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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0권
18.6. 지혜편(智慧篇)
〔여기에는 두 가지 연(緣)이 있음〕
18.6.1. 술의연(述意緣)
대체로 두 가지 장엄에서는 혜(慧)를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고 삼품차제(三品次第)에서는 지(智)를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다섯 바라밀[五度]이 있어도 지혜바라밀이 없으면 어리석은 소경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말한 까닭에 파야[波若:般若]는 세간을 잘 벗어나게 하고 모든 존재를 깨뜨려 없애기 때문이다.
『석론(釋論)』에서 또 말하였다.
“부처님은 곧 중생들의 어머니요 파야는 부처님을 생산해 낸다.”
이 말은 곧 지혜는 일체 중생의 조모(祖母)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서(外書)에서 말하였다.
“예(叡)ㆍ철(哲)ㆍ흠(欽)ㆍ명(明)은 곧 방훈(放勛:堯)의 덕이요, 인(因)ㆍ예(禮)ㆍ지(智)는 곧 선니(宣尼:孔子)의 도이다.”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마땅히 지혜의 법을 닦지 않을 수 없고, 세간을 초월하는 원인[因]을 반드시 익히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큰 어둠을 배척함은 마치 보름달이 세 갈래 악한 세계를 비추는 것과 같고,
온갖 독을 떨쳐 버림은 흡사 마지(摩祗)가 온갖 악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찌 그것이 항상하다고 생각하여 방임하면서 빠져들어 그것만 지킨 채 오래 도록 혼미해질 수 있겠는가?
모양이 집착하여 서로 얽히면 내 마음도 얽혀 맺히게 되기 때문에 항상 애욕이 많이 있고 늘 무명(無明)이 풍부해져서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대치(對治)를 닦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무성한 아만의 산은 거의 숭화(嵩華)만큼 높고 도도하게 흐르는 애욕의 물은 마침내 푸른 바다만큼 넓어진다.
때로는 제멋대로 아주 끊어지고 만다느니 항상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느니 하며 고집하거나, 치우치게 합해지느니 나뉘어지느니 하고 논란을 벌이기도 한다.
정신이 누렇고 정신이 흰 것을 나는 보았다느니 나는 안다느니 하거나 한 다리를 늘 들고 서 있고 다섯 변두리[五邊]가 오래도록 타고 있으며 풀을 뜯어먹는 소를 배우려 하고 똥을 먹는 개와 같아지려 애쓰기도 한다.
때로는 최하의 진리를 융성하게 논하고 있으나 어찌 중도(中道)의 종취를 알 겠으며,
혹은 네 가지 어김을 북돋우고 고집하고 있으나 어찌 대승(大乘)의 뜻을 깨달아 알겠는가?
혹은 남모르게 처음으로 깨달음이 생기면 그 밖에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세간의 정상(定常)은 오직 이것만이 제일 귀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또 비유상(非有想)을 말하면서 이것만이 열반을 증득한다 하기도 하며 자재천(自在天)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하나니,
이는 어리석고 혼몽(昏瞢)하며 용렬하고 어두우며 미련하고 거친 사람이니,
손가락을 보면서 달을 찾고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면서 토끼를 구하는 격이다.
향기나는 풀과 악취나는 풀도 가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콩과 보리를 분별하겠는가?
비록 깨닫고 나서 기뻐 웃는다 하더라도 장차 비비(▼((學-子)/禺)▼((學-子)/禺))와 다르지 않고 헛되이 다를 게 없다.
진실로 공(空)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무명(無明)에 빠져 있나니 대체로 이 뒤바뀐 마음을 모두 삿된 소견이라고 말한다.
오주(五住)의 번뇌가 한 터럭만큼도 줄어들지 않았고 백팔 번뇌[使]에 얽힘도 삼연(森然)히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대사(大士:보살)께서 여덟 글자를 구하기 위하여 몸과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인연 속에 있다가 괴로움을 당하면 즉시 물러날까 두려우니, 그러므로 스스로 마음을 극복하고 그 뜻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
18.6.2. 구법연(求法緣)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법을 구하기 위한 까닭에 법을 베푸는 이가 말하기를 ‘만약 능히 일곱 길이나 되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 수만 있다면 마땅히 그대에게 법을 주리라’고 하자, 보살이 이 말을 듣고 한량없이 기뻐하며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법을 위하기 때문에 오히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아 아비지옥(阿鼻地獄) 등 모든 악한 세계 가운데에서 한량없이 많은 고통을 받을 수도 있거늘 하물며 인간 세계의 미미하고 작은 불구덩이에 들어가기만 하면 법을 들을 수 있는 일이겠느냐?’
