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비달마순정리론 제40권
4. 변업품 ⑧
4. 경(經)에서 설해진 온갖 업
4.1. 선ㆍ악ㆍ무기의 3업
온갖 업의 성상(性相)이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이에 근거하여 마땅히 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온갖 업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경 중에서는 “업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선ㆍ악ㆍ무기가 바로 그것이다.”고 설하고 있는데,1)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온하고 안온하지 않고, 양자 모두 아닌
업을 일컬어 선ㆍ악ㆍ무기의 업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안온(安穩)한 업을 설하여 ‘선업’이라고 한다.2) 즉 그것은 능히 애호할 만한 이숙과와 열반을 획득하여 잠시와 영원의 두 때에 걸쳐 온갖 괴로움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안온하지 않은 업을 일컬어 ‘불선업’이라고 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능히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이숙과를 초래하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완전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가 아닌 업은 ‘무기’라고 이름하는데, 선ㆍ불선 어느 것으로도 기표(記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안온한 업도 아니고 안온하지 않은 업도 아니라는 뜻이다.
4.2. 복ㆍ비복ㆍ부동(不動)의 3업
또한 경 중에서는 “업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복(福)과 비복(非福) 등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하고 있는데,3)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복ㆍ비복ㆍ부동업(不動業) 중에서
욕계의 선업을 ‘복업’이라 이름하고
불선업을 ‘비복업’이라고 이름하며
상계의 선업을 ‘부동업’이라고 이름하니
자지(自地)의 처소에 근거하여
과보와 업이 산동(散動)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선업을 일컬어 ‘복업(福業)’이라 하는데, 비복업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욕계의] 온갖 불선업을 일컬어 ‘비복업(非福業)’이라 하는데, 복업과 반대되는 것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上) 2계의 선업을 일컬어 ‘부동업(不動業)’이라고 한다.
어찌 세존께서는 “아래 세 선정을 모두 ‘유동(有動)’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지 않았던가?4)
성자께서 이(아래 세 정려) 중에 심(尋)ㆍ사(伺)와 희(喜)ㆍ락(樂)의 수(受)가 존재하는 것을 ‘동(動, 動搖)’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아래 세 정려에는 심ㆍ사 등이 있어 재환(災患)이 아직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동’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5) 그리고 『부동경(不動經)』 중에서는, 능히 부동의 이숙을 초래하여 획득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부동’이라고 이름하였다.6)
어떻게 동요됨이 있는[有動] 선정[의 업]이 동요됨이 없는[無動] 이숙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인가?
비록 이 같은 선정 중에서는 재환의 동요됨이 존재할지라도 업의 과보가 욕계에서처럼 다른 처소로 이동하여 일어나는 일[動轉]이 없기 때문에 ‘부동’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였다.7) 이를테면 욕계 중에서는 다른 취(趣)나 처소[處]에서 지은 만업(滿業)[의 과보]를 별도의 인연의 힘에 의해 그 밖의 다른 취나 처소에서 향수하기도 한다. 혹은 어떤 업(즉 만업)은 능히 내외의 재산과 지위, 생김새나 몸집[形量], 정력[色力], 즐거움 따위를 초래하는데, 천취 중에서 이 같은 업이 성숙하게 되는 것은 별도의 인연의 힘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이지만, 인취 중에서 이러한 업은 [별도의 인연의 힘에 의하지 않고] 바로 성숙한다.
그러나 색ㆍ무색계에서는 다른 어떤 지(地)나 처소의 업이 전전하여 그 밖의 다른 지나 처소에서 [그 과보를] 향수하는 일이 없으니, 업을 짓는 처소와 그 과보를 향수하는 처소는 바뀌거나 동요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과보는 업과] 동등한 지(地)에 포섭 인기되어 산동(散動)되는 일이 없기 때문으로, 바로 이 같은 뜻에 근거하여 ‘부동’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복업은 인과 상속(相屬)에 대해 어리석기 때문에 짓게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복업은 순전히 염오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복업은 거칠고 무거운[麤重] 상속에 존재하는 무명에 의해 [조작되는] 것으로, 이러한 무명이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능히 인과의 상속을 헤아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비복행(非福行, 즉 비복업)을 발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진실한 뜻[眞實義]에 대해 어리석기 때문에 복업과 부동업을 짓게 되는 것으로, 여기서 진실한 뜻이란 4성제를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4성제에] 대해 어리석은 온갖 유형의 이생도 선심의 상태에서 역시 복업과 부동업을 이따금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업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3계에 대해 그것의 성질이 모두 ‘괴로운 것’임을 참답게 알지 못하고서 복행(즉 복업)과 부동행(즉 부동업)을 일으켜 후유(後有)의 원인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미 진리를 통찰한 자[見諦者]라면 이와 같은 일이 없지만, 점차 염오를 떠날 때 이전에 지었던 행(즉 업)의 힘에 편승하여 차례대로 욕ㆍ색ㆍ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4.3. 순락수업(順樂受業) 등의 3업
또한 경 중에서는 “업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순락수업(順樂受業) 등이 그것이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순락과 순고와 순불고불락[非二]에서
제3정려까지의 선업이 순락수업이고
온갖 불선의 업이 순고수업이며
그 이상의 선업은 순불고불락수업이다.
유여사는 하지에도 역시 존재한다고 설하니
정려중간도 이숙을 초래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세 업은 전후가 아닌 동시에
성숙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순수(順受)에는 모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자성(自性)과 상응(相應)과
그리고 소연(所緣)과 이숙(異熟)과
현전(現前)으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선업 중에서 욕계로부터 시작하여 제3정려에 이르기까지의 선업을 순락수업(順樂受業)이라고 이름하니, 모든 낙수(樂受)는 오로지 이곳(제3정려)까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불선업을 순고수업(順苦受業)이라고 이름하며, 제4정려와 무색계의 선업을 일컬어 순불고불락수업(順不苦不樂受業)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에는 고수와 낙수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온갖 업은 오로지 수(受)의 과보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수’의 자량이 되는 것도 역시 초래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8) 즉 여기서는 ‘수’와 그 자량을 ‘수’라고 말하였으니, 교화되는 이가 원함[欲]에 따라 전체적으로 ‘수’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제4정려] 이하의 온갖 지(地)에도 역시 순비이업(順非二業, 즉 순불고불락업)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인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그(제4정려) 아래의 [온갖] 지에도 역시 순비이업(順非二業)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정려중간[中間定]에는 이미 고수와 낙수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그것을 초래하는] 업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9)
중간정려와 초정려는 동일한 계박이기 때문에 이러한 중간정려의 업은 초정려 중의 낙근의 이숙을 초래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10)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본론(本論)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본론에서는 “혹 업이면서 심수(心受)의 이숙은 초래하여도 신수(身受)의 이숙은 초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선한 무심(無尋) [지(支)]의 업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11) 중간정려의 업을 이미 ‘무심’이라고 하였음에도,12) 만약 근본정려(초정려) 중의 낙근의 이숙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무심[지]의 업이 신수와 심수 두 가지 이숙을 모두 초래하는 것이라 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본론에 위배된다. 즉 이러한 업은 오로지 심수[의 이숙]만을 초래한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불선의 업이 오로지 신수[의 이숙]만을 초래하는 것과 같다.
설혹 [신수와 심수 두 가지 이숙을] 모두 초래한다고 인정할지라도 본론에 위배되는 일이 없으니, 본론에서는 마땅히 선한 무사(無伺)[지(支)의 업]에 대해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13) 혹은 모든 업이 다 수(受)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으로, 그것은 마땅히 색과 심불상응행[의 이숙]을 초래하는 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14) 그렇지만 일체 무심(無尋)[지]의 업 중에는 오로지 심수의 [이숙]과만을 초래하는 업이 존재하며, [본론에서는] 그것에 치우쳐 설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정려의 업도 이숙을 초래하기 [때문에]’라고 하는 사실은 ‘하지에도 순비이업(順非二業)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증명하는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4정려 이하의 온갖 지에도 역시 순비이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논]증이 있으니,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혹 세 가지 업으로서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닌 [동일찰나에] 이숙과를 받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순락수업이 색을, 순고수업이 심ㆍ심소법을, 순불고불락수업이 불상응행법을 받을 때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15) 이 같은 사실에 의해 [제4정려] 이하의 지에도 역시 순비이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으니, 욕계를 떠나 이 세 가지의 업이 동시에 성숙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역시 올바른 논증이 아니니, 본론 중에서는 3계의 업에 대해서도 3수의 업처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16) 그렇지만 3계에 계속(繫屬)되는 온갖 업은 [그 이숙과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론 중에서 “3계의 업으로서 동시에 성숙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 것은, 대법(對法)의 종의에 대해 이해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는지를 시험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증상과에 대해 ‘수(受)의 이숙’이라는 말을 설한 것으로, 색ㆍ무색계의 사(思)가 하지의 이숙을 자조(資助)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오래 지속하게 하기 위해 이같이 [“3계의 업으로서 동시에 성숙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순삼수업(順三受業)에 관한 문구도 역시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인용한 바도 결정적인 논증의 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수고스럽게 그가 계탁하여 주장한 바(하지에도 역시 순비이업이 존재한다는 주장)를 따질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가 계탁하여 주장한 바를 살펴보건대, 『품류족론』에 위배되기 때문으로, “무엇을 순락수업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계로부터 제3정려에 이르기까지의 선업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17)
그것(『품류족론』)에 위배되는 과실은 없으니, 결정적으로 말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기서는 [욕계계로부터 제3정려에 이르기까지의 선업을] ‘오로지’ 순락수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즉 [제4정려] 아래 지(地)에 비록 순비이업(順非二業)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아주 적기 때문에 그것의 문구에서 드러내어 [말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에 준하여 “상지에도 역시 순고수업이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고락(苦樂)의 염오함을 떠날 때 비로소 그곳(제4정려와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오로지 “광과천(廣果天, 제4정려 제3천)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처에 이르기까지 비고비락수업(非苦非樂受業)이 존재한다”고만 설하였을 뿐,18) 하지에는 [그 같은 비이수업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았으니, 상지에는 이와 상위(相違)하는 수(즉 순락수업과 순고수업)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하지에는 이와 상위하는 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하지에도 비고비락의 이숙이 있을 수 있기에 그와 같은 3계에 계속되는 업을 이러한 [『품류족론』의] 문구로써 결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 그럴 수 없다[無容]거나 그럴 수 있다[有容]는 사실(다시 말해 하계에는 순비이업이 존재하지 않는거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실로 다같이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업(제4정려 이하의 순불고불락수업)은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불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것은 선하지만 저열한 것이다”고 하였다.19) 또한 이것은 개별적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고, 전체적으로만 말할 수 있는 것으로,20) 온갖 선업 중의 혹 어떤 종류는 능히 낙수와 [이러한 낙]수의 자량을 초래하지만, 혹 어떤 종류는 능히 비이수(非二受), 즉 불고불락수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업은 능히 낙수를 증익하기에 ‘순낙수’라고 이름하였으니, 마치 순마처(順馬處)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다시 이러한 업은 능히 즐거움을 향수하기에 ‘순낙수’라고 이름하였으니, 마치 순욕산(順浴散)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21) 그 밖의 다른 수에 따른 업(즉 순고수업과 순사수업)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순낙수업은 오로지 낙수의 이숙과만을 초래하는 것인가?
