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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문화는 위대하다
오형근
불교와의 최초인연
나의 인생과 불교라는 주제는 책 한권을 쓸 주제라고 생각된다. 일생을 불교와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는 어려서 유교가정에 태어나서 유교를 숭상하는 교육을 받았다. 아버님은 한문을 잘 아셨기 때문에 삼강오륜을 가르쳐 주시고, 한문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서당에도 다니게 하여 한문을 배우고 훈장님에게 유교예법을 배우도록 하셨다. 이와 같이 어려서는 불교와는 다른 교육을 받아왔으나 그러나 흔히 유교문화는 외부의 사회문화를 지배하였고 불교문화는 내부의 정신문화를 지배하였다는 뜻으로 외유내불이라고 하듯이 나의 집도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산에 놀러 갔는데 그 산에 암자가 있었다. 친구 중 한 사람이 법당에 있는 축원문을 펼치면서 너의 이름도 여기 있다고 하였다. 나는 절에 와 본 것도 처음인데, 축원문에 이름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 친구 말은 어머님께서 불공을 드리려 와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바로 그 축원문을 뒤져 보았으나, 내 이름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님께서 나와 가정을 위하여 불공을 드리셨구나 하면서 어머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그 절 주지스님과 먼 친척이어서 절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친구는 또 이절에서는 한 달에 쌀 한 말만 갔고 오면 주지스님한테서 한 달간 한문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즉시 친구들을 설득하여 방학 때마다 석 달간 한문을 배운 적이 있다. 그리고 주지스님 권유로 아침과 저녁에 예불에 참석도 하였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도록 한 최초의 인연이었다.
출가와 경전공부
그 후, 나는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결정적인 인연을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서울에서 피난 온 여성불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보살님은 내가 한문책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총각은 절에 가서 한문도 배우고 수행도 할 수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한문을 배운다는 말씀에 곧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 절 주지스님은 학자가 아니어서 염불만 가르쳐 주셨다. 서당에서 한자를 외우는 버릇이 있어서 반야심경 등 외우라는 문장은 쉽게 외웠다. 그러나 뜻을 모르고 외우기만 하니 답답하기만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하산하려고 하였으나 그 절 경치가 너무 좋아서 떠나기가 싫어졌다.
주지스님은 가끔 출가하라고 하셨는데, 하루는 법당의 불상 앞에 앉혀놓고 부처님 앞에서 거짓말 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출가하지 않으려면 내일 당장 하산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때, 속마음으로 “부처님 용서하세요, 이번 한 번만 거짓말을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출가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에 거짓말 한 것을 항상 참회하였고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다.
나는 뜻도 모르고 염불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고 생각하며 주지스님 모르게 경전을 가르치는 강원으로 갔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법사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내가 친견하며 배웠든 강주스님은 보광선사와 운허선사와 탄허선사와 관응선사 등이었다. 이들 강주님들은 당대의 석학들이었으며,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행운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산의 금정선원에서 전 종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이셨던 경산 큰스님을 모시고 선을 수행하였으며, 범어사에서 만난 덕암스님과 도반이 되어 수해안 일들은 나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나는 금정선원에 있을 때, 김동화 선생님이 저술하신 불교학개론을 사서 보았다.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산에 올라가서 마치 웅변연습 하듯이 큰 소리를 내며 외웠다. 그 때의 학습은 교리관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부터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김동화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김동화 선생의 가르침과 유식학 공부
나는 동국대 기숙사에 입사하여 사생장도 해보고 법사칭호도 얻었다. 법사칭호는 사생들 모임에서 발표한 귀에 하였는데, 발표 후 사생장들 중에서 법사라고 칭하기 시작하면서 본명보다도 오법사가 나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는 승려출신 학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타에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3학년 때, 김동화 선생님의 유식학 강의가 너무 훌륭하여 당돌하게 유식학 한문원전을 단독으로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집으로 와서 배우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종암동 전차 종점 옆, 아담한 기와집에서 매주 한 번 씩, 일 년간 원전을 강의해주신 스승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선생님의 원고를 교정보아 드리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주 질문하여 가르침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선생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책을 많이 저술하셨기 때문에 교정보아 드리는 시간은 많이 빼앗겼지만, 그 이상의 대가는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등사판으로 인쇄된 책을 대할 때마다 선생님의 모습이 그 책에서 보이는 것 같다. 박사과정에 있었을 때, 선생님께 교법사에 응시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학자가 될 사람은 배고픔도 참을 줄 알아야 하며, 허리띠를 졸라 맬 줄도 알아야 한다고 지도해 주셨다. 이와 같은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한 눈 팔지 않고 논문 한 편이라도 더 쓰게 되었다고 회상해 본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급히 부르시더니 유식학 강의를 대강하라고 하시면서 이 젊은 선생이 강의를 나보다 더 잘 할 터이니 열심히 들으라고 하시고 밖으로 나가셨다. 이렇게 전강을 받은 나는 유식학을 연구하여 불교학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학생활동과 불교운동
나는 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대승불교를 배우면서 이타행을 하는 법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부시간을 빼앗기는 학생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내에서는 재건학생회의 종교부를 맡아 교내 학생포교를 하였고 교외에서는 한국대학생종교학회를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종교학회란 동대 불교학과, 서울대 종교학과, 성균관대 유교학과,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연세대 신학과 등의 학생들이 모여 한국대학생종교학회를 만든 것을 말한다. 이때, 나는 회장을 맡고 이화여대생이 총무를 맡아 종교적 견해차이가 있음에도 무사히 일 년간 임무를 마쳤다. 총무가 많이 도와준 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때 우리는 미래의 종교문화와 한국의 정신문화를 우리 손으로 발전시키자는 다짐도 하였다. 학생 시절의 순수하고 소박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때 회원들 중에는 교수가 되어 종교학회를 중흥하는 역할도 하였다.