또 『집일체공덕삼매경(集一切功德三昧經)』에서 말하였다.
“석가모니께서는 과거 세상에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다섯 가지 신통을 얻은 선인(仙人)으로서 이름이 최승(最勝)이었다.”
또 『지도론』에 의하여 말한다.
“삭가문(釋迦文)부처님께서는 본래 보살이었을 적에 이름이 낙법(樂法)이었다.
그 때 그 세상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 좋은 말씀을 듣지 못했으므로 사방으로 법을 구하면서 정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끝끝내 얻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마귀가 바라문으로 변하여 그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한 게송이 있다.
네가 가죽음 벗겨 종이로 삼고 뼈로써 붓을 만들며 피로써 먹물을 삼아 이 게송을 베껴 쓸 수만 있다면 마땅히 너에게 가르쳐 주리라.’
낙법은 즉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세상마다 몸을 잃어버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이런 이익은 얻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는 곧 스스로 가죽을 벗겨 말렸다. 그 가죽이 말라 게송을 베껴 쓰려고 하자 마귀가 곧 몸을 없애버렸다.
그 때 부처님께서 그의 지극한 마음을 아시고는 곧 아래 방향에서 솟아나오셔서 그를 위해 심오한 법을 설하셨으므로 곧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였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법을 위한 인연으로 몸을 깎아 등을 만들고서 가죽과 살을 차곡차곡 포개놓고 소유(蘇油)를 부어 그것들을 태우면서 심지로 삼았다.
보살은 그 때 이 큰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 그 마음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와 같은 고통은 지옥에서 받는 고통에 비하면 오히려 백천만 분의 일에도 마치지 못한다.
너는 한량없는 백천 겁 동안 큰 고뇌(苦惱)를 받았으면서도 전혀 아무런 이익이 없었다.
그대가 만일 이렇게 가벼운 고통조차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관(觀) 할 때에 몸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그 마음은 물러나지 않았으며 동요하지도 않았고 바뀌지도 않았다.
보살은 그 때 스스로
‘나는 결정코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깊이 깨달았다.
보살이 그 때에 구족(具足)한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다면
법을 위한 인연으로 능히 머리ㆍ눈ㆍ골수ㆍ뇌ㆍ손ㆍ발ㆍ피ㆍ살을 중생에게 보시할 수 있었겠으며,
몸에 못을 박고서 바위에 부딪치고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겠는가?
보살은 그 때 아무리 이와 같이 한량없는 온갖 괴로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물러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으며 바뀌지도 않았으니,
보살은 마땅히
‘나는 지금 결정코 물러나지 않는 마음이 있으므로 장차 아뇩보리를 얻으리라’고 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한 글자와 한 글귀의 뜻을 위해서라면 능히 시방 세계의 값진 보배를 법왕(法王)에게 바쳐 보시하며 그 한 게송의 인연으로 몸과 목숨을 버린다.
비록 한량없는 항하(恒河)의 모래만큼 많은 겁 동안 보시를 닦고 실천한다 해도 한 번 보리의 일을 듣고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것만은 못하다.
바른 법이 있는 곳에서 바른 법 듣기를 좋아하고 바른 법 말하기를 좋아하면 항상 모든 부처님과 하늘들이 기억하게 되며 그렇게 기억한 힘 때문에 세간에 있는 온갖 경전을 다 통달해 알 수 있게 된다.”
또 『대방편보은경(大方便報恩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항상 부지런히 선지식(善知識)을 구하는 것은 부처님 법에 대하여 마지막 한 글귀ㆍ한 게송ㆍ 하나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듣기 위해서이니, 삼계(三界)의 번뇌가 모두 시들어버련다.
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구할 때에 법을 갈망하는 정(情)이 증하므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설사 뜨거운 쇠붙이와 훨훨 타오르는 땅을 밟는다 해도 근심하지 않는다.
보살은 하나의 게송을 위하는 까닭에 오히려 몸과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거늘 하물며 십이부(十二部)의 경전이겠는가?
하나의 게송을 위하는 까닭에 오히려 목숨조차 아끼지 않거늘 더구나 그 밖의 재물이겠는가?
법을 들은 이의 때문에 몸에 안락함을 얻고 믿는 마음을 깊이 내어 마음이 곧 아지고, 바른 견해가 생긴다.