오로지 낙수의 이숙과만을 초래하는 일체의 모든 업을 순낙수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혹 어떤 업은 순낙수업이라 이름할지라도 능히 낙수의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도 있으니, 이를테면 색과 불상응행을 초래하는 업이 바로 그것으로, 그 밖의 다른 수에 따른 업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온갖] 업은 오로지 수(受)의 이숙과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 모두를 ‘수에 따른 업’ 즉 순수업(順受業)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인가?
온갖 업을 원인으로 하여 초래되는 이숙과는 모두 ‘수’와 유사하기에 ‘수’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한 [온갖 업은] 모두 다 ‘수’와 마찬가지로 소의신을 증익(增益)하기도 하고, 감손(減損)하기도 하며, 평등(平等, 증익하지도 감손하지도 않는 것)하게도 하기 때문이니, 마치 물과 불 등이 나무 가지 등에 대해 이익이 되기도 하고, 손해가 되기도 하며, 평등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순수(順受, vedanīyāta) 즉 ‘수에 따른다’고 하는 것에는 다수의 종류가 있지만, 간략하게 설해 보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순수(自性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온갖 ‘수’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계경에서 “낙수를 향수할 때에는 낙수를 향수함을 참답게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22)
두 번째는 상응순수(相應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촉(觸)을 말하는 것으로, 계경에서 “낙수에 따르는 촉[順樂受觸]……(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23)
셋째는 소연순수(所緣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대상[境]을 말하는 것으로, 계경에서 “눈이 색을 보고 나서는 오로지 색을 향수하는 것이지 색탐을 향수하는 것이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24) 즉 색 등의 대상은 바로 ‘수’의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숙순수(異熟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이숙과를 초래하는 업을 말하는 것으로, 계경에서 “낙수에 따르는 업[順樂受業]……(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25)
다섯째는 현전순수(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현행하고 있는 ‘수’를 말하는 것으로, 계경에서 “낙수를 향수할 때 두 가지의 수(고수와 사수)는 바로 소멸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26) 즉 이러한 낙수가 현재전할 때 그 밖의 다른 ‘수’가 있어서 능히 이 같은 낙수를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낙수 그 자체가 현전함에 근거하여 바로 ‘낙수를 향수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수에 따른다’고 하는 것에는 다수의 종류가 있기 때문에, 비록 업의 이숙과가 모두 ‘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전체적으로 ‘수에 따르는 업’ 즉 ‘순수업’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온갖 선업을 원인으로 하여 초래되는 색과 불상응행법도 능히 소연이 되어 낙수를 낳기 때문에, 이는 바로 온갖 낙수로서 영납(領納)되기 때문에, 참으로 애호할 만한 이숙과는 ‘낙수에 따르는 것[順樂受]’이기 때문에 역시 ‘낙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선업에 의해 초래되는 온갖 과보 [자체]는 비록 낙수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낙수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초래하게 한 업을 ‘순락수업’이라 이름한 것으로, 순고수업과 순비이업도 이치상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4.4. 정(定)ㆍ부정업(不定業)과 이에 따른 4업ㆍ5업ㆍ8업
이와 같은 세 가지 업에는 [그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적인 정업(定業)과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다.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러한 업에는 정업과 부정업이 있으니
정업은 세 가지로 순현(順現) 등이 그것인데
혹자는 업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설하며
유여사는 네 구(句)로 설하기도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순락수업 등은 각기 정업(定業)과 부정업(不定業)의 차이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업’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순락수업으로서 필시 결정된 시기에 성숙하지 않는 것(다시 말해 이숙과를 낳지 않는 것)을 말하지만, 만약 성숙한다면 필시 마땅히 즐거움의 이숙과를 받게 된다. 그 밖의 두 가지 업(순고수업과 순불고불락수업)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정업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이며, 둘째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이며, 셋째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이 바로 그것이다.27) 이 같이 이숙과를 초래하는 시기가 결정된 세 가지 정업과 앞서 언급한 부정업으로써 모두 네 종류의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혹 어떤 이는 부정수업(不定受業)에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즉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 것인지가 결정되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으로,28) 여기에 정업의 세 가지를 더하여 다섯 종류의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순현법수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 생에서 조작하고 증장하여 오로지 이 생에서 이숙과를 받는 업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 여기서 ‘이 생에서’이라는 말은 중동분(衆同分)을 나타내며, 가행과 근본업도를 나타내기 위해 ‘조작’이라는 말을 설하였으며, 후기(後起)를 나타내기 위해 ‘증장’이라는 말을 설하였다.29)
혹은 ‘조작’이라 함은 견인업(牽引業)을 나타내며, ‘증장’이라고 하는 말은 원만업(圓滿業)을 나타낸다. 혹은 ‘조작’이라 함은 경솔하게 생각나는 대로 짓는 것[率爾作]을 말하며, ‘증장’이라는 [살펴] 말은 생각하고 난 다음에 짓는 것[思已作]을 말한다.30) 혹은 ‘조작’이라 함은 손해가 되어 뉘우치는 업을 말하며, ‘증장’이라는 말은 기뻐하며 섭수하는 업을 말한다. 혹은 동일한 종류를 조반(助伴)으로 삼는 업을 일컬어 ‘조작’이라 하였고, 역시 ‘증장’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선업이 다시 선업에 대해 조반이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업을 오로지 ‘조작’이라 이름하였다. 혹은 견고하게 집착하여 조작한 업을 일컬어 ‘조작’이라 하였고, 역시 ‘증장’이라고 이름하였으며, 이와 반대되는 업을 오로지 ‘조작’이라 이름하였다. 혹은 구족(具足)함에 근거[依]하여 지은 업을 일컬어 ‘조작’이라 하였고, 구족함으로 말미암아 지은 업을 일컬어 ‘증장’이라고 하였다. [조작과 증장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등의 다양한 갈래의 해석이 있다.
‘오로지 이 생에서 이숙과를 받는다’고 하는 말은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것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취(人趣)의 생 중에서 [업을] 조작하여 증장하고서 다시 오로지 이러한 인취의 생 [중]의 다른 몸이 이숙과를 받는 것도 역시 순현법수업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을 막기 위해 다시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바로 죽음과 태어남을 갖는 자에 대해서만 ‘오로지 이 생에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자라면]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이러한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는 말]에 의해 [순현법수]업[이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가 허물어지지 않음을(다시 말해 결정적인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온갖 의심[疑網]을 매우 분명하게 끊게 한 것이다.
어떻게 이같이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는 말을 설함으로써 결정코 ‘다른 몸이 받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인가? 혹 [어떤 경우] 이러한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는 말은 바로 인취가 아닌 생[에서 받는 것]을 부정한 것일 뿐 ‘다른 몸이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앞에서 ‘오로지 이 생에서’라고 말하여 인취가 아닌 생[에서 받는 것]을 부정하는 뜻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이미 ‘오로지 이 생에서’라는 말을 설하여 ‘인취가 아닌 종류에서는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결정적으로 나타내어 성취하였으며, 그리고 나서 다시 뒤에서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는 말을 설한 것은 ‘다른 몸이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으니, 이로써 [다른 몸이 받는 것이 아님을] 지극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 생에서’라는 말을 설하고 나서 다시 ‘다른 생에서가 아니다’는 말을] 거듭하여 설하였을 것인가?
따라서 이러한 업을 순현법수업이라 이름한 것이니, 여기서 ‘현법(現法)’이란 바로 현신(現身)의 뜻이기 때문이다.
순차생수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 생에서 지은 업[의 이숙과]를 무간생(無間生, 바로 다음 생)에 받는 업을 말한다. 즉 여기(순차생수)서 말한 ‘생’이란 바로 생처(生處, 태어나는 처소)의 뜻으로, 업을 지은 생 이후에 무간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차생’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바로 ‘차후(次後)의 생’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차후의] 생에 수순하는 업을 순차생수업이라 이름한 것이다.
순후차수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 생에서 지은 업[의 이숙과]를 무간생 이후에 받는 업을 말한다. 여기(순후차수)서 말한 ‘후’란 바로 무간생 이후의 중동분을 나타내며, ‘차’란 다수의 생에 걸쳐 차례대로 [각기] 별도로 받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이(순후차수업) 말의 뜻은 결정적으로 차례대로 각기 한번의 생을 초래하는 순후수업(順後受業)을 나타내지만,31) 언사가 번잡해지는 과실을 피하기 위해 다수의 업을 통괄하여 하나의 명칭으로 설정한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순부정수업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어떤 종류의 업은 시라(尸羅)로 말미암아, 혹은 올바른 원[正願]으로 말미암아, 혹은 범행(梵行)으로 말미암아, 혹은 등지(等持)로 말미암아, 혹은 지혜의 힘[智力]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결과를 갖지 않게 되거나 혹은 [갖더라도] 경미하게 되거나, 혹은 그것의 위상[位]을 전이(轉移)시킬 수 있음을 관찰하였는데, 이러한 일체의 업을 부정업이라 이름하였다. 즉 이러한 업을 바꾸기(전이시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청정한 행을 닦아야 하는데,32) 온갖 유정류에게는 이러한 업이 가장 많다.
