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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 5∼1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는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대회에는 ‘조선대표’가 참가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자주독립의 타당성을 의연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대회의 개요뿐만 아니라 그 대회에 한국 대표가 참가한 배경과 대표로 참여한 인물에 대한 이해는 매우 미흡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그 대회의 개요를 살피면서 당시 그 대회의 조선 대표로 참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김법린(金法麟)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범어사 승려 출신으로 중앙학림을 졸업한 김법린은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3·1운동 직후 김법린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의 일선에 있었으나, 뜻한 바 있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 1928년 귀국한 이후에는 불교청년운동과 불교 교단의 정상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원으로 활약하였음은 그 실례이다. 김법린은 8·15 해방 이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문교부장관, 동국대 총장 등을 역임한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필자는 최근 근·현대 불교사를 연구하면서 김법린의 행적을 주목해오던 차, 그가 그 대회에 참가한 대표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당시 조선대표가 그 대회에 배포한 문건인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를 입수할 수 있었다. 필자가 그에 관련된 제반 개요 및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파악한 것이 많지는 않지만 우선 현재까지 파악한 그 대회의 제반 내용을 정리하고, 〈한국의 문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 대회에 관한 개요를 이해함과 동시에 일제하 불교계 민족운동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진한 내용의 보완은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김법린은 어떤한 배경에서 그 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였을까? 이 전후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회에 참가하기 이전 그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 김법린은 1899년 8월 23일 경북 영천군 신령면 치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 인근의 은해사(銀海寺)로 출가하였다. 이후 범어사 명정학교의 보습과 및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수학하였고,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그의 출신을 범어사로 전적(轉籍)하였다. 그후 서울의 휘문고보에 진학하였지만 졸업하기 1년 전인 1918년에는 불교 중앙학림에 편입하였다. 역사적인 3·1운동이 발발하였을 때, 김법린은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라는 한용운의 지시를 받고 3·1만세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3·1운동 거사 전날 밤 10시, 지시를 받은 김법린은 중앙학림의 동료들과 함께 인사동의 범어사 포교당에서 긴급 회의를 갖고 대책을 숙의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 결과 김법린은 김상헌과 함께 범어사의 만세운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3월 1일 김법린은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에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참가하는 등 서울시내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후 3월 5일 그는 경부선 열차를 이용하여 부산 범어사로 내려왔다. 범어사에 도착한 김법린은 범어사의 원로 승려인 오성월·이담해·김경산 등을 면담하고 서울의 만세운동을 알렸다. 그리고 범어사 중견 승려인 유석규, 김상호와 범어사에서의 만세운동 추진을 상의하였다. 그 요지는 범어사 강원, 지방학림, 명정학교의 학인들이 중심이 되어 동래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결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 학인들의 대표격인 주동 인물과 상의하여 의거일을 3월 18일로 정하였다. 거사 직전 지방학림과 명정학교의 졸업생을 위한 송별회가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의거의 목적, 방법 등을 설명하고 적극적인 동참을 확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위에 이용할 태극기·선언서·격문 등도 준비하였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거사가 성공한 것은 범어사 학인 32명의 결사대가 조직되어 그 의거의 중심에 있었기에 가능하였다.2) 이같은 김법린의 용의주도한 준비에 의해 범어사 의거는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김법린은 범어사 의거를 주도한 직후 곧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일제는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법린은 중앙학림의 동지들과 함께 더욱더 민족운동의 최일선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상해로 망명하였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우면서 점차 민족운동의 중심부로 진입하였다. 당시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점차 민족운동의 구심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김법린은 임시정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다시 국내에 들어온 그는 국내의 불교계 동지들에게 상해의 소식을 전하여 주었다.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민활하게 전달한 것이다. 그는 김상헌·김대용과 같이 만주(안동현)로 건너가 동광상점(東光商店)이라는 쌀 가게를 내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상해와 국내 간의 비밀활동을 전개하였으니, 혁신공보(革新公報)의 발행도 그 활동 중의 하나였다.3) 이후 상해로 돌아온 김법린은 임시정부에서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집 발간에 이용될 자료 수집에 나섰다. 이에 그는 국내로 잠입하여 귀한 사료를 확보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당시 상해에 망명한 불교계 지사들과 임시정부가 추진한 것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집과 불교계의 여력을 독립운동에 투입시키는 의용승군(義勇僧軍)의 조직이었다. 