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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에 있어서의 근원적 자유(1975)
박홍규, in 희랍철학논고: 박홍규전집 1, 2007(초 1995), 178-201.
in 철학연구, 10집 1975, 41-45.
- 박홍규(朴洪圭, 1919-1994), 전남 광주, 광주일고, 1940 와세다대학, 1945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전임강사, 1946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1946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로 지냄.
* 박홍규 선생의 베르그송 작업에서 가장 큰 작업은, 나로서는, 베르그송이 플라톤 철학과 결정적으로 벗어난다는 주장이다. 그는 자연의 두 가지 개념화 작업을 주목하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에 관한 이 두 개의 개념(deux conceptions)[개념작업] (DI 105)>을 주목하였으며 이로부터, 그가 <베르그송은 ... 영원의 좌표를 양상론적 다(多)의 현상좌표, 즉 시간의 좌표로 환원시킴으로써 플라톤 철학과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p.188)>이란 표현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고대철학 불모지대이고 프랑스철학은 수용되지 않은 시절인데도, 깊은 혜안의 덕분일 것이다. 이런 관점은 서양철학사에서도 들뢰즈정도 일 것이라 본다.
** 대학원 시절에 선생님의 글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문제점을 제기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프랑스철학 자체를 잘 모르는 시절이라, 여러번 읽고서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발표를 했다. 그날 이상하게도 윤구병 선배가 참석했다. 그는 발표를 듣고 뒷풀이에서 불만으로 몇 번이나 읽어냐고 물었다. 다섯 번 읽었다고 하니 그러면 열 번 읽지 라고 했다. 아마도 그가 보기에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론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못다 해 읽은 다섯 번을 읽고 몇 가지 인용했던 것 같은데, 그때조차도 이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벩송 전집을 여러 차례 읽고 나서 벩송이야 말로 진솔한 유물론자이며 질료형이상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서야 형상론의 반대방향은 질료론이구나. 상층의 반대 방향이 심층이고, 관념론의 이데올로기의 반대 방향은 자연주의의 내재성의 발현이라 보게 된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박 선생님의 한마디, 벩송의 철학이 <플라톤 철학과 결별>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을 것 같다. (51NLE)
1. 문제의 제기
2. 자연의 의미
3. 본질과 자발성
4. 영원좌표의 시간좌표로 환원
5. 본질 및 자발성과 현실성과의 관계
1) 본질과 현실과의 관계
2) 자발성과 현실과의 관계
6. 본질 및 자발성과 자유와의 관계
1) 본질과 자유와의 관계
2) 자발성과 자유와의 관계
## 내용 *********
베르그송에 있어서의 근원적 자유(1975)
박홍규, in 희랍철학논고: 박홍규전집 1, 2007(초 1995), 178-201.
1. 문제의 제기 178
베르그송은 그의 초기 저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의 제3부에서 자유를 아프리오리(a priori)한 측면과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측면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가 동일한 저서의 서문에서 자유를 형이상학과 심리학의 공통된 문제라고 진술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아프리오리라고 한 측면은 자유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아포스테리오리라고 한 측면은 심리학적 측면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79) [(최 322-323)]
