에 메달아 죽인다는 뜻이다. 이것 하나만 해도 당장 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 예수님 나신 날이라고 다 알고 있고 믿고 있다. 그런데 아니다. 그것은 태양신을 숭배한 날이라고 하면 지는 것이다. 로마 사람들이 태양신을 숭배한 날이다. 반태옥 신전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던 날이 12월 25일이었다. 그 날을 국교가 되면서 예수님 탄생일로 만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오기 전까지는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12월 25일 난 것으로 알고 있다. 축하하기 위해서 생일을 하나 만든 것이다. 논쟁을 하다 보면 그냥 진다. 그 사람들은 그것만 연구해서 왔는데 이기겠는가. 기독교에서는 무엇을 주장하는데 무엇이 틀렸다는 것을 연구해서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이기겠는가. 그러니까 다 진다.
처음에 신자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 사람을 훈련시켜서 맨 먼저 신자를 찾아가지 않고 목사를 찾아 간다. 목사와 논쟁해서 이기면 이 사람이 확신이 확 생긴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일부러 목사를 찾아간다. 그런 사람들에게 논쟁해서 이기겠는가. 그런데 나처럼 하면 이긴다. 그것도 하기 쉽지 않다. 그냥 인간으로 내놓고 하는 것이 낫다.
6. 하나님 나라의 주권(영적 주권)은 위치에 있음으로 예수는 그 위치로 승리하셨음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위치에 있다.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치에 있다. 우리가 이것을 알면 쉽다. 예수는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 위치만 가지고 그 위치로 승리했다. 바람을 잠잠케 할 때는 능력으로 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위치로 안 된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 우리 인생의 위치로 안 된다. 마귀를 이길 때는 능력이 소용없다. 능력은 나보다 더 많으니까 마귀를 이길 때는 위치로 전쟁을 해야 된다.
6-1. 진실은 위치의 문제임(행위 이전에)
⑴ 위치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임으로 지식(머리)으로 얻지 못함
위치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지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바꿀 수가 없다. 자기가 아무리 간교해도 사람의 위치를 가질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진실은 위치 문제다. 행위 이전에 위치 문제다.
⑵ 사탄은 지식으로, 예수는 위치로의 대결에서 사탄의 지식은 무력화되었음 (머리가 상함)
사탄은 지식으로 나오는데 예수는 위치로 대결했다. 그래서 사탄의 지식은 무력화되었다. 같은 무기로 했으면 우리가 질 텐데 다른 무기로 했다. 똑같은 무기로 하면 서로 무기 경쟁을 한다. 그래서 포를 쏘면 몇 미터 가느냐를 서로 경쟁한다. 25㎏ 가냐 40㎏ 가냐를 갖고 싸운다. 25㎏ 가는 놈과 40㎏ 가는 놈이 싸우면 40㎏ 가는 놈이 당연히 이긴다. 그러면 상대방에서 45㎏ 짜리를 또 만든다. 그래서 점점 무기가 발달되어 나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결을 하면 끝이 없는 대결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무기로 전혀 상관없는 무기로 이겼다. 상대방이 전혀 없는 무기를 가져야 이긴다. 독일이 그렇게 승승장구 했던 것도 이쪽에서 없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겼다.
우리도 상대방이 없는 무기를 개발해야지 상대방이 있는 무기를 개발하면 아무리 개발을 해도 못 따라간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주포는 40㎏ 간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25㎏ 간다. 북한이 아무리 경쟁을 해봤자 미국에서 만드는 자주포를 당해 내겠는가? 못 당해낸다. 그래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으로 안 되니까. 한방으로 되는 것. 돈을 제일 적게 들이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원자폭탄을 하나 만드는 것이다. 돈도 제일 적게 들고, 방법도 제일 쉽다. 미군의 엄청난 화력을 이길 수 없으니까 핵을 보유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앞으로 6자 회담 아무리 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의 생존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남이 못 가지고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이긴다. 남이 가진 무기로는 이길 수 없다.
그러면 인생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무엇이고, 사탄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지혜나 지식이나 이런 것은 사탄이 가지고 있는 무기이고, 성품과 인격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기다. 우리는 이 무기를 개발해야 된다. 그래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이 저쪽서 지식으로 무기를 탁 드러냈는데 이쪽에서 탁 다른 무기를 내놓으니까 그 무기가 소용이 없게 되었다. 무력화 되고 말았다. 아무 쓸모없게 되었다. 상대방이 이것을 받아줘야 되는데 상대방이 전혀 상관없는 길로 가버리니까 전쟁이 안 되고 말았다.
그래서 머리가 상했다는 것이다. 이제 까지는 머리를 써서 이겼는데 머리를 써도 안 되는 길이 생겼다. 자기가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이것은 안 된다. 사람의 위치를 자기가 어떻게 갖겠는가? 지식으로는 도저히 사람의 위치를 가질 수 없다.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개발했던 모든 무기가 다 무력화 되고 말았다. 이래야 우리가 전쟁에 이기는 것이다.
