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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
1. 신성한 계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6~28)
이번 집회는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신성한 계시이다. 이 계시의 중심 노선, 그리고 그 목표는 건축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해서 그 사람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는 한 사회를 한 나라를 갖는 것이다. 이것을 신성한 건축이라고 표현한다. 창조는 건축을 위한 것이다. 창조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건축을 위한 것이다. 만약에 창조가 있다 하더라도 건축이 없으면 마치 재료들은 많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집을 짓지 않는 것과 같고, 재료는 많이 있는데 음식을 만들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음 받은 것은 지음 받은 대로 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인 건축 안으로 우리를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건축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
이 목표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고, 성경이 무엇을 써 놓은 것인지도 알 수가 있다. 반대로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어디로 가는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 하나님,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하는 이야기이다. 땅과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다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있으라고 하시니 있었다는 이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셨다는 말과 같다. 아브라함에게 아직 아들이 없을 때, 너의 후손이 하늘에 별수와 같이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신 분이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 한 것을 바랄 수가 있고, 지금 아직 없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다고 되어 있다.
창조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이 창조이다. 이 창조는 무엇 때문에 있었는가? 건축을 위해서 있었다. 재료를 만들어 놓은 것은 집을 지으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포항 제철에서는 철근을 만들고 벽돌 공장에서는 벽돌을 만든다. 그것들은 창조에 속하고, 그 물건들을 가져다가 집을 짓는 것은 건축에 속한다.
사람을 만든 것은 창조에 속하고, 사람들로 인해서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건축에 속한 문제이다. 재료가 좋으면 건축도 좋아질 수도 있고, 건축의 목표가 좋으면 재로도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초가집을 짓는 데는 재료가 별거 아니라도 지을 수 있다. 옛날 집들은 돌과 흙을 적당히 버물려서 지붕을 이어서 집을 만들었다. 63빌딩이나 엠파이어 빌딩을 지을 때는 그런 재료로는 안 된다. 그래서 쇠가 필요하고, 돌이 필요하고, 시멘트가 필요한 것이다. 건축의 목표에 따라서 재료도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건축의 목표 안에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드시냐 하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초가집을 지으려면 우리가 아무런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겠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운 거처를 거룩한 거처를 만들려면 사람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창조도 그렇지만 연단의 과정도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집을 좋은 것을 지으려고 하면 재료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좋은 집을 이 우주 안에서 가장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준은 대단히 높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사느냐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한 집이 되게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계시니까, 늘 우리하고 잘 안 맞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과 그 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우리는 그 분의 생각을 먼저 알고, 그 다음에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야지 그 분의 생각을 모르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그 분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일단 접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우리 생각을 접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자기 생각으로 들으려고 하면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이 생각이 서로 틀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우리의 범위 내에서 우리의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계획을 하시니까 서로 전혀 맞을 리가 없다. 맞지 않으면 서로 말이 오고갈 때 서로 못 알아듣는다. 계획이 틀리니까 서로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우리 생각을 접어야 한다. 우리 생각을 접지 않고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나서 땅 위에 충만하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위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고 1장에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한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땅위에 충만하려면 사람이 많아야 된다. 그 말은 사람으로 땅을 채우라는 말이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땅에 그냥 살라는 것이 아니고 땅의 어떤 문제들을 처리하라는 말이다.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벌써 건축을 계획하셨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할 때 이미 건축을 계획하시고 사람을 만드셨다.
2장에서는 하나님이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었고, 그리고 생명나무를 먹게 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건축 안으로 이끌기 위해서 동산 안으로 불러놓으신 것이다. 이 동산 안에는 생명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를 먹으면 그 옆에는 강이 흐르게 되어 있었다. 강이 흐른다는 말은 생명나무를 먹은 결과는 무엇이 흐른다는 뜻이다. 생명의 강이 흐른다는 뜻이고, 강 안에는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흐르는 강물 속에 변화가 있다는 뜻이다.
