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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의식(la Conscience reflexive) 철학 일반에서
브레몽디(F. Brémondy,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432-433.(P.3299)
- 브레몽디(François Brémondy, s.d.) 투르 대학 [전공이 현상학?]
이 항목에서 간략한 ‘[개요]’에서 앞뒤가 잘린 글들은 적합하게 번역하기 어렵다. 단지 무엇에 대한 반사적(반성적) 사고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층(상징계)의 반사일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 실재성의 사유는 심층에서 솟아나는 생성을 성찰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고대와 근대에서 반성적 사고와 내재적 사유 사이의 연결 방식에서, 둘 사이의 경계가 불명하다. 특히 고대에서는 사유는 이중적이며, 지혜로서 도덕적 의식과 지식으로서 인식적 의식 사이에 구별보다, 연대 또는 공감성으로서 둘 사이에 중첩적이고 혼성적이다.
근대에서 데카르트가 이런 이중성을 이원성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려 했으나, 다섯 감관의 통합과는 다른 정신의 추리를 인정하였다. 그 추리는 정신의 확장만큼이나 물체들의 확장을 사고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영혼의 위상을 정신의 부분역할 정도로 보아서, 영혼과 신체의 이원론을 통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데카르트에서 영혼이 실재로서 물질의 성장과 생장에서 나온다는 사유를 하기에는 생물학과 심리학이 아직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이라는 양면성을 드러냈음에도, 둘 사이의 상대성을 추론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주체를 개입시켰고, 주체의 인식능력을 의식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능력은 신체에도 있다는 것을 주체의 능력에 속하는 정도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라이프니츠에서는 물질이라는 성질의 다양성이 제기되고, 그 관점에서 물체들의 층위와 강도의 차이를 보면서, 의식에도 전체 속에서 여러 층위의 부분들이 있음을 자각하였다(apercevoir). 라이프니츠는 스토아학파의 견해 또는 플로티노스의 학설을 토대로 삼아 의식의 강도적이고 위상적인 영역구별을 하면서, 물체들 사이에도 위계적이고 강도적 층위를 구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물체들 각각에도 강도성을 인정하면서 각각이 자기 단일성을 즉 모나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에게서 의식은 정신의 단일성처럼 주체(영혼)의 단일성이 완성 되어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사유에는 물체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타인(인격)들에 대한 인식을 하는 의식들의 차원(에너지, 강도)들이 다름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라이프니츠도 데카르트처럼 근대인으로서, 내재의식의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탐구에서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주체와 영혼은 다를 의미 일 것이다.
주체가 물체들과 세계들에 대한 주인의식의 측면서 주체는 의식하고 있고, 즉 인식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영혼은 다른 인격의 영혼을 물체들처럼 인식할 수 없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한 영혼과 다른 영혼 사이의 교류와 상호교감은 물체의 인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왜 19세기에 와서는 영혼들 사이의 인식에 대한 “차히”와 주체와 물체 사이에서 인식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 내재 의식(in-conscient)의 발현은 다양한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지, 통일된 전체성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내재 의식의 발현에서 자아의 본성을 찾으려 하는 노력에서 정신의 사고에서 영혼을 찾는 길과는 다른 길을 발견할 것이다.