법을 설하는 이를 보면 마치 부모를 보는 것같이 하여 마음에 교만이 없어진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이양(利養)을 위하지 않으며,
중생을 위한 까닭에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하지 않고,
바른 법을 위한 까닭에 왕난(王難)ㆍ배고픔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ㆍ호랑이ㆍ이리 따위의 사나운 짐승과 도적 따위의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먼저 스스로 번뇌와 모든 감관을 조복(調伏)받은 연후에 법을 들어야 한다.”
또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이와 같은 방편으로 법을 구하므로 지니고 있던 온갖 진귀한 보배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거나 아까워함이 없으며 이런 물건에 대해서는 구하기 힘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한 구절이라도 일찍이 듣지 못했던 법을 들을 수만 있다면 삼천 세계를 가득 채운 귀중한 보배를 얻은 것보다 더 낫고,
하나의 게송이라도 들을 수만 있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석제환인(釋提桓因)과 범천왕(梵天王)의 귀덕를 얻는 것 보다도 더 낫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한 구절의 법을 받기 위한 까닭에 설령 삼천대천세계가 큰 불로 가득히 차 있더라도 위의 범천 세계에서부터 스스로의 몸을 아래로 던져야 하겠거늘 하물며 어찌 조그마한 불에 있어서이겠느냐?
나는 오히려 온갖 지옥의 고통을 다 반으면서도 그래도 법을 구해야 하겠거늘 더구나 어찌 사람 가운데 조그만한 고뇌에 있어서이겠는가?’
법을 구하기 위한 까닭에 이와 같은 마음을 내면 들은 법과 같이 마음이 항상 기쁘고 즐거워져서 모든 것에 대하여 바른 관찰을 할 수가 있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지 못하면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며 깨끗한 법안(法眼)을 증득할 수 없다.
어떤 것들이 그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법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아무리 법을 들어도 귀로 그 소리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이며,
셋째는 알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요,
넷째는 미처 법을 얻지도 못했으면서 방편으로 부지런히 구하지도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얻은 법을 잘 지키고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순인(順忍)을 성취하지 못한 것이다.
이 여섯 가지를 반대로 하면 능히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깨끗한 법안을 증득할 수 있으리라.”
또 『미증유경(未曾有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비마국(毘摩國)의 사타산(徙陀山)에 한 마리의 야간(野干)이 살고 있었다.
야간은 사자에게 쫓기다가 어떤 언덕에 있는 우물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마음이 열려 죽음을 분별하고서 스스로 게송을 말하였다.
온갖 것은 모두가 덧없는 것이거늘
사자에게 이 몸을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어찌하여 어차피 죽을 모진 이 몸에 대하여
목숨만 탐하다 아무 공(空) 없이 죽는단 말인가.
공 없음이 가히 한스럽기는 하다만
다시 인간 세상의 우물마저 더럽히고 말았구나.
시방의 부처님께 참회(懺悔)하옵나니
부디 저의 마음을 굽어 살펴 비추어 주소서.
전대(前代)에 지은 온갖 악한 업(業)을
현재에 다 갚아 모두 다하게 하옵고
이로부터 밝으신 스승을 만나
수행하여 모두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제석(帝釋)이 그 말을 듣고 팔만의 모든 하늘들과 함께 그 우물 곁에 이르러 말하였다.
‘성인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여 오래도록 깊숙이 어두운 곳에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범상하지 않은 말씀을 하셨는데, 부디 다시 한 번 그 법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간이 대답하였다.
‘천제께서는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시는군요. 법사는 아래에 있고 자신은 그 위에 있으니, 애초부터 공경을 닦지 않으면서 어찌 법의 요체(要體)를 묻습니까?’
제석이 이에 하늘 옷을 모아 잡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참회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 일찍이 세상 사람들을 보니 먼저 높은 자리를 펴고 뒤에 법사를 초청했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하늘들이 곧 제각기 입었던 보배옷을 벗어 차곡차곡 쌓아 높은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야간이 자리에 올라 말하였다.
‘두 가지 큰 인연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설하여 하늘과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니 복이 한량없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음식을 보시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니, 그 과보가 한량없기 때문입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우물에 빠지게 된 재액(災厄)을 면할 수 있는 공덕도 마땅히 큰 것일텐데, 어찌하여 그 은혜는 미치지 못합니까?’
대답하였다.
‘살고 죽는 것은 저마다 이치에 맞는 일이건만 어떤 사람은 살기를 탐하고 어떤 사람은 죽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죽고 나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부처님의 법을 어기고 멀리하여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며, 삶을 탐내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다가 죽고 나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은 삼보(三寶)를 받들어 심기고 밝은 스승을 만나 악을 고치고 선을 닦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좋아하다가 죽고 나면 천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높으신 분께서 가르친 바와 같이 목숨을 보전하게 한 것은 아무 공도 없습니다.