그런데 계경에서 “혹 온갖 업 중에는 마땅히 현법에 [그 과보를] 받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혹 그것이 바뀌어 지옥에서 받는 것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33) 여기서는 순현법수업을 분별한 것이 아니다. 즉 [이 경의] 뜻은 [과보를] 받는 것이 결정되지 않은 업도 있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만약 능히 정성껏 몸과 계와 마음과 지혜를 닦은 이라면 이러한 이에 의해 지어진 업은 마땅히 인간의 생(즉 현법)에서 [그 과보를] 받게 될 것이지만, 정성껏 몸과 계와 마음과 지혜를 닦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업에 편승하여 나락가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계경에서는 또한 말하기를, “혹 온갖 업 중에는 마땅히 지옥에서 [그 과보를] 받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혹 그것이 바뀌어 인취 중에서 받는 것도 있다”고 하였는데,34) 이 역시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적인 업에 대해 분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되지 않은 업에 대해 설한 것이니, 그 뜻에 대해서는 앞의 경설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앞서 인용한 경의 뜻은 비록 조작하였을지라도 증장하지 않은 업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 만약 그러한 [업의] 힘을 임지하였다면 마땅히 현법에 [과보를] 받게 되지만, 만약 그 후에 다시 지옥[의 과보]를 초래할만한 업을 지었다면 [앞의 업을] 자조(資助)하고 증장시켜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마땅히 인취 중에서 현법에 [그 과보를] 받을 업도 그 후에 다시 지옥[의 과보]를 초래할만한 업을 지어 [앞서 지은 업을] 증장시켰기 때문에 지옥 중에서 [과보를] 받게 하는 업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앞서 인용한 경설)은 부정업에 대해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 ‘업은 다생(多生)에 걸쳐 이숙한다’는 비유자 설 비판
그런데 비유자(譬喩者)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순현법수업은 [이 생 이외] 그 밖의 다른 생에서도 역시 이숙과를 획득할 수 있지만, 처음으로 이숙하는 위치[初熟位]에 따라 업의 명칭을 순현법수업이라고 건립한 것으로, 다만 그러한 처소(즉 현재 인취)에서만 결과를 초래하기에 칭명(稱名)된 것이 아니다.”35)
즉 그의 뜻은, 조작되어진 온갖 업이 만약 이 생에서부터 능히 원인이 되어 이숙과를 낳는 것이라면 순현법수업이라 이름하고, 만약 다음 생에서부터 비로소 능히 원인이 되어 이숙과를 낳는 것이라면 순차생수업이라 이름하며, 만약 다음 생을 건너뛰어 제3의 생에서부터 [능히 원인이 되어] 이숙과를 낳는 것이라면 순후차수업이라 이름한다고 설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이 주장하게 된 것인가?
[그 같은 정업은] 강력한 업이어서 이숙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선설(善說)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한 업이 이전에 이미 이숙과를 낳았다면, 중간에 그 사이가 단절되어 이숙과가 다시 생겨난다고 함은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마치 종자와 싹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36) 만약 “무간(無間)으로(다시 말해 중간에 그 사이가 단절됨이 없이) 후신(後身)을 낳는다”고 한다면, 죽고 태어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업에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혹은 소의신 상에 차이가 없음에도 마땅히 자주 죽고 태어나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의 업이 [1생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2생 3생 등을 초래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온갖 결과[果相]는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각기] 다른 업에 의해 상속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의 업의 결과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혹은 [2생 3생 등은] 동일한 업의 결과로서 그 상(相)이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전후의 상(즉 앞의 생과 뒤의 생)이 다른 것인지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만업(滿業)의 조력(助力)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마땅히 1생에도 전후의 차별이 있어야 한다. 현견하건대 인업(引業)에 의해 견인된 1생에 비록 여러 가지 다수의 만업의 결과로서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인업이 하나이기에 다만 1생이라고 이름하듯이,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2생이나 3생 등을 초래할만한] 별도의 원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온갖 결과(2생이나 3생)의] 상이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것은 바로 1생이라고 해야 한다. 즉 1생 중에는 전후 [결과]의 상이 동등하여 전후의 생으로 차별되는 것을 관찰할 수 없으니,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동일한 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1생의 소의신을 바로 여러 가지 다수의 인업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니, [그럴 경우] 능히 [생을] 인기하는 업에 차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럴 경우] 본유(本有)에(다시 말해 한번의 생에) 마땅히 죽고 태어나는 일이 있어야 하거나, 혹은 마땅히 궁극적으로 죽고 태어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동일한 업에 의해 초래된 다수의 생은 하나의 취(趣)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다수의 취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하나의 취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허물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앞[의 생]과 뒤[의 생]을 마땅히 1생이라고 해야 하거나, 혹은 1생 중에서 마땅히 자주 태어나고 죽어야 할 것이니, 그것은 동일한 업의 결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다수의 취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온갖 취를 서로 비교해 보건대 상ㆍ중ㆍ하의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동일한 업의 결과라는 것은 이치상 필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일 찰나에 지어진 하나의 업에 상ㆍ중ㆍ하품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취는 마땅히 서로 뒤섞이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취에는 뒤섞이는 일이 없으니,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37)
만약 “그 밖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생 중에서 전생에 이미 결과를 획득한 업이 결과를 초래하는 세력을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생 중에 의탁하여 [아직 다하지 않은] 이숙과를 다시 받기 때문에, 비록 하나의 업이 능히 다수의 생을 초래한다고 할지라도 죽고 태어나는 결과[果相] 상의 차별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38)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생 중에 의탁하여 다시 결과를 받게 하는 업은 [생을] 견인하는 것(즉 인업)이나 [생을] 원만하게 하는 것(즉 만업) 중 어느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생 중에 의탁하여 받은 이숙과를 인업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업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인가? 먼저 [다른 생 중에] 의탁하여 인업의 과보를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 생’이라는 인업의 과보는 그 밖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업도] 하나의 과보를 인기하고 나서 다시 [과보를] 인기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과보는] 마땅히 하나의 업에 따른 것으로, [다시 인기한다면] 그 공력을 쓸데없이 허비하는 것[當捐]이며, 뒤의 업은 이에 대해 지극히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역시 또한 1생 중에 결과(즉 생)을 인기하는 두 [업]이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결과를] 향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도 안될 것이니, [그럴 경우] 하나의 상속 중에서 다수의 생(生)과 다수의 취(趣)라는 이숙과를 동시에 받게 되는 허물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다른 생 중에] 의탁하여 만업의 과보를 받는다고 말해서도 역시 안 되며, [다른 생 중에 의탁하여] 인업이 존재한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전생 중에서 이미 인업의 과보를 획득하였음에도 그 밖의 다른 인기하는 힘(즉 인업)이 금생에 이르면서 전변하여 만업을 성취하게 되는 허물이 있는 것이다. 이는 즉 어떤 종류의 순생수업(順生受業, 다음 생에 과보를 받는 업)이 다음 생 중에서 인기될 결과를 초래하고 나서 지금 그 밖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생 중에서 순후수업(順後受業, 다음 생 이후에 과보를 받는 업)으로 전변하여 만업으로서의 결과인 이숙과를 초래한다는 것으로, 그럴 경우 하나의 업이 역시 인업이 되고 역시 만업이 되어 인업과 만업이 뒤섞이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업은 전전하며 서로를 자조하니, 그런 즉 그것들은 모두 조작과 증장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필경 이숙과를 받지 않는 것이면서 열반에 이르는 어떠한 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저들의 종(비유종)에서는 이를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듯] 비유자(譬喩者)에게는 그 허물과 편벽됨이 많으니, 저들의 종에서 주장하는 순현법수업 등 존재하는 온갖 업은 다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39)
그렇지만 온갖 업은 전전하며 서로를 자조할뿐더러 이치상으로도 마땅히 [그것들은] 모두 조작과 증장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세존께서는 경에서 조작되고 증장된 모든 업을 결정업(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업)이라고 하였음에도, [조작되고 증장된] 모든 업이 다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저들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佛敎] 밖에 존재하는 자들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서 저들은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그 밖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생 중에서는 이미 전생에 결과를 인기한 다른 업이 능히 만업을 자조(資助)하여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전세(前世)에 자신이 인기한 생에서는 능히 만업을 자조하는 원인이 되어 [그것을] 상속하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만약 천(天)의 과보를 받는 업[順天生受業]을 지녔을 경우, 천으로부터 사몰(死沒)하고 나서 지옥 중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천의 순생수업이 지금 지옥에서 [다시금] 후생(後生)의 낙과(樂果)를 받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지옥으로부터 사몰하고 나서 천 중에 태어났을 경우, 그곳(지옥)에 태어나게 한 업[順彼生業]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이 책망해 보아야 한다. 천 중에 태어나게 하는 업은 무간지옥에서 그 과보를 [다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역시 무간지옥에 태어나게 하는 업도 천 중에서 그 과보를 [다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업은 다른 취(趣)를 건너뛰어 자류의 취 중에서 비로소 능히 거듭하여 그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40) 그것의 과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던 것인가?
“업이 이전에 이미 이숙과를 낳았다면 중간에 그 사이가 단절되어 이숙과가 다시 생겨난다고 함은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마치 종자와 싹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고 하였다]41) 그가 비록 논리를 세워 “[그 같은 정업은] 강력한 업이어서 이숙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였을지라도 이 역시 올바른 논증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요컨대 결과가 다수인 업을 강력한 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순현법수업을 강력한 업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이 능히 신속하게 결과를 획득하기 때문에 이 같은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만약 어떤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다수의 생각과 원[思願]을 일으켰고, 여기에 전후에 걸쳐 수승하고 저열함의 차이가 있어 능히 현생을 초래한 후에 [저열한] 이숙과를 초래하였다면, ‘다수의 과보를 초래하였다’고 말하여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요컨대 다수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이라야 비로소 강력한 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전륜왕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업은 부처를 초래하는 업에 비해 강력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다수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42) 그러나 만약 부처를 초래하는 업은 미묘하기 때문에 강력한 업이라고 말한다면, ‘강력한 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다수의 종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업이 강력하다’는 이치에 다수의 품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혹 어떤 업은 결과를 [초래하는 시기가] 가깝기 때문에 ‘강력하다’고 말하였으며, 혹은 결과가 다수이기 때문에, 혹은 결과가 미묘하기 때문에 ‘강력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즉 순현법수업은 결과를 [초래하는 시기가] 가깝기 때문에 ‘강력하다’고 말한 것이니, 어찌 강력하다는 말로써 ‘다수의 결과를 초래한다’(다시 말해 ‘업은 다생에 걸쳐 이숙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대법자(對法者)는 “온갖 업[의 분류] 중 순현법수업 등의 세 가지는 각기 다른 [시기에] 결과를 낳는 것[에 따른 것]으로, 업과 그 결과는 뒤섞이는 일이 없다”고 설하였던 것이니,43) 이치상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유자(譬喩者)는 업을 [다음과 같은] 네 구(句)로 논설하기도 하였다.
