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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 생명이다
도래하고 있는 협동조합의 시대
이호중(농생물 91,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기획팀장)
지난해부터 대학원에 진학하여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농업농민농촌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데 최근 협동과 신뢰의 사회가 너무나 시급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예전에는 애들 어렸을 때만 걱정하면 그만이었는데, 지금은 다 큰 딸아이도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거죠’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는 한 누님의 이야기다. 누님은 나보다 한 학번 위인데 일찍 결혼한 탓에 올해 첫째 딸이 대학에 입학했고 수원에 살고 있다. 최근 발생했던 수원지역 성폭행 사건에 대해 얘기하다 나왔는데 딸아이를 둔 엄마로서 하는 하소연이었다.
또 최근에 노량진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다가 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조그만 박스를 펼쳐놓고 5~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를 옆에 앉혀 두고 돌이 갓 지났을 아이를 업은 채 노점상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악세사리를 팔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보았다. 6살 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머리핀 몇 개를 샀다.
사실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며 늘상 보고 듣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밤거리를 마음 놓고 다닐 수 없고 그 부모는 성년이 된 딸자식의 귀가길까지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사회의 양극화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OECD소득불평등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는 조사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이고 이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고 자살이 속출하는 등 사회적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양극화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은 더욱 심각해 더 이상 방치하게 된다면 향후 우리 사회의 미래마저 어둡게 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울 정도다.
상호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사회, 치열한 경쟁위주의 사회에서 소위 스펙 있고 능력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재능을 사회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협동조합의 역할, 사회적 경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때라는 생각을 요즘 주위를 둘러 볼 때마다 더욱 깊게 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믿음과 신뢰에 기초한 사회와 경제를 만드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희망의 단초, 협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류 생존의 비밀, 협동
협동은 인류 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자 중 한명이었던 다윈을 평생 고민하게 만들었던 과제였다고 한다. 자신의 진화론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오직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데 수많은 사례에서 동물들은 협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례도 빈번하게 관찰된다. 하지만 다윈은 협동하는 집단이 더 우월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을 뿐 협동의 원리를 파헤치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
협동은 심리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근년에 경제학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시장 만능의 경제 원리로 답하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들이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적 딜레마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딜레마란 사회(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하기 때문에 결코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전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생각해보자. 저마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환경 파괴 따위는 모르는 척하는 게 합리적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구가 망할 것 같지는 않으니 신경 쓰지 않는 게 합리적이다. 환경 파괴에 따른 비용을 책정하여 시장에서 환경 파괴권을 판매할 수도 있다. 그러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부자들은 조금 더 마음 편하게 환경 파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2008년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를 생각해보자. 소득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리한 대출을 권했던 모기지 업체, 파산 위험이 있는 대출을 담보로 파생상품을 만들어 판매한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라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문제인 사교육과 부동산은 어떠한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는 사교육 비용과 부동산 가격은 계속해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에 맡겨 놓는 게 옳을까? 그렇다면 무상급식 이후 불고 있는 복지국가 건설의 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두가 이기적이라서 제 이익만 챙기려 든다면 누가 무상급식을 위한 세금을 내려고 할까? 시장에만 맡긴다면 사회복지 서비스가 제대로 형성될 수 있을까?
시장경제를 적용했을 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면, 이제는 그와 다른 원리로서 접근해야 한다. 경제는 시장이 아니다. 경제학에는 시장경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한 사회적 경제와 협동의 원리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도래하고 있는 협동조합의 시대
FC바르셀로나, AP통신, 알리안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회사의 소유구조가 같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농협처럼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돼 운영 중인 기업들이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천재 리오넬메시가 뛰고 있는 세계적 축구클럽 FC바르셀로나는 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든 "축구 클럽"이며, 오렌지주스의 대명사 "썬키스트"는 원래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의 오렌지농가들이 만든 "썬키스트오렌지농업협동조합"의 대표브랜드이다. 이탈리아나 스위스에서 소비자협동조합은 소매유통의 30~40%를 점유하고 있으며, 북유럽은 새로 짓는 주택의 상당수를 주택협동조합이 시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례를 소개할 수 있다.