[형이상학의 두 측면(deux aspects): 상층 대 심층. 심리학의 두 측면: 온자기(Soi) 대 자아(Moi). 두 전자들의 측면은 플라톤주의에서 라이프니츠까지 그리고 후자들의 측면은 플로티노스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벯송으로. 전자는 보편성의 편재가 표상으로 전개되는 점을 설명하는 것에 가깝고, 후자는 동근원의 내재성에서 생성하는 과정을 표면에 나타난 기호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아프리오리가 논리적으로 선천적이며 실재적으로 선험성에 가깝다면, 아포스테리오리는 논리적으로 후천적이며 경험적으로 획득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전자의 자유와 후자의 자유는 다른 양상이 된다. 상층에서 표면으로 자유는 질서, 지도, 지배, 구속의 자유이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자유는 생성, 발명, 발견, 창조의 자유이다.(51NLE)]
“자유(liberté)의 문제가 자연에 관하여 대립된 두 개의 체계(deux systèmes)인 기계론(méchanisme)과 역동론(dynamisme)을 대결 시키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동론은 의식(conscience)에 의하여 주어진 유의적 활동(activité volontaire)의 이념(ideé)에서 출발하여, 이 이념을 조금씩 비움으로써 타성(inertie)의 표상(représentation)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그것(dynamisme)은 한편으로는 자유스런 힘(force libre)을 또 한편으로는 법칙(loi)에 지배되는 물질(matière)을 확신한다. 그러나 기계론은 반대로 간다. 기계론은 그것이 종합하는 물질적인 것이 필연적 법칙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생각하며, 그 결합이 더욱 풍부해지고 예견하기 힘들며 외견상으로는 우연적인 것이 되더라도, 그것이 당초에 갇혔던 필연성의 좁은 환(cercle étroit de la necéssité)을 빠져나올 수 없다. / 자연에 관한 이 두 개의 개념(deux conceptions)[개념작업]을 천착하면 이 두 개의 개념이 법칙과 법칙이 지배하는 사실(le fait)에 관하여 매우 다른 두 개의 가정(deux hypothèses)을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역동론자는 그의 눈을 높이 듦에 따라서 그 만큼 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사실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역동론은 사실을 절대적인 실재[성](réalité absolue)로 삼고, 법칙을 그 실재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실재의 기호(symbole)적 표현으로 삼는다. 이와 반대로 기계론은 개별적인 사실 속에서 일정한 수의[몇 개의] 법칙들을 분간하는데, 말하자면 사실들은 이 법칙들의 교차점(le point d'intersection)이 된다. [말하자면 기계론은 몇 가지의 법칙들의 교차점을 구성할 것이다. 그런데 법칙이 이런 가설에서 근본적 실재성이 될 것이다.] / 그런데 [이제] 고차적인 실재성을 혹자는 사실에 귀속시키고, 혹자는 법칙에 귀속시키는 이유를 찾는다면, 기계론과 역동론은 단순성이라는 말(le mot simplicité)을 두 개의 다른 뜻으로(deux sens)[두 방향을] 취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전자(기계론)에서 그 결과가 예견되고 또한 계산되는 모든 원리는 단순하다. 이리하여 타성이라는 개념이 그 정의 자체에 의해서 자유보다 더욱 단순하며, 동질적인 것(l'homogène)이 이질적인 것(l'hétérogène) 보다 더욱 단순하며, 추상적인 것(l'abstrait)이 구체적인 것(le concert)보다 더욱 단순하다. 그러나 역동론은 여러 관념들(notions) 사이에 편리한 질서(ordre)를 세우려 하기 보다는 그 관념들의 실재적인 연관성(filiation réelle)을 찾으려고 한다. 사실 소위 단순한 관념도 - 기계론이 원초적인 것으로 삼는 것도 - 외견상으로는 단순한 것에서 파생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의 융합(fusion)으로 얻어진 것인데, 이 융합에서 마치 어둠(une obscurité)이 두 개의 광선의 간섭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듯 그 개념들은 서로 중화된(neutralisé)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발성이라는 이념(l'idée de spontanéité)은 타성이라는 이념(celle d'inertie) 보다 확실히 더욱 단순하다. 