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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21년 2017년 8월 26일 남양주 봉인사의 담마야나 3개월 집중 수련자들께 새벽 법문입니다. 오늘 부처님 가르침에 삼장법의 경전에 속하고 오부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니터나 외다 상윳따 티라 나마까 숫따, 티라가 스님의 이름이에요. 나마까가 이름. 티라 스님의 이야기.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같이 사는 사회, 같이 사는 혼자 살 수 없는 중생이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가족으로 살고, 이웃으로 살고, 국민으로 살고, 그렇게 구성원으로 같이 사는데, 사람과 같이 사는데 대한 부처님의 이야기가 있어요.
한국말로 하면, ‘무소의 뿔’, 이런 말이 있잖아요. ‘무소의 뿔’. 인간은 사회적으로 혼자 사는 중생이 아니다, 이런 말이 있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에 ‘무소의 뿔’이라는 말이 있어요. 무소라는 게 뭔가 하고 한국말로 뭔가 찾아보니까. 코뿔소. 무소의 뿔 하니까 좀 듣기 좋은 것 같은데, 코뿔소 하니까 좀 웃기게 보이기도 해요. 그 무소가 되게 무서운 소잖아요. 뿔이 하나밖에 없어요. 코 자리에 뿔이 있어요. 하마처럼 몸통이 되게 크고 싸울 때도 무섭게 싸워요. 호랑이나 사자하고 싸워도 만만치 않아요. 이길 때도 있는 아주 무서운 소인데, 부처님은 그 뿔을 가지고 얘기하고 계세요. 보통 뿔은 두 개가 있잖아. 그 소만 뿔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도 중간에 있어.한때는 그렇게 그 뿔처럼 살아야 하는 때도 있다, 라는 의미로 부처님이 혼자 사는 것을 칭찬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돼. 혼자 사는 것을 칭찬하시지만, 혼자 사는 사람의 마음가짐, 어떤 마음으로 혼자 사느냐 이것이 중요해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해가 되게 중요해요. 말만 겉으로 보고 하면 안 돼요. 깊은 이해가 필요해요.
그럼 무소의 뿔처럼 지내라는 말을, 진짜 이해해서 들어보면 무슨 말씀이냐. 그것은 같이 어울릴만한 사람, 마땅한 사람이 없을 때 얘기지. 항상 절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덕 있는 자들이 없을 때는 무소의 뿔처럼 살라 얘기지. 그런데 무소의 뿔처럼 사는 사람의 자격이 사실은 아라한 정도는 되어야, 아라한 정도는 되어야 살 수 있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적으로 볼 때도 뭔가가 대단한 실력이 없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경우라면 뭔가 심리적으로 삐딱한 사람이 많아요. 혼자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외로워지고, 혼자 살다 보면 생각들도 많아지잖아. 다른 사람하고 있으면 얘기하고 뭐하고 어울리고 이런 일들이 있는데 혼자 살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지. 그게 올바른 생각이면 괜찮은데, 틀린 생각이면 틀린 생각이 삐딱한 채로 오래 굳어지는 것이지.그래서 우울증 되고 디프레스되고, 사견이 생기고, 또 혼자 살다가 성격이 되게 날카로워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것 보면서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어떤 사람들은 어울려서 살다가 상처 너무 받아서 혼자 살긴 사는데, 정상적으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좀 비정상적으로 혼자 살게 되는 것, 그런 것도 안 좋은 것이지. 항상 지혜롭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서,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할 때 어떤 조건을 갖고 말하느냐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그 조건에 맞아야 그렇게 따라할 수 있는 거지. 그 조건에 맞지 않으면 따라하는 것이 아니지.
