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귀족 출신인 어머니와 철학자이자 로마대학 학장이었던 아버지, 삼촌은 화성에 있는 거대한
홈을 발견한 천문학자였다.
보수적이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호기심과 상상력을 잃지 않던 그녀였다.
7살 때 로마의 꽃 시장에서 눈부신 색과 모양,향기를 가진 꽃을 보고 온 뒤 얼굴이 꽃으로
뒤덮이면 정말 멋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 귀와 코와 입에 진짜 꽃씨를 심고 꽃이 피기를 하루종일 기다리기도 했다.
천문학자인 삼촌과 망원경으로 몇 시간씩 별을 관찰하고 세어보고 우산을 펼쳐 들고
3층 창밖으로 뛰어 내려 보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든 비행 기계처럼 하늘을 날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원사가 모아둔 거름더미에 떨어져 다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관능적인 내용을 담은 시집을 출간해
보수적인 성향의 가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2살에 늘 엄격했던 집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아기보는 일을 하며 돈을 벌며 독립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 프랑스 파리에 잠시 들렀다가 친구의 초대로 무도회에 간다.
입고 갈 드레스를 살 형편이 안 되고,바느질할 시간도 없어 천에다 이리저리 옷핀을 찔러
드레스를 만들었다.
그녀가 만든 첫번째 드레스였다.
비록 무도회장을 우아하게 돌아다니는 동안 옷핀 들이 옷에서 빠져 버렸지만~
하지만 그때부터 그녀에겐 옷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결혼과 함께 미국에 갔지만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은 금세 끝났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두 살이 던 딸과 함께 다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직업 디자이너 경력이 없었던 그녀가 만든 옷은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아파트에서 생활은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옷을 만들었다.
친구가 된 여러 예술가들이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1927년 니트웨어 컬렉션에 트롱 프뢰유 스웨터를 출품해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옷 원단에 프린팅을 넣은 것으로 마치 실제 리본을 맨 것으로 보이게하는 '눈속임 기법'의
스웨터를 만든 것이다.
아르메니아 피난민의 손을 빌어 만든 검정색 울 스웨터로 패션잡지 <보그>로 부터
'예술적인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따로 바느질을 배우지 않았다.
그런데도 곁에 있던 재단사와 재봉사,수를 놓는 사람들이 그녀의 스케치와 상상력을 실현시켜
주었다.
당시 유행하던 예술 흐름이었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다채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녀가 최초로 해낸 일들은 매우 많다.
1)기성복 파는 가게를 처음 열고
2)패션쇼에 음악과 곡예사를 처음 등장시키고
3)여성 옷에 남성 옷인 양복 디자인을 활용
4)여성 옷에 처음 지퍼 사용
5)윗옷과 바지가 붙어 있는 옷과 치마바지도 만들었다.
6)시루스 레인코트(안쪽에 입은 옷 색깔이 보이는 투명한 옷)를 만들고
7)접는 선글라스
8)색깔이 들어간 몸에 꼭 붙는 스타킹 모양의 바지
9)손톱 부분을 반짝이는 플라스틱 재료로 만든 파티용 장갑
10)척추뼈와 갈비뼈가 튀어 나오게 만든 해골 드레스
11)강렬하고 화려한 색 '핑크컬러'
12)손모양을 넣은 재미있는 허리띠
13)종이옷
14)구두를 머리에 얹은 것 같은 각테일 해드(파티에 쓰는 장식 모자)
15)장콕도의 그림을 새겨 완성한 자수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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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여성이 입는 옷과 스타일은 얌전하고 소박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평범한 것과 특별한 것 모두를 받아 들였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와 교류하고 영감을 주고 받았다.
고대 로마의 발전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생각의 유연성을 방해한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인간관계나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도 내가 가진 고정관념 때문에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오늘날 우리 아이들도 꼭 닮 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