왜냐하면 전자(타성)는 후자(자발성)를 통해서만 이해되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며, 후자(자발성)는 자족하기(se suffit)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각자의 자유스런 자발성(sa libre spontanéité)에 대하여, 사실에 맞건 착각이건 간에, 직접적인(immédiat, 무매개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데, 이 표상 속에는 타성의 이념이 어떠한 이유로도 들어오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물질의 타성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물질은 그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며 스스로 정지할 수도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 것이며 모든 물체(corps)는 다른 힘이 간섭하지 않는 한, 정지나 운동을 계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 경우에서 필연적으로 활동성이라는 개념(l'idée d'activité)으로 소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든 여러 가지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추상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인 것의 관계, 복잡한 것에 대한 단순한 것의 관계, 법칙에 대한 사실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서, 우리가 선천적으로(a priori) 인간 활동에 관한 두 개의 상반되는 개념(deux consceptions opposées)[개념작업]에 도달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시킨다. (DI 105-106)” - (179-180)[(최 323-325)] [다음 문장까지 번역하여 올려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천적 문제거리와 후천적 문제거리의 차이를 보아야 논의의 방향을 알 수 있다. (46SLJ)]
위 문장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베르그송이 강조하고 있는 기계론과 역동론의 대결을 플라톤 철학에서 기본적인 원인의 구실을 하고 이는 이념과 능동인, 또는 본질과 자발성의 대결임을 간과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위 문장을 정확히 천착하려면 서양의 형이상학의 여명기에 전개되었던 사물의 진상에 관한 원인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181) [박선생님의 장점은 벯송에서 자연의 두 의미(방향)을 플라톤에서 찾았다는 것이고, 그 문제제기에 소크라테스의 이뭣꼬(ti esti)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나로서는 벯송의 두 방향의 제시는 플로티노의 영향이라고 본다. 물론 이 플로티노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이 방향을 달리 보았다는 점이다. 플라톤에서 상층에서 표면으로 방향은 이야기(mythe)이고 표면에서 상층으로 방향은 변증법이라 한다. 이에 비해 플로티노스는 심층에서 표면을 거쳐 기호(추상)의 방향을 이야기(담론)로 보고, 기호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심층으로 방향을 변증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벯송, 강의록4(1999): 플로티노스 강의록, 참조). 플로티노스의 심층방향은 동근원(동원천)의 탐구가 변증법적이다. 내재성의 흐름, 즉 내재성의 혼융은 다양체이기 때문이다.(51NLD)] [이런 벯송의 관점은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는 이야기(설화, 신화)를 깡그리 무너뜨리는 것이다. 결국 그는 소르본 대학 교수에 채용될 수 없었고, 카톨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논리실증이 아니라 실재성의 실증의 시대가 이 그의 사유를 증명하게 될 것이다. / 우스개 소리지만, 상층 논리로서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논리의 극한은 아담. 그를 만드는 자는 신이라 부르겠지만 말이다. 실증의 시대에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단계가 표면으로는 불연속이라고 생명상 연속으로 올라가면(불연속이며 계열이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멸종이 있다) 단백질의 합성의 원핵세포들 또는 진핵세포들이라는 것을 부정하겠는가? (51NLE)]
2. 자연의 의미 181