물이 흐르는 곳에 가 보면 변화가 있다. 돌도 반질반질해 지고, 가만히 있는 곳 보다 물이 흐르는 곳에 가 보면 변화가 많이 있다. 지어진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고 생명의 흐름 안에서 변화가 된다는 뜻이다. 무엇을 하려고 변화하는가? 건축을 위해서 변화한다. 이 재료들은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인데 바울 시대 와서는 금과 은과 동으로 지은 집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요한계시록에 가면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새 예루살렘이 건축이 된다. 새 예루살렘은 결국 생명나무를 먹고 변화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에 따라서 당신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어서 그 사람을 생명나무 아래 두어 생명나무를 먹고 변화하게 해서 건축의 재료가 되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건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이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 되도록 정해져 있다.
그리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하와를 만들었다고 창세기 2장에 나와 있다. 하와를 만든 것 역시 건축이다. 갈빗대라는 재료를 가지고 하와를 건축했다는 뜻이다. 하와는 교회의 예표이고, 새 예루살렘의 예표이다.
결국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창조한 한 생명을 가지고 그 생명을 그냥 건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건축 안으로 들어가도록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건축 재료들은 일단 공장에서 철근, 벽돌 등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집을 지을 때는 또 한번 기술자의 손에 의해서 다듬어져서 그것이 건축 안으로 들어간다. 자를 것은 자르고 깎을 것은 깎고 이을 것은 이어서 건축 안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그냥 건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과정을 지나서 건축이 된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보면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전적으로 값없는 은혜로 구속을 받고 들어오지만 이 사람이 교회가 되려면 상당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게 된다. 여러 가지 문제란 너무 길 수도 있고 너무 짧을 수도 있고 너무 두꺼울 수도 있고 너무 얇을 수도 있다. 그래서 너무 긴 것은 잘라야 하고 너무 짧은 것은 붙여야 하고 너무 두꺼운 것은 깎아야 하고 너무 얇은 것은 보태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오셔서 교회 생활을 할 때 옛날에는 예배당에 가서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되었고, 봉사만 열심히 하면 되었고, 성경 공부 열심히 하면 되었다. 건축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엮어져야 하기 때문에 지체와 지체가 같이 엮어져야 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자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너무 미운 사람이 생겨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 좋은 사람이 생겨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혼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혼자 기도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다른 사람과 엮어져서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다 보면 다 너 잘나고, 나 잘난 것이 나와서 다 문제가 되게 되어있다. 이것이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온 문제이다.
예배당 안에서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예배만 드리고 기도만 드리면 되니까 기도하는 것은 나 혼자 하는 것이지 남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 봉사를 할 때 부딪히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업적인 부딪힘이다. 우리가 참된 교회 생활 안에 오면 내 인격의 어떠함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 이런 문제들이 생길 때 세상에서는 서로가 다 네 탓이라고 한다. 네 탓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해결이 안 되고 교회 생활이 안 된다.
결국은 내 탓이라는 것을 발견해야지 개선의 여지가 있게 된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이 가도 발전이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자기 문제로 깨달은 사람은 발전이 되지만 항상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발전이 안 된다. 우리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그 사람은 30년이 됐지만 아직도 제자리에 있다. 자기는 그대로 있고 항상 남이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되면 죽을 때 까지 남의 문제이고, 자기는 문제는 모른다. 이런 사람은 건축에 들어가기 대단히 어렵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자기 문제를 깨달은 사람은 금방 발전할 수 있다. 누구라도 금방 발전할 수 있다.
처음에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 아담의 갈빗대를 뺀 것은 아담의 죽음을 상징한다. 죽지 않고는 갈빗대를 뺀 수 없다.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뺐다고 말하고 있다.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 하와를 건축한 셈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담은 죽어서 하와가 되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와 똑같은 원칙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죽음을 통해서 교회를 산출하게 되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고 형상이었다. 아담에게서 일어나는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원칙은 똑같다.