첫째,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어도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할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순현법수업 등의 세 가지 업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하는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하는지는 결정되어 있어도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부정업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하는지 결정되어 있는 업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 두 가지 모두가 결정되어 있는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순현법수업 등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할지 결정되어 있는 업이 바로 그것이다.
넷째, 두 가지 모두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부정업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는 바로 온갖 업에는 모두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순현법수업에 결정적인 것과 결정적이지 않은 것이 있으며, 나아가 부정업에도 역시 이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44)
2업 (약시, 約時)
시정업 (時定業):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업
시부정업 (時不定業):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되지 않은 업
4업 (약시, 約時)— 시기와 이숙과의 결정 여부를 조합한 4구(句)
시이숙구정업 (時異熟俱定業): 시기와 이숙과 모두 결정된 업 (예: 순현법수업 등)
시정이숙부정업 (時定異熟不定業): 시기는 결정되었으나 이숙과는 결정되지 않은 업
시부정이숙정업 (時不定異熟定業):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으나 이숙과는 결정된 업
시이숙구부정업 (時異熟俱不定業): 시기와 이숙과 모두 결정되지 않은 업 (예: 부정업)
5업 (약시과, 約時果)
순현법수업 (順現法受業)
순차생수업 (順次生受業)
순후차수업 (順後次受業)
정업·부정업 등(기타 분류 포함)
부정업 (不定業)
8업 (약시과, 約時果)— 비유자(譬喩者)가 설한 온갖 업의 8가지 종류
순현법수업에 결정적인 것순현법수업에 결정적이지 않은 것
순차생수업에 결정적인 것순차생수업에 결정적이지 않은 것
순후차수업에 결정적인 것순후차수업에 결정적이지 않은 것
부정업에 결정적인 것부정업에 결정적이지 않은 것
4.5. 특히 4업설에 기초한 여러 업론
이상에서 논설한 업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4업설이 선설(善說)로서, 함께 지을 수 있으며
동분을 인기하는 것은 오로지 세 가지 뿐이며
모든 처소에서 네 종류의 업을 지을 수 있으나
지옥에서는 선에 상응하는 순현법수업이 제외된다.
이염지(離染地)에서 [물러남이 없는] ‘견(堅)’의
이생은 순차생수업을 짓는 일이 없으며
성자는 순차생과 순후차수업을 짓지 않으며
아울러 욕계ㆍ유정(有頂)에서 물러난 [성자도 그러하다].
1) 비유자의 8업설 비판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순현법수업 등의 4업을 분별한 앞의 본송)서는 오로지 순락수(順樂受) 등의 업으로서 현생 등에 그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되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었으니, 경에서 설해진 순현법수업 등의 네 가지 업을 해석하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정업(定業)을 세 종류로 나누었고, 아울러 여기에 부정업(不定業)을 더하여 네 가지가 된 것으로, 이러한 설이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치상으로 볼 때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면서 그것을 받는 시기가 결정된 업은 있을 수 없으니,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가 결정된 업의 상태의 차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숙과를 떠나 시간 자체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숙과를 받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다고 하면서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45) 여기(순현법수업 등의 4업을 분별한 앞의 본송)서는 다만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가 결정된 업으로서 결과를 획득하는 상태의 차별에 근거하여 순현법수업 등을 각기 별도로 설정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숙과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숙은 반드시 이러한 시기에만 존재하고 다른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만약 이러한 시기를 벗어난다면 필경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저들(비유자)은] ‘[과보를 받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지만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이 경우 이숙과도 역시 마땅히 결정된 것이라고 해야 하니, 그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서로 유사하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언젠가 결과를 받을] 시기가 존재한다면 혹 올바른 이치가 아닐지라도 [결과를 받는] 시기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숙이 존재한다면 혹 올바른 이치가 아닐지라도 마땅히 이숙과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다시 두 가지 모두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결과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업이라면 그것의 이숙도 역시 마땅히 결정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 결정되지 않은 것을 부정업이라고 이름한다면, 그것은 [결과를 받는] 시기 역시 마땅히 결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 같은 이치로 볼 때 8업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며, 온갖 업 중에 부정(不定)의 뜻을 갖는 것은 마땅히 총괄하여 순부정수업(順不定受業)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가 결정되어 있어도 받는 시기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熟定時不定業]은 받는 시기가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다 같이 순부정수업이라고 인정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받는 시기가 결정되어 있어도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時定熟不定業]은 이숙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순부정수업이라고 해야 하거늘 어찌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따라서 비유자(譬喩者)가 이러한 [네 가지 업의] 뜻을 분별하는 중에 8업을 안치 건립하는 것은 지극한 잡란(雜亂)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비유자는 설하기를, “일체의 업[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무간업도 모두 다 바뀔 수 있으니, 만약 무간업이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능히 제일유(第一有, 有頂天 즉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하는 이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그의 말을 관찰하건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만약 온갖 업 중 조금이라도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유정처(有頂處)의 업이 결정코 그 중의 첫 번째가 된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온갖 업 중에서 제일유의 업이 가장 미세하기 때문이다. 즉 생사의 근본이 되는 온갖 힘으로 광대한 이숙과를 능히 섭수하여 무시(無始)이래 생사유전을 [되풀이한] 유정으로서 일찍이 그것을 초월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이와 같은 종류의 업을 바꿀 능력을 갖는 자(예컨대 아라한)라면 무간업인들 어찌 바꿀 수 없을 것인가?”
그러나 이 역시 다만 허망하고 편벽된 주장일 뿐이니, 무간업은 이숙과 분위(分位,결과를 낳는 시기)의 두 가지가 모두 결정되어 있지만, 유정천의 업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용한 예(例)는 [이숙과와 그것을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공능을 갖지 않은 것이다.46) 그러나 만약 유정처에서의 업도 모두 다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선정을 일으키는 자도 마땅히 결정코 생을 초래한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런 즉 그러한 선정을 일으키고 나서 무학과나 반열반을 증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만약 일체의 업을 모두 다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정업(定業)이 존재한다”고 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 4업의 동시조작과 인업(引業)
만약 그렇다면 네 가지의 업을 동시에 짓는 경우도 있는 것인가?
있을 수 있다.
어떠한 경우가 그러한가?
세 명의 사자(使者)를 보내고 나서 스스로 사욕행(邪欲行)을 행할 때, [네 가지의 업은] 동시에 구경에 이르게 된다.47)
순현법수업 등 네 종류의 업 가운데 몇 가지의 업이 능히 중동분(衆同分, 즉 一期의 생)을 인기할 수 있는 것인가?
[중동분을] 인기하는 것은 오로지 순현법수업을 제외한 세 가지 업이니, 순현법수업은 반드시 선세(先世)의 업에 의해 인기된 동분(즉 現身)에 근거하여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생에서 반드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3) 3계 5취에서의 4업의 조작
어떠한 계(界), 어떠한 취(趣)에서는 능히 몇 가지의 업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계, 모든 취에서는 선이든, 혹은 악이든 그것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네 가지 업 모두를 지을 수 있으니,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보면 이와 같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으로 짓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언급해 보면, 나락가(지옥) 중에서는 선에 상응하는 순현법수업이 제외되니, 그곳에는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업은 모두 지을 수 있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색ㆍ무색계에는 결정코 순현법수업이 존재하지 않으니, 순현법수업은 반드시 수승한 경계에 대한 가행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모와 부처님과 아라한과 그 밖의 수승한 공덕에게 훈수(熏修)된 소의신에 대해 손해를 끼치거나 이익을 행하면 능히 현재에 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혹은 그 밖의 경계에 대해 맹리(猛利)하고도 견고하게 집착[堅執]하여 가행을 일으킬 경우에도 역시 현재에 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즉 이와 같은 종류의 업은 상계에는 모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계(색ㆍ무색계) 중에는 순현법수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 밖의 다른 [순현법수]업은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2계에도 역시 수승한 업이 존재하며, 그 세력은 신속하여 현재에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상2계에는 비록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수승한 경계 등을 반연하는 순현법수업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뛰어난 선정이 존재하여 능히 현재에 결과를 초래하게 하니, 순현법수업의 종류는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중(中)을 포섭하여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순현법수업 등의 네 업은 다 욕계의 일체[의 처소에 존재할 뿐더러] 색ㆍ무색계의 변행(遍行)인 수소단의 수면에 의해 수증되기 때문에 일체의 처소에서 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업을 모두 지을 수 있다.”
물러남이 없는 종성[不退性]을 ‘견(堅)’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러한 이로서 이생(異生)의 존재라면 이염지(離染地)에서 순차생수업을 제외한 그 밖의 세 가지 업을 지을 수 있으며, 그러한 이로서 성자(聖者)라면 이염지에서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 업을 지을 수 있다. 즉 이생으로서 물러남이 없는 자가 만약 어떤 지의 염오를 떠났다면, 그는 무간으로 그곳에서 생을 받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마땅히 [그곳에 태어나는] 순차생수업이 제외되는 것이며, 상계에서 몰하면 반드시 다시 하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그가 순후차수업을 짓는 것은 허용되는 것이다. 또한 성자로서 물러남이 없는 자가 만약 어떤 지의 염오를 떠났다면 필시 그곳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곳에 태어나는]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이 모두 제외되는 것이며, 태어난 지에 따라 순현법수업을 짓는 것만이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업을 짓는 것은 어떠한 처소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온갖 성자로서 만약 욕계나 유정처(有頂處)에서 이미 이염(離染)을 획득한 자라면, 비록 물러남이 있을지라도 역시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을 짓지 않으니, 그곳으로부터 물러난 자는 반드시 그러한 과위(果位, 불환과와 아라한과)에서도 물러나기 때문으로, 이미 그러한 과위에서 물러난 이는 반드시 명종(命終)하지 않고 다시 본래의 과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48)
4) 욕계 중유에서의 조업(造業)
중유(中有)의 상태로 머물면서도 역시 업을 짓는 것인가?