베르그송은 강단철학자가 아니며 어휘의 의미를 정확히 규정한 바 없이 일상적인 용어를 철학의 전문적인 용어로 구사함으로써 표현의 애매함을 번번히 범하고 있다. (182) [여기에 윤구병은 일상의 삶의 언어에서부터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수입된 철학이 일상어와 괴리를 갖고 있어서 삶을 왜곡한다고 본다. 나로서는 앵글로색슨으로 덧씌어진 사고방식의 지배가, 즉 일본제국주의 60여년, 미국제국주의 70여년의 지배가, 본성(la nature)과 인도주의(humanitaire) 사유를 저 구석까지 밀어붙여서 상품자유주의나 물체화된 개인주의가 철학의 기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내재성의 철학, 본성의 사유로 전환이 필요하다. / 자연에 대한 두 개의 개념화 작업(deux conceptions)이 필요하다. 하나는 착각이고 다른 하나는 실재이다. 착각이 우세한 것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지배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대상의 지배를 바랄 때도 제국의 도장을 받아야하는 역사였다. 지금도 우리의 자유를 위해 트럼프를 칭송해야 되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는가? (51NLE)]
그러나 자연과학자에게 직접적으로 소여되는 대상은 그 자연과학을 한정하고 있는 특수성[과학들 각각의 한정성]으로 인하여 그 범위가 국한되어 있으며, 개별적인 과학에서 형이상학으로 학문이 확대됨과 동시에 직접적으로 소여되는 대상의 범위는 대상 전체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의 대상은 ... 주관성을 투여한 바 없는 원초적이며, 직접적인[무매개적] 전체로서 대상이며, 모든 이론의 차안(此岸)에 있다. (182-183)
[형이상학의 두 의미에서 하나는 피안(彼岸)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차안(此岸)에 있다. 피안이란 선의 이데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신, 천국, 극락 등이다. 이들을 이해하고 하는 사고는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차안은 구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시기에 접근 밖에 있다가 어떤 시기에 영토화가 되고, 또 다른 탈영토화가 있다가 재영토화가 된다. 생명체는 환경, 풍토, 영토, 지구 그리고 우주와 더불어 살아간다. 피안은 착각이고 해석은 아편이다. 아직 건드리지 못한 질료, 형상 없는 질료, 전체로서 질료를 설정하는 것은 상상의 가정이 아니라 담론의 과정에서 필요조건이다. (51NLE)]
3. 본질과 자발성 183
... 그러나 진상(眞相)을 의미하는 희랍어 알레테이아(alētheia)[비은폐성, 진리]는 은폐되어 있지 않음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상 개념의 탐구의 지침이 된다. / 다(多)로 성립하는 현실적인 자연의 진상을 탐구하기 위하여 모든 사물에 대하여 던져진 <이것은 무엇이냐?>는 물음도 비은폐성의 지침 하에 해명될 수 있다. (183) [<이 뭣꼬?>라는 물음을 사물 또는 물체에 한정하는 사고와 본성 그리고 생명에 관심을 두는 사유는 서로 차이가 아니라 차히가 있다.
그러므로 본질로서의 진상은 1) 타자 일반, 2) 관계 맺음 일반, 3) 허무 일반에 대비하여 규정된다. 사물의 진상은 ... 그 사물에만 고유한 내용[특이성]이며, 관계맺음 일반 법칙에서 오는 모든 규정을 배제하며 최후로 무가 아니므로 그 자체로 실재한다. [여기서 진상은 Idea인셈 인데, 이런 고유성, 규정배제, 비(非)-무, 자체적 실재 등으로 표현되는 것은 상징(symbole) 또는 추상으로서 기호(semo)일 뿐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타자와 타인과 관계맺을 필요없는 자족적 실체는 개념화 작업(la conception)에서 결과일 수 있으며 또는 미래를 예측으로 목표로 같은 결과를 목적으로 삼는 것일 수 있다. (51NLE)]
[* 마실의 도식]
\ 하나(선의 이데아)
본질 //
밖 표상 [물체] 개별물의 공존
-- 관계맺음(우연 : 간섭) -> 대립적 의미(양립불가능) 대 공현존(양립가능)-
안 [속성들] -> 양태들로 생산(생성)
무규정성
\ 허무(절대무)
[도표1.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연관하여 벯송을 설명하기 위하여]
본질 공존한다.
타자 [일정하게 규정성을 수용]
관계맺음 [질료를 포함한 형식, 모습 figure, 상호간섭] [데미우르고스]
무규정성 타자화하는 운동, 자발성,(질적변화 운동)
허무 흐름, 운동[필연=운동 그자체 = 과정]
[도표2: 플라톤, 즉 본질론적 입장에서 본 형이상학 ... ]
진상의 이면(裏面)[안면]은 타자에 대한 절대상이다. 이것은 허무로 인하여 가능하다.[진상의 절대적 온타자는 허무이다] 그러므로 본질[들] 사이에는 상호 해후(邂逅)가 없으며 상호 간섭이 없다. 상호해후는 우연의 원인이며 상호 간섭은 비공존의 원인이다. (184) - [어려운 표현이다. 존재와 무의 만남 원래 없다. 그런데 둘(존재와 무) 사이 만남이 있다면 우연인지 아니면 그럴 이유가 없지 무는 없는 작용이니까. 그렇다면 이데아들 사이에는 만남이 우연이겠지(이런 의미에서 이데아들은 공현존이잖아). - 존재와 무 사이에 상호 간섭은 양립가능성(공존)을 배제한다고, 그리고 이데아들 사이에 상호 간섭의 배제는 공현존이다. 상호 간섭하게 되면 양립불가능이며 비공현존이 아닌가?]
