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人生)은 요지경(瑤池鏡)
인생 꼬임의 첫 번째.....
나는 컴퓨터는 제쳐두고, 음악교육에서 특히 국악교육에 관심이 많았는데 학교에서 승진을 하려면 연구점수가 꼭 필요하여 국악교육 연구논문을 써서 제출.... 인천에서 1등급을 받아 전국대회에 갔는데 1등급을 못 받고 2등급을 받았다.
연구내용에 무척 자신이 있었는데 1등급(푸른 기장)을 받지 못한 것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중 뒷소문을 종합해 보면 음악 논문 심사는 양악(洋樂) 전문교수와 국악(國樂) 전문교수가 나누어 맡는데 바로 그해는 국악 전문교수들이 젊고 말발이 약했던 모양으로 국악에서는 한 명도 1등급이 없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2년 후엔가 대학 음악반 후배가 찾아와서 선배님 연구논문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몇 군데 인용을 하고 싶은데 괜찮겠냐? 꼭 각주(脚註)를 달아서 선배님 논문임을 밝히겠다.
물론 허락을 했고, 그 후배는 곧바로 1등급(푸른 기장)을 땄다.
더 열 받는 것은 몇 년 후 음악 교과서에 내가 발표했던 내용이 고스란히 반영되다니....
내 연구논문은 당시 국악(예:아리랑)을 교과서에 실렸는데 서양 악보로 그려 놓으니 도무지 국악의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논문 주제는 서양 악보로 그리되,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음인 퇴성(退聲)은 악보에다 흘러내리는 곡선을 긋자, 또 흔들리는 음 요성(搖聲)은 꼬불꼬불 선을 그어 나타내자는 것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온 것이다.(현재 악보도 그렇게 표시되어 있다.) 제기럴....
두 번째 열 받는 것은....
컴퓨터 교육인데 1996년인가 컴퓨터연구논문을 썼는데 내용은 건지골 소식의 학교통신망(학교 홈페이지), 부평남초등학교의 별똥마을 학급통신망(학급 홈페이지) 운영내용이었는데 두 가지 모두 전국 최초였으니 당연히 자신이 있었다.
나는 글 쓰는데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 나름대로 빠뜨림 없이 잘 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시 반드시 인천교육연구원 연구사의 지도를 받고 도장을 받아야 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다.
다행이 논문지도연구사가 대학 1년 선배이고 대학 때 같은 클럽이었던 분이어서 걱정도 하지않고 룰룰룰~ 콧노래를 부르며 연구원에 갔는데.... 10여명이 차례를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어 인사를 하고 내 연구논문을 내 밀었더니 후루룩 곁눈질로 넘겨보더니 한다는 말이
‘이거 완전히 탁상공론(卓上空論)이네....’ 당시 들은 ‘탁상공론’ 이 네 글자가 지금도 머리 속에 생생하다.
그 말의 의미는... 당시 연구사들은 일단 연구논문이 두꺼워야 하고, 뒤에 부록으로 아이들 직접 쓴 그림이나 글이 붙어야 되고.... 그런데 내 논문은 두껍지도 않고 뒤에 첨부물도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내가 다가서며 그 뒤편에 보면 비록 캡처(Capture)하여 프린트하였지만 모두 아이들 글이고 학부모님들 글....
이라고 하는데 갑자기 내 손을 탁 치며 ‘알아 , 백선생이 컴퓨터 도사인 줄 알아 .....’ 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강고(江高) 출신이다!! 나는 네가 어떤 부류(部類)의 인간인지, 어떤 줄을 잡고 연구사가 되었는지 다 안다.
속으로 부르짖으며 논문을 탁 잡아채서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어어어... 백선생, 백선생....’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다른 연구사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와 버렸다. 한 참 있다가 집으로 전화가 왔다.
‘내 말이 심했다면 미안하네. 다시 오시게....’ 내 대답은 ‘안갑니다!!!’
그리고 연구에서 손을 놓아버렸는데 나중 주위의 권유로 음악, 컴퓨터 연구로 연구점수는 채웠지만, 교직의 명예인 1등급 푸른 기장은 따지 못했다. 그때 내 논문이 중앙대회에 나갔더라면 틀림없이 1등급(푸른 기장)을 땄을 것이고 내 승진도 7~8년은 더 빨랐을 것인데 내 승질을 못 죽여서 결국 승진이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강화도로 교감 초임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을 때 우리 학교(華道初)로 신임 교장 발령이 났는데 바로 그 1년 선배 연구사가 교장이다!! 우리 직원은 물론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그 연구사의 갈등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 직원들은 나를 쳐다보며 ‘어쩝니까?’ 하는 표정이다. 뭐 어쩌나 두고 봐야지....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그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고 나한테 너무 잘한다.
술을 좋아하던 그 교장은 건강이 나빠져 술은 입에도 대지도 못하고, 마니산을 오르면 숨을 허덕거리며 오르다 중간에 포기하고... 뭐든지 학교 일은 ‘교감선생님 알아서 하세요...’
나는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 ‘걷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하며 매일 오순도순 함께 등산을 권했더니 1년도 지나지 않아 건강을 되찾았고 마니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은 정말 요지경(瑤池鏡)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좀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교직생활 40년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퇴직 후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었던 세계 배낭여행도 맘껏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혼자 배낭 메고 중남미 두 번, 스리랑카와 인도 한 달 반, 중국은 수차례 갔었고, 실크로드를 포함하여 1개월, 기타 동남아시아, 유럽, 그리스와 터키.... 최근은 유럽과 아프리카 모로코 2주를 합하여 50일간 여행.... 후회 없는 인생이다.
내가 스스로 붙인 내 별명(別名)이 여랑(旅浪-여행의 낭만), Backpacker, Backpack Traveler.....
덧붙인다면 혼자 배낭여행을 하기 위해 열심히 영어를 공부한 덕에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 영어통역사로 봉사도 했다. 하나 더 부언하면, 나는 음악을 전공한 덕으로 새로 개교하는 3개교의 교가(校歌)도 작곡했는데 현재 손자들이 다니고 있는 인천 청라지구 경명초등학교 교가도 내가 작곡했으니 이것도 우연인가, 인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