우리 수행자들이 너무 친구하고 어울리는 것도 맞지 않아요. 너무 친구 좋아하고, 말만 하고 다니고, 혼자 수행하지 못하고 그것도 문제에요. 그것도 안 맞는 것이지. 또 같이 사니까 문제가 많다, 그것도 문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극단이라는 것이 지혜롭지 못하면 양쪽 극단으로 가게 돼 있어요. 저쪽 끝에 갔다가, 이쪽 끝에 갔다가, 양쪽 끝 어디도 가봤자 소용없는 것이지. 저쪽 끝에 가도 틀리기 때문에 내 수행에 도움이 안 되고. 이쪽 끝에 가도 도움이 안 되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없으니까. 혼자 살려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있어야 돼. 부처님이 무소의 뿔을 이야기 할 때에는 대부분 첫째가 이런 거예요. 나보다 계정혜가 높은 사람. 그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을 때. 또 같이 어울리면 오히려 내가 망가질 것 같을 때, 그럴 때는 혼자 살아야지.
그러니 결국 무슨 얘기에요? 내가 의지할 만한, 나보다 계정혜가 높은 사람을 찾아서 의지하면서 살아야지. 부처님께서도 부처가 되고 나서는 세상에 의지 없이 사는 것이 안 좋다 이런 거지. 부처님도 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다, 내가 으뜸이니까, 위 없는 분이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서 최고이니까, 자기가 의지할 만한, 기댈 만한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부처님이 내가 깨달은 법이 되게 우수하다.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해탈. 이 법이 우수하기 때문에 이 법을 나의 스승으로 삼겠다, 이런 말을 했어요. 이해하기 어렵지.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법을 의지로 삼느냐. 우리가 예불할 때, 붓땅 사라낭 갓차미, 부처님을 의지처로 살아가겠습니다. 담망 사라낭 갓차미, 법을 의지처로 살아가겠습니다. 부처님도 그런 의미에요. 부처님은 담망 사라낭 갓차미 한다, 그런 의미에요. 나는 법을 스승으로 삼겠다. 추상적이지만, 법이 나의 의지처다, 법이 나의 스승이다, 그렇게 살겠다고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요.
부처조차도 의지를 찾고, 스승을 모시고 사는데, 우리 제자들도 스승을 모시고 살아라 이런 말이야. 스승을 모시고 의지를 갖고 살아야 되는 것이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가 열악하기 때문에 그렇지. 너무 우리가 열악하고 너무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의지를 갖고 살아라 그런 의미이지.
그런 말을 하다가도 또 무소의 뿔을 이야기하면 그러면 부처님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다른 거지. 어떤 상태는 혼자 사는 게 낫고, 어떤 상태는 혼자 사는 것이 사실은 맞지 않다, 이런 거지. 한 번씩 젊은이들이 스님한테 와서 이 생에 얼마나 실망했는가 이야기 하면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해요. 그럴 때 스님 항상 하는 말은 출가하면 해, 출가 안하면 결혼 안하는 것이 안 맞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람 수준을 보니까 그렇게 대단한 수준이 아니잖아. 그러면 뻔히 다음에는 이상한 성격으로 살 건데, 그러면 차라리 결혼하는 것이 낫다 이거지.
결혼하면 차차 성숙해지는 것이 있지. 결혼하면 둘이 책임감도 있고, 둘이 좋은 점 안 좋은 점 맞추면서 살게 되고, 사회성도 좋아지고 이런 거죠. 여러 사람하고는 안 맞춰도, 남편하고 부인하고 맞춰야 하고 그러면서 차차 맞춰가야 하지. 결혼하는 것도 고통이지만,꼭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살아가면서 좋은 도반이 있는가, 좋은 도반이 있으면 결혼 안 해도 돼. 뭔가가 나하고 취미나 뭐가 맞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의지하고 살 수 있다, 그러면 괜찮은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보면. 용기가 없거나, 아니면 혼자 살면서도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정신적으로 이상해지지. 나이가 많아서 더 좋은 길을 찾으면 괜찮은데, 좋은 길을 못 찾으면 진짜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심리적으로 무너져.