관계맺음은 존재의 고립성을 개방하여 타자와 연결을 설정하므로, 관계맺음 일반의 원리는 연속성을 구할 수 있다. .. 모든 존재의 상호 타자화의 극한인 무규정성 일반은 모든 존재의 관계맺음 일반의 성립 기반이다. ... 모든 존재의 관계맺음에서 관계 맺음의 필연적 법칙은 모든 존재를 연속적으로 무규정성으로 인도한다. .. 무규정성에서 성립하는 흐름(부동성 浮動性)은 운동의 특징이므로 무규정성은 운동의 원인이다. ...관계맺음의 필연적인 규정은 연속적으로 타자화하는 운동 그 자체이며, 과정(process)을 동반하며, 그 과정의 극한치는 그 과정과도 구별될 수 없는 상태이다. (185) [본질은 관계맺음이 없을 때 본성자체이다. 관계맺음은 연속성이고 관계맺음의 일반은 무규정성으로 가고 그래서 운동만이 있다. 필연성으로서 운동은 흐름이며 무규정성의 원인이다.]
만유는 서로 관계 맺고 있는 한, 그 진상[만유의 표상 또는 현상]은 만유의 무규정적인 것으로의 연속적인 몰락[chute]이다. ... 이질적인 존재[가], 즉 모든 규정의 무규정화가 초래된다. 즉 모든 본질의 몰락이 초래되는 것이다. (185-186) [만물이란 진상이 무규정적인 것으로 하강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질적인 것이 서로 관계 맺음으로서 진상이 몰락하는 것이며, 진상이 무규정화되어 가는 것이다. 즉 진상이 아페이론 속에서 카오스모스 상태로 추락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플라톤주의의 사고이다. (51NLE)]
[몰락 또는 완전 결핍으로 가는 것이 무로 향하는 것일 것인데, 허무는 순수 사유에서만 가능하다. 순수 선이 사고에서만 가능하듯이. 그럼에도 논자는 허무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나변(奈邊)]에서 찾으려 한다. 벩송이 찾은 곳은 유기체의 영역이니까.] - [[나변(奈邊) [어느 곳] 나변(那邊)[명사]1. 어느 곳 또는 어디. 2. 그곳 또는 거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관계 맺음과 운동을 통하여 사물이 탄생하며 공존이 가능한 사태는 유기체 영역에서 볼 수 있는 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현실의 관계 맺음을 외면하고 고립 속에서만 다가 성립한다는 영원의 좌표와 관계 맺음 속에서는 다는 무규정성으로 몰락한다는 관계맺음의 필연적인 법칙의 좌표는 해결을 제공할 수 없다. (186)
[= 고립 속에서 영원좌표 대 무규정성으로 몰락한다는 필연 좌표. 그런데 극한 상에서 전자에서 다자가 고립과 영원성 후자에서 관계맺음이 심하여 무규정성의 필연성. 이 양자에서 새로운 관계 맺음의 좌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유기체 영역에서 심층으로부터 운동을 통해 사물이 표면으로 생성하며 관계맺음으로써 다(多)의 공존이 표면(현실)상에서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상층에서는 관계맺음 없이 다(多)자가 영원함으로써 고립적으로 즉 정태적으로 성립하며 표면(현실)과 관계없고, 관계맺음이 많아서 무규정성이 되는 필연성의 법칙은 거의 혼돈으로 남는다. 그런데 필연성에서 유기체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영원과 필연 사이에 영원에 의탁하지 않고, 그리고 무규정성의 혼돈에 머물지 않은 좌표(이것은 표면의 이중성의 좌표이지만), 즉 무규정성에 역기능 하는 좌표가 필요하다. 그것이 관계맺음과 운동 속에서 존재[현존]이 형성[생성]되며 공존한다는 새로운 관계맺음의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 좌표가 우리가 보기에 표면의 이중성이다. 논자는 필연성에 “역기능하는 비합리적 좌표”라 부른다. / 간단히 말하면 상층의 영원좌표 대 심층의 필연좌표가 있다고 했다. 이제 새로운 생성의 표면 좌표가 필요한데, 이는 관계맺음과 운동에 의해서 이다. 관계맺음과 운동을 구분할 경우 전자는 형식이고 후자는 내용이 된다. 그러면 들뢰즈가 보인다. (51NLC)]
그러므로 이 비합리적인 좌표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성[역능성]을 통해서 현실화되는 좌표이며, 필연성[무규정성]의 좌표에 대해서는 가능성[생성, 창조]의 좌표이다. 필연성의 좌표는 가령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에서 나타난다고 하며, 가능성[생성]의 좌표는 전자에 역기능한 것으로 일자[동일자] 속에 타자가[타자들이], 부분 속에 전체가 기능적으로 들어 있는 생명 현상 속에서 성립한다고 한다. (187)
[논자는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에서 성립하는 횡축과 종축(186)에 비유했지만, 두 좌표는 방향을 달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플로티노스의 해석에 따라.]
