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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과 그 예술
지난날 우리나라 역사상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다.남성을 주축으로 하는 모든 윤리적 질서는 이 땅의 여성들로 하여금 부정이라는 낱말을 망각시켰다. 그러기에 영조 때 洪良漢(홍양한)이 지은 (사임당 申씨의 그림 폭에 적는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그림으로써 세상에 들어간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마는 모두 남자요, 부인은 아주 없으며, 또 잘 그리는 이는 많아도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간 이는 드문데, 부인으로서 그림을 잘 그려 신묘한데 들어간 이야말로 오직 우리나라 사임당 申씨가 그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임당의 그림이 세상에서 진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 저 값진 구슬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이다.」라고 했다. 사임당의 그림들에 붙어 있는 옛 사람들의 방문들을 보면, 위에 말한 홍양한 이외 肅宗大王(숙종대왕)과 宋時烈(송시열)을 비롯하여 홍양호, 소세양, 권상하, 신경, 김진규, 신정하, 송상기, 이병연, 신석우, 신응조, 이언유, 송근수, 이어서, 오세창등 많은 학자들이 쓰고 있는데, 사임당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학문은 물론이거니와 그림과 글씨도 한문글씨의 바른 체법(體法)에 맞는 글씨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임당의 그림 역시도 일찍부터 많은 학자들의 절찬을 받아 왔다. 사임당은 7세때 산수화,포도화(葡萄畵)를 그렸고, 그 외 오히려 절묘한 솜씨를 보인 것은 "포도"와 벌, 잠자리, 나비, 등의 "풀벌레"였으며 다시 그 위에 서예도 능숙했다. 율곡이 지은 師任堂行狀(사임당 행장)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포도를 얼마나 잘 그리 셧던지 세상에는 비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하였고, 명종때 魚叔權(어숙권)은 그의 稗宮雜記(패궁잡기)에서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安堅(안견)에 다음 간다고 한다.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경솔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냐.」하였고 또 李秉淵(이병연)은 "사임당 포도에 붙이는 詩"에서 「아버지 교훈 아래 자라난 부인, 우리 동방 어진 인물 낳으셨으니, 사람들은 포도그림만 좋아 하면서, 부녀 중의 李營丘(이영구)(宋나라 화가)라 일컫는구나.」하였고, 또 숙종 39년(1713)에 宋相琦(송상기)(玉吾齊大提學)는 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말하기를 「내게 일가 한 분이 있어 일찍 말하되 집에 율곡선생 어머님이 그린 풀벌레 그림 한 폭이 있는데, 여름철이 되어 마당 가운데로 내어다 볕을 쬐자니 닭이 와서 쪼아 종이가 뚫어졌다.」는 것이다. 「옛 부 터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야 어찌 한정이 있으랴마는 다만 그 사람 자신이 후세에 전할 만한 인품을 가진 연후에야 그 그림이 더욱 귀한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야말로 그림은 그림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인 것이다. 어찌 족히 중경(重輕)을 말할 것이 있다 하랴. 조선시대의 여성으로서 덕 행을 쌓은 여가에 예술까지 이처럼 능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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