그런데 여기는 이 스님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런 것이 있는 거지. 부처님이 어떤 때는 무소의 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어떤 때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의 수준이 달라서 그렇다는 거야.
테라 나마까 숫따, 이야기는 어떤 거냐. 부처님께서 라자그라하에 웰루와나라는 대나무가 많이 있는 숲속, 빔비사라 왕이 보시한 절에 계실 때, 어떤 비구가, 테라라는 법명의 비구가 이까 위하리지와 호띠 위하라사짜 완나와디, 유명해 그 스님이. 에까 위하리, 혼자 산다. 스님들과 어울리지 않아. 자기 혼자 살아. 에까가 하나, 위하리는 사는 자. 에까 위하리. 혼자 살고, 에까 위하라사짜 완나와디,혼자 삶에 대한 공덕의 대단함을 많이 칭찬하면서, 대단하다 하면서 살아. 그 소문이 퍼졌어요. 아, 테라 스님은 혼자 계시고, 혼자 삶의 공덕을 많이 칭찬하다고 설법하면서 다닌다. 그렇게 이름이,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어느 날 스님들이 모여서 부처님을 친견했을 때 부처님께 그 이야기를 했어요. 테라 스님이 항상 혼자 사십니다. 혼자 살고, 또 혼자 사는 것을 좋다하고 많이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러면 테라 스님에게 내가 불렀다고 가서 말해라. 부처님이 부르신다. 해서 그래서 가서 테라 스님을 모시러 갔어요. 부처님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 해서 테라 스님이 부처님께 왔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물어봤어요. 테라 스님, 스님이 항상 혼자 지낸다고 들었어요. 삿짜 띠라. 맞는냐?예, 부처님. 맞습니다. 제가 혼자 삽니다. 그리고 혼자 사는데 대한 많이 칭찬하신다고 들었어요. 맞습니까. 하니까. 네 그렇습니다.부처님.
부처님께서, 에까 위하리 에까 위하라삿짜 와나와디, 그래, 그런 스님 있지요. 그런 스님이 있지요, 하는데 이 말은 테라 스님은 사실 그런 스님 아니다, 이런 말이에요. 맞아, 혼자 살고 혼자 사는 것이 칭찬할 만한 스님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없지는 않지요. 있어요.부처님은 직접적으로는 말 안 해요. 조금 돌려서 말해요. 그런 스님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있지, 없지 않아, 그렇지만 그런 스님은 어떤 스님이냐 하면, 부처님 말씀에 아라한 수준을 말하고 있어요.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갓탕자 테라 에까 위타네나 빠리쁘나 호띠,혼자 산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칭찬을 한다, 그런 스님이 없지는 않아, 있는데, 의미가 너무 깊어요. 의미가 깊어. 뜻이 엄청나, 의미가 넓어요. 테라 스님이 생각하고 있는 정도는 아니야.
테라 스님은 혼자 어떻게 사느냐, 부처님이 물어보니까. 처음에 탁발할 때도 혼자 가요, 다른 스님이랑 같이 안가요. 갔다 올 때도 혼자 와요. 절에 혼자 살아요, 다른 스님이랑 어울리지 않아요. 테라 스님이 혼자 산다는 것은 그 정도밖에 모르는 거야.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혼자 산다는 것이 항상 하던 이야기지만, 세 가지이다. 해 봐요. 까야 위위까. 몸으로 혼자 사는 것. 까야, 몸이, 위위까, 조용하고 고요하고, 몸이 조용하다는 것은 몸으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래서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같이 탁발할 때도 같이 이야기 하면서 가고, 또 신도집에 가서 이야기하다가 차 마시고 후식도 먹고 같이 절에 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이런 것은 몸으로 섞이는 거지. 그러면 몸으로 섞이지 않는다, 까야 위위까, 그건 맞아요. 테라 스님은 그런 몸으로 섞이지 않은 것을 대단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스님들이 뭔가 아닌 것 같아서 부처님한테 가서 말한 거지. 이 스님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부처님한테 가서 알려드리고 부처님께서도 테라 스님을 아시니까 이렇게 불러서 설법을 해주고 있는 거지. 뭔가 잘 못 알고 있다.