이상에서 논하는 바와 같이 다(多)에 관해서 두 가지 대립된 좌표가 성립한다. 그 하나는 ... 영원에서만 성립한다. 또 하나는 운동의 과정에서만 현상한다. .. 이 후자의 경우에는 관계맺음과 운동을 통해서 ...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신 자발성으로 인하여 무규정성 속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존재, 즉 현상이며, .. (187) [다른 좌표란 내재성의 발현, 새로운 생성이다.]
즉 하강하는 운동에 역기능 하는 측면을 시간이라 하므로 다(多)는 시간에서만 현상[생성, 표출]한다. ... 시간에서는 고정적인 것은 성립하지 않으므로 다(多)의 변하는 측면, 양상만이 현상[생성] 한다. 이렇게 영원과 시간이 다(多)를 성립시키는 좌표에서 대립한다. (188) [여기서 현상한다는 단어 때문에 국내에서 벩송을 현상학의 일부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한다 영원좌표에서 모방(시뮬라크르)와 시간좌표 모방(시뮬라크르)가 같은 단어 시뮬라크르라고 해서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뢰즈가 강조하듯이, 시간에서는 현상이 아니라 생성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51NLE)]
4. 영원좌표의 시간좌표로 환원 188
... 베르그송은 ... 영원의 좌표를 양상론적 다(多)의 현상좌표, 즉 시간의 좌표로 환원시킴으로써 플라톤 철학과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188) [박선생님이 한 때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에 관심을 기우려 읽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손동현 교수의 논문이 있다.] [나로서는 가로축과 세로축이 아니라, 방향의 차히라고 본다. 차히라고 표현한 것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현실에서 유사성, 대비, 대립, 관계 등이 있다고 해서, 실현태에서 비교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표상과 생성은 다른 차원이라 본다]
본질론적 입장에서는 다의 공존은 본질들의 무간섭성에 기인하며, 이 무간섭성은 허무에 기인하거니와 허무는 본질을 절대적으로 고립시키는 요인이다. (188)
본질론적 입장에서 다가 성립하려면 여러 존재가 공존해야 한다. 그런데 공존을 가능케하는 근거는 허무였다. 그러나 공존에 있어서 본질들은 허무 속에 임의로 있을 수 없으며 적어도 위히를 달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본질은 불가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무는 위치에 의해서 분할되며 상대적인 하나의 차원으로 변한다. ..(189)
그러나 본질들이 성립하는 영원의 좌표는 시간의 자표로 아직 환원되어 있지 않다. ... 관계맺음에서 운동의 반대 방향의 극한은 다(多)라고 이상에서 논하였거니와 자발성은 다를 동시에 그 본질에 참여한 부분에 있어서 배후의 무규정성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며 보존한다. .. 자발성의 보존 능력을 베르그송은 기억이라 하며, 동시성은 기억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191) [다른 방향은 자발성이다. 무화하는 길과 달리 상승하는 권능이다.]