예수는 죽음을 통해서 교회를 건축했다. 오늘 우리는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 안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문제가 있다는 말은 내가 예수의 죽음 안에 안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내가 예수의 죽음 안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내가 발견되면 나는 죽을 일 밖에 없고, 내 일은 죽을 일 밖에 다른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텐데 발견되지 않으니까 결국 생생하게 지어진 그대로 자연인 그대로 교회가 되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교회를 낳았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 안에서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죽으심 안이라는 말은 그의 죽음 안에 발견된 나를 가지고, 세상에서 발견된 나를 가지고가 아니고, 그 분의 죽으심 안에 발견된 나를 가지고, 그 죽으심을 보니까 그 안에 내가 있구나, 저 사람이 바로 나구나, 발견된 그 사람으로 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우리가 발견될 때는 다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발견될 때는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 어떤 사람은 저런 사람, 여러 가지로 발견되었다. 그것을 가지고는 절대로 연합이 될 수가 없었다.
예수 안에서 발견될 때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어떤 이유에 상관없이 모두 죽음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 죽음 안에서 발견된 나를 가지고 그 내가 결국은 교회 안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교회로 건축된다는 것은 다시 사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죽은 내가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부활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생활로 산다는 것은 부활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땅에 이루어졌다. 부활이 없이는 교회가 없다. 우리가 교회 생활 속에 산다는 것은 내가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부활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자연인으로는 교회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왜 문제가 생겼는가? 그건 자연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왜 문제가 없는가? 부활한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부활하기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부활하기 전에 이미 죽은 자로 발견이 됐기 때문에 부활 안에서 문제가 없다. 자연인으로서 문제가 있던 사람은 부활 안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참된 교회 생활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바로 이 사람으로 교회를 건축했다. 이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부활 생명 안에만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연인 안에 계신 것이 아니고, 부활한 사람들 속에 계신 분이다. 부활한 사회 속에 계신 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부활한 세계 안에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지 부활하지 않은 세계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자연인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자연인으로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부활한 사람들 속에서만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왜 이러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교회를 못 보기 때문이다. 자연인으로서는 교회를 볼 수가 없다. 이것을 바울은 비밀이라고 하였다. 만세와 만대로 음으로 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이다. 외모로 보면 똑같은 사람인데 한 사람은 죽음 안에서 다시 나온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자연인으로 있는 사람이다. 자연인으로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 부활한 사람은 비밀이다. 밥도 똑같이 자고 잠도 똑같이 자는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 건축 안에 가면 다른 사람이다. 모든 일이 다 똑같은데, 다 생리적인 것도 똑같은데 교회 건축 안에 가서는 한 사람은 교회 건축이 되고, 한 사람은 교회 건축이 안 된다. 여기서 차이가 생기게 된다.
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차별이 생긴다. 이 사람은 수학을 잘하는 사람, 이 사람은 영어를 잘 하는 사람으로 차별이 생긴다. 이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 이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차별이 생긴다. 그런데 이 나라는 두 개의 세계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는 자연인의 세계이고, 하나는 부활한 사람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 안에서 밖에는 구별이 되지 아니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건축 안으로 부르셨다. 하나님의 신성한 노선은 건축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변화하게 해서 하나의 건축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간단하다. 이 원칙에서 성경을 봐야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 원칙을 벗어나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소원과 목적 안에서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왜곡되고, 성경은 왜곡되고, 이 성경 때문에 더 많이 분열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왜곡되니까 분열되기가 더 쉽다. 하나님을 왜곡시키는 것 보다 성경을 왜곡시키는 것이 더 쉽다. 쉽기 때문에 성경이 왜곡됨으로써 분열은 아주 쉽게 되게 되었다. 성경을 보다가 의견이 틀리면 분열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래서 수많은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인간의 목적과 소원을 위해서 성경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갈망을 위해서 성경이 쓰여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과 갈망을 알고 성경을 봐야 성경이 왜곡되지 아니하고, 성경이 왜곡되지 않는다면 분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의 건축을 위해서 성경을 썼으니까 그것을 제대로 본다면 분열될 리가 없다.