6-2. 승리의 위치가 예수 안에서 확인되었음
승리는 위치의 전쟁이니까 위치는 예수 안에서 확인이 되었다. 사탄을 이기는 위치는 이것이구나! 바로 이것이 무기구나! 다른 것은 백날 해도 소용이 없구나! 목이 터져라 산에 가서 소리를 질러서 능력을 받아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면 이기는가? 그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수는 사탄이 더 잘 알고 있고, 더 많이 알고 있어 소용없다.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을 보고, 아 저것이 방법이구나! 저것이 길이구나! 저것이 생명이구나!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아버지께로 가는 길도 많았다. 옛날에 우리가 생각한다면 많은 길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고, 내가 곧 생명이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느 길로 우리가 가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셨다. 승리하는 것도 내가 곧 길이라고 했다. 그분이 곧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확실하게 전쟁은 이제 확실히 끝났구나! 우리만 그렇게 하면 된다. 예수님과 마귀 사이의 전쟁은 끝났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전쟁이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아직 무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간까지 용이 계속 간다. 머리를 상한 채로 계속 간다. 죽은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큰 붉은 뱀이 되어가지고 유황불 붙는 곳에 들어간다고 되어있다. 그것은 우리가 준비될 때 새 예루살렘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부가 준비될 때에 그 전에 그것은 망하게 될 것이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언제 오는가? 땅위에서 당신의 교회가 준비될 때 그때가 사탄이 끝나는 때이다. 위치 전쟁에서 예수님께서 승리 하셨다. 우리 인류가 다 위치를 찾는 데로 돌아 와야 된다. 이것이 구속이다.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모든 사람을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해야 된다. 기독교인의 자리가 아니라 불교인 자리도 아니라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 와야 된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의 자리로 되돌아 와야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첫 번째 길이다. 이것을 안 하고 기도를 하라거나 뭘 하라고 하면 뭐 하겠는가? 위치가 다른 데 있는 사람이 기도 하면 뭐 하겠는가? 전쟁에 이기겠는가?
우리가 전쟁을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마귀를 정복하는 일을 하셨다. 그리고 이 전쟁은 우리 전쟁이다. 그분만 하시고만 전쟁이 아니고, 미국과 같은 무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미국은 무력을 가지고 이겼지만 우리는 그런 무력이 없다. 지금 또 전쟁하면 또 진다. 지금도 역시 국력이 약하니까.
그런데 예수님 전쟁은 그것이 아니다. 그때도 이겼고 지금도 이기고 영원토록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사탄은 영원히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도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영원히 끝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은 또 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이 다시 미국을 이길 수 있다. 그러면 또 우리는 일본한테 질 수도 있다. 세계정세는 그렇다. 어떻게 바꿔질지 모른다. 완전한 전쟁이라 할 수 없고 완전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다. 무조건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전쟁은 언젠가 또 뒤집어 질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마귀의 전쟁은 다시 뒤집어 질수가 없다. 이것은 영원히 뒤집어 질수가 없다. 무슨 방법으로 했으면 뒤집어 질수가 있지만, 방법으로가 아닌 위치로 한 전쟁이기 때문에 영원히 뒤집히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한 승리 가운데 지금 와 있다. 우리는 이 승리를 잡고 이 승리를 가지고 승리를 해야지 다른 것으로 하면 우리는 또 지게 된다.
예수 안에서 이것이 확인 됐다. 오늘 부로 우리는 다른 것을 가지고 해보려는 생각을 정지하고, 정지가 아니라 없애고, 절대적인 승리의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는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늘 대답하는 사람 “난 여기 있습니다.”, “나는 인생입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외에는 하나님이 쓰실 수 가 없다.
우리는 언제든지 “나는 사람입니다.” 대답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쓰신다. 어떻게 쓰실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의 후손으로써 예수의 사역 첫 번째 사역이 마귀를 이기는 일이다.
우리도 여자의 후손으로써 우리는 첫 번째로 마귀를 정복해야 우리가 복음도 전할 수 있고, 내가 뭐 천당에도 갈 수 있고, 천국에도 갈 수 있다. 이것 없이는 천당도 천국도 다 갈 수 없다. 다 헛일이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의 사역!
첫 번째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 우리는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을 봤으니까 이제는 언제든지 그 마귀를 병신 만들 수 있다. 언제든지 바보 만들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우리가 늘 당해왔지만 늘 우리가 지혜가 없다고 당하고 약하다고 당해 왔지만 이제는 반대로 바보를 만들 수 있다. 천재를 바보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위치를 내 놓을 때 그렇다. 그러면 완전히 천재가 바보가 되는 것이다. 천재를 바보 만들자.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연약한 인생을 이렇게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들인데 주님이 탁월하신 생명으로 탁월하신 위치로 우리의 원수인 마귀를 정복하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길을 이렇게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이후로 우리는 누구든지 이 위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가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하고 이 위치 이외 어떤 무기도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