부디 바라건대 음식을 보시하고 법을 보시하는 것을 들려 주십시오.’
대답하였다.
‘음식을 보시하는 것은 하루 동안의 목숨만을 구제해 주는 것이요,
진귀한 보배로 보시하는 것은 한 세대의 재액을 구제해 주어 나고 죽음에 더욱 이익을 주는 것이며,
법을 설하여 교화하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을 벗어나게 하는 도(道)로써 삼승(三乘)의 과(果)를 얻고 세 갈래 악한 세계를 면하게 하여 사람이나 하늘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시하는 것은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셨습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선생의 지금 이 몸은 바로 업의 과보로 된 것입니까, 응화(應化)로 된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이는 죄의 업보이지 응화가 아닙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저는 성인께서 지금 죄의 업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는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 인연을 들려 주십시오.’
대답하였다.
‘옛날 바라내국(波羅奈國) 파두마성(波頭摩城)에 살고 있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었습니다. 찰리(刹利)의 종성으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랑하였는데, 특히 배우고 익히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스승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시절(時節)을 잃지 않고 오십 년 동안 지내면서 아흔여섯 가지 경서에 대하여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화상(和尙)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 공을 갚기가 어려웠습니다.
먼저 지혜를 배운 연유로 저절로 숙명(宿命)을 알았으나
왕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사치하고 음란하게 되었고, 쾌락에만 집착하다가 그 과보가 다하고 목숨을 마치자 지옥과 축생(畜生)에 태어났습니다.
’[이하는 생략하고 기술하지 않는다.]
그 때 제석은 팔만의 하늘들과 함께 그에게서 열 가지 선(善)을 받고서 금새 천궁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언제쯤 이 죄의 과보를 버리고 천상에 태어나시게 됩니까?’
야간이 말하였다.
‘이로부터 이레 뒤에는 마땅히 이 몸을 버리고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도 곧 그 하늘에 태어나기를 희망하십시오. 그곳에는 많은 보살이 있어 법을 설하고 교화하신답니다.’
그로부터 이레 뒤에 목숨을 마치고 도솔왕궁에 태어났다.
그 후 그는 숙명(宿命)을 알고는 열 가지 착한 도[十善道]를 실천하였다.”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바라내국(波羅奈國)에 계실 때였다. 숲 속 못가에서 여러 하늘과 사람 등 네 무리의 대중들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밝게 설명하였었다.
그 때 허공에서 오백 마리의 기러기떼가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서 마음 속에 깊은 애요(愛樂)가 생겼다. 그래서 빙빙 돌며 날아 내려오다가 사냥꾼이 쳐놓은 그물에 걸렸고, 기러기들은 그 속에 떨어져 사냥꾼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그렇게 죽은 기러기들은 모두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
그들은 부모의 무릎 위에 있을 때 벌써 여덟 살 쯤 된 아이와 같았으며, 단정하고 엄숙하기 비할 데 없었고 광명은 마치 금산(金山)과 같았다.
그들은 곧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들이 무슨 인연 때문에 여기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그러다가 곧 숙명(宿命:前生의 일)을 깨달아 법의 과보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좋아하며 곧 함께 꽃을 가지고 염부제(閻浮提)로 내려와 세존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아뢰었다.
‘저희들은 법의 음성에 힘입어 묘한 하늘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부디 거듭 미묘한 법을 열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시자 수다원(須陀洹)의 과위를 증득하고는 곧 천상으로 돌아갔다.”
[여기에 대략 법을 찬탄한 공덕이 나와 있다.
만약 자세하고 분명한 것을 찾기를 원한다면 『법방궤(法方軌)』상(上) 제2권 『경법(敬法)』중에 갖추어져 있다.]
게송을 말한다.
물길에 배를 띄워
저 언덕 나루를 건너가네.
나고 죽음 초월하고 싶거든
먼저 복과 지혜들 밑천으로 살아야 하리.
거울이 삼륜(三輪)을 통하고
구슬로 여섯 가지 덮인 것을 맑히나니
말을 부리려면 굴레가 있어야 하듯이
금으로 측려(則礪:砥石)을 살아야 하네.
광적(抁跡)은 물처럼 흐르고
제포(齊鏕:銅瓮)는 풀처럼 엉켜 있네.
다섯 인(忍)으로 반드시 층계를 삼고
네 근(勤)을 바꾸지 말아야 하네.
마음의 파도 사무치게 맑히고
뜻의 티끌 날개처럼 접어야 하리.
업장의 길 이미 평탄해졌으니
도량에 이렇게 나아가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