물체에 대한 인식의 의식과 인성의 교감을 통한 인식의 의식은 별개의 것이라고 또는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본 철학자는 벩송이다. 이 필자는 데카르트 이래로 자각작용(aperception)에서 의식을 구별해 내고, 라이프니츠, 니체, 프로이트, 러셀 등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들은 물체를 대하든 정신을 교감하든, 각각에는 구조 또는 체계가 있다는 관점에 속한다. 벩송의 시기에는 구조와 위상의 구별이 없어서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들뢰즈는 이들 철학자들의 인식이 - 니체를 제외하고 - 데카르트와 다른 길이라고 하더라도 의식 속에서 구조 또는 요소를 설정하고 관조하는 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구조없는 구조”[위상]로서 철학을, 즉 의식의 생산과 창안을, 즉 새로운 개념의 창조를 말할 것이다. (56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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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 의식(la Conscience réflexive) 철학 일반에서
[개요]
중요한 것은 무매개적 인식인데, 정신이 그 무매개적 인식을 자기의 작동들과 자기의 감화작용들로 필연적으로 다룰 수 있거나 다루고 있다. 몇몇 고대 작가들은 이런 표현을, “의식을 다루다” 또는 “의식”이란 용어를 이용 한다;
이처럼 데모크리토스(Démocrite, 전460경-전370경), “나쁜 품행의 의식(conscience, syneidenai [σῠνειδέναι])하다. (「단편」, 29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전384-322), “그것들 자신에서(en eux) (…) 선에 대해 의식하는(synaisthenesthai)데,” (윤리학, 1170b) [여기서 윤리학은 대 윤리학일 것이다]
플로티노스(Plotin, 205-270), “{일자(l’Un)}가 자기 자체로부터 일종의 의식(une soirte deconscience: synaisthesis [συναίσθησις])” (엔네아데스, V, 4, 2.)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사유를 의식에 의해 정의했다. “사유라는 명사[단어]에 의해, 내가 우리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만큼이나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원리들(Les Principes de la philosophie, 1647, I, 9). 항목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이것을 허락하는 것이 이런 정의(定義)이다. “그런 이유로 이해하다, 원하다, 상상하다 뿐만 아니라, ‘느끼다’도 또한 사유하다는 것과 여기서 동일한 것이다.” (같은 책)
이런 정의는 새롭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유를 의식에 의해서, 마치 데카르트가 그렇게 할 것처럼, 정의하고자 생각하지 않는다.” 아믈랭(Octave Hamelin, 1856-1907),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Le système d'Aristote, 1920), ch. 20) 그렇게 생각 하기는 커녕,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식을 부속물로서 간주한다. “과학[지식]. 감각작용, 견해, 추론적 사유는 드러나기에 완전히 다른 대상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자체적으로 보조적으로 점유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XII, 1074b)
[내용]
따라서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는 의식의 반사적(반성적) 능력(la réflexibilité)을 가지고 기술적 개념을 만들었으며, “의식하다(Etre conscient), 이것은 저기 사유에 관해 확실하게 사유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1648년경, 「부르만과 대화(Entretien avec Burman)」, I.)
데카르트를 이어서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에 의해 채택된 용어: “우리 지신의 인식 또는 의식”(스피노자, 소론(Tractatus de Deo et homine ejusque felicitate: Court Traité de Dieu, de l'homme et de la béatitude, 1660), II, 2, §1). 참조 아믈랭(Hamelin, 1856-1907), “{스피노자에 따르면} 관념(…)은 그 자체로 무한히 이중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의식이다.”(스피노자, 같은 책). 그리고 또한 참조로, 윤리학(Ethica; L'Éthique, 1677), II, 21, 명제주석.: “사람들이 어떤 것을 알자마자, 사람들은 심지어 그것에 의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또 무한이 이어서 알고 있는 것을 안다.”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는 “우리는 {우리의 영혼} 그것의 관념에 의해서는 결코 인식하지 못하며 우리는 영혼을 의식에 의해서 또는 내적 감정을 통해서 만이 인식 한다”(진리의 탐구에 대해(De la recherche de la vérité. 1674-1675), III, 2, 7, §4). 특히 주목: “우리는 우리 밖에 대상들 자체로서 있는 그 대상들을 깨닫지 못하며 (…) 우리 정신의 무매개적 대상은, 그가 ㅎ태양을 볼 때, 태양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관념이라 부르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영혼 속에 있는 것들{사물들}은 영혼의 고유한 사유들이며, 다시 말하면 영혼의 여러 다른 변양들이며 (…) 우리 영혼은 이 모든 사물들을 자각하기(apercevoir) 위하여 관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같은 책, III, 2, 7, §1).
