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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셀린, 퐁주의 선구자, 장-자끄 루소(Jean-Jacques Rousseau précurseur de Kafka, de Céline et de Ponge, 1962)
들뢰즈, (루소 탄생 250주년 기념), Arts, n. 872, 6-12 juin 1962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엮음, 이학사, 149-160.
- L’Ile déserte et autres textes, pp. 73-78
* 들뢰즈는 위대한 저술가들에 대한 오해가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그 저술가 체계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저술가가 최대한 반-순응주의[저항주의] 능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한다. 루소에게서 카프카, 셀린, 퐁주의 면모를 발견하지 못하면 루소를 이해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에서는 하나는 카프카 글에서 자주 웃고, 유머(해학)의 이면을 알아채야 한다. - 이 문제에 관한한 제국(국가)이 실행하는 과도한 억압의 우스꽝스러움을 웃어넘기기는, 검찰의 과잉 수사 뻣뻣함의 우스꽝스럼을 유머로서 되받아 치기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루소의 고백록에서 유쾌한 측면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째로 셀린과 연관에서, 루소가 자기 이익을 얻지 않고 자연으로 산다는 심정에서 유머를 본다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점은 벩송의 웃음에도 마찬가지인데 제도와 제국의 억압을 웃어넘기기에는 실제의 삶에서 쉽지 않다. 유머가 한 시점, 한 영역에서 웃음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환경과 생태에서 다른 생태를 유머로서 대처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 강압과 폭력이 강하면(트럼프가 이란 지도자를 죽이는 짓)을 유머로 대처하기보다 분노와 투쟁(lutte, combat)의 붉은 깃발을 올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루소에게서 유머란 삶을 이익과 편안보다 자연으로 살아간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삶은 영혼이 추구하는 정열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유물론의 현자를 추구한 것이다. 셋째로 퐁주와 관계는, 들뢰즈에 따르면, 개인에 관한 점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간 대 인간의 맞추침에 대한 것으로 설명한다. 에밀에서처럼 아이에게 사물을 가져다주지 말고, 반대로 아이를 사물에게 옮겨 놓는 방식을 해보라는 점이다. 사르트르가 곡해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퐁주가 사물을 인간보다 앞세웠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루소를 잘 읽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8세기 당대의 스콜라 철학자의 영향도 아니고, 같이 어울렸던 백과전서파들과 같은 지식인에 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궁정음악인 라모 등과 같은 시류의 인간도 아니면서 작고도 하고, 식물학자 뷔퐁과 같은 생물학자도 아니면서 식물채집을 좋아하고, 소설과 극작을 몇 편 남겼다고 해서 문인에 속하지도 않지만 그의 독특한 편지들, 고백록은 특이한 작가로서 손색이 없다. (53LKG)
** 프랑스 혁명에서 자꼬방파들은 루소를 혁명의 전당인 판테온(만신전)에 루소를 안치했다. 그럼에도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은 루소를 비판하면서 “혁명, 공화국, 인민은 장-자끄보다 더 큰 적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했단다. 철학자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히틀러는 루소의 결과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마레코(Jan Marejko, 1946-2016)는 이런 비판이 루소 작품 속에서 전체주의적 체계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유럽 18세기 연구자인 미국의 크로케(Lester Gilbert Crocher, 1912-2002)에 따르면, 현대 전체주의가 루소의 두 요소를 – 루소의 자급자족 체계 경향과 국민적(민족적) 통일[일반의지]의 관념에 대한 주장을 - 선호했다고 한다. 혁명과 공화국에 연관하여 루소의 일반의지를 한정하면, 한편으로 전체주의로 향할 지도부가 있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인민은 어떠한 체제든 억압 체제를 전복하는 권능이 있다. 