협동조합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체의 활동 자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조합원)이 만든다. 영리기업은 자본에 인간이 종속되지만, 협동조합은 사람을 중심에 두고 여기에 자본을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2008년 이후 세계 경제의 대안으로 협동조합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올초 열린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포럼)에서도 이윤 극대화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온바 있다. 특히 세계적 경제위기는 협동조합 경제가 가진 대안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데, 양극화 해소와 일자리 창출, 지역공동체 활성화, 양질의 사회서비스 제공 등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협동조합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뒤흔들릴 때 유럽 협동조합 연맹은 ‘협동조합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천명한 바 있다. 이미 유럽에는 1억6천만 명의 조합원과 약 27만개의 협동조합들이 있고 약 54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등 유럽에서 협동조합은 이미 규모 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경제 주체이고, 특히 공동체적 소유, 민주적 운영, 자립과 지속가능성 등 금융자본주의 시장경제와는 다른 가치와 운영 원리로 새로운 영역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협동조합 경제는 이념이나 가치로서만이 아니라 대안적 실체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며, 요즘 우리나라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는 사회적기업도 협동조합의 전통과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올해 2012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 인데, 이 역시 빈곤 해소, 일자리 창출, 사회통합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협동조합이 가진 역할과 가능성을 국제사회가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유엔은 세계협동조합의 해를 통해 국민과 정책결정자들에게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협동조합의 활성화와 확산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펼칠 것을 각 국가별로 권고 하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한국의 협동조합
일제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한국의 협동조합은 1945년 해방 이후 본격 구성된 농업협동조합, 1960년대부터 도시지역중심으로 설립된 신용협동조합 등으로 대표되고 있지만 이들은 국가통제로 인해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왔다. 오히려 1980년대 초반부터 여러 개의 생활협동조합(생협)들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 초반 빈민운동진영이 빈민들의 경제적 불이익을 극복하고 그들의 자주적인 생활을 돕기 위해서 실천한 생산공동체 운동이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식품안전과 협동적 가치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소비자, 의료, 공동육아,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생활협동조합이 활성화되고 있다.
현재 생협이 취급하는 친환경농산물은 전체 농산물생산의 5%에 불과하지만 생협의 규모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2010년 말 현재 4대 생협연합조직(한살림, iCOOP생협, 두레생협, 여성민우회생협)의 조합원은 46만 세대에 달하고 있다. 또한 2010년 친환경농산물 공급액은 5천3백억 원 정도의 규모인데, 이는 약 4조원으로 추정되는 친환경농산물시장의 약 13%에 해당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또한 법제도의 미비로 아직 협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공동육아, 보육, 대안학교, 의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운영 중인 많은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협동조합기본법의 주요내용
지난해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됨으로서 올 12월부터는 5명 이상 조합원의 결사로 누구나 자유롭게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게 됨으로서 새로운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기본법의 주요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분야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8개의 특별법에 따라 1차 산업 및 금융 소비 부문에서 제한적으로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금융 및 보험업 이외의 모든 업종에서 협동조합을 설립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협동조합 설립 기준이 대폭 낮춰졌다. 기존에 설립 가능했던 협동조합도 조합원이나 출자금 등의 설립기준이 높아 자유로운 설립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출자금 규모에 상관없이 5명만 모이면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됨. 또한 주무부처의 인가 없이 신고만으로 설립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셋째, 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세계협동조합 역사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협동조합으로, 조합원 편익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협동조합과는 달리 조합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한다. 취약계층을 위한 일자리 제공이나 그들을 위한 사회서비스 제공,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 등을 수행하는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기본법의 의의와 한계
우선, 모든 경제 활동 영역에서 자유롭게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협동조합은 농협법 등 8개의 특별법에 따라 노동자협동조합, 공동육아협동조합과 같이 보건, 복지, 교육, 주택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동조합 설립이 사실상 불가능하였지만 이제 허용된 것이다.
이에 따라 협동조합 운동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기존의 주식회사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방식의 기업운영 환경에서, 또 다른 경제활동 방식을 우리 사회가 수용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사회적 목적과 자발성에 근거한 사회적 경제를 우리나라에 뿌리내리는데 상당히 기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사회적 논의가 부족한 가운데 정부주도로 입법화됨에 따라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발의되어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3개월 만에 제정된 것은 그동안 협동조합기본법을 제정하고자 노력했던 협동조합운동진영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는데, 정부 주도로 입법되다보니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가 부족하였고 법안 내용에도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자발성에 근거한 역량이 취약한 가운데 2007년 정부 주도로 제정된 사회적 기업육성법도 제도 자체의 취지와 달리 부실한 사회적기업을 양산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똑같은 전철을 되풀이 할 것으로 우려된다는 것이다.
협동조합기본법과 농업농촌농민
농업계에는 ‘농협만 제대로 선다면 한국 농업 문제의 절반은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농업협동조합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주도로 설립된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농협은 농민들의 개혁요구를 외면해왔고 지금까지도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에 직면해왔다.
이에 따라 그동안 농촌지역에서는 농협의 독점으로 자유로운 협동조합의 설립이 사실상 불가능하여 영농조합법인이라는 형태로 생산자조직이 설립 운영되었으나 이제 ‘농사협동조합’, ‘농민협동조합’등 다양한 형태의 농업생산자 협동조합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변화는 관제협동조합에 익숙해져있는 농민조합원들이 참협동조합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며, 아래로부터의 협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어 향후 농협개혁을 일구는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농민 스스로의 자발성의 확대는 도시 귀농자들의 증가,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확대,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 등과 맞물려 새로운 대안농정을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