로크(Locke, 1632-1704)는 “그 어느 누구나 의식을 갖고 있으며, 현재화되거나 또는 과거화된 어떤 행동들의 내부 감정은 동일한 인격이며, 그 인격에게 행동들이 속한다.” (로크,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89), §16).
꽁디약(Condillac, 1715-1780)은 “모든 사람들이 고백하건데, 영혼 속에는 지각작용들이 있고, 이 지각작용들은 영혼도 모르게 영혼 속에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영혼에게 지각작용에 대해 인식을 부여하고, 그리고 자기 속에 일어난 것의 일부분에 대해 영혼에게 경고한다. 나는 이 감정을 의식(conscience)이라 부를 것이다.”(꽁디약, 인간 인식 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connaissances humaines, 1746, I, 2, §4).
맨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 “의식이라는 단어는 데카르트와 그의 학파에 의해 채택되었고, 표현적으로 자기 스스로 느끼는 작동을 지칭하기 위해 [쓰였다.]” (전집, III, p. 92).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 “사람들은 의식에 의해 무엇을 이해하는가? 응답, 자아의 {직접적이고 무매개적} 지각작용인데, 외부 사물들의 지각작용에 대립에 의해서 이다. (임의 자유에 관한 시론(Essai sur le libre arbitre. 불어 번역 1877): 원전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Ü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s: Sur la liberté de la volonté humaine, 1839))
니체(Nietzsche, 1844-1900), “의식의 문제(또는 정확하게 자기의식의 문제)” (Die fröhliche Wissenschaft, la gaya scienza. 1882(fr. Le Gai Savoir), §354.)
후설(Husserl, 1859-1938), “의식의 세 개념들 (…) 2. 의식은 고유한 심리적 체험들의 내적 지각작용(지각활동)과 같다.” (같은 책, V, I, §1).
볼프(Ch. Wolff, 1679-1754)는 의식(conscience)이라는 데카르트적 용어를 자각작용(aperception, 통각)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용어로 대체했다. (볼프, 경험적 심리학(Psychologia empirica, 1732), § 25; 칸트, 순수 근거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fr. 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 증보판, 1787)),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의 용어를 단자론에서 발견한다: “지각작용(perception)과 자각작용(aperception)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좋다: 지각작용이란 외적 사물들을 대신하는 모나드들의 내적 상태이며, 자각작용은 의식이며 또는 내부 상태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다.” (단자론, §4.) 의식의 반성(réflexivité, 반사적 특성)은 하나의 형식적 인식에 앞서는 의식의 동일화작용(son identification)을 가정한다.
데카르트의 정의는 여러 저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우선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 그러고 나서 니체(Nietzsche, 1844-1900), 프로이트(Freud, 1856-1939), 러셀(Russell, 1872-1970) 등이 있다.
[라이프니츠에서] “사람들은 {지각작용을} 자각작용 또는 의식으로부터 구별해야 한다. (…)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지각작용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고려 하면서, 그 점에서 매우 결함이 있다.”(라이프니츠, 위의 책.);
[니체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고, 추억[기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그러한 모든 것을 의식하는 것이 필연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 마치 모든 살아있는 존재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다. (니체, 위 책, 즐거운 지식(Die fröhliche Wissenschaft, la gaya scienza. 1882));
[프로이트에서] “정신분석학은 심리적 동일성과 의식의 동일성에 대한 반대들을 걷어내지 않을 수 없다. (…) 정신분석학은 무의식(inconscient, 내재의식)적 사유와 무의식적 의지가 있다고 주장해야한다.”(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입문(Introduction à la psychanalyse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 1922)(de 1915 à 1917에 비엔나 대학에서 강의를 출판), ch. I.)