왜 성경 때문에 분열되는가? 그 성경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곡되게 보려고 하겠는가. 다 진실하게 보고 다 옳게 보려고 한다. 그래서 정통 교리를 세우고 더 완전하게 하려고 한다. 어디에 가면 ‘바로 선 교회’, ‘바로 선 장로교’가 있다. 장로교도 바로 섰는데 거기에 더 바로 선다면 얼마나 더 바로 서라고 것인가. 다 바로 서려고 노력한다. 왜 분열되는가? 그것은 왜곡되어서이다. 왜 왜곡되는가? 하나님의 목적과 소원이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분열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분열됐다.
건축은 하나님의 목적이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건축을 위해서 불렀다. 우리 개인을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다. 분열은 사탄의 계략이다. 하나의 집을 건축하게 하지 못 하게 하려고 사탄은 창세 때부터 계속 방해해 왔다. 어떤 이유로든지 분열이 되고 있다는 것은 사탄의 계략에 말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분열되었든지 교파를 통해서 분열이 되었든지 또 다른 이유로 분열이 되었든지 간에 모두 다 사탄의 계략에 말려 들어간 것이다.
또 우리 안에서는 우리 안에서 대로 누구하고 나 사이에 무슨 이유로 분열되어 있다, 무슨 이유로 밉다, 무슨 이유로 싫다, 이건 전부 분열을 계획하는 사탄의 계략에 말려 들어가 있는 것 때문에 그렇다. 자기 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 때문도 아니고 사탄의 계략에 말려 들어가 있다. 더 높은 데서의 계략이 있으면 그 밑의 하급에서는 자기도 모르고 계략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혼자 설라고 생각해 봐도 안 된다. 방법이 없다.
우리나라도 전 세계가 냉전 상태에 있었을 때 그 뒤에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진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대한 나라가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 거대한 세력이 이 세계의 패권을 가지고 지배하려다 보니까 냉전이 생겼다. 그 냉전 하에서 우리 한국은 분열이 되었다. 한국 사람이 누가 같은 민족끼리 분열되기를 원했겠는가. 아무도 분열되기 원치 않았다. 쌍방이 다 통일 통일을 원했지만 왜 분열되었는가? 그것보다 더 큰 세력이 위에서 하나의 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열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살 것 같지만 그렇게 못 한다. 자기 스스로 설 것 같지만 서지 못 한다. 더 큰 세력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우리 한국도 동북아의 중심 국가라고 내걸고 홀로 서기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홀로 서기가 가능한가? 홀로서기가 불가능하다. 큰 세력 밑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홀로 서기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치가 왜 필요한가? 홀로서기가 안 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미국으로 붙어야 할 것인지, 중국으로 붙어야 할 것인지 우리는 아주 중대한 문제에 놓여 있다. 어느 세력이 더 클 것인지, 중국에 붙었다가 조선 말엽처럼 망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일본에 붙었다가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세력은 작기 때문이다.
분열은 사탄의 계략이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건축의 노선을 분명히 모른다면 우리는 거기에 속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분열 속에 들어가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대리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의 초점은 창조와 건축이다. 오늘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신 것은 뭐 때문에 부르셨는가? 나를 이러한 사정 때문에 부르고 이러이러한 사정 때문에 부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건축에서 나를 불렀다. 우리 각자 개인적인 사정이 다 달랐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입을 때 다 다른 사정에 있었다. 그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줄로 알았다. 그런데 와 보니 그것이 아니고 그 분의 신성한 목적이 있어서, 우리를 그런 사정을 이용해서 부른 것에 불과하다.