그러면 혼자 산다고 할 때, 이 스님은 어울리지 않고 자기 혼자 탁발하고 하지, 혼자 먹고, 절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대단하다고 그렇게 알고 말하고 있는 거지. 부처님이 까야 위위까라는 것이 몸으로 섞이지 않는 것.
두 번째는 해봐요. 찟따 위위까. 마음으로 섞이지 않는 것.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으로 섞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 생각했다가 저 사람 생각했다가, 그 사람 마음속에 넣었다가 저 사람 마음속에 넣었다가, 그 사람 마음속에 싫었다가 저 사람 마음속에 싫었다가 하면 몸은 혼자이지만 마음은 계속 섞이고 있는 거지. 대부분의 혼자 산다는 사람들이 그렇지. 몸은 혼자 살 수 있지만 마음은 혼자 살 수 없잖아. 마음으로 사마타 위빠사나로 어디 집중 돼 있거나 어디 내 마음을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면 정말 혼자 산다고 말 할 수 있는데, 테라 스님이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부처님이 불러서 말하고 있는 거지. 찟따 위위까가 돼야 진짜 혼자 있는 거지, 몸은 섞이고 있지 않지만 마음은 계속 섞이고 엮이고 있으면 그것이 진짜 혼자 사는 것 아니지. 그것을 모르고 혼자 사는 것 대단하다고 말하고 있으면 안 맞다 이런 거지. 우리도 혼자 산다고 말할 때,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혼자 사는 거냐,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울리지 않는 거냐, 그 마음이 중요해요. 그 마음가짐이 틀렸으면 올바른 혼자 삶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해요. 나한테 도움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하고 같이 어울려야 하지. 부처님이 그 스님한테 혼자 탁발하고, 혼자 먹고, 혼자 살더라도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 하고 싶어서 혼자 살고 혼자 사는 것에 대한 공덕을 말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아요,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간단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 진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내가 이야기해줄게. 그러면서 부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냐. 야 아띠따 딴빠히나 딴하 딴따가나. 이렇게 살아야, 이렇게 돼야 혼자 살고, 혼자 지내고, 혼자 삶에 뭔가가 대단하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이런 말이지.
야 아디따 딴빠히나, 과거의 어떤 것들은 다 버렸어요. 다 버렸다는 것이 과거의 추억이 쉽게 말하면 지워버리는 듯이 다 없어졌어요.과거는 이미 끝났다. Past has gone. 그런데 혼자 살아요. 그런데 과거에 놀았던 것 생각하면서 욕심 부리고 있고, 또 싫었던 것 생각하면서 화 내고 있고, 잘 했던 것 생각하면서 자만 부리고 있고, 이것저것 생각해서 질투하고 시기하고 벌써 지나간 일들인데, 벌써 지났어, 이미 끝났어. 그 일들 가지고 탐진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혼자 살아봤자 아무 소용없다, 이런 거에요. 혼자 살아봤자 외로운 것뿐이지. 혼자 살아봤자 왕따가 된 것뿐이지. 얻어지는 것 뭐가 있느냐. 이런 의미지. 혼자 산다고 할 때 부처님은 야 아디땅 딴 빠히나, 야 어떤 디땅 과거는 있었다. 땅, 빠히나, 벌써 버렸어. 과거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라한이에요. 과거를 완전 버렸다면 아라한이야.