[러셀에서] “의식은 심정적 현상들의 성격적 특성과는 거리가 멀다.” (러셀, 위의 책)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적 개념작업에서 변증법적 반대 의사를 피력 한다: “우리가 우리 사유에 관해서 표현적으로 항상 반성하는데, 이와 달리 정신은, 새로운 사유를 결코 통과할 수 없음에도, 각 반성에 관하여 무한히 반성할 것이다.” (라이프니츠, 인간 오성 신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작성 1704, 출판 1765);
니체와 프로이트는 데카르트 개념작업에 심리학적 관찰들로 반대한다.
[니체에게서] “또한 이제 생명의 가장 큰 부분이 그러한 반성이 있지 않고서도, 우리 속에서 흐른다. - 그리고 우리 삶의 (…) 사유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니체, 위 책, [즐거운 지식(1882)]);
[프로이트에게서] “사람들이 이런 무의식의 무든 실재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데, 무의식은 강박 적인 활동성만큼이나 만질수 있고[현실적이고] 또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실재성에 대한 효과를 생산한다. (그런데 강박 활동성의 의미는 환자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 또한 행위의 목표 만큼이나 행위의 기원에 관해서도 어떤 실재성에 대한 효과를 생산한다.” (프로이트, 위의 책, [정신분석학 입문(1922)])
아믈랭(Hamelin, 1856-1907)은 라이프니츠의 반대에 대해 비판한다. “이런 논증은 의식과 반성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의식은 반성과 동일화 하지 않으며, 반성도 또한 이렇게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 의식은 주체에게 사유를 연관시키는 데 적절하지 않으며, 이 때에 사유는 자체에서(en soi) 그리고 정의에 의해서 무의식일 것이다.”(아믈랭, 위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1920)). 또한 그는 심리학자들에게 응답한다. “분명한(밝은) 의식의 제한[한계상황]은 귀머거리 의식이 무한하게 저넘어[저세상]를 듣게 되는[이해하게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 마치 그 현존[무의식의 현존]이 많은 경우들에서 경험적인 절차들에 의해서 이의제기할 수 없지 않듯이, 거꾸로 이런 저런 점에 관해 사실상으로 그것을[그 현존을] 파악하는데 무능함은 그 현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심리학이 우리의 학설에 반대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르트르(Sartre, 1905–1980)가 끌어온 이 용어의 비판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선반성적의 의식의 관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인식의 우선성에 대한 착각을 감내하는데, 그러한 점에서(à tel point)에서 우리는 의식의 의식을 가지고 스피노자의 방법으로 관념의 관념을(une idea ideae), 다시 말하면 (…) 인식의 인식을 곧바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직 반성만을 또는 의식의 입장적인 의식(conscience positionnelle)만을, 더 좋게 말하면 의식의 인식만을 정의할 것이다.”(사르트르, 위의 책); 사르트르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의식을 인식으로 환원은 인식자(인식하는 자)가 자기 차례로 알려지기 위하여 (…) 셋째 항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딜레마 앞에서 위치하게 될 것이다. 또는 우리는 자기 의식 아닌 반성을 (…) 어떤 항에 멈출 것이다; 또는 우리는 무한히 퇴행의 필연성(관념의 관념의 관념 idea ideae ideae)을 주장하는데, 이는 불합리 하다”(사르트르, 위의 책). “선반성적 의식은 자기의 의식이다.‘ (같은 책, II, ch, I, La présence à soi)
니체는 반성적 의식의 주제를 거부했다. 그는 기원에 관한 가설을 형성했다. “우리의 작동들, 우리의 사유들, 우리 감정들이 우리의 의식에(적어도 부분적으로) 이른다는 사실은 무서운 필연성의 귀결이다(…) {인간은} 도움을 필요로 했고 (…)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표현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는 우선 의식(la conscience)을 필요로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savoir) 했고,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아야(savoir) (…)”, 그래서 “언어의 발전과 의식의 발전이 (…) 자기의 손안에 주어진다.” (니체, 위의 책, §354.) (F. Brémondy)
(5:37, 56M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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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에 아티카(Attique) 지방의 알로페케(Alopèce, Ἀλωπεκή, Alōpekē) 데모스에서 태어나서, 399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460 데모크리토스(Démocrite, Δημόκριτος, 전460경-전370경), 원자론자. 53권의 저술을 썼으나 남아있지 못하다. [소크라테스보다 약 열 살 어리다.- 플라톤(전427-347)과 50여년이 겹치는데 플라톤이 몰랐을 수 없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기원전 427-347)(80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우주론을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세 위상으로 전개한다.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전384-322) 스타지르(Stagire, Στάγειρος)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3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50살에 아카데미아에 입학했다고 한다.