다음으로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창립하는데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했던 일이 새롭게 떠오른다. 이는 한국불교의 일대사라 할 수 있는 불교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단체 졸업동문단체인 학사불교회회장을 맡으면서 2년간 열심히 뛰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연합회 간사장으로서 수많은 전국 대학생들을 인솔하고 수련대회를 주관하는 등, 불교부흥을 꿈꾸었다. 그 후 나는 대학원생으로서 공군사관학교의 불자생도들에게 불교특강을 5년간 하였다. 이때 행원스님과 이한상 거사님이 주최한 달마회와 인연을 맺고 사관생들의 사기를 돋는데 큰 힘이 되었다.
사관학교 정문에서 헌병들의 검열을 받으며 입교했던 일, 그리고 기독교와 천주교에는 군목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와 행사를 가졌지만, 불교는 강의실에서 법회를 하는 시절이었다. 그 후, 군승제도가 생기면서 국가가 인정한 군승들에게 포교임무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조교수 시절에는 대불련 출신 교수들이 교수불자회를 만들자고 해서 발기인이 되어 학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 불교단체의 창립에 참여한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었고 나의 인생을 가장 값있게 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60년대는 불교단체가 많이 생겼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 시절에는 이한상 거사님이 봉은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삼보법회를 가졌었는데, 이 법회를 발전시킬 방향에 대하여 발표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시내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자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채택되어 세운상가내의 풍전상가를 준공하기도 전에 사무실을 법회장소로 옮겼다. 이때 백성욱 박사님을 법사로 모시고 시내의 제1회 법회를 성대하게 열었던 것이 신도단체의 효시였던 것이다. 당시 대기업을 운영한 이한상 거사님께서 발원하여 종립학교연합회를 만들고 교법사제도를 만들고 불교교과서도 만드는 비용을 모두 부담하셨다. 거사님은 보살의 화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불교발전에 기여하셨다. 그때 나는 잠시 연합회의 간사 업무를 맡으면서 봉은사에서 김동화 박사님을 연사로 모식 수련회를 가졌던 일들이 생각난다.
학문연구와 교수활동
나는 학생 신분임에도 불교를 포교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불법에 귀의하여 법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제 교수로 있으면서 활동했던 일들을 생각이 떠오르는 데로 몇 가지 적어보기로 한다.
학부시절에 백성욱 총장님이 대강당에서 강연한 말씀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백 박사님은 우리 대학은 앞으로 세계적인 대학이 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불교대학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불교대학에는 불교학과와 철학과가 있는데 동서철학을 함께 연구하여 세계 제일의 철학자가 나올 수 있는 대학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에 감동하여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당시는 철학과가 불교대학 내에 있어서 철학 강의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철학과가 문리대학으로 옮겨가 버렸다. 이러한 학사행정은 학문발전을 고려하지 못한 행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불교학과장으로 있을 때, 불교이념을 올바로 실현하려면 불교전공자가 총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불교과동문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른바 느티나무집에서 발기회를 열어 동문회를 만들었다. 당시는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 대학이 매우 소란하였다. 나는 교수모임의 대의원회 의장으로 활동도 해 보았고 교수회장이 사퇴하여 회장서리도 겸하며 활동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활동은 교수들과 학생들의 불평불만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이때에 대학의 건학이념의 교육을 좀 더 강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불교대학장으로 있을 때, 재단 감사 한분과 사무국장으로부터 오학장을 총장으로 정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교수활동을 통하여 학교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려고 한 때라 잘 해보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이튿날 이사회에서 없던 일로 했다는 연락을 받은 일이 있다. 큰 불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 그 후 나는 총장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말았다.