나는 옛날에 생각할 때 다 나 같은 사정이 있었으면 다 이렇게 부름 받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다 나 같은 사정에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다 나하고 다른 사정에서 부름 받았다. 그렇다면 내 문제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하고 다 달랐던 것이다. 그 다 다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이 불러내었다.
하나님이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해결하려고 불렀는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 안으로 우리를 흡수하려고 불렀다. 이제 이 부르심을 알고 나면은 우리 문제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내가 이런 사정이 있었느냐, 저런 사정이 있었느냐, 이것은 다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것은 하나의 부르시는 수단에 불과했고 동기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은 배가 고파서 부름 받았고 어떤 사람은 배가 아파서 부름 받았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아파서 부름 받았고 다 다른 처지에서 부름 받았다. 하지만 목표는 다 하나이다. 한 건축 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부르심을 알았으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옛날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거나 나는 이런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아직도 그걸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 사람도 있다. 옛날에 어쨌다는 것이 왜 그렇게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옛날에 불행한 적도 있고 행복한 적도 있었는데 행복했던 것도 안 떨어지면 문제가 되고, 불행했던 것도 안 떨어지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 껍데기도 벗겨지고 나가야 하는데 안 벗겨지고 있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지 않으면 날아 갈 수가 없다. 허물을 벗어야 매미가 될 수 있는데 안벗으면 날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옛것을 떨쳐 버리지 않고 있으면 앞으로 전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신성한 목표 안에 옛것을 던지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그 분의 계시만이 온전한 것이고, 그 분의 계시만이 신성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건축 안에 불렀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이 건축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동시에 하나님을 표현하는 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이 된다, 이 보다 인생에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흙으로 지어진 인생이 하나님의 집이 된다면 그 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뭐가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헷갈리는 사람을 보면 아주 시시한 것을 가지고 헷갈린다. 형편없는 것을 가지고 그걸 못 잊는다거나 그걸 귀중하게 생각하거나해서 헷갈린다. 굉장히 중요한 것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를 가지고 헷갈리는 것이 아니고, 아주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안 들렸던가,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건축에 참여하기를 주저했던가, 내가 뭐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두려웠던가를 잘 생각해 보자. 굉장히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주 시시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을 보게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지 얼마나 시시하고 하잘 것 없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땅 위에서 살아야 할 유일한 목표는 건축에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유일한 목적도 건축에 있는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하늘에 대한 동경이 굉장히 많다. 하늘, 하늘로 간다. 항상 하늘에 대한 동경이 너무 많다. 하늘에서 건축하는 것은 없다. 건축은 땅 위에 있는 것이다. 하늘에는 건축이 없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하면서 하늘가기를 원한다. 이번에 이 말씀을 하게 된 원인도 이것이다.
우리가 하늘 갈 것을 버리고 땅 위에서 건축하는데 참여하자고 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하늘 갈 것을 버리고 하늘에 갈 것을 포기하고,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땅위에서 건축을 잘 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너무너무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이 계시 안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하늘로 부른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를 하늘로 부른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반대로 새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땅으로 내려온다고 되어 있다. 우리를 하늘로 데려간다는 것은 절대로 없다. 여러분 중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이 있으면 생각해보시고 그래도 믿어지지 않으면 집에 가서 다시 읽어보시기 바란다. 일일이 읽어보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있는지 체크해보기 바란다. 하늘로 올라간다는 데는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땅위에 지어놓았다. 왜냐하면 땅위의 건축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땅위에서 건축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땅은 잠깐 있는 정거장이고 우리는 하늘로 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이것은 속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속아 있다. 땅은 잠깐이고 우리는 모두 하늘로 간다고 모두 하늘을 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하늘 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건축에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해서 내가 신령하게 되어서, 어떻게 내가 깨끗하게 되어서, 어떻게 기도를 많이 해서, 내가 믿음이 좋아서, 어떻게 선한 사람이 되어서 하늘에 갈까하는 생각만 다 하고 있다. 하늘에 가는 시험을 모두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천로역정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상의 모든 과정을 다 지나서 어디를 가는가? 천성을 향해 간다, 하늘을 향해 가는데 마지막 코스가 하늘이다. 그 문에 들어가니까 사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잡아먹을 것 같아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뚫고 들어가니까 그 사자는 묶여 있는 사자였다. 그 믿음으로 천성에 간다는 것이다.