O
204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5-270) 이집트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 hypostases »)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υϛ), 영혼 (L'Âme, ψυχη) [이 말로 보면 상층의 일자, 중간에 점으로서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누스는 자연 자체가 된다. 누스 다음에 로고스를 넣으면 지식일반 그리고 영혼이 인간 인식(과학)이 될 것이다]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철학의 원리들(Les Principes de la philosophie, 1647),
1628 부르만(Frans Burman, 1628-1679)과 대화에서 데카르트는 영혼과 신체의 통합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네델란드의 신학생인 부르만과 1648년 대화록이 있다. 「부르만과 대화(Entretien avec Burman)」(1648년 경 - 진위불명확)
1632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 철학자.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869: Essai sur l'entendement humain, 1689)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리베리아 반도에서 온 유태인 가계의 출신(세파라드 유대계 출신)으로 네델란드 철학자. 그는 그리스트교나 유태교가 지닌 유일신의 불변성과 독자적 고유성에 대해 부정하고, 살아있고 움직이는 자연 즉 신을 주장한다. 소론(Tractatus de Deo et homine ejusque felicitate: Court Traité de Dieu, de l'homme et de la béatitude, 1660)(독일 문헌학자 1851년 원고발견, 1878년 프랑스어 번역), 윤리학(Ethica; L'Éthique, 1677)
1638 말브랑쉬(Nicolas Malebranche, 1638-1715) 프랑스 철학자. 신학자, 오라트와르 신부, 진리의 탐구에 대해(De la recherche de la vérité. Où l'on traite de la Nature de l'Esprit de l'homme, & de l'usage qu'il en doit faire pour éviter l'erreur dans les Sciences, 1674-1675),
1646 라이프니쯔(Gottfrid Leibniz, 1646-1716) 이 다재다능한 철학자. 새로운 논리계산(명제계산)을 발명하고자 했고, 뉴턴과 달리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40%는 라틴어로, 35%는 프랑스어로 25% 독일어로 썼다. 형이상학 담론(1686), 인간 오성 신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작성 1704, 출판 1765. 단자론(La Monadologie, 1714)
1679 볼프(Christian Wolff ou Wolf, 1679-1754) 독일 철학자, 법학자, 수학자. 그의 논리학은 프랑스 포르르와얄 논리학과 문법학의 영향이라 한다. 경험적 심리학(Psychologia empirica (Francfort et Leipzig, 1732)
1715 꽁디약(E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5-1780) 프랑스 감각론자. 인간 인식 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connaissances humaines, 1746 ,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프로이센 철학자. 계몽주의 철학자. 순수 근거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fr. 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증보판, 1787).
1766 맨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은 ‘自我의 哲學者(philosophe du moi)’이다 {멘느 드 비랑: 프랑스 유심론 철학자}
1788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 철학자, 작가. 충분이유율의 네 가지 뿌리(1813),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Ü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s: Sur la liberté de la volonté humaine)(mémoire couronné par la Société Royale des Sciences de Norvège en 1839)- 레나쉬(Salomon Reinach)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 “임의 자유에 관한 시론(Essai sur le libre arbitre. 1877)”.
