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인간관-Ⅱ
인간은 무수한 공덕 갖춘 不空여래장의 ‘예비 붓다’
오염에서 벗어난 뒤엔 곧 맑은 성품 드러나
개인은 세계와 호흡…집단 무의식과도 연결
<사진설명>경북 경산시 자인면에 위치한 이곳은 원효 스님의 탄생성지로 추정된다.
원효가 마음이 있다고 할 때에는 대개 두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진여(眞如)한 마음인데, 이 마음은 본래부터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무수히 많은 성품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원효가 인간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불성이 있고 깨끗한 양심이 있고 물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원효는 끝없이 강조합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무수한 공덕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불공여래장으로 그것은 텅텅 비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아니라는 거죠.
또 하나는 생멸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가려져 있고, 성품이 나타나지 못하며 숨겨져 있다는 뜻을 간략하게 표시하기 위하여 공(空)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염된 것을 벗어나기만 하면 그 본래의 모습이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이것도 여래장이라고 부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비록 물결이 된다고 할지라도 끝내 물의 성품을 잃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하는 거죠. 이것은 숨어있는 여래장 즉 은복여래장(隱覆如來藏)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제 모습을 찾아 나타나면 바로 법신(法身)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의 바다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지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 마음은 거대한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가 인식작용을 할 때는 감각이라 할 수 있는 눈, 귀, 코, 혀, 느낌 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눈으로는 색을 인식하게 되고, 귀로는 소리를 인식하는 식이죠. 그런데 감각과 대상만 있다고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6식과 제7식과 제8식이 영향을 주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그냥 인식하는 아니라 본인의 깊은 식과 연결돼 있다는 겁니다.
그럼 제6식이 뭐냐. 이것은 의식(意識)의 세계인데 지각, 지성, 감정, 의지, 상상력 등 이런 것을 통틀어 6식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제7식인데 바로 요놈이 문제입니다. 흔히 마나식(末那識),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온갖 것을 계산하고 분별하는 놈입니다. 그러면서 철저히 ‘나’라는 에고가 중심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을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고,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고, 자기중심으로 해석합니다. 자아의식, 아집, 자기에 대한 구속, 자기견해에 대한 집착, 아만, 자기애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8식은 알라야식으로 장식(藏識)이라고도 하고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하는데 이 게 참 재미있습니다. 이 제8식은 일체의 종자를 보관하여 간직합니다. 제 얘기를 잠깐 말씀드리면 저는 어릴 때 소도 길러보았고 꼴도 베어보았고 나무도 해봤습니다. 어릴 시절 밤에 우두커니 별을 바라봤던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의 제 기억에 남아있는 것도 있고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기도 합니다. 또 아주 예전에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책에서 노인이 칠십 몇 번인가를 고기를 못 잡고 빼앗기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정확히 미끼를 끼워 넣으며 이렇게 해야 행운이 올 때 그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던 부분은 제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누구든 자기가 경험했던 것이나 지나온 날들이 기억 가능한 6식으로도 있겠지만 설령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제8식에 모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점심을 먹을 때 은행이 나왔는데 그 걸 먹으며 은행의 추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땅에 떨어진 얼마 후 뿌리를 뻗어서 물기를 빨아들였을 테고, 어느 날은 저 먼 아득한 남태평양에서 불어온 바람을 맞아 은행나무 잎이 크게 흔들리거나 떨어지기도 했을 거고, 어느 날은 매미나 까치가 와서 울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을 별을 보기도 했을 겁니다. 그게 은행이 갖고 있을 무의식의 세계일 것입니다. 또 우리가 먹은 명태 있지 않습니까. 그 명태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 전에 그 얼마나 바다를 헤엄쳐 다녔을 것이며, 또 그 바다에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먹었겠습니까.