역시 짓는다.
어떻게 짓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중유위에서는 능히
스물 두 종류의 업을 짓는데
모두 순현법수업에 포섭되니
종류의 동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 중에서 중유의 상태로 머무는 이는 능히 스물 두 가지의 업을 지을 수가 있으니, 이를테면 중유의 상태와, 태중(胎中)에 처해서와 출태(出胎) 이후의 각 5위(位)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이 바로 그것이다.49)
여기서 태중의 5위란, 첫째는 갈랄람(羯剌藍)이며, 둘째는 알부담(頞部曇)이며, 셋째는 폐시(閉尸)이며, 넷째는 건남(鍵南)이며, 다섯째는 발라사가(鉢羅奢佉)이다. 또한 태외(胎外) 5위란, 첫째는 영해(嬰孩)이며, 둘째는 동자(童子)이며, 셋째는 소년이며, 넷째는 중년이며, 다섯째는 노년이니,50) 이 같은 열한 가지 상태는 한 번의 생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중유의 상태로 머물 때에는 능히 중유의 정업과 부정업을 지으며, 나아가 능히 노년[을 초래하는] 두 가지 업을 짓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중유에 의해 지어진 열한 가지 종류의 정업은 모두 순현법수업에 포섭되는 것으로, 각 종류의 동분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51) 말하자면 이 같은 중유의 상태와 자류(自類)의 열 가지 단계는 동일한 중동분으로서,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순중유수업(順中有受業)을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으로, 그것은 바로 순차생수 등의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52)
그리고 여기서 ‘각 종류의 동분’ 즉 유동분(類同分)이란, 이를테면 [중유ㆍ생유ㆍ본유ㆍ사유의 동분이 동일한] 인간 등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5]취(趣)나 [4]생(生)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5]취나 [4]생에 근거할 경우 중유와 생유의 동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5) 정업 즉 정수업(定受業)의 특징
온갖 정수업(定受業)은 그 상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거운 번뇌나 청정한 마음에 의한 업과
아울러 항상 조작되어 행해지는 업과
공덕의 복전[功德田]에 대해 일으킨 업과
부모를 해치는 업이 바로 정업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조작되어진 업으로서 무거운 번뇌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맑고 깨끗한 마음[淳淨心]에 의한 것, 혹은 항상 조작되어 [습관적으로] 행해진 것, 혹은 뛰어난 공덕의 복전(福田)에 대해 일으킨 것이라면 [이는 바로 정업(定業)이다]. 여기서 공덕의 복전이란 불(佛)ㆍ법(法)ㆍ승(僧), 혹은 증상의 보특가라로서, 이를테면 세간과 출세간의 뛰어난 공덕을 증득한 자를 말한다.53) 즉 이러한 공덕의 복전에 대해, 비록 무거운 번뇌나 맑고 깨끗한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또한 역시 항상 조작되어 [습관적으로] 행해진 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선 혹은 불선에 의해 일으킨 온갖 업이 바로 정업이다.
혹은 부모에 대해 하계(下界)의 전(纏)을 일으켜 해코지[損害事]를 행하는 이와 같은 일체의 업도 모두 정업에 포섭된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만약 맹리한 의요(意樂)에 의해 조작된 업이거나, 혹은 짓고 나서 환희심을 일으키는 업이거나, 혹은 모든 때에 걸쳐 자주 반복하여 습관화된 업이거나, 혹은 뛰어난 원력(願力)이나 현실적인 힘[事力]에 의해 일어난 업은 모두 결정업이다”고 하였다.
6) 순현법수업의 특징
현법과업(現法果業, 즉 현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법수업)은 그 상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승한 복전과 의요에 의한 업과,
아울러 결정코 이숙은 초래하지만
영리(永離)를 획득한 지(地)의 업은
결정코 현법의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54)
논하여 말하겠다.
‘수승한 복전에 의한 업’이란, [이를테면] 어떤 필추가 대중스님[僧衆]들에 대해 ‘여인’이라는 말을 하여 [모욕을 줌]으로써 그는 바로 여인으로 바뀌었다고 전해들은 일이 있으니, 이같이 전하여 들은 이야기는 그 종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뛰어난 의요에 의한 업’이란, [이를테면] 어떤 황문(黃門, 성불구자)이 여러 마리의 소가 황문이 되는 것(즉 거세되는 것)을 구하여 주었기 때문에 그는 바로 장부(丈夫)로 바뀌었다고 전해들은 것이 바로 그 같은 예이니,55) 이같이 전하여 듣는 이야기도 역시 한 [두] 가지 가 아니다.
혹은 그 밖의 다른 업도 역시 현법의 과보를 획득하는 경우가 있다. 즉 이러한 지(地)에 태어나 이러한 지의 염오를 영원히 떠날 때, 이러한 지에서 행한 온갖 선ㆍ불선의 업은 반드시 현세의 [그 과보를] 받게 되니, 다시는 [이러한 지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으로, 아라한이나 불환과의 경우가 그러하다. 즉 아직 염오를 떠나지 않았을 때 이미 그 같은 업을 지었지만, 지금 염오를 떠났기 때문에 현법의 과보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같은 업이란 어떠한 업인가?
이를테면 이숙이 결정된 업이다. 여기서 논설된 업은 바로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지가 결정된 업으로,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업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밖의 다른 상태(염오를 영원히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순정수업(順定受業, 이를테면 순차생수업이나 순후차수업)이 존재한다면, 그는 필시 염오를 영원히 떠난 일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상태(즉 현생 이후)에서 이숙과를 받게 된다. 또한 만약 이숙과 역시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염오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이숙과를 받지 않는다. 즉 모든 불환과와 아라한이 설혹 욕계와 3계로 물러나 염오를 일으킬지라도 필시 하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으며, 결정코 열반에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숙이 결정된 업은 모두 현세에 과보를 받게 된다.
그 밖의 업(순현법수업을 제외한 업)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이 같은 사실로 유추하여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7) 현법(現法)의 과보를 초래하는 복전
어떠한 복전에 대해 일으킨 업이 즉시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를 상수(上首)로 하는 승가나
아울러 멸진정과 무쟁정(無諍定)과
자비정과 견도와 수도에서 나온 자를
해코지하고 이익 되게 하는 업은 즉시 과보를 받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종류의 공덕의 복전[功德田]에 대해 선ㆍ악의 업을 행할 때, 결정코 바로 그 과보를 받게 되니, 여기서 ‘공덕의 복전’이란 부처님을 상수(上首)로 하는 승가를 말한다. 그러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말할 경우, [이러한 공덕의 복전에는] 다섯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로는 멸진정에서 나온 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마음이 적정(寂靜)을 획득하는데, 이러한 선정의 적정은 열반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선정으로부터 나와 처음으로 마음(즉 出定心)을 일으킬 때에는 열반에 들었다가 다시 나온 자처럼 뛰어난 적정의 공덕이 그의 몸을 장엄하고, 또한 그것은 크고 청정한 마음[殷淨心]이 생장하는 의지처가 되니, [그래서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무쟁정(無諍定)으로부터 나온 자이다.56) 이를테면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이미 일체의 번뇌와 그 재환(災患)의 상속을 영원히 뽑아버렸으며, 일체의 유정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아 일으킨 가없는 증상의 의요와 무쟁의 공덕이 소의신 상에 적집 훈습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에서 나올 때, 그의 마음의 상속은 세간의 어떠한 정심(定心)과 부정심(不定心)에 의해서도 승복(勝伏)되지 않으니, 이는 바로 복(福)과 비복(非福)의 직접적인 결과[近果]를 초래하는 수승한 복전이다.57)
셋째로는 자비정[慈定]으로부터 나온 자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려는 뛰어난 의요가 소의신 상에 적집 훈습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에서 나올 때에는 유위의 무량 최승의 공덕에 의해 훈습된 소의신의 상속이 일어나 능히 수승한 업을 낳게 된다. [그래서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넷째로는 견도(見道)로부터 나온 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도에서는 무시이래 유전하여 능히 초월할 수 없는 3계에 윤회하는 생사의 근본을 그 일부분이라도 능히 초월하기에58) 이러한 도에서 나올 때에는 뛰어나고 청정한 소의신의 상속이 생겨나 능히 수승한 업을 낳게 된다. [그래서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수도(修道)로부터 나온 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도에서는 생사의 근본을 그 일부분이라도 능히 초월하는데,59) 그 밖의 사실(즉 이러한 도에서 나올 때)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상태로부터 처음으로 나올 때(出定할 때)에는 이전에 닦은 뛰어난 공덕의 세력에 힘입어 마음은 여전히 [그것을] 되돌아보고 전념하여 버리지 않는다. 모든 근(根)은 적정하고 기특하여 항상 하는 것[常]과는 다르며, 세간과 출세간의 정업과 부정업의 복이 능히 그것을 승복(勝伏)하여 영탈(映脫)하는 일도 없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를 설하여 ‘공덕의 복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같은 공덕의 복전에 대해 해코지하거나 이익 되게 하는 업을 지을 경우, 이러한 업은 필시 능히 바로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밖의 다른 선정이나 다른 과위(果位)로부터 나올 때에는, 이전에 닦은 것이 결코 수승한 공덕은 아니며, 수소단의 번뇌도 필경 아직 다 멸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속은 뛰어난 복전(福田)이 아닌 것이다.