근데, 위빠사나 수행자도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하고 있을 때 과거를, 마음이 두 가지는 할 수 없잖아. 현재에 있는 물질 정신, 내 몸과 마음에 딱 집중하면서 몸에 있는 사실 그대로를 관하고 있어. 일 초만 관하고 있어도 일초도 과거로 가지 못해요. 60초 1분 관하고 있으면 60초 1분은 내가 과거로 가지 않아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나는 벌써 과거에서 벗어나고 있어요. 과거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에서 영혼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혼이 빠진 것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과거에 매여 있어서 그렇지.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매여 있음으로 그 마음은 힘이 벌써 없어졌어요. 시체같이 살고 있는 거지. 벌써 마음의 힘들이, unlimited power, 리미트 할 수 없는 마음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진짜 어리석기 때문에 그 마음의 힘을 과거의 묘지에 묻혀 있는 듯이 내 마음이 묻혀 있어봐요. 그렇게 손해보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제일 가치가 있는 것이 마음밖에 없어요. 제일 가치로운 것이 마음이에요. 이 마음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모든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데, 그 마음을 묘지에 묻혀서 시체같이 살고 있는 사람만큼 손해보고 있는 사람은 없는 거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아요. 대부분의 사람이 과거에 마음이 묻혀져 살아요. 진짜 손해보는 거지. 야 아디따 딴 빠히나, 야 아나가따 딴 빠띠네사타, 빠띠네사타, 네사타는 버리는 거에요. 놓아버리는 것. 빠띠는 다시를 말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버리는 거에요. 깔끔하게 버리는 것. 버리기는 버리는데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버림. 손에 끈으로 묶어 놓으면서 버리는 것같이, 버리기는 버리는데 끈으로 묶어놓으니까 다시 잡아당기면 다시 손에 들어와. 사람들이 버리는 것이 그런 버림이지. 네사타, 빠띠네사타, 완전히 버렸어.
야 아나가따, 야 어떤 아나가따 미래가 있다. 딴 빠띠네사타 거기에 대한 버렸다라는 것이 미래에 대한 바람이 없다. 미래에 대한 뭔가가 욕심 내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면 혼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뭐하고 있어요. 미래에 욕심내고 있는 거지. 내일 어떻게 되고 싶다, 모레에 어떻게 되고 싶다. 내년에는 어떻게 되고 싶다, 그래서 미래에 많이 힘을 쓰고 있는 거지. 빠띠 네사타,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내 마음을 보내고 있으니까 현재에는 혼이 빠져 있는 시체처럼 살고 있는 거지. 과거에 묻혀 있거나 미래에 퍼져 있거나, 현재에는 마음이 하나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요. 그런 사람은 혼자 살아봤자 소용없다 이거에요. 혼자 살아봤자 소용없어. 혼자 살 때는 어떻게 살아야 혼자 사는 거냐, 부처님이 지금대로 야 아디따 딴 빠히나, 야 아나가따 딴 빠띠네사타, 과거도 버리고 미래도 다 놓아 버리고, 빠쮸 빠네숫짜 아따가와 빠띠라베수 찬다라고 수빠띠위니또 이미 끝난 과거를 버릴 수 있다 해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이 가지 않다 해도, 현재 아빠바와 빠띠라베수, 아빠바와라는 것은 현재 이 몸이 우리의 이 몸이, 지금 현재의 몸과 마음이라는 우리의 존재감에 대해서도 찬다라고 수빠띠위니또, 찬다 라가루 수빠띠 위니따 잘 청소하는 듯이 깨끗이 정리해서 그런 사람이 요 고티라 에까 위하리나 빠리쁘나 호띠 이런 사람이야말로 혼자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최상의 의미를 갖고 얘기할 때 그렇게 말하지. 아라한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이렇게 되어 버렸잖아. 그렇지는 않아요. 최상을 가지고 말하지만 밑으로 가면 아나함도 그렇게 해도 되지. 아나함도 멸진정까지 할 수 있는데, 멸진정은 말하자면 살아있으면서 해탈을 가지고 있는 거니까. 그것도 그냥 과선정의 해탈을 가지는 사람이 있고, 과선정의 해탈을 가지는 사람은 마음은 살아 있어요. 과선정의 마음이 살아있어요. 그런데 멸진정에 들어갈 때는 마음까지 죽었어요. 한동안은 죽었어요. 마음이. 마음이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 되요? 마음이 생기면 찌리짜 룻빠라는 물질까지 죽은 거야. 그래서 업과 업생물질만 남아 있는 거야. 업, 업생물질. 그건 니로다 사마빳띠를 말해요. 니로다 사마빳띠, 니로다가 해탈을 말해요. 니로다 사마빳띠는 해탈을 보고 살고 있는 거야. 그때 마음이 죽었기 때문에 마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물질도 죽었어요.