끝으로 자발성의 입장에서 본질을 고찰하면 텅빈 공간에서 타성적으로 정지하거나 운동하는[질을 유지하는] 본질은 자발성에 비하여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자발성처럼 무규정성의 힘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고,] 그 결과 자기 보존을 기할 수 없고 무규정성의 힘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운동하는 점에 있어서 자발성과 다르므로 자발성의 능력의 부분적인 결핍을 의미한다. (191-192) [생명의 능동성과 본질의 자족성에 대한 의미해석]
... 만유가 시ㆍ공간적으로 연속된 운동을 하고 있는 한 자발성 자체는 하나이다. (192) [이 하나는 이데아의 하나와 달리 덩어리, 다발, 들뢰즈 표현으로 다양체이지만 분명히 단위로서 하나이다.] - [공간좌표에서 시간좌표로 환원이라기보다, 둘 사이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는 사고의 차원이며 후자는 사유의 차원이다] ...
5. 본질 및 자발성과 현실성과의 관계 192
1) 본질과 현실과의 관계 193
a) 현실에 대한 본질적 [담론] 이설(理說)의 하나는 기계론이다. (193) [소박한 유물론의 견해이다.]
b) ... 본질은 구체적 현실에서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성립하는 여러 외연(外延)에서 추상적 작용을 거쳐 성립하며, 본질들의 외연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본질들의 관계를 정확히 해명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현실을 본질을 기준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이러한 정확한 외연관계는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 외연을 투여함으로써 가능하다. (194) - [뉴턴이래 신칸트학파의 인지적 사고이며, 분석철학도 마찬가지이다]
c) 본질의 현실에 대한 이설을 다음과 같다. 자연에서 성립하는 모든 현상은 물질적 현상이든 의식적 현상이든 모두 흐르고 있으며, [상층 이데아계에서] 인위적 기호만이 고정적이므로 본질의 특징인 고정성은 기호에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질을 기준으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은 기호로써 성립하는 존재를 기준으로 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는 이론이다. (194) [자연의 현상은 흐름이고, (상층의) 본질은 기호[symbole]이다. 후자에서는 현실을 기호로서 설명한다. 의미를 해석한다. ]
2) 자발성과 현실과의 관계 194
이상에서 본질과 연실의 관계를 일별하거니와 자발성과 현시릐 관계를 검토함에 있어서 역동론은 사물의 내용의 실재적인 연관성(la filiation réele)을 찾는다는 구절이 지침이 된다. (194) [연관성이라 번역했는데, 계열과 같은 의미이다. 끈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자연의 자발성은 표면의 현실성과 연결되어 있다.]
영원에서 성립하는 본질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므로 자율은 필요 없으며, 그 결과 본질의 항존성에 기초를 둔 법칙의 불변성으로 현실의 운동을 지배하여 그 운동의 내용의 항존성을 확보하려는 존재론적 이론이 요청된다. (196) - [영원에서는 자족적이니 움직일 필요도 없지, 항존성이다. 그래서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항존성의 변형으로써, 전체 세상의 총량의 불변, 운동보존의 법칙이나 에너지 보존법칙 등에서도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이런 총량불변 또는 통일성(제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유로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역행), 자기력(동일한 반대의 힘이 존속), 수학에서 물질계에 대한 통계학 우연성, 무한이 무한하게 열림 등에서 통일성 이론이 부분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역동론의 이장에서 보면 본질은 자발성의 기능에 의하여 세계의 표면에서 추상화된 것이다. (196) - [밖으로 보기에 독립적이고 정태적인데 비해, 내부적으로 자발적이고 동태적이라고 본다]
6. 본질 및 자발성과 자유와의 관계 197
1) 본질과 자유와의 관계 197
자유의 의미는 자유로 인하여 사물의 존재가 확보되는 데 있으므로, 본질론적 입장에서 자유는 각 사물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인간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 자유가 된다. (197)
[인간이]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궁극적 목적은 본질을 구현하는 데 있는데, 본질론적 입장에서는 본질의 진상은 타자에 대한 영원한 무감동이므로 본질론적 입장에서 성립하는 자유의 극치는 모든 타자에 대한 영원한 무감동에서 성립한다. (198) [본질의 구현이 자유이고 그 자유는 무감동(무관계)이며, 자족적이고 영원하다고 볼 것이다. (51NLC)]
2) 자발성과 자유와의 관계 198.