상부의 관점과 심층의 관점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루소에게 심층의 권능의 의미가 더 크다는 점에서 루소를 자연주의 계열로서 손색이 없다. 그가 “현자의 유물론(matérialisme du sage)”이라 부른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53L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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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프카, 셀린, 퐁주의 선구자, 장 자크 루소(6. Jean-Jacques Rousseau précurseur de Kafka, de Céline et de Ponge) 73-78, 번149-160
우리는 위대한 작가를 오해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에 빠져들 위험이 잇다. 예를 들어[하나] 우리는 그의 깊은 논리를 모르거나 또는 그의 작품이 지니는 체계적인 특성을 모르는 데서 온다. (우리가 이때에 작가의 “비일관성들(incohérences)”에 대해 말하고 마치 비일관성들이 우리에게 더 나은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또한[다른 하나] 작가의 희극적 권능과 그의 희극적 천재성을 모르는 데서 온다. 즉 권능과 재능에서부터 그의 작품은 작가의 최대한의 반-순응주의적 효과를 일반적으로 끌어내고 있다. (우리는 불안과 비극적인 측면에 대해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진실로 우리가 카프카 작품을 읽으면서 자주 웃지 않는다면 우리는 카프카를 제대로 찬미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규칙(ces deux règles)은 특히 루소에게 있어서 유효하다. (73, 149)
루소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논제들 중의 한 논제에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선하다는 것을, 적어도 악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한다. .. 그것은 지극히 정확한 논리적 선언이다(un manifeste logique). (73, 150)
루소는 말한다. “인간들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만남에서 서로 공격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만나지 않았다. 도처에서 전쟁의 상태가 지배하였지만, 지구는 평화로웠다.” 자연 상태는 이처럼 독립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의 상태까지도 말하는 것이다. (73-74, 150)
자연 상태에서 우리의 필요들(nos besoins)은 그 필요들 자체가 [충족의 여건상]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능력과의 균형 속으로 들어가며, 결국에는 일종의 자족(autosuffiance)을 획득한다. 심지어는 자연상태에서 성관심(la sexualité)까지도 단지 일시적인 접근만을 낳거나 또는 우리를 고독(la solitude) 속에 놔둔다. (루소는, 깊이 있는 이론의 해학적인(humoristique) 이면과도 같은 이점에 대해서, 말할 것이 많았으며 또 실제로 많은 것을 말하였다.) (74, 150-151)
.. 루소는 억압적인 관계 그리고 이 억압의 관계가 전제하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분석을 확신했던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폭력과 억압이 최초의 사실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억압이] 공민 상태(un état civil), 사회적 상황들, 경제적 결정들을 가정하는 것, 이런 극단적 논리의 원리를 상기시키고 새롭게 하는 데는 엥겔스(Engels, 1820-1895)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74, 151)
로빈슨(Robinson)과 금요일(Vendredi) 관계 .... 만일 로빈슨이 금요일을 예속시켰다면, .. 그것은 단지 로빈슨이 물에서 건져낸 약간의 자본과 생산수단들 때문에 그런 것이었으며, 또 난파당한 로빈슨이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던 사회적 과업들에 금요일을 종속시키기 위해서 이다. (74, 151)
사회는 줄곧 고약(méchant)함으로써 이익을 얻게 되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우리는 허영심 때문에(par vanité) 우리가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진실을 보자면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 (74 151)