나는 학생처에서 맡고 있던 군승업무를 불교대학에 넘겨달라고 요청하여 인수받은 적이 있다. 그 목적은 장학금을 마련하여 군승지망생을 처음부터 장학생으로 뽑아 학비 걱정 없이 공부를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군승으로 입대하여 다른 군목들보다도 뛰어난 설교와 활동으로 군불자를 많이 확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학장으로 있을 때, 성균관대학의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주간과 야간에서 강의를 할 때, 야간대학원 이름이 유학대학원이었다. 나는 유학대학원장에게 언제부터 유학대학원이 생겼느냐라는 질문을 하여 설립취지를 들었다. 그 이튿날 나는 기획실장에게 전화하여 불교대학원의 신설 서류를 낼 터이니,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 기획실장은 충원계회 업무는 모두 끝났으니 불가능하다는 답이었다. 나는 그러면 총장님한테 건의하겠다고 하면서 줄기차게 설득하여 3일 이내에 서류를 제출해 달라는 답을 받았다. 원칙은 불교대 교수회를 열어 협의를 거쳐야 하는데 교수회를 열면 여러 가지 토론하다가 3일 이내에 제출하지 못할까 염려가 되었다. 누가 보아도 좋은 일이니 혼자서 서류를 준비하고 교무주임이 정리하여 서류를 제출하였다.
나는 학과설정에서 불교학과 불교사학을 정하고 특별히 불교복지학과를 정했다. 여기서 불교복지학과를 설정한 것은 불교계가 복지운동을 하는 불자들에게 복지 자격증을 주어서 활동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해 운 좋게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혹자는 불교대학원에 누가 오겠는가의 반대말도 많았지만 학생모집 결과 뜻 밖에도 많은 학생들이 와주었다. 일반교수가 자신들이 벌어서 영세대학과 영세학과를 먹여 살린다는 농담을 가끔 들었는데 불교대학원이 생긴 뒤에는 그런 말은 없어져 버렸다.
나는 불교대학원 복지과 학생들을 실습시키기 위해서 중구청에서 짓는 약수동 전철역 근처에 있는 복지관을 인수하려고 하였다. 재단 이사장 이름으로 신청하였는데, 신청금 일억 오천만 원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중구청 사회과장이 틀림없이 동국대가 인수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다음날에는 천주교가 인수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신분을 알 수 없는 동국대 동문이 전화로 방해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거의 일백억대의 빌딩인데 그 건물은 멋진 건물이었다.
그 후 나는 불교의 예술을 부흥시키려면 불교대학원에 불교예술학과를 신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학교의 연극학과 등이 유명하니까 일반예술학과와 함께 예술대학원을 신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연극학과과 김흥우 교수의 도움을 받아 예술대학원의 서류를 제출하였다. 그때, 운 좋게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게 되었다.
나는 불교학과 동문인 천태종의 윤덕산 스님이 천태종 발전에 조언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절 안에 불교대학을 신설하여 교육사업을 하라고 조언했다. 그때, 신촌 성종사의 땅굴법당에서 금강대학을 열고 첫 강의를 해준 일이 있었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지금의 금강대학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학회활동과 논문발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의 인생은 불교를 위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경야독이라고 하듯이 잠을 덜자고 연구시간을 보충하였다. 교수로서 학문 활동을 회고해 보면 불교학회의 학술이사로 활동했고 한국종교학회에서도 학술이사를 맡아 한국철학회가 발간한 한국철학연구 제1집에 신라 유식학과 관계되는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유식학을 알렸고, 가톨릭 대학의 논문집에는 우주는 모두 생명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발표들은 철학자들과 교류가 되어 한국철학회에서 나를 대한민국학술원의 회원으로 추천해 준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불교 몫의 회원모집이었는데 불교를 좀 공부한 목사교수를 회원으로 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불만이었다. 나는 일본의 대정대학과 용곡대학 등의 학술회에서 학술발표를 하였고 중국의 북경대학과 현장학회 등에서 학술발표를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 밖에서 학자들의 발표를 보면 거의 자국의 불교학을 알리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것을 본 나는 한국불교의 진면목을 알리는 논문을 주로 발표하였다. 원측법사(613~696)와 원효대사(617~686)의 불교사상은 세계의 정신문화를 선도할 수 있다. 이미 옛적부터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원측법사와 원효대사의 사상을 연구해왔고 지금도 연구하고 있음을 학술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원효선으로 돌아가자