그래서 쉽게 말하면, 오분의 사 정도는 죽었어요. 오분의 일정도만 살아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업과 업의 과보만 남아있는 거야. 아나함이 과선정으로 해탈을 보고 있을 때는 마음이 있어요. 과선정 마음으로 인해서 그때 마음에 있는 찌릿짜 루빠라는 마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물질들이 온몸에 퍼져 있는 거야. 그래서 해탈을 보는 것도 달라요. 아나함이라는 분이 멸진정까지 갈 수 있으니까,그때 볼 때는 사실 아라한과 차이가 없죠. 그렇게 볼 때는 오가타 네야로 아라한을 말하지만, 아나함도 들어가요. 마찬가지로 사다함,수다원도 과선정 들어갈 수 있어요. 과선정 들어가고 있으면 아라한과 차이가 없어요. 그때 번뇌가 없어요. 그러면 또 한 단계 내려가면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상카루뻬까로 가고 있는 사람들, 상카루뻬까는 위빠사나 지혜에요. 깨닫지 않았으면. 깨닫고 나서도 상카루뻬까 또 있어요.
예를 들면 수다원 되기 전의 상카루뻬까는 깨닫기 전의 상카루뻬까죠. 수다원 되고 나서 수다원이 사다함 되려고 할 때, 그때 또 상카루뻬까 가야 해요. 그때 위빠사나를 다시 했다가, 또 상카루뻬까를 다시 가요. 그 상카루뻬까 힘이 꽉 차면 사다함의 도로 들어가지. 그 다음 사다함의 과선정 할 수 있어요. 사다함의 과선정 들어갈 때는 과마음이고 사다함이 아나함 되려고 하면 위빠사나 또 해야 해요. 또 해서 사다함의 위빠사나가 또 생겨요. 그러면 사다함의 위빠사나가 상카루뻬까로 들어갔다가 아나함으로 들어가는 거지.마찬가지로 아나함이 아라한 되려면 뭐 해야 해요? 또 위빠사나 해야 해요. 위빠사나로 생사 보는 네 번째 지혜를 다시 하는 거예요.그러면 여러분과 똑같이 네 번째 지혜에서 상카루뻬까로 가는 과정은 같이 가요. 갔다가 상카루뻬까에서 아라한이 되는 거지.
상카루뻬까가 여러 단계가 있지만, 일단, 상카루뻬까 마음에 가 있으면 아라한과 비슷해요. 번뇌가 안 일어나요. 번뇌가 아예 없는 듯해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듯해요. 그러면 상카루뻬까 지혜를 갖고 있을 때는 혼자 살 수 있어요. 충분해요. 그때가 아디따 과거를, 빠히나, 버리고 살 수 있어요. 아나가타 빠띠네사타, 미래를 욕심 안 부리고 살 수 있어요. 또 현재에도 찬다라가 소쁘띠 위니또 아주 평정, 보는 순간 벌써 닦았어요. 보는 것뿐으로 끝나요. 보는 것에서 뭔가 이어가는 것 없어요. 듣는 것뿐으로 끝나요. 냄새 맡는 것뿐으로 끝나요. 맛보는 것뿐으로 끝나요. 감촉 닿는 것뿐으로 끝나요. 마음은 생각하는 것뿐으로 끝나요. 뿐으로 할 수 있는 상카루뻬까가 있을 때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아요. 사띠를 놓치지 않아요.