루소는 말한다.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그 상황 속으로 들여오는 덕을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게 열망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자각 없이 금방 또는 천천히 나약해지기 마련이며, 또 영혼 속에서는 옳고 선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도, 사실 속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옳지 못하고 악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고결한 영혼(la belle âme, 아름다운 영혼)이 그 어떤 기이한 운명(un étrange destin)에 의해 애매한 상황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들어 그 속에서 오로지 큰 고통만을 부여잡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74-75, 152)
“나의 상황과 나의 성향들(les inclinations) 사이의 연속적인 대립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과오들(des fautes énormes), 터무니 없는 불행들이 생겨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비록 힘을 없을 지라도 역경을 승화시킬 수 있는 모든 덕목들이 생겨나는 것을 볼 것이다.” ... 실제로 고백록은 비극적이고 환각적인 책처럼 끝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고백록은 문학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유쾌한 책들 중의 하나처럼 시작한다. (75, 152-153)
고결한 영혼은 결코 자연 상태로 있는 법이 없다. 고결한 영혼은 부드러움을 가지고서 인간관계를 꿈꾼다. (153)
실제로 우리는 루소의 이 꿈이 잃어버린 삼각관계(une Trinité perdue)의 형상을 다시 회복코자 하는 것이었음을 안다. .. 실제로 루소는, 몽상이 테레즈(Thérèse Levasseur, 1721-1801) 속에서 구현되고 또 엄한 어머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욕심 많고 불쾌감 주는 여인인 테레즈의 어머니 속에서 구현될 때 자신의 부드러운 몽상을 인정하지 못했고. 게다가 바랑스 부인(Mme de Warens, 1699-1762)이 그에게 새로운 연인으로 오빠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을 때에도 자신의 부드러운 몽상을 인정하지 못했다. (75, 153-154)
루소는, 자신이 느린 관념들과 재빠른 감정을 지녔다고 종종 또 즐겁게 설명한다. 그러나 관념들은 느리게 형성되었지만, 그 관념들이 삶에서 갑자기 솟아올라, 그에게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고, 낯선 발명들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시인들과 철학자들에게서 우리는, 관념과 감정을의 조합을 증거하는 광기들(les manies, 엉뚱함)과 기이함들(les bizarreries, 별낫 짓)조차 사랑해야만 한다. (76, 154)
토마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95)는 .. 칸트에 관한 단편(슈보가 번역한 임마누엘 칸트의 마지막 나날들(Les Derniers Jours d'Emmanuel Kant, 1854))속에서 칸트가 양말을 정리 보관할 수 있는 걸이 기구(porte-chaussettes)를 사용하기 위하여 발명한 극도로 복잡한 장치를 기술하고 있다. (76, 154-155)
또 마찬가지로 루소는 무티에(Motiers)에 거주하는 동안에 아르나니아식 복장을 하고서, 여인들과 이야기하면서 자기 문 앞에 올가미들(des lacets, 덫)를 설치하였다. .. 이것들은 “사상가”의 일화들(des anecdotes)이다. (76, 155)
우리가 고약하게 됨으로써[나쁜 짓으로] 이익을 얻게 되는 상황들을 어떻게 회피하는가? .. 예를 들어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상속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그렇다. (76, 155)
마찬가지로 신엘로이즈((Julie ou Nouvelle Héloïse, 1761)에서 .. “쥘리는 자신이 남편의 상실로 가졌던 비밀스런 이익을 자신을 보존하는 이익으로 바꾼 것이다.” (76, 156)
예를 들어 루소는 자기의 방광에 걸린 질병((la maladie de vessie)이 .. 왕의 은급[연금]을 포기하도록 선택하였다. 즉 이 경우에는 그의 질병이 유머(해학)의 원천으로 작용하면서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귀의 장애(ses troubles d'oreille)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이는 나중에 샐린(Céline, 1894-1961)의 재치와 유사한 재치(une verve)로 이야기 한다) 그는 왕의 은급의 수혜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악보를 베끼는 필경사가 되기를 선택한 해학(humour)은 분명히 도덕의 이면에 해당하는 유머이다. (76-77, 156-157)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루소는 신엘로이즈에서 상황의 위험스러움을 피하는데 적합한, 깊이 있는[심층적] 방법을 공들여 세운다. 그에 따르면 상황은 오로지 상황 자체만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77, 157)