그런 수많은 경험을 겪었을 명태라는 놈을 우리는 이 안에 섭취하는 것입니다. 무의식에는 우리와 우리 부모님들의 추억은 물론 아메바 시절부터 녹아있기 때문에 이 세계는 그야말로 거대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도 무의식에 녹아있고 남이 경험한 것도 이 안에 녹아있습니다. 은행의 추억과 명태의 과거가 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내 알라야식에 다 저장돼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화엄이고 연기이기 때문이죠.
개체는 세계와 호흡합니다. 이로 인해 개인은 집단무의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유식(唯識)으로 말하면, 공업(共業)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8식인 알라야식은 연기의 축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그러니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모든 것들이 낱낱이 우리의 이 알라야식에 저장된다는 것이지요. 방송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계신 분이 오늘 여기와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방송이 어떤 것을 보여주느냐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앞에 놓고 그 허깨비 같은 것을 보아가며 끝없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칼로 찌르는 장면을 자주 본 아이들은 그 비슷한 상황이 되면 잠재돼 있던 무의식이 튀어나와 자기도 모르게 칼로 찌르게 됩니다. 조잡한 광고를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우리의 인격까지도 조잡하게 돼 있습니다. 그건 지상파 방송뿐만 아니라 그 수많은 채널에서 저질스런 방송이 나오면 나오는 만큼 국민의 수준도 질이 낮아지게 돼 있는 겁니다.
옛날부터 임산부한테 온갖 것을 조심하라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고 했던 것이 다 잠재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꽁보리밥과 어느 날 보았던 별빛과 어느 날 읽었던 시와 전혀 감동이 없던 책까지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훈습(薰習)이라는 것 자체가 불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훈습은 담배를 오래 피면 담배냄새가 몸에 배이고 짙은 안개 속에 오래 있으면 이슬이 옷에 젖어들듯이 우리들이 경험했던 그 자체가 무의식 깊이 스며드는 것을 훈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소리를 듣고 좋은 냄새를 맡으면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지만 반대로 나쁜 것을 보고 나쁜 소리를 듣고 나쁜 냄새를 맡으면 탁한 쪽으로 영향을 받게 돼 있습니다.
다소 용어도 낯설고 내용도 쉽지 않지만 훈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훈습은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경험을 통해서 진여(眞如)가 훈습을 할 경우와 그렇지 않고 좋지 않은 훈습도 있습니다.
<사진설명>원효의 저술인 『대승기신론소별기』
그런데 원효는 ‘그 성품을 신통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이라고 했고, ‘본각심(本覺心)이 허망한 인연에 의뢰하지 않고 본성이 스스로 신통하게 이해되는 것을 스스로 참된 모습[自眞相]이라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인간에게는 스스로 물들지 않은 모습이나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빛이 있어서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본각이란 이 심성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상[不覺相]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깨달음의 빛[覺照]의 성질을 본각’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원효가 ‘본각(本覺) 중에는 모든 착한 일을 생길 수 있게 하고, 항상 중생들에게 사랑의 비를 뿌릴 수 있게 하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과 같으며 ‘그 자체에 큰 지혜광명의 뜻이 있다’ ‘본각 중에는 세속을 비치는 지혜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듦을 따르는 생멸하는 마음이 내면적으로 훈습하는 힘에 의지해 두 가지 업을 일으킨다. 그것은 소위 고를 싫어하고 낙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인(因)이다. 이것이 근본이 되어 지극한 결과를 낳게 된다.…묘업장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 자체 내의 훈습의 힘으로 모든 중생에게 두 가지 업을 내게 한다. 두 가지란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착한 일에 더욱 힘쓰는 선심이다. 이 두 가지 업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에 일체 사업의 가행(加行)의 근거가 된다고 한 것이니, 이 도리로 말미암아 이름 하여 묘업(妙業)이라 하였다.
이것이 원효가 바라보고 있는 우리 인간의 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훈습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우리가 중생계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며 윤회하도록 하는 훈습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리=이재형 기자
김상현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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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석천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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