레나쉬(Salomon Reinach, 1858-1932) 프랑스 고고학자, 문헌학자. 예술사 교수.
1844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독일 철학자. Die fröhliche Wissenschaft, la gaya scienza. 1882(Le Gai Savoir – 제목은 중세 아끼텐 지방의 방랑시인 투르바두르의 영향이며, 이 용어는 라블레가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 도덕의 계보학(1887).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정신분석학 입문(Introduction à la psychanalyse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 1922)(de 1915 à 1917에 비엔나 대학에서 강의를 출판),
1856 아믈랭(Octave Hamelin, 1856-1907)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 연관 있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Le système d'Aristote, 1920)
1859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독일 철학자. 논리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Recherches logiques, 1900-1901)
1872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인식론자, 정치가, 도덕론자. 나는 왜 크리스트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1927(fr. Pourquoi je ne suis pas chrétien, 1964).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and Its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1945). 나는 왜 크리스트교인이 아닌가? 와 다른 논문들(Why I Am Not A Christian and Other Essays on Religion and Related Subjects, 1957) .
1905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 철학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활동가, 문학비평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
(7:37, 56MLH)
# 참조 1***
* syneidenai σῠνειδέναι - 데모크리토스, 단편 297
- σύνοιδᾰ (súnoida), συν-(sun-) + οἶδα(oîda), 1. to share in knowledge of, be privy to, 2. to be conscious of, be cognizant of
- [σύνοιδᾰ에서] σῠ́νιστε σῠνίστων active infinitive σῠνειδέναι participle m σῠνειδώς f σῠνειδυῖᾰ n σῠνειδός
-(파생어) συνείδησις(명사), 의식, 스스로에 대한 지식 ## 양심
* synaisthenesthai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윤리학, 1170b.
[συναίσθηνεσθαι] - [συναισθάνομαι, 1. to perceive also or at the same time.]
[συναίσθενεσθαι] - [συναισθάνομαι, 1. to perceive also or at the same time.]
[συναίσθης + εσθαι -- συναίσθημα]
[συναίσθηση < συν- + αίσθηση]
* synaisthesis συναίσθησις: 플로티노스 엔네아데스 V, 4, 2.
플로티노스에서 쉰아이스테시스(συναίσθησις)는 의식을 의미하지 않는다.(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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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2 ## 그리스어 ****
# σύνεσις
어원(Etymology): From σῠνῑ́ημῐ (sunī́ēmi, “bring together”) + -σῐς (-sis).
- ῑ̔́ημῐ • (hī́ēmi)
1. I release, let go
(of sounds) I utter, speak, say
I throw, shoot, hurl
(of water) I let flow, flow, spout forth
I send
(middle) I speed myself, hasten
(middle, with infinitive) I am eager, I desire (to do something)
(middle, with genitive) I am set upon, long for
Noun
* σῠ́νεσῐς • (súnesis) f (genitive σῠνέσεως); third declension
1. a conflux, uniting, coming together
2. understanding, intelligence
3. conscience
4. a branch of art or science
5. a decision or decree
6. (Gnosticism) one of the aeons or emanations of the Godhead, representing intelligence
* σύνεσις: συνεσι (어간) + ς (어미). 어원: σύνειμι (εἶμι ibo), σύνιημι.
1. 함께 오기, 2. 이해, 지능, 총명, 3. 양심.
#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 Etymology: From σύνοιδα(súnoida), + -σις (-sis).
* σῠνείδησῐς • (suneídēsis) f. (genitive σῠνειδήσεως); third declension
1. consciousness, perception of one's own thoughts
2. consciousness of right or wrong, conscience
# σύνοιδα -- συνείσομαι
의식이 있다, 잘 알고 있다.
1. to share in knowledge, be cognisant of, be privy to
2. to be conscious of
3. to be conscious that
4. I am conscious
5. I know well that, admirest
6. an accomplice
7. joint knowledge,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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