그 결과 범어사·통도사의 자금이 임시정부에 제공되었으며, 김포광이 불교계 대표로 상해에 특파되었고 이담해·오성월·김경산이 임정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한편 의용승군 조직은 승려의 비밀결사를 지향한 것이었는데, 그 전제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와 임시의용승군헌제가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서 신상완, 김상헌, 김법린 등은 국내로 잠입하여 범어사, 석왕사 등지에 거점인 기밀부(機密部)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1920년 4월 6일 그 운동의 중심 인물인 신상완이 서울에서 체포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당시 김법린은 일제에 의해 미체포 인물(이종욱·백성욱·백초월 등)로 지목되어 일제의 피체 대상이었다.4) 이에 김법린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상해로 와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공부를 해야 할 것인지. 결국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5) 그는 대학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생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단념하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국민당 지도자였던 왕조명(王兆銘)이 주도한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라는 장학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유능한 중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에 김법린은 그 유법검학회의 후원을 얻어 프랑스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6) 1920년 10월 그는 상선을 타고 싱가포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40여일 만에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에 도착하였다.7) 프랑스의 파리에 도착한 그는 우선 어느 부호의 집에 들어가 청소부를 하면서 불어를 배웠다. 불어를 좀더 배우기 위해 그는 프랑스 북부의 플래르시로 가서 포래로 시립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23세의 나이로 공부를 한 그는 이듬해 7월에는 파리대학교 부설 외국인학교로 옮겨 공부를 지속하였다. 그 무렵 파리의 동포 27명을 규합하여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어느새 김법린은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대학교(소르본대) 철학과에 입학였으니 때는 1923년 11월이었다. 학비 조달을 위해 병원의 막일까지 하면서 수학한 결과 1926년 7월,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파리 인근의 지방은행에 다니며 1926년 11월 파리대학원에 입학하여 근세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김법린의 이력이 1927년 2월에 개최된 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 대회 직전에 프랑스 파리에 있었으며, 능숙하게 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이 자연 그로 하여금 조선대표의 자격을 구비케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그의 확고한 민족의식은 그 대회에서 세계 각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여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했다. 1927년 2월 5∼14일,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의 개최 배경과 성격에 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분야가 매우 많다.8) 이 대회는 1925년 겨울 전, 세계에서 압박받는 민족과 계급의 공수동맹(攻守同盟)으로 생존권을 보전하기 위해 결성된 반제국침략주의대연맹9)이 기관을 설치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그 대회에는 세계 각처의 124개 단체에서 147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는 ‘조선대표’가 정식으로 참가하였는데, 그 대표는 김법린과 당시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이극로(李克魯), 이의경(李儀景:일명 이미륵), 황우일(黃祐日) 등 4명이었다.10) 그러면 어떤 연고로 이들이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는가를 주목해 보자. 이에 관해서는 이극로의 회고록에 그 사정에 관한 편린이 전하고 있는11) 바, 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극로와 독일 베를린 대학의 동창인 김준연(金俊淵)12)은 동아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그 대회가 브뤼셀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했으며 ‘국내’의 대표로서 이극로와 황우일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파견의 주체가 어느 단체인지, 신문사인지 혹은 독립운동가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김준연이 만주로 가서 그 여비를 이극로에게 송금하였으며 그후 독일유학생 대표로 이의경이 포함되고, 프랑스 유학생 대표로13) 김법린도 포함되었다. 또한 당시 여행중이었던 허헌도 이 4인의 대표와 그 대회에 관한 일을 상의하였는데, 허헌은 신문기자 자격으로 대회를 참관하기로 하였다.14) 그러면 여기에서 대표로 참여했던 인물들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극로는 1920년 상해의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와 근 10여년을 중학과정부터 대학교육을 이수하여 1927년 5월에는 베를린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후일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15) 일제에 징역 6년의 판결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의경은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이미륵이었다.
경성의학전문에 재학중 3·1운동에 참여한 후 상해를 거쳐 독일로 망명한 그는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의학, 동물학 등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1928년 7월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1931년 이후에는 오히려 문학에 몰두하여 기념비적인 작품을 독일문단에 발표하였다.16) 황우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극로와 함께 국내대표로 선정된 것을 보면 당시 독일에 체류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대회가 종료될 때까지 동참하였는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17) 신문기자 자격으로 참여한 허헌은 일본 명치대학의 법과를 1908년에 졸업하고 그 직후 변호사가 되었는데, 3·1운동시에는 민족대표 47인의 변호인단으로 활동하였다. 이후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과 보성전문 교장을 역임하고, 1925년에는 조선변호사회 회장에 피선되었다.18) 그는 1926년 5월 세계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세계일주 여행을 하다가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대회는 예비회(2. 5∼9)와 정식회(2. 10∼14)로 구분하여 진행되었다. 예비회에서는 대회에 출석하기 전에 각 단체 대표단을 구성하고 통일된 의견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회 전날에는 신문기자를 초청하여 참가한 배경 및 소신을 밝히는 회견을 가졌는데, 조선대표도19) 반제국주의 관련의 연설을 하였다. 이에 그 대회에 참가하게 된 한국인 4인은 ‘조선대표단’을 구성하고 이극로가 단장을 맡기로 하였다. 당시 그 대표들은 대회 직전에 상의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안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이극로는 회고하였다.