4.6. 심수업(心受業)과 신수업(身受業)
이숙과 중에서는 수(受, 즉 고ㆍ낙수)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온갖 업 중에서 오로지 심수(心受)의 이숙과 만을 초래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신수(身受)의 이숙과 만을 초래하고 심수는 초래하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인가?60)
역시 있다.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선한 무심(無尋)의 업은
오로지 심수만을 초래하는 것으로 인정되며
악은 오로지 신수 만을 초래하니
이것이 바로 수(受)를 초래하는 업의 차이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선한 무심(無尋)의 업’이란 이를테면 중간정(中間定)으로부터 유정천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선업을 말하는데, 여기서 능히 ‘수’의 이숙을 초래하는 선업은 단지 심수 만을 초래하고 신수는 초래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그러한 지(地)에는 신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수는 반드시 심(尋)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무심의 업은 유심(有尋)의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온갖 불선의 업으로서 능히 ‘수’의 이숙을 초래하는 것은, 단지 신수 만을 초래하고 심수는 초래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불선의 원인(업)은 고수(苦受)를 결과로 삼지만, 우수(憂受)―의지(意地)의 고수(다시 말해 마음과 구기하는 고수)를 ‘우수’라고 이름한다―는 필시 이숙과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61) 불선업은 오로지 신수 만을 초래하는 것이다.
1) 마음을 발광시키는 업[心狂業]
만약 우근(憂根)은 결정코 이숙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온갖 유정들이 일으키는 심광(心狂) 즉 마음의 발광은 어떠한 식(識) 중에 존재하며,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초래되는 것인가? 또한 어떠한 처소에 의지하여 [이 같은] 비이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광은 오로지 의식 중에서
업의 이숙에 의해 생겨나고, 아울러
두려움과 상해와 어긋남과 근심에서 생겨나며
북구로주를 제외한 욕계에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정의 심광(心狂)은 오로지 의식(意識)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5식(識)에는 필시 심광이 존재하지 않으니, 5식신은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로 말미암아 유정의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인가?
심광은 유정이 지은 온갖 업의 이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어떠한 업의 이숙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약물이나 주술을 이용하여 다른 이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혹은 다른 이가 원하지도 않는 독이나 술을 마시게 하며, 혹은 위엄을 나타내어 날짐승과 길짐승 따위를 두렵게 하고, 혹은 맹렬한 불을 놓아 산과 못을 태우며, 혹은 구덩이를 파 중생을 거기에 빠뜨리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사업으로써 다른 이의 정신을 잃게 하면, 이 같은 업을 원인으로 하여 미래세에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대종의 이숙과를 초래하여 획득하게 되니, 바로 그러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발광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심광 자체가 이숙과는 아니니, 선한 마음이든 악한 마음이든 모두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본송에서는] 다만 ‘심광은 업의 이숙에 의해 생겨난다’고 설한 것이다.62) 다시 말해 악업을 원인으로 하여 평등하지 않은 이숙의 대종을 초래하며, 이러한 대종에 의해 마음은 바로 실념(失念)하니, 그래서 이를 설하여 ‘미쳤다[狂]’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심광(心狂)과 심란(心亂)의 관계에 대하여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63) 이를테면 심광이지만 심란은 아닌 것……(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심광이지만 심란이 아닌 것은, 이를테면 미친 자의 온갖 불염오심이다. 심란이지만 심광이 아닌 것은, 이를테면 미치지 않은 자의 온갖 염오심이다. 심광이면서 역시 심란인 것은, 이를테면 모든 미친 자의 온갖 염오심이다. 심광과 심란이 아닌 것은, 이를테면 미치지 않은 자의 불염오심이다.
유정의 심광은 다만 이것(업의 이숙과)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인가?
다시 네 종류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놀라고 두려워함[驚怖]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비인(非人,예컨대 귀신) 등이 무서워할 만한 형상으로 나타나 핍박할 때 유정은 그것을 보고 나서 마침내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상해(傷害)를 입으므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어떤 일을 도모함으로써 비인 등을 괴롭히면,64) 그들이 진노하여 그의 지절(支節, 末摩 즉 급소를 말함)을 해치게 되고 마침내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즉 유정의 몸 가운데에는 별도의 지절이 있어 그것을 때리거나 건드리게 되면 마음은 바로 발광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조화되지 않음[乖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몸 안의 풍(風)과 열(熱)과 담(痰)의 한계가 서로 어긋나 4대종이 조화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근심[愁憂]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친애(親愛)하는 이를 상실함에 따라 수심의 독(毒)이 마음에 사무쳐 마침내 마음이 발광하게 되는 것으로, 예컨대 바사(婆私) 등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65)
어떠한 유정류에 이러한 심광이 존재하는 것인가?
북구로주를 제외한 그 밖의 욕계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유정들에게 심광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욕계천에서조차 마음이 발광하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나 악취가 심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지옥은 항상 미쳐 있으니, 많은 괴로움이 핍박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온갖 지옥에서는 항상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괴로움을 주는 도구[苦具]로 말마(末摩, marman, 死穴)에 상해를 입히니, 그것은 지극히 맹리(猛利)하여 참으로 참기 어렵다. 그러하여 고수(苦受)에 핍박되는 것조차 스스로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시비(是非)를 알 것인가?66) 그래서 세상에서는 “지옥 중에서는 원한에 사무친 마음[怨心]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미쳐 날뛰며 울부짖는다”고 하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모든 부처님을 제외한 욕계의 성자 중에도 대종이 조화되지 않을 때 심광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이숙생의 심광은 없다.67) 만약 [그들에게 이숙의 대종을 초래하는] 정업이 있다고 한다면, 필시 마땅히 먼저 [심광의 과보를] 받고 난 후에 비로소 성도(聖道)를 획득하였을 것이며, 만약 정업이 아니라고 할 경우에도 [이미] 성도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능히 [심광의] 과보를 받게 되는 일이 없다. 또한 놀라고 두려워함도 없으니, 모든 성자는 다섯 가지의 두려움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역시 상해를 입는 일도 없으니, 모든 성자는 비인(非人) 등이 증오하고 혐오할 만한 일을 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역시 근심하는 일도 없으니, 모든 성자는 법성(法性)을 깨달았기 때문이다.68)
그러나 일체의 여래에게는 심광도 심란도 없을 뿐더러 점차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없고, 음성을 파열되는(쇠약해지는) 일도 없으며, 또한 역시 머리카락이 희어지거나 얼굴에 주름살 등이 생기는 일도 없으니, 지극히 맑고 청정한 묘업(妙業)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4.7. 곡(曲)ㆍ예(穢)ㆍ탁(濁)의 3업
또한 경 중에서 설하기를 “업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곡(曲)ㆍ예(穢)ㆍ탁(濁)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 같은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경에서] 설하기를, 곡업과 예업과 탁업은
아첨과 진에와 애탐에 의해 생겨난다고 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身)ㆍ어(語)ㆍ의(意) 3업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곡ㆍ예ㆍ탁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순서대로 아첨[諂]과 진에[瞋]와 애탐[貪]에 의해 생겨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아첨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ㆍ의업을 일컬어 ‘곡업’이라고 하는데, 아첨은 왜곡[曲]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즉 진실의 왜곡을 견(見)이라고 하니, 그래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진실의 왜곡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온갖 악견(惡見)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첨은 바로 그 같은 [악견의] 종류이기 때문에 ‘곡’이란 명칭을 획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아첨에서 생겨난 신ㆍ어ㆍ의업은 ‘곡’을 원인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에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것을 설하여 ‘곡업’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진에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ㆍ의업이라면 그것을 일컬어 ‘예업’이라고 하는데, 진에는 더러움[穢]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즉 진에를 ‘더러움’이라고 이름한 것은, 이를테면 진에가 현전할 때에는 마치 뜨거운 쇠 구슬과 같아서 그것이 던져지는 곳에 따라 능히 자신과 타인의 몸과 마음을 태워 해치니, 온갖 번뇌 중에서 그 허물이 가장 무겁다. 그래서 박가범께서는 [진에를] ‘더러움’이라는 명칭으로 거듭 설정하였던 것으로, 온갖 더러움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에로부터 생겨난 신ㆍ어ㆍ의업은 ‘예’ 즉 더러움을 원인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에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것을 설하여 ‘예업’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애탐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ㆍ의업이라면 그것을 일컬어 ‘탁업’이라고 하는데, 애탐은 혼탁함[濁]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즉 애탐을 ‘혼탁함’이라고 이름한 것은, 이를테면 애탐이 현전할 때 그것에 의해 염착된 소연은 바로 염오성이기 때문으로, 그러한 애탐으로부터 생겨난 [신ㆍ어ㆍ의업]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한 바에 준하여 마땅히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69)
또는 진실로 곧은 도[直道]는 말하자면 팔정도인데, 능히 그것의 생기를 장애하는 [신ㆍ어ㆍ의의] 세 업을 ‘곡업’이라고 이름하였다. 진실로 병이 없는 것[無病]은 말하자면 영원한 열반인데, 그것을 증득하는 근거(즉 성도)를 장애하는 세 업을 ‘예업’이라 이름하였다. 외도의 견해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정한 신심을 장애하는 불신(不信)을 ‘탁’이라 이름하였으니, 그것은 능히 청정한 신심을 어지럽히고 흐리게 하기 때문으로, 그것에 의해 일어난 세 업을 ‘탁업’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또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떨어져 처중(處中)의 행(行, 즉 中道行)과 어긋날 때,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신ㆍ어ㆍ의업은 곧은 도[直道, 즉 8정도]와 서로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곡업’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손감(損減)의 견해로 말미암아 일어난 온갖 업은 능히 청정한 법을 더럽히기 때문에 ‘예업’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70) 즉 ‘예’라고 하는 말은 필시 지극히 더럽다는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가야견(薩伽耶見)에 의해 일어난 온갖 업은 능히 진실하고도 청정한 무아의 견해를 장애하는 것으로, 청정함을 장애한다는 뜻에 따라 ‘탁업’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41권
4. 변업품 ⑨
4.8. 흑흑(黑黑)ㆍ백백(白白) 등의 4업
1) 흑흑ㆍ백백ㆍ흑백ㆍ비흑비백의 4업
또한 경 중에서 설하기를 “업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어떤 업은 흑(黑)으로서 흑의 이숙을 초래하며, 혹은 다시 어떤 업은 백(白)으로서 백의 이숙을 초래하며, 혹은 다시 어떤 업은 흑백으로서 흑백의 이숙을 초래하며, 혹은 다시 어떤 업은 비흑비백(非黑非白)으로서 이숙을 초래하는 일이 없으니, 능히 온갖 업을 멸진한 것이다”고 하였다.1)
경에서는 간략하게 나타내기만 하였을 뿐 널리 해석하지 않았으니, 지금 마땅히 그것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흑흑 등의 차별에 의해
설해진 네 종류의 업은
악과 색ㆍ욕계의 선과
능히 그것이 다한 무루의 업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흑ㆍ백ㆍ흑백ㆍ비흑비백이라고 이름하였음을.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서는 업과 그 과보의 성질과 종류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대치되는 것[所治]과 능히 대치하는 것[能治]의 차별에 따라 흑흑(黑黑) 등의 네 가지 업을 설하였다.