여기서 오가타 네야를 아라한 수준으로 말하고 있지만, 밑에 보면 우디야베야, 네 번째 지혜까지만 잘 되고 있어도 돼요. 여러분들이 지금 법당 안에 사람이 스무 명 있다고 해도 혼자 산다고 할 수 있어요. 몸으로 섞이지 않고, 마음으로 물질, 정신을 알고 있고, 인과를 알고 있고, 무상고무아를 알고 있고, 생사를 알고 있으면, 몸도 섞이지 않고 마음도 섞이지 않고, 몸을 섞인다는 게 서로 이야기하고 있거나, 서로 놀고 있거나 하면 몸이 섞여 있는 거지. 앉아 있을 때, 수행할 때 몸이 섞이지 않고 혼자 가만히 앉아 있잖아. 마음도 찟따 위위까,
마지막으로 해봐요. 우바띠 위위까. 우바띠 위위까는 해탈을 말하는 거에요. 그것은 깨달은 자가 되야 하고, 과선정에 들어갈 때에나 우바띠 위위까가 있지. 과선정에 들어갈 때는 수행자의 마음이 아는 것이 해탈밖에 없어요.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내내 해탈을 보고 사는 거지.
위위까가 세 가지 있어요. 까야 위위까, 찟따 위위까, 우바띠 위위까가 있는데, 이 스님은 까야 위위까밖에 모르고 큰 소리 치고 있는 거지. 그래서 부처님이 얘기 해주고 있는 거지. 그것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혼자 산다는 것이, 에까 위하리라는 것이 의미가 깊어, 범위가 넓어, 그런 것을 알려고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사바비부 아비부 사바위도 수메다
산 꼭대기 올라간 사람이 산 밑이 다 보이는 듯이 모든 것이 지혜가 위에서 다 보는 것처럼 우리가 스카이뷰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을 말하는 거지. 그런 것이 아비부를 말하는 거지. 사바비부 아비부, 모든 것을 다 봤어요. 사바위두 모든 것을 다 알고, 수메다 좋은 지혜가 있는 자, 아라한을 말하고 있는 거지. 사베수 다메수 아누빨리따 모든 법에서, 모든 법이라는 것이 물질-정신, 즉 오온, 12처. 아누빨리따 하나도 묻히지 않는다, 묻히지 않는다는 것이, 같이 살아도 묻히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는데 연꽃이 진흙에서 피는 거지 그런데, 진흙이 묻지 않는 거지. 깨끗하게 나왔잖아. 진흙에서 나왔는데 깨끗해. 진흙이 더럽히지 못해. 그런 식으로 아라한이 되면 더러운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어도, 그 더러움이 아라한에게는 묻히지 않는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지. 세속에 살고 있지만 세속의 더러움이 부처님에게 묻히지 않는다.