대회에 참가한 조선대표는 위의 요지로 한 제안을 대회 간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대회 집행부는 조선대표가 제출한 안건을 소홀히 하였다. 당시 그 대회에 참가한 약소국의 대표들도 제안을 하였지만 대부분 무시당하였다.
주된 의제는 반영운동(反英運動)이었기에 그에 관련된 국가인 중국·인도·이집트의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던 것이다. 이에 제출된 안건을 배척당한 조선대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벨기에의 자유전당이라는 에그멍 궁전에서 본회의는 2월 10일 오후 8시에 개최되었다. 회의장 안에는 조선의 태극기도 게양되었으며 사회 평등, 민족 자유라는 문구가 있는 포스터가 있었고, 제국주의 타도를 의미한 선전문을 순한문으로 쓴 것도 있었다. 본회의 첫날, 김법린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압박을 탄핵하는 기조 연설을 하였다.21) 그리고 이극로는 분과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에 원동위원회(遠東委員會)의 정치산업부의 위원이 되었다. 이극로는 당시 그 기회를 활용하여 조선 문제에 관한 안건 채택에 관하여 대회 의장단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는 조선 문제를 채택치 않은 불공평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에 의장단은 숙의를 한 후, 조선 문제의 토의는 중의에 붙여 그 가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배경에서 나온 표결에서 약소민족 대표는 대부분 찬성하였지만, 그 결과는 3표차로 부결되었다. 2월 14일 최종 회의에서는22) 간부들의 제의안과 각 대표단의 결의안이 낭독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압박에 대항하고 민족 자유를 위한 대연맹’을 창립한다는 것과 영국대표 린스베리를 그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등 9명의 집행위원을 선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각 단체의 결의안 5∼6건은 대회에서 낭독하여 통과시키고, 기타사항은 시간관계상 집행위원회에 일임하였다. 아시아 문제에 관련해서는 ‘아세아민족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단체는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고 아시아 민족간의 상호관계를 도모하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조선, 중국, 인도, 시리아에서 각각 1명씩 위원을 선발하었다. 조선의 위원으로는 김법린이 피선되었다. 대회가 종료된 이후 이극로는 독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고 영국의 런던으로 떠났다. 이미륵도 역시 독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한편 김법린은 일단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이후 1927년 12월 9∼11일 벨기에의 수도 룩셈부르크에서 개최된 피압박민족대회의 간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였다.23) 그후 그는 네덜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1928년 1월 14일 귀국하였다.24) 고국을 떠난 지 8년만이었다. 그런데 그의 귀국은 1927년 4월경 이미 국내 불교계에 알려졌다.25) 이는 1927년 3월 16∼19일 각황사에서 개최된 재단법인 교무원 평의원 총회에서 김법린의 귀국 여비를 보조하기로 결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그 총회에 참석한 평의원인 황운곡(黃雲谷)은 ‘불란서 파리대학에서 고학으로 성공하여 불란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범어사 학생 김법린 씨의 귀국여비를 보조하기를 발의’하여, 각 본산 주지가 평균 10원씩을 표준하여 300원을 기부하되 그 지불을 교무원의 예비비에서 지출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26)
그리고 그의 활동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이전 동지인 김상호는 전국 사찰을 돌며 그의 귀국 여비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귀국에 즈음하여 불교계에서 귀국하여 불교계를 위해 일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당시 돈 6,000원이 동봉되었다. 김법린은 프랑스에서 계속 공부를 할 마음도 있었지만 불교계의 간곡한 호소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것이다. 귀국한 그는 우선 그의 출신 사찰인 범어사로 가서, 귀국 후 최초 강연을 1928년 2월 14일에 가졌다.27) 그는 각황사와 교무원에서도 불교 강연을 하였다.28) 이후부터 김법린은 불교청년운동과 식민지 불교의 극복을 위한 최일선에 다시 섰던 것이다. 조선불교청년회의 재기,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불교청년단체의 통합, 만당 결사,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의 개최, 종헌 실행운동, 사찰령 극복 및 사법 개정운동, 교단 정상화 운동 등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당시 불교계의 중요한 움직임29)의 중심에는 김법린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편 그는 1929년 12월 6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반제국주의자동맹의 베를린 사무국에서 초청을 받았지만30) 일제의 탄압으로 참가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193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구택대학(駒澤大學)에서 범어와 인도철학을 다시 공부하는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김법린 등 조선대표는 그 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 및 신문기자들에게 일제에게 침략을 당한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건을 제작하였다. 