“쥘리, 더 이상 이 은신처에 마음 쓰지 마세요. 이제 이곳은 다 드러났으니까요.” 또한 그[루소]는 덕목을 생-프뢰의 현재의 이익을 만들고자 한다. “생-프뢰가 사랑하는 사람은 [현재의] 쥘리 드볼마르가 아니라, [과거의] 쥘리 데땅쥬에요. 그런데 생-프뢰는 그가 사랑한 인물[쥘리]의 소유자[남편]으로서 나[볼마르]를 증오하지 않지만, 그가 사랑했던 인물(쥘리)의 납치자로서 나[볼마르]를 증오해요.… 그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그녀를 사랑해요; 그러니까 그것이 수수께의 진솔한 말이에요. 그에게 기억을 제거하세요, 그는 더 이상 사랑을 가지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시간의 달아남[도망]을 [아제에]알아가는 것, 그리고 우리가 결국에는 과거 속에서 우리에게 정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 속에서 원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 대상과 더불어 또한 예를 들어 덤불숲과 같은 장소와 더불어 연관 속에서 이다. 이것이 바로 루소가 “현자의 유물론(matérialisme du sage)”이라 불렀던 것이고 또는 현재와 더불어 과거를 덮는다(couvrir)는 것이다. (77, 157-158)
루소의 철학 작품을 이루는 두 축은 에밀(Emile, 1762)과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 1762)이다. ... (77, 158)
에밀은 사적인 인간의 재확립에 있고, 사회 계약론은 [공적인] 시민의 재확립에 있다. 루소의 교육적 규칙의 첫째는 이러하다. 우리와 사물들과의 연관을 회복하는 것이다. ... 진실한 교육적 재건은 인간들의 연관을 인간과 사물들의 연관에 종속시키는 데 있다. 사물들에 대한 취향은 루소 작품의 일관성(상수)이다(프랑시스 퐁주의 훈련들은 루소의 어떤 점을 지니고 있다) 이로부터 에밀의 유명한 규칙이 나온다. 그 규칙은 신체적인(du muscle, 근육, 근력)[운동교육] 것만을 요구한다. 즉 아이에게 사물들을 가져다주지 말고, 아이를 사물들에 갖다 놓아라. (77-78, 158-159)
사적인 인간은, 자신과 사물들의 연관을 통해서, 고약함으로써 이익을 얻게 되는 유치한[유아적인] 상황을 몰아내는 인간이다. 반면에 시민이란, 유덕한 것에서 이익을 얻는 연관들과 같은, 인간들 사이의 연관들 속에 들어가는 자이다. (78, 159-160)
로소의 탄생일 기념하는 날[250주년], 사회 계약론을 읽고 또는 다시 읽을 기회일 수 있다. 시민은 이 책에서 권력들의 분리의 신비화가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 그런데 어떻게 공화국이 유일한 권력의 즉 입법권의 현존에 의해 정의되어야 하는 지를 배운다. 법의 개념의 분석은, 그 분석이 루소에게서 나타나는 대로, 오랫동안 철학적 반성을 지배할 것이고 그리고 그 반성을 아직도 지배한다. (78, 160) (6:05 53LLG)
***인명록
1699 바랑스(Françoise-Louise de Warens, 1699-1762, Madame de Warens ou Louise Éléonore de la Tour du Pil) 1713년 결혼했다가 그해 결혼 취소했다. 프로테스탄트였던 그녀는 1726년에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당대로서 자유로운 여인이었다. / 스위스 출신, 13살 차이로서 루소의 후원자이며, 나중에 연인이다. 루소는 처음에 마망(Maman, 엄마)이라 불렀다. 루소는 1728년(열여섯)에 그녀를 알게 되었고, 1735(스물셋)-1737(스물다섯)까지 샤르메뜨(Charmettes)에서 집사로 지냈다. 1754(마흔둘)에 제네바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녀(쉰다섯)는 쇠약해 있었다. 영국에서 돌아온 1767(쉰다섯)년에 그녀를 찾았으나 그녀는 이미 사망했다. 마담은 회상록(Mémoires)을 남겼다. 루소는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들(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la)의 둘째 산보(« Dixième promenade »)를 그녀에게 헌정했다. / Jean Samuel Rodolphe Wintzenried
1712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1721 르바쇠르(Thérèse Levasseur, 1721-1801), 루소의 동거녀. 세탁부(la lingère de l'hôtel Saint-Quentin). 1747년에서 1755년 사이에 다섯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고아원(les Enfants-Trouvés)에 보냈다. 교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루소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루소가 죽고 난후, 그녀는 사냥터지기와 결혼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루소에 얹혀살았다.
