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뜰의 모든 기구들은 다 놋이었다. 반면 성소와 지성소의 모든 기구들은 금이었다. 놋은 심판과 십자가를 상징한다. 이는 뜰은 죄를 처리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죄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거니와 그 곳에서 봉사는 더욱 불가능하다.
놋바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대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제사장들이 손발을 씻도록 만들어진 이 놋바다가 얼마나 컸는가? 자그마치 직경이 5m나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얼마나 손발을 깨끗이 씻기 원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모든 제사장들은 제사하기 전에 놋바다에서 손발을 씻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씻지 않으면 안 된다. 천국에는 유리바다가 있다(계 4:6). 이곳을 통과해야 지성소인 보좌 앞에 나아간다. 그리고 바다에 담긴 물은 다음날 쓰는 일이 없이 언제나 신선한 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대제사장 벤 카틴은 바다를 들어 내려서 물을 쏟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성전의 아침은 바다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로 시작되며 이 소리는 멀리 여리고까지 들렸다고 한다.
놋바다와 물두멍은 매일 깨끗한 물로 새로 갈아주었다. 그래서 언제나 놋바다와 물두멍의 물은 맑고 투명했다. 물두멍은 성전 왼쪽에 5개, 성전 오른쪽에 5개씩 10개가 있었는데 물두멍마다 4개의 바퀴가 달려 있어서 쉽게 제사장들이 제물의 피를 씻을 수 있게 했다. 제사장들은 놋바다와 물두멍 앞에 설 때마다 먼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출애굽기 38:8에 보면 성막의 물두멍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했다. 더구나 부정을 용납지 않는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이니 얼마나 자기를 깨끗이 단장했겠는가? 영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 놋바다와 물두멍의 의미이다.
거울에 비춰지는 나의 더러운 모습을 보며 물두멍의 물에 손과 발을 씻는다. 그런 역할을 위해 쓰여 졌던 것이 바로 놋바다와 물두멍이다. 야고보 1:22-24의 말씀을 보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거울만 보는 사람과 같다. 우리는 거울을 보고 내 참 모습을 봤으면 반드시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우리의 참 모습을 영적으로 비추어 볼 것인가? 우리는 말씀의 거울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본다. 이를 위해 물로 놋바다를 가득히 채워야 하겠다. 그럼 맑은 놋바다에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손발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 먼저 번제단에 피를 드린 뒤에 온 몸을 목욕한 사람은 날마다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을 비춰보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성막의 물두멍은 여인의 거울로 만들었다고 했다. 반면 성전의 놋바다는 대상 18:8을 보면 아람의 하닷에셀에게서 빼앗은 심히 많은 놋으로 만들었다. 아람은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연단의 장소이다.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연단을 받았고, 사사시대의 이스라엘도 메소포타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에게서 연단을 받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서 연단을 받았고, 이스라엘도 앗수르에서 연단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을 연단한 나라는 아람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안일하고 편안한 삶은 우리를 세상과 벗하며 거룩하지 못한 인생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연단과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깨끗해 질 것이다. 불가항력적 고난 앞에 우리는 성결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두멍을 열 개를 만들라고 하셨다. ‘10’은 ‘최소한’이면서 ‘온전한’의 의미가 있다. 즉 이곳에서 씻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율법적으로 어떤 죄일지라도 최소한 물두멍 열이면 씻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죄만 씻어 지는 것이 아니다. 죄와 함께 저주도 다 씻어진다. 예수의 피는 어떤 저주와 죄도 다 씻을 수 있다.
또 놋바다는 네 마리씩 동서남북으로 열 두 마리의 놋소가 받들고 있었다. ‘12’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12지파’나 ‘예수님을 따른 12제자’를 나타낸다. 소는 겸손하고 충성된 종을 나타낸다. 거룩한 자는 누구인가? 우직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말이 앞서지 않고 몸으로 헌신하며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이다. 즉 겸손과 다방면의 충성스런 육체의 영성이 없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불가능하다는 원리이다. 그러니까 늘 엎디어 기도하고 순종해야 한다. 또 바다의 두께는 손 넓이만큼 했다. 이것은 상당히 두꺼운 두께인데 손바닥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우리에게 반드시 영성을 입히사 온전케 하실 것을 보여준다.
또 놋바다의 물의 양은 2000밧 혹은 3000밧이었다. 그런데 왕상 7:26절에는 바다의 물이 2,000밧, 대하 4:5에서는 3,000밧이라고 했다. 왜 같은 바다인데 서로 다른가? 그것은 용량은 3000밧인데 보통 2,000밧을 넣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2,000은 평소에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면서 사용하는 놋바다의 물의 양이고, 3,000밧은 대제사장이 1년에 1차례 지성소까지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물의 양이다. 이는 보다 영향력 있는 영적 직분을 맡을수록 더욱 높은 수준의 거룩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제사장 수준의 성결과 대제사장 수준의 성결은 다른 것이다. 심지어 대제사장 한 명이 다른 모든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물의 반을 사용하는 비중으로 대제사장의 성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레위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 일반 평민이 범죄할 때 드리는 속죄제물의 수준이 다르고, 족장이 범죄할 때 드리는 속죄제물의 수준이 다르고, 제사장이 범죄할 때 드리는 속죄제물의 수준이 다른 이유와 같다. 어떻게 달랐는가? 일반 백성이 범죄할 때는 매번 속죄제로 흠없는 암염소를 바쳤다. 족장의 경우는 흠없는 수염소를 바쳤다. 제사장의 경우는 흠없는 수소를 바쳤다.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범죄했을 때도 수소를 바쳤다. 제사장의 경우는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범죄했을 때 바치는 수준의 속죄제를 드려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제사장의 경우는 일반 제사장들에게 요구하는 수준과 비교도 안 되는 훨씬 높은 수준의 성결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하 16:13,17을 보면 놋바다가 변형되는 사건이 생긴다. 아하스왕이 앗수르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느라 다메섹에 갔다가 다메섹에 만들어진 이방 신전을 본 후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하스왕은 번제단을 따로 만들었다. 물두멍을 없앴다. 놋바다를 놋소에서 내려다가 돌 판 위에 두었다. 직접 하나님께 번제와 소제를 드렸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야 제사장은 아하스의 지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아하스왕의 말대로 그대로 했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나라는 어려워졌다. 또 왕하 25:13-16에 느브갓네살왕도 놋바다를 깨뜨려서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느브갓네살은 결국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받았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다른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밖에 없다. 우리는 번제단,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온몸을 목욕을 한 것과 같다. 이뿐 아니라 놋바다와 물두멍을 통해 날마다 생활회개를 하며 어찌하든지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출처 : 김정열 | 글쓴이 : 각하 | 원글보기 카톡 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