이에 필자는 그 문건에 기재된 제목을 활용하여 ‘한국의 문제’로 명명하겠다. 이 문건의 제원은 가로와 세로가 15×23cm이며, 지질은 모조지이다. 겉 표지에는 ‘한국의 문제’라는 제목을 각각 영어, 불어, 독일어로 쓰고, 그 아래에 원색의 태극기를 교차된 상태로 그려 놓았다. 그 하단에는 동아시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지도에는 한국, 일본, 중국의 주요 도시가 영어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건은 총 8쪽인데 ‘Korea’라는 제목 아래 독일어 4쪽 영어 4쪽으로 1910∼1926년의 한국의 실상을 요약하였다. 또한 앞과 뒤의 내지에는 일제의 식민지 침탈상을 도해로 요약하였다. 맨 뒤의 표지에는 문건의 인쇄처인 독일의 살라 운트 스타인코프(Saladruck Zieger £ Steinkopf) 주소가 기재되어 있다. 현재 이 문건의 원본은 독립기념관의 자료로 등록되어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 이 자료가 독립기념관의 자료로 등록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 자료는 독일에서 유학하였으며 그 대회에 참석한 이미륵이 독일 뮌헨 대학의 교수인 자일러(Seyler) 교수에게 제공하였다. 자일러 교수는 이미륵과 뮌헨 대학 생물학부 동물학과 동기 동창생이었다. 자일러 교수는 이 자료를 40년간 개인적으로 보관해 오다, 1969년경 독일로 유학 간 성신여대 정규화 교수(독문학)에게 제공하였다. 정규화 교수 또한 이 자료를 보관해 오다, 1984년 7월 14일 독립기념관 설립운동이 추진될되고 있을 때에 독립기념관설립추진위원회에 이를 기증하였던 것이다.
이 문건의 겉 표지 하단에는 연필로 ‘Brusel 10 Feb 27’ ‘Mirok’라고 씌어져 있는데 이는 이 자료가 분명히 그 대회에 활용되었다는 것과 이미륵의 연고를 확실히 말해 준다. 그러나 이 문건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우선 이 문건을 서술·인쇄하게 된 시점과 주체의 문제다. 조선대표로 선정된 4인이 전부 모여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독일에서 인쇄되었기에 독일에 체류하던 이극로·이미륵·황우일이 상의한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또한 이 문건의 인쇄 수량이라든가, 인쇄비 조달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또한 이 문건의 내용을 서술한 당사자는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간다. 그러나 독일어와 영어로 된 문건의 내용을 살펴 보면, 서로 같은 글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는 한글로 문건의 내용을 먼저 집필한 다음 영어와 독어로 동시 번역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같은 상황을 전제로 할 때 영어 번역은 김법린이 했을 가능성이 많다. 프랑스로 유학하기 전 김법린은 미국 유학을 꿈꾸며 한때 영어 공부에 전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어 번역은 이극로·이미륵·황우일 가운데 한 사람이 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다음으로 이 문건과 앞서 이극로가 언급했던 대로 대회에 제안하기로 한 ‘3항의 내용’과의 연관성이다. 요컨대 오히려 3항과 관계된 부분이 미진하여 연설 등의 형식으로 보충하기로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나 벨기에 오기 이전 이 문건은 이미 인쇄되었을 것이기에 그 대회에 참가한 초기의 일종의 전략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인쇄의 주무자는 이극로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문건의 인쇄처가 베를린이었다는 것을 볼 때, 당시 베를린 대학에 재학중인 이극로가 이를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문건의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겠다. 우선 문건의 앞뒤 내지에는 1910∼1926년 식민지 침탈상을 한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수, 일본인의 토지침탈, 한국인의 생활고, 한국인과 일본인 지주의 자본 비교, 학교 교육의 차별, 한·일 양국인의 관료의 수 등을 도해하여 제시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한국은 문화를 갖고 있는 독립국이라는 점, 일제의 국권강탈과 그 피해,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 3·1운동 등에 대해 간략히 제시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일제는 한국을 무력으로 지배할 수 없음을 전제하면서, 한국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일제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개진하고 있다. <끝>
김광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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