나는 명예교수가 된 후 작은 연구실을 마련하고 원측법사와 원효대사의 불교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여기서 결론을 얻은 것은 한국불교는 이분들의 사상을 본받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원효의 선사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해본 결과 중국과 일본의 불교와는 달리 독특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원효대사의 선사상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본성은 심원을 뜻하고 진여심을 뜻한다. 선을 수행하며 모든 번뇌망상을 정화하면 곧, 심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곧 견성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원효선은 진여삼매와 금강삼매를 뜻하며 이 선사상은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원효대사의 선사상은 일미관행을 말한다. 일미는 둘이 아닌 하나의 진여를 뜻하며, 일미를 마음의 지혜로 관찰하는 수행을 일미관행이라고 한다. 원효대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결가부좌와 구종심주의 선법을 설명하고 있다. 견성과 성불은 이와 같은 지와 관의 선정수행해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선법을 수행하는 분을 신라시대에는 유가사라고 하였다. 일연선사는 삼국유사에서 유가사를 선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원효대사의 선사상은 인도의 대승선을 말하며 화두는 곧 마음이 접촉하는 대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혜와 경계가 둘이 아닌 것을 견성이라 하였다. 마음이 접촉하는 대상을 화두라고 한 것은 마음은 안으로는 마음을 접촉하고 밖으로는 자연을 접촉하여 그 진리를 관찰하여 깨닫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있는 곳에서 모든 것들을 접촉하면서 살고 있다. 접촉의 대상이 곧 진리이며, 진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원효선은 현대인의 삶과 직결되는 선이며 이러한 선으로 말미암아 각자가 하는 일에 성공을 촉진하는 정신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경이 모두 화두가 되는 것이며 화두와 하나가 되는 것을 심일경성이라고 한다. 즉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일미관행이라고 한다.
요즘 현대생활에 알맞은 대중선 또는 생활선을 찾는 분이 많은데 바로 원효선이 대중선이요, 생활선이며 불국토를 창조할 수 있는 선인 것이다. 원효선은 간화선과는 다른 선이며 오로지 한국선이다.
둘째는 선교불이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본래 선과 교를 분리하지 않았다. 교리에는 선사상이 담겨있고 그 선사상을 알려면 교리를 공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대승불교와는 달리 중국의 선사들은 교종과 선종을 차별화하기 위하여 교보다 선이 수승하다고 하였다. 이는 곧 진리는 평등하고 일여라는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에 선이 교보다 수승하다는 사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혜잠선사와 같은 분은 선과 교는 둘이 아닌데 선만 수승하다는 주앙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 교가와 선가라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는 중국선종의 영향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교와 선을 차별화하려는 선가의 노력이 지나치면서 능가경에 나오는 불설일자라는 문구도 부처님은 한 글자도 설하지 않으셨다고 해설한다. 그러나 불설일자의 근원을 살펴보니까 부처님은 망상이나 망념으로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뜻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성불한 후부터 열반하실 때까지 45년 동안 항상 삼매 속에서 설법을 하신 것이고 망념과 망상 그리고 잡념이 일어난 마음에서는 한 자도 설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나는 학장으로 있을 때, 북경대학의 원로교수인 계선림교수의 초청을 받고 학술발표할 때, 불립문자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그때 나는 선불교에서 불립문자 뜻을 마치 달마대사가 문자를 부정하는 것처럼 해설하고 있는데 이런 해석은 불교발전에 큰 장애가 되는 해설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때 발표한 논문은 남경대학의 선학연구 제2집에 싣자고 해서 허락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원효대사는 중국선과는 달리 인도의 대승선을 잘 정리하여 신라에 토착화 하였으며 이 선사상이 대각국사와 지눌선사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나 중국선의 세력에 밀려버리고 말았다. 현대불교는 원효불교를 부활시켜서 대중들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원효는 불교경전을 모두 이해하면 일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일미의 경지에 있으면 대중들과 다투지 않는 화쟁의 사회를 이룰 수가 있다고 하였다.
나의 인생과 불교라는 제목으로 집필함에 있어서 나의 과거사를 모두 털어 놓았는데 쓰고 보니 너무 지루한 것 같다. 불교와 더불어 살아온 나의 결론은 한국불교는 원효대사의 교학과 선사상을 널리 펴서 한국의 불교문화가 위대하고 한국의 정신문화가 수승하다는 것을 세계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 선조들의 사상 즉 원효대사의 교학과 선사상이 훌륭하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먼저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이 한글번역을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 불사를 진생하고 있다. 사부대중이 이 불사에 동참하시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오형근(吳亨根) 1964년 불교과 졸업. 법호는 법성(法性). 혜진스님 문하에서 득도하여 탄허스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후 동국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불교대학장 및 불교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 및 역서로는 유식사상과 대승보살도, 유식학입문, 대승기신론소병별기, 불교와 자연과학 등이 있으며, ‘십대논사 및 제가논사에 대한 소고’, ‘신라유식사상의 특성과 역사적 전개’, ‘영혼의 윤회와 해탈’ 등 유식학 관련 논문도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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