절대로 우리는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말이 된다.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마 하늘에 있지 않겠느냐하고 물었을 것이다.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으니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하늘로 갈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하늘로 간다고 하지 않고 내가 곧 길이라고 했다. 그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더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또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했다. 하늘로 데려간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신 것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 불렀다. 오늘 우리가 교회 안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 안으로 불렀지 하늘로 부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으로 불렀다. 우리가 하늘로 간다면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다 산에 가서 기도 하다가 가면 된다. 기도하다가 승천하면 된다. 그것이 제일 쉬울 것이다.
왜 이 땅위에 교회가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기 원치 않고 땅에 거하기 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해서 계속 땅으로 내려오는 일을 하고 있고, 땅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땅에 자기 집을 짓는 일을 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성막을 지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는 일이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오셨다. 이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장막 안에 거하시다가 이제는 육체 안에 거하시게 됐다는 말이다. 그 육체 안에 거하시는 것은 땅 위에서 라는 말이다.
이 예수가 다시 교회를 낳았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교회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시기 위해서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로 가 버리면 하나님은 다시 하늘로 가야 한다. 땅 위에 자기 집이 없으면 하나님은 있을 곳이 없으니까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 갈 생각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버리고, 땅 위에서 그 분의 신성한 건축이 되자. 그 분의 거처가 되자. 땅 위에서 그 분의 표현이 되고, 땅 위에서 그분의 거처가 되고 땅 위에서 그 분의 영광이 되자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하게 되면 우리는 교회 생활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교회 생활 밖에 없으면 교회 생활에 대해서 부진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로 간다는 생각이 있고, 하나는 세상으로 간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교회 생활이 부진한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한 길 밖에 없다. 하나님은 오직 이 한 길로만 불렀다. 교회 생활 안으로, 이 건축 안으로만 불렀지 세상으로 부른 것도 아니고 하늘로 부른 것도 아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를 지금 불러냈다. 그러므로 세상으로 부른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하나님 말씀이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 불러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세상에 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니다. 내가 도와줄테니 다른 사람보다 잘 살아보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냈다. 너희는 거기 있지 말고 따로 나와서 따로 있으라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나오라 했으니까 세상으로 다시 가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잘돼야 한다느니, 못돼야 된다느니 그런 말이 있다. 그 세상에서 잘될 것도 아니고 못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불러서 하늘로 불러냈느냐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아니고 당신의 집이 될, 당신의 집으로 불렀다.
우리 위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나를 어디로 불렀는가를 인식을 확실히 해야 한다. 교회가 가 봐야 별거 없다 하면 다시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보니까 교회 아니면 세상이다. 하늘이 별로 없다 보니까 교회 아니면 세상이다. 우리는 교회가 좀 희미하고 잘 안 보이고 없으면 세상으로 나갔다가 또 못 견디면 교회로 돌아온다. 그래도 하늘로 가 버리는 것 보다는 낫다. 하늘로 가 버리는 것은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세상으로 가는 것이 낫다. 세상으로 가면 불러 낼 말씀이 있는데, 하늘에 있는 것은 내려오라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이 교회 밖에 없다.