사베수 다메수 아누빨리따 모든 것에서 아누빨리따 묻히지 못한다. 사반자하 모든 것을 버렸어요. 갖고 있어도 욕심이 없다면 버린 것이에요. 벌써 마음과 연결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갖고 있어도 욕심 업으면 자하 버린 거에요. 사반자나 따나카야 탐욕, 갈애가 없어졌어요. 위모따 완전히 perfect freedom 완전히 벗어나고 있어요. 위모따. 사반자나 따나카야 위모따 빠마하 에까 위하리 그런 사람을 에까 위하리 혼자 산다고 내가 여래가 말한다. 그래서 혼자 산다는 것이 잘 알고 본인의 수준을 잘 알고 혼자 살아야 한다. 열심히 자신의 수준을 진짜 혼자 살 수 있게끔 높이면서 에까 위하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부처님의 수행 팔정도 수행하여 에까 위하리가 되어 생로병사 삼세윤회 모든 고통 벗어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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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행자들이 너무 친구하고 어울리는 것도 맞지 않아요. 너무 친구 좋아하고, 말만 하고 다니고, 혼자 수행하지 못하고 그것도 문제에요. 그것도 안 맞는 것이지. 또 같이 사니까 문제가 많다, 그것도 문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극단이라는 것이 지혜롭지 못하면 양쪽 극단으로 가게 돼 있어요. 저쪽 끝에 갔다가, 이쪽 끝에 갔다가, 양쪽 끝 어디도 가봤자 소용없는 것이지. 저쪽 끝에 가도 틀리기 때문에 내 수행에 도움이 안 되고. 이쪽 끝에 가도 도움이 안 되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없으니까. 혼자 살려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있어야 돼. 부처님이 무소의 뿔을 이야기 할 때에는 대부분 첫째가 이런 거예요. 나보다 계정혜가 높은 사람.
베수 다메수 아누빨리따 모든 것에서 아누빨리따 묻히지 못한다. 사반자하 모든 것을 버렸어요. 갖고 있어도 욕심이 없다면 버린 것이에요. 벌써 마음과 연결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갖고 있어도 욕심 업으면 자하 버린 거에요. 사반자나 따나카야 탐욕, 갈애가 없어졌어요. 위모따 완전히 perfect freedom 완전히 벗어나고 있어요.
unlimited power, 리미트 할 수 없는 마음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진짜 어리석기 때문에 그 마음의 힘을 과거의 묘지에 묻혀 있는 듯이 내 마음이 묻혀 있어봐요. 그렇게 손해보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제일 가치가 있는 것이 마음밖에 없어요. 제일 가치로운 것이 마음이에요. 이 마음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모든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데, 그 마음을 묘지에 묻혀서 시체같이 살고 있는 사람만큼 손해보고 있는 사람은 없는 거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아요. 대부분의 사람이 과거에 마음이 묻혀져 살아요. 진짜 손해보는 거지.
예를 들면 수다원 되기 전의 상카루뻬까는 깨닫기 전의 상카루뻬까죠. 수다원 되고 나서 수다원이 사다함 되려고 할 때, 그때 또 상카루뻬까 가야 해요. 그때 위빠사나를 다시 했다가, 또 상카루뻬까를 다시 가요. 그 상카루뻬까 힘이 꽉 차면 사다함의 도로 들어가지. 그 다음 사다함의 과선정 할 수 있어요. 사다함의 과선정 들어갈 때는 과마음이고 사다함이 아나함 되려고 하면 위빠사나 또 해야 해요. 또 해서 사다함의 위빠사나가 또 생겨요.
그러면 사다함의 위빠사나가 상카루뻬까로 들어갔다가 아나함으로 들어가는 거지.마찬가지로 아나함이 아라한 되려면 뭐 해야 해요? 또 위빠사나 해야 해요.
과거는 이미 끝났다. Past has gone. 그런데 혼자 살아요. 그런데 과거에 놀았던 것 생각하면서 욕심 부리고 있고, 또 싫었던 것 생각하면서 화 내고 있고, 잘 했던 것 생각하면서 자만 부리고 있고, 이것저것 생각해서 질투하고 시기하고 벌써 지나간 일들인데, 벌써 지났어, 이미 끝났어.
그 일들 가지고 탐진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혼자 살아봤자 아무 소용없다, 이런 거에요. 혼자 살아봤자 외로운 것뿐이지. 혼자 살아봤자 왕따가 된 것뿐이지. 얻어지는 것 뭐가 있느냐. 이런 의미지. 혼자 산다고 할 때 부처님은 야 아디땅 딴 빠히나, 야 어떤 디땅 과거는 있었다. 땅, 빠히나, 벌써 버렸어. 과거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것은 아
아라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