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85년전인 1936년 8월9일. 제11회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첫번째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 선수는 3위로 골인,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이들은 시상식에서 그리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고개도 푹 숙이고 있었다. 울려 퍼지는 국가는 일본 국가였고,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은 일본인 “손기테이”로 기록돼 있다. 이를 수정할 방법도 없다. 나라 잃은 민족의 비애다.
O〮〮〮당시 국내신문은 연일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동아일보와 조선 중앙일보는 8월13일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 인쇄술이 열악했던 당시 흐릿한 사진은 왕왕 있었던 일이라 이 사진은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8월25일자 기사에서 다시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했다. 총독부 검열관이 이를 발견, 문제를 삼았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 이길용 기자 등 8명이 40여일간 구속, 고초를 겪었다. 동아일보는 8월29일부터 9개월간 정간 조치됐다. 조선중앙일보는 자진휴간 뒤 결국 폐간됐다.
O〮〮〮다른 것도 그렇지만 마라톤 기록은 눈부실 정도로 빨라졌다. 85년전 손기정은 42.195Km를 2시간29분19초로 완주, 세계기록을 갈아 치웠다. 마의 2시간30분대를 깬 것으로 대단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우승한 킵초게(케냐)의 기록은 2시간 8분38초다. 2시간1분39초라는 세계 신기록도 갖고 있는 그는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3번째 선수가 됐다. 이 기록은 손기정보다 27분40초나 빠르다. 킵초게의 기록은 마라톤 전구간을 100미터당 평균 17~18초로 달렸다는 얘기다. 왠만한 사람이 100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정도의 속도다.
O〮〮〮한국 마라톤의 역사는 100년 남짓하다. 1920년 조선체육회 주관으로 열린 “경성일주” 마라톤이 효시다. 그러나 한국 마라톤은 마라톤 도입 12년만인 1932년 LA 올림픽에서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9위를 차지하는 등 장족의 발전을 했다. 급기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각각 1,3위를 차지했다. 해방 후에도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서윤복이 우승, 한국마라톤의 명맥을 이어갔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나란히 1,2,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봉주도 2001년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후 주춤하던 한국 마라톤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우승, 56년만에 손기정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봉주가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뒤 국제대회에서 한국선수들의 이렇다할 입상기록이 없다.
O〮〮〮한국 마라톤은 1930년~1950년대에 세계 정상급이었다. 그후 주춤하던 한국 마라톤은 90년대 들어 황영조와 이봉주로 인해 반짝 살아나는 듯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였다. 올림픽 4회연속 출전을 비롯 메이저 대회에서 41회나 완주하는 이봉주의 투혼 이후 그를 잇는 후배가 없다. 한국 신기록도 이봉주가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7분20초가 21년째 그대로다. 한국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 2명이 출전했다. 심종섭은 2시간20분36초로 49위,오주한은 부상으로 레이스 도중 기권했다. 이처럼 2000년 이후 한국마라톤은 퇴보하고 있다. 한국선수들은 90년대까지만 해도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다퉜으나 이제는 세계 기록과 너무 수준차가 난다. 인간의 한계와 극기로 대변되는 마라톤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 런닝 인구가 4백여만명으로 추산되는 등 마라톤 동호인이 계속 늘어나는 걸 보면 꼭 힘들어서 만은 아닌 것 같다. 살 만해지니 취미로는 해도 고된 훈련을 하려는 프로 선수가 줄어든 탓인 것 같다.
202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