우리 인간이 가야 할 최종적인 자리는 바로 여기이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여기 와 있다. 이것이 지금 생각할 때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깊이 듣다 보면 우리 인생에 유일한 목표는 건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 이것이 하늘보다도 중요한가? 왜 이것이 천당보다도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천당이 중요할 것 같다. 천당이 더 중요하지 교회가 중요한가. 교회는 정거장이고 천당은 목적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보면 천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 교회가 더 중요하다. 오늘 교회 생활이 더 중요하다. 시간적으로 보면 오늘 교회 생활은 짧은 것 같고, 그리고 천당은 영원히 살 것 같아서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목표는 교회에 있지 절대로 천당에 있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천당에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절대로 없다. 그 분의 목적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땅위에 자신의 장막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분의 유일한 소원은 땅위에 있는 당신의 집이다. 오늘 우리는 그 유일한 소원 안으로 부름 받았다. 그 유일한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될 때 우리는 땅위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의 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땅을 정복하게 될 것이고, 분열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계략을 파괴하는 그런 전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탄의 계략도 땅 위에 있고, 하나님의 계획도 땅 위에 있다. 사탄의 계략이 땅위에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하늘로 올라가면 그럼 사탄들이 땅을 다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패배주의이다. 기독교가 결국 패배주의에 빠져서 땅위에서는 희망이 없다,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하고, 그래서 해 봐야 싸움뿐이 안하고 희망이 없다. 그래서 이 땅은 희망이 없다, 하늘로 가자로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탄의 계략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밭은 하나뿐인데 농부가 둘이다. 한 사람이 여기에 콩을 심으려고 왔다. 이 콩 심는 것을 방해하는 원수가 왔다. 이 원수가 와서 무슨 이유를 대서 여기는 콩이 안 되는 곳이고, 밭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그래서 여긴 농사 못 짓겠네, 가 버려야 되겠네 하고 가 버리는 것과 똑같다. 그럼 이 땅은 누가 차지하는가? 방해하는 자가 차지하게 된다.
사탄의 감언이설에 속으면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한 밭 밖에 주지 않았다. 땅 하나 밖에 주지 않았다. 두 개의 땅이 우리에겐 없다. 두 개의 인생이 우리에겐 없다. 땅에서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되어 있지 두 개의 땅도 없고, 두 개의 인생도 없다. 오직 하나 뿐이다.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도록 해야 된다. 바울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여러 개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 여기도 좀 하고 저기도 좀 하고 땅위에서도 잘살고 천당도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제 알고 보니까 나는 여기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장소는 하나 밖에 없다. 월드컵은 하나 밖에 없다. 그런데 독일에 가서 잘 안된다고 호주에서 뛰고 있으면 아무리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독일 월드컵이니까 독일에서 뛰어야 한다. 월드컵이 두 개라면 모르겠지만 월드컵은 하나뿐이니까 우승하려면 독일에서 뛰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은 하나 밖에 없다. 한 인생 밖에 없다. 이 인생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장막이 되는, 하나님의 건축이 되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여해야 한다. 성경은 신성한 기록이다. 왜? 하나님의 건축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한 기록이다.
우리는 신성한 기록을 따라가야 한다. 신성한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절대로 하나님의 목적을 왜곡시키면 안된다. 하나님의 목적을 왜곡시키는 것은 성경을 왜곡시키는 것이 되고, 성경을 왜곡시키면 분열이 되게 되어있다. 당연히 그렇다. 모두 분열된 것은 성경 때문에 분열됐다. 그 이유는 성경이 분열 시킨 것이 아니고, 성경을 왜곡시켜 놨기 때문에 분열이 됐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신성한 건축의 계시가 확실히 박혀서 내가 사나 죽으나 나는 主만 영화롭게 해야겠구나, 나는 사나 죽으나 건축 안에 참여해서 우리가 단체적인 한 실체로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여기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어디로 갈지 모르고 무엇이 우리의 목표인지 모르고 살던 사람들인데 다만 우리의 소원을 따라서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무엇을 찾고 헤매던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신성한 목표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것에 감사하고 당신의 신성한 계시를 통해서 이 노선을 확보하시고 우리에게 이것을 제시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이 길 안으로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부르신 목표가 어디 있는가를 분명히 새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으로서, 오직 主만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의 건축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