자발성에서 성립하는 자유는, ... 본질론적 자유와 비슷하나[비슷하게 보이나], 일보 전진하여 본질에 입각한 이론적 체계는 타성의 체계이므로 이을 따름은 자발성의 자기 상실을 의미하며, [그] 이론적 체계를 따른다는 것은 타율이 된다. [본질론(형상론)의 자유는 자발성의 상실(뻣뻣함)이며 타성(정태적)이다. 동일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자발성의 자유는 유연함과 역동성이며 차이반복을 한다. 이런 방식을 실행하는 것은 유기체이며, 온자아를 느끼며 작동하는 권능의 힘으로 자아를 통해 자아의 정체성 또는 인격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
선택의 주체자는 자기 자신의 자발성을 전체적인 자발성[온자아Moi]과 융합하면서 선택한다. 그리하여 선택은 선택하는 주체자의 자발성의 유한성을 함유하고 있지만, 자유의 의미는 자유로 인하여 사물[인격, 영혼]의 존재[현존]를 보존하는 데 있으며, 자발성이야말로 사물의 존재를 보존시키는 원인이므로, 선택에 있어서 자유는, 전체를 보존하는 자발성과 합치한 개인의 자발성에서 선택이 성립할 때, 진정한 자유가 된다. (199) [온자아(Moi)와 자아(moi)의 일치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은 진정한 자유이라는 점은 플로티노스, 스피노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벩송은 자유의 실현을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본 것이다. 내재성과의 합일에서 자아의 행위는 거침이 없을 것이다. 금강경에서 이런 행위는 보시를 시행하는 것도 보시를 받는 것도 아닌, 그저 이루어지는 세상이라 한다. 이런 삶을 보살(보리)의 삶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실재로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게 자유이며 티끌(하화)에도 불성이 있다는 화엄의 세계이다.]
그런데 세계 내에서 발휘하는 자발성의 기능과 세계의 한계에서 발휘하는 기능은 하나의 자발성의 기능의 양면이다. (199) [이 양면성이란 스피노자에서 권능과 노력인 셈이다. 즉 온자아와 자아의 합일과 융합의 권능, 자아가 세상에서 행해야할 것에 작동하는 권능은 양면이라기보다 다중화일 것이며, 하나의 권능이 펼쳐지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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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형이상학[이데아들의 공존, 양립가능성]
인지 (개념작업) a posteriori
신체적 (행동) 다변화(이데아를 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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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적 (작동) 다중화(생성과 모방)
인식 (속성의 양태화) a priori
질료형이상학[다발, 덩이, 근원다(根源多), 양립불가능]
[표3: 진솔한 유물론: 질료에서 자발성의 발현으로 본에 의식의 발현 ]
자발성은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 하며 다(多)로 분산하는가 하면 일자로 수축하고, 외부로 확산하는가 하면 내부로 집중하여 우연과 모순을 통하여 존재로 향할 수 있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근원다(根源多)인 자유는 자발성 자체의 초월적[내재성, 선험성] 성격을 지칭하며 자발성의 기능의 어느 일부분을 지칭하지 않는다. ... 자발성은 관계맺음[연관]에 있어서 사물을 존재케 하는 원인이므로[,] 진정한 자유는 모든 사물과 관계맺음 속으로[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데서 성립한다. (200)
필자는 베르그송의 근원적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시론의 제3부에서 자유를 아프리오리한 측면에서 서술한 부분을 이상과 같이 분석했거니와 인간의 자유는 인식과 행위[작동]를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으므로, 베르그송의 근원적 자유는 그의 철학에 있어 행위와 인식의 관계를 설명함을 불가피하게 하나 이 문제는 본고의 한계를 넘는다. (200) [행동이나 인식의 문제는 근원적 자유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편의와 유용을 적용하는 하는 문제이다.
(9:29, 51N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