즉 모든 불선업은 한결같이 ‘흑(黑)’이라고 이름하니, 염오의 흑과 불가의(不可意)의 흑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그 이숙과도 역시 ‘흑’이라고 하니, 불가의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색계의 선업은 한결같이 ‘백(白)’이라고 이름하니, 어떠한 불선의 번뇌도, 어떠한 불선의 업도 섞여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 이숙과도 역시 ‘백’이라고 하니, 바로 가의(可意)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의취(意趣)에 따라 무색계의 선을 [백백업에서] 제외한 것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여기서는 처음의 것(즉 색계의 선업)을 언급하면서 뒤의 것(즉 무색계의 선업)도 [함께] 나타내었다”고 하였다.
혹은 “색계 중에는 가의(可意)의 백업과 명료(明了)한 백업이 존재한다고 말[施設]할 수 있기 때문에 색계에만 유독 ‘백’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무색계 중에는 가의의 백업은 존재하지만 명료한 백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백’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 색계 중에는 중유와 생유의 두가지 백의 성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독 백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계경에서 ‘혹은 남자 혹은 여자로서 신묘행(身妙行)……(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을 성취한 이는 백의(白衣)의 빛깔과 같은 유색(有色)의 의성(意成,중유)를 초래하여 획득하게 된다’고 말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2)
혹은 색계에는 3업과 10업도가 모두 존재하고, 무색계의 경우는 그렇지 않음에도 계경에서 “[4]정려와 [4]무량과 [4]무색정도 다 백백(白白)의 이숙업이라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순수하고도 청정한 가의(可意)의 이숙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백’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3) 그렇지만 그 경은 요의설이 아니니, 상[2]계의 4온과 5온의 일체의 선법을 ‘업’이라는 말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이숙인은 업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업이 아닌 것[非業]도 역시 업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던 것으로, 그 경은 요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욕계의 선업을 일컬어 ‘흑백(黑白)’이라고 하니, 악이 섞여 있기 때문이며, 그 이숙과도 역시 ‘흑백’이라고 이름하니,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非愛果]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흑백’이라는 명칭은 상속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으로서, 업 자체[自性]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다.4)
그 까닭이 무엇인가?
어떠한 업도, 어떠한 이숙과도 흑이면서 역시 백인 경우는 없으니, 상호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악업과 그 과보에도 선업과 그 과보가 섞여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경우에도 역시 마땅히 그것을 백흑업(白黑業)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5)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욕계 중에서 자주 행하는 불선의 힘은 능히 선을 굴복시키기 때문이다.6) 즉 그러한 [불선업과] 고과(苦果)에 낙(樂)의 이숙이 섞여있을지라도 욕계 선업은 저열하여 불선을 능가하거나 굴복시킬만한 공능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선업의] 낙과(樂果)도 역시 고(苦)의 이숙과 뒤섞일만한 공능이 없기 때문에 악업과 그 과보에 대해서는 [‘백흑’이라 하지 않고] 순전히 ‘흑’이라고만 이름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욕계의 선업은 의요(意樂)와 가행(加行)에 흑백이 섞여 일어나니,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흑백이라는 두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던 것으로, 어떠한 업도 그 자체가 선이면서 악인 것은 없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컨대 어떤 사람이 다른 이를 속이고 해코지하기 위해 다른 이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따르게 하려는 뜻에서 먼저 속임수로 보시를 행하고, 나아가 출가하였을 경우, 이 같은 경우를 일컬어 비록 의요는 흑일지라도 가행은 백이라고 하는 것이다. 혹은 또한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이나 문인(門人)들에게 이롭고 안락하지 않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이롭고 안락한 일에 안주하게 하고자 하기 위해 연민의 마음에서 추악한 신ㆍ어업을 일으켜 유정을 매질하고 꾸짖고 욕하며 핍박하였을 경우, 이 같은 경우를 일컬어 비록 가행은 흑일지라도 의요는 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불선업도 마땅히 백흑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선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요와 가행에 백과 흑이 섞여 일어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앞서 언급한 논설에만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온갖 무루업으로서 앞의 세 가지 업을 능히 영원히 끊고 다한 것을 일컬어 네 번째 업(비흑비백업)이라 한다. 즉 이러한 무루업은 염오성이 아니기 때문에 ‘비흑’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여기에는 이치상 어떠한 허물도 없다. 또한 더 이상 [3]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흑의 이숙은 물론이거니와 백의] 이숙도 끊었기 때문에 무이숙(無異熟)이라고 이름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렇다면] 이는 이미 승의(勝義)의 백업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비백(非白)’이라 이름한 것인가? 부처님께서도 역시 저 『대공경(大空經)』 중에서 아난다에게 말하기를, “모든 무학의 법은 순선(純善) 순백(純白)으로 한결같이 무죄(無罪)이다”고 하였으며,7) 본론(本論)에서도 역시 “무엇이 백법(白法)인가? 이를테면 모든 선법과 무부무기법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
여기서는 은밀한 뜻[密意]에서 ‘비백’이라는 말을 설하였다.
은밀한 뜻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여기서는 앞의 세 업을 대치하는 업을 네 번째 업으로 설정하였으니, 교화되는 이가 “어떻게 백업이 능히 백업을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의심하지 않도록 능히 대치하는 것(즉 무루업)이 대치되는 것(백업)보다 수승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비백’이라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숙을 초래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비백’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으니, 능히 백의 이숙도 초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무학의 법은 일체의 염오한 소의신을 초월할 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순백’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으로, 이는 유학의 법과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유학의 법은] 일체의 염오한 소의신을 초월하지 않더라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순백’이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 경에서는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무학의 법을 ‘순백’이라는 말로 설한 것이지만, 지금 이 경(흑업 등의 4업을 설한 경)에서는 무루업은 애호할만한 결과를 쫓는 것이 아닐뿐더러 또한 능히 백의 이숙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비백’이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2) 무루업(비흑비백업)과 앞의 세 업의 관계
그렇다면 온갖 무루업은 다 앞의 세 가지 업을 능히 멸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법지인(法智忍)과 욕계를 떠난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와 함께 작용하는
열두 가지의 무루의 사업(思業)은
오로지 순흑(純黑)의 업만을 멸진한다.
욕계와 네 가지 정려의 염오를 떠난
제9 무간도와 함께 작용하는 사업의 경우
한가지는 흑백[雜]과 순흑의 업을 멸진하며
네 가지는 순백의 업을 멸진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견도(見道) 중에서는 네 가지 법지인(法智忍)과, 그리고 수도(修道) 중에서는 욕계의 염오를 떠난 상태인 앞의 여덟 가지 무간(無間)의 성도(聖道)와 함께 작용[俱行]하는 열두 가지 사업(思業)은 오로지 순흑업(純黑業) 즉 흑흑업만을 멸진한다.9)
욕계의 염오를 떠나는 제9 무간의 성도와 함께 작용하는 한 가지 무루의 사업은 흑백업과 순흑업을 함께 멸진하니, 이때에는 욕계의 선업이 모두 끊어지기 때문이며, 또한 제9품(즉 하하품)의 불선업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4정려 각각의 지(支)의 염오를 떠나는 제9 무간도와 함께 작용하는 무루의 사업 네 가지는 오로지 순백업, 즉 백백업 만을 멸진한다.
그 밖의 온갖 업(즉 무색계의 선업)은 이숙을 초래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명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논설하지 않은 것으로, 그래서 여기(본송)서는 오로지 열일곱 가지의 무루업만을 설한 것이다.10)
그리고 무간의 성도와 함께 작용하는 사업[聖思, 즉 무루의 사업]도 능히 앞의 세 가지 유루업을 영원히 멸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온갖 업을 멸진하는 것은 바로 성도인 혜[聖慧]의 공능이라 할지라도 여기서는 그것과 가까운 대치도를 설한 것으로, [무루의] 신ㆍ어업도 역시 앞의 세 가지 업을 가까이서 대치하지만 그것은 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온갖 지(地)의 유루의 선법은 오로지 최후의 도(즉 제9 무간도)에 의해서만 능히 끊어지고 그 밖의 도에 의해서는 끊어지지 않는 것인가?11)
모든 선법은 자성단(自性斷)이 아니어서 [그 밖의 도에 의해] 이미 끊어졌더라도 현재전(現在前)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번뇌가 끊어질 때 비로소 그 같은 선법을 끊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 때의 선법은 이계(離繫)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12)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것(즉 선법)을 소연으로 하는 번뇌가 1품이라도 남아있는 한 [그러한 선법이] ‘끊어졌다’고 하는 뜻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니, 그 때에도 선법은 여전히 계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3) 흑흑업과 흑백업에 대한 이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떤 이는 지옥의 이숙을 받는 업과
그 밖의 욕계의 업을 흑흑ㆍ흑백[雜]업이라고 설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욕계의 견도에 의해 소멸하는 업과
그 밖의 욕계의 업을 흑흑ㆍ흑백[俱]업이라고 설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첫 번째 업(흑흑업)과 세 번째 업(흑백업)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니,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지옥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順地獄受業]과 그 밖의 욕계 중에서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순서대로 이름하여 순흑업(純黑業, 즉 흑흑업)이라 하고, 잡업(雜業, 즉 흑백업)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지옥의 이숙은 오로지 불선업 만이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기에 적합한 업을 ‘순흑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지옥을 제외한 그 밖의 욕계 중의 이숙은 모두 오로지 선ㆍ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기에 적합한 업을 ‘흑백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설은 앞에서 이미 비판하였으니, 이를테면 선업은 능히 불선업과 뒤섞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유여사는 이같이 설하였다.