1755 바시안스키(Ehregott Andreas Christoph Wasianski, 1755-1831)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서 거기에서 몰했다. 칸트 제자로서 프러시아 신학자. 칸트 전기 작성으로 후기를 보냈다. Kant in seinen letzten Lebensjahren, ein Beytrag zur Kenntniss seines Charakters und seines häuslichen Lebens aus dem täglichen Umgange mit ihm (Königsberg: F. Nicolovius, 1804). fr. Les derniers jours d'Imanuel Kant (1827)
1785 토마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95) 영국 수필가. 독일 철학을 대중화 하였다. 임마누엘 칸트의 마지막 나날들(Les Derniers Jours d'Emmanuel Kant, 1854)/ 프랑스 번역 두 판본: Thomas de Quincey, Les Derniers jours d'Emmanuel Kant, Ombres (1986). Traduction de Marcel Schwob. - Thomas de Quincey : Œuvres, collection Pléiade, Gallimard (2011). Traduction de Sylvère Monod.
1820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경제학자로서 카를 맑스와 함께 맑스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 유고:『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
1867 슈보(Marcel Schwob, 1867-1905) 프랑스 작가, 시인, 번역가.
1883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현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1894 루이 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éline, 본명: 데투슈(Louis Ferdinand Destouches, 1894-1961) 프랑스의 작가이자 의사로, 필명이 셀린(Céline)이다. 셀린은 1932년 출판된 <밤 끝으로의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 1932)>(르노도상 수상), <외상 죽음(Mort à crédit 1936)>, <꼭두각시 밴드(Guignol's Band, 1944)>.
1899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 1899-1988), 프랑스 시인,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일차대전 말기에 사회주의에, 1937년에 공산주의에 가담하였다(10여년). 사물들의 편(Le Parti pris des choses, 1942).
1921 모노(Sylvère Monod, né 1921-2006) 프랑스 번역가, 수필가, 대학교수, 영국문학 전문가.
Jean-Paul Sartre, qui consacre une critique importante au recueil (L'Homme et les choses, Poésie 44, juillet-octobre 1944[1947]) et rédige une préface au Parti pris des choses. - Fr.Wiki, “Francis Ponge”항목에서
L'homme et les choses - SARTRE (Jean-Paul), Seghers, Paris, 1947.판 소개문의 일부.
C'est par Le Parti pris des choses, recueil de trente-deux poèmes écrits entre 1924 et 1939 et publié en 1942, que Francis Ponge [']est fait connaître comme poète. Deux ans plus tard, en 1944, Sartre, écrit L'Homme et les choses. En effet, selon Sartre, le projet de Ponge n‘est pas de décrire le mieux possible, « avec les moyens du bord » que lui offre le langage, les choses qu’il rencontre. Sartre reproche à Ponge de poser « l‘antériorité de l’objet sur le sujet » et, du coup, de réduire les hommes au rang d‘« automates ». /[[ [']는 [s’]의 오타? ]] 가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1973)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철학사가. 정치철학 전공이다. 1937년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스펙토르(Céline Spector, 1972-) 프랑스 여성 철학자. 파리-소르본대 교수, 몽테스키외와 루소 전공. Au prisme de Rousseau. Usages politiques contemporains, 2011(298 p), Rousseau. Les paradoxes de l‘autonomie démocratique, 2015(p. 121), Rousseau et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2017(p. 158)
(7:34, 53LLG)
*참조1, fr.Wiki, “Jean-Jacques Rousseau” 항목에서
Leo Strauss s'oppose à cette interprétation car il estime, selon Céline Spector273, « que le contrat rousseauiste ne peut exiger le sacrifice de l'individu, car la nature ne dicte rien d'autre que l'intérêt personnel ». Selon Strauss, « Rousseau croyait que des révolutions pourraient restaurer la modération[절제, 중용, 온건] de l'Antiquité sur des principes nouveaux, conscients. Sa pensée est une union bizarre du progressisme radical et révolutionnaire de la modernité et de la discrétion[신중함, 조심성, 분별] et de la réserve[유보, 보류, 신중함] de l'Antiquité »274.
273 Spector 2011, p. 84. / 274L. Strauss et J. Cropsey, Histoire de la philosophie politique (1993), trad. O. Seyden (Paris 1994), p. 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