“욕계의 업으로서 견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見所斷]과, 욕계 중에 존재하는 그 밖의 업(즉 修所斷의 업)을 순서대로 일컬어 순흑업과 구업(俱業, 즉 흑백업)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견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업이 섞여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순흑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욕계의 업으로서 수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은 선업과 불선업이기 때문에 구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두 가지 도에 의해 끊어지는 업 가운데 흑ㆍ백이 함께 존재하는 업[俱有業]은 능히 이숙과를 초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논설한 세 가지 업은 이숙과를 갖는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이숙과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면, 마땅히 욕계 견도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라고 분별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 세력이 강력한 업은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 힘이 저열한 것과 뒤섞여 있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에 의해 끊어지는 온갖 불선업도 역시 잡업(雜業, 즉 흑백업)’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설해서도 안 되며, 역시 또한 욕계의 선은 그 힘이 불선보다 뛰어나 악업을 능가하고 굴복시킬 수 있다고도 말해서는 안될 것이니, 그 같은 주장은 허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욕계의 선은 자주 자주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능히 일겁(一劫)의 과보를 초래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4.9. 3모니업(牟尼業)과 3청정업(淸淨業)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모니(牟尼)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청정(淸淨)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다같이 신(身)ㆍ어(語)ㆍ의(意)의 그것이다.13)
이러한 법들의 각각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의 신ㆍ어업과
마음이 바로 세 가지 모니이며
세 가지 청정이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바로 세 가지의 온갖 묘행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학(無學)의 신업을 신모니(身牟尼)라고 이름하며, 무학의 어업을 어모니(語牟尼)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바로 무학의 마음[意]을 의모니(意牟尼)라고 이름한 것으로, 의모니란 의업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14)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색온과 식온 중에만 모니가 존재하며, 그 밖의 다른 온에는 모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유여사는 설하기를 “제일 끝과 처음의 온을 언급하게 되면 중간의 온에도 역시 그러한 뜻이 있음을 나타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참다운 뜻은 ‘승의(勝義)의 모니는 오로지 마음을 본질로 한다’는 것으로, 그래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마음이 적멸되어 고요[寂靜]해졌기 때문에 유정은 고요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심모니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즉 신ㆍ어업이 온갖 악을 떠났기 때문에 이로써 추리하여 [마음도 그러함을] 알 수 있지만, 의업 중에는 능히 그것을 추리할 만한 작용이 없다. 그래서 오로지 능히 추리의 근거가 되는 것[能比,즉 무학의 신ㆍ어업]과 그것에 의해 추리되는 것[所比,즉 무학의 마음]을 합하여 모니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15)
어떠한 이유에서 모니는 오로지 무학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아라한은 바로 진실의 모니로서, 온갖 번뇌의 말이 영원히 적멸하여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신(身)ㆍ어(語)ㆍ의(意) 세 종류의 온갖 묘행(妙行)을 신ㆍ어ㆍ의 세 종류의 청정(淸淨)이라고 말한 것으로, 무루의 묘행은 악행(惡行)과 번뇌구(煩惱垢)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6)
유루의 묘행은 악행과 번뇌구의 더러움이 여전한데 어떻게 ‘청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역시 잠시 동안 능히 악행과 번뇌구를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이것의 세력이 능히 무루인 승의의 청정을 인기하기 때문에 ‘청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만약 “이 역시 번뇌의 등무간연이 되어 능히 번뇌구를 인기하기 때문에 마땅히 청정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선심이 일어날 때 그것은 염오심을 위한 가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염오심과 무간에 무루는 생겨나지 않지만, 유루의 선심은 능히 무루를 인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루의 선심도 ‘청정’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무루에 수순하는 마음은 능히 더러움[穢]을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업(모니와 청정)을 설한 것은, 유정들이 그릇된 모니[邪牟尼]와 그릇된 청정[邪淸淨]을 추구[計]하려는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였다.17)
4.10. 3악행(惡行)과 3묘행(妙行)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악행(惡行)이 있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묘행(妙行)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다 같이 신(身)ㆍ어(語)ㆍ의(意)의 그것이다.18)
이러한 법의 각각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한 신ㆍ어ㆍ의업을 설하여
세 가지 악행이라고 이름하며
아울러 탐ㆍ진ㆍ사견도 악행인데
세 가지 묘행은 이와 반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불선인 일체의 신업과 어업의 전후 근분(近分,즉 가행과 후기를 말함)과 근본업도, 그리고 불선의 사업(思業)을 순서대로 신ㆍ어ㆍ의악행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의악행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의업이 아닌 탐(貪)ㆍ진(瞋)ㆍ사견(邪見)이 바로 그것이다.
어찌 계경에서도 역시 “탐 등을 일컬어 의업이라 한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여기서는 탐ㆍ진ㆍ사견을 의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19)
이는 바로 업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업’이라고 일컬은 것이니, 마치 누(漏)의 자량이 되는 것을 역시 ‘누’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20)
탐 등은 의업이 아니라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아급마(阿笈摩)』와 정리(正理)에 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급마』에 [따랐다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에서 “탐ㆍ진ㆍ사견은 바로 업의 연이 되어 그것을 일으키는 것[集]이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탐 등이 바로 업의 존재[業性]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온갖 애(愛)가 드러난 것이 바로 의업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애’가 바로 업의 본질이 아니며, 그 밖의 다른 예(例, 탐 등)의 경우도 마땅히 그러함을 알게 된 것으로, ‘업이 바로 업을 일으키는 것[業集, 즉 업의 원인]이다’고 헤아려 말해서는 안 되니, 그래서 계경에서는 ‘애’와 업을 다른 것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주(經主)는 “번뇌가 바로 의업이라고 인정하였는데, 여기에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21) 그러나 이와 같이 [번뇌가 바로 의업이라고] 인정하는 경우 앞의 계경과 뒤의 정리에 위배되거늘 어찌 크나큰 과실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약 “[계경에서] ‘탐은 능히 마음[意]으로 하여금 온갖 악행을 짓게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경에서도 비록 ‘탐이 바로 이러한 의(意)악행의 인연이 된다’고 설하고 있을지라도 탐이 의악행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애(愛)가 업의 원인이 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이러한 ‘애’ 역시 바로 업[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면, 그 같은 예증은 평등한 것이 아니니, 이 경에서는 “‘애’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표업을 일으키게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 경에서 “탐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악행을 짓게 한다”고 말하였던 것처럼 이 경에서는 “‘애’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표업을 일으키게 한다”고 설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같은 경을 인용하면서 이 경을 예증으로 삼아 ‘표업의 원인인 애(愛)도 역시 업이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경에서 “온갖 치(癡)가 바로 무명이다”고 설한 것과 같다. 즉 이 경에서는 다만 ‘치’가 바로 무명의 체성임을 나타내고, ‘치’가 아닌 것은 바로 무명이 아님을 나타낸 것일 뿐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 경에는 온갖 희구(希求)가 바로 ‘애’이며, “온갖 ‘애’가 나타난 것이 바로 의업이다”고 설하였으니, 상(相)의 차별을 분별하면 그 뜻이 이미 드러난 셈이다. 즉 만약 희구가 아니라면 바로 애가 아니며, [희구인 ‘애’에 의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역시 의업이 아니니, 오로지 가설하였다는 사실만을 제외하면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의업을 ‘나타난 것[表]’이라 한데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22)
정리(正理)에 [따랐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번뇌가 바로 업이라고 한다면, 12연기와 세 가지 장애[障] 등에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23)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탐 등은 업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곧 이러한 법(불선의 3업과 탐ㆍ진ㆍ사견)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聰慧者]가 꾸짖고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능히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은 바로 악이기 때문에 ‘악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세 가지 묘행은 이와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선한 일체의 신업과 어업의 전후 근분(近分)과 근본업도, 그리고 온갖 선한 사업(思業)을 순서대로 신ㆍ어ㆍ의묘행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의묘행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의]업이 아닌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정견(正見)이 바로 그것으로, [이러한 법은] 바로 지자(智者)에 의해 찬탄하는 바이기 때문에,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행은 바로 미묘하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여기서 정견과 사견은 비록 다른 이를 이익 되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것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역시 선ㆍ악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11. 선ㆍ악의 10업도와 묘ㆍ악행의 관계
또한 경 중에서 말하기를 “10업도(業道)가 있으니, 선 혹은 악의 업도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24)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경에서] 설한 10업도는
악행과 묘행 중의 거친 것을
포섭하여 그 자성으로 삼은 것이니
상응하는 바에 따라 선과 악을 성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악행과 묘행 중에서 만약 거칠게 나타나 알기 쉬운 것이라면 그것을 포섭하여 ‘10업도’로 삼았으니,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만약 선업도라면 앞서 언급한 묘행이 여기에 포섭되고, 불선의 업도라면 앞서 언급한 악행이 여기에 포섭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악행과 묘행이 [10업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
가행과 후기 등이 [포섭되지 않으니], 그것은 거칠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불선의 10업도 중에서, 만약 신악행(身惡行)으로서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목숨을 상실하게 하고, 재물을 상실하게 하고, 처첩을 상실하게 하는 등의 악행이라면 이를 설하여 [악]업도라고 하였으니, 이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어악행(語惡行)으로서 그 과실이 막중한 것(이를테면 양설ㆍ망어ㆍ악구ㆍ기어)이라면 이를 설하여 [악]업도라고 하였으니, 이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악행(意惡行)으로서 그 과실이 극중한 탐ㆍ진 등을 설하여 [악]업도라고 하였으니, 이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악행의 가행과 후기, 그 밖의 허물이 가벼운 악행, 그리고 불선의 사(思)는 모두 [악]업도가 아니다.
선업도 중에서도 신(身)의 선업도는 신묘행의 일부분을 포섭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가행과 후기, 그리고 그 밖의 선한 신업 즉 이음주(離飮酒)와 단막시(斷莫施) 등이 바로 그것이다.25) 어(語)의 선업도는 어묘행의 일부분을 포섭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애어(愛語)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의(意)의 선업도는 의묘행 중의 일부분을 포섭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온갖 선한 의지[善思]가 바로 그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