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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제5구간 산행
솔티고개-태봉산-유수교-실봉산-진주분기점-화봉산-계리재
2014-11-16
산행거리:24.9km
산행시간 7시간 30분
옷소매를 살살 파고드는 냉기, 오색의 형형한 단풍... 가을에 덧붙이는 글은 많아도 나는 오늘 이 짦은 한줄의 글에 만족한다.
"산길을 걸었다"
08:46
산길을 걸었다.
적송 사이로 적 혹은 황색으로 세상을 수놓았던 단풍은 잊혀진 사랑처럼 이미 힘없이 지고 아직 떨구어지지 못한 나뭇잎들은 끊임없이 몸을 나투어 무상을 設했다.
낮게 고개 숙인 늙은 구릉의 솔티고개 초입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늦은 가을인지 이른 겨울인지 모를 날씨가 관심도 없는 무정한 낯빛으로 우리를 맞는다. 새로울것도 간절할것도 없는 산행이다.
09:19
산행을 시작한지얼마 안되어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태봉산에 도달하였다. 대간길처럼 높은 산을 이어 걷는것은 아니지만 빨래판처럼 물결치듯 산을 오르내리는것이 정맥산행의 진정한 묘미다. 그래서 낮은 산이라도 은근히 힘이든다.
지난번 산행에서 발생한 오금쟁이 통증이 낫지 않아 벌써 걱정이다. 속력을 내기가 겁이난다. 소백산에서의 악몽이 자꾸 되살아나 산행 내내 나를 괴롭혔다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아예 무시 할 수도 없는 은근한 가을빛이 숲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무들, 바싹 마른 낙엽과 땅의 냄새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연상시켰지만 나는 그 기억의 본질에 다달을 수 없었다.
산길을 나아갈수록 숲은 수없이 지나왔던 과거의 길들을 상기시켰다 지난번.그리고 또 지지난번의 산행들.. 언제나 똑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껏 잊고 싶었던것들. 아니 뒤돌아보면 괴로울것 같아 애써 외면했던 순간들, 생각하기를 피해 온 모든것 들이 마치 터진 그물 속에서 해방된 물고기처럼 기억의 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려 하고있었고 늘 그랬던것처럼 나는 그것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무심해 지려 몸부림치는 사유의 그늘을...
어쩌면 모르겠다는 이 모호한 출발에서 또 다른 하나의 삶이 출발되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것 그것을 잊고 싶은 까닭들을... 되돌아 보기를 왜 그처럼 두려워했었는지를
긴 숲길을 걷는동안 건초의 냄새며 묵직한 솔향 허우적거리다 죽어간 사슴벌레 한마리까지 숲의 모든것들이 잊고싶었던것을 새삼 떠올리게하고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것을 돌아보게했다.
과거의 상자 속에 봉인된 이제와서 돌이켜야 무슨 소용인가 싶은 모든 기억들을...
09.36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떻게 앞을 볼 수가 있을까요? 소용없는것들 생각하기도 싫은것들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껴안아야하는것들 삶을 비춰 줄 소중한 등불이 아닐까요. 삶 등불...
얻기 힘든 기회야말로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힘의 원천이다. 내 소중한 길벗들은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낙남정맥을 시작하면서 솔직히 나는 대간길의 악몽에 시달려야했다. 하지만 막상 걸어보니 맥길은 맥길 나름으로 대간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소박하고 질박한 막사발과 같은 은근함 이런것이야 말로 정맥길의 매력이 아닐까.
10:00
유수교가 보인다 맥길이나 대간길은 물길을 건너가서는 안되지만 인공으로 만든 수로라 어쩔 수 없다 진양호 수위를 조절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이물길은 가화천으로 이어진다.
낮은 구릉을 미로 속을 헤메듯 이리 저리 둘러다닌다. 말의 머리가 아니라 말의 꼬리를 잡고 달리는 기분이다. 풍경에 경도됨이 없이 넘치지 않는 秋色의 흐름을 따라 은근히 이어내리는 호흡. 계절에 붙잡힌 짧은 탄식..
하늘은 험잡을 때 없이 아름답고 풍경은 눈부신 그리움 그대로다.
산행이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있다면 이런 자기정화의 기능, 한없이 맑고 깨끗한 기분을 얻는것이다.
마음을 거울로 비유한 옛 성현들의 혜안은 얼마나 놀라운가! 마음을 한없이 내려앉히면 사심의 티끌은 어느새 씻겨져 나간다.
비록 긴 산행길이라도 매 순간이 이렇게 간절한것은 끊임없는 자기 정화의 기능이 산중에 때문일것이다.
이전에 이해하지 못한것을 문득 깨닫게 될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산행이 주는 육체적 괴로움을 승화시켜 하나의 보람과 가치로 이루어 낼 때 남모를 힘이 솟는다.
그래서 나는 삶을 통해 매순간 나를 괴롭히는 선택의 고통들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 길을 통해 나는 더 새로와 지기 때문이다.
산길을 걷는 동안 나 자신에대한 이러한 이해와 통찰들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지리산이 보이는 마을
얼마나 좋을까! 아침마다 머리맡을 지켜 줄 산이 있다면.. 지리산과 함께 잠을 깬다면..
산길을 걷는 느낌보다 과수원을 순례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든다 잎이며 열매며 그 모든것을 떨구어 낸 과수원.
아직도 주황의 열매를 매단 채 마지막 남은 햇살로 제살의 깊이를 익혀가는 과실들.
몸져 누워 이미 흙이 되어버린 긴 기도문...
남도의 가을산은 이렇게 온통 과일들의 세상이다
내 완소 카메라를 들고 오지 못한 아쉬움이 절절하다 하늘을 찍다가도 소니 카메라가 재현해 낼 푸른빛의 한계를 생각하면 은근히 부화가 치민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카메라는 정말 마약과 같은것. 늘 아쉽다.
카메라가 없다면 나는 조금 더 일찍 날머리에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일찍 내려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몸에 좋지도 않는 라면을 먹는일이 고작이니 그런 자리라면 피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 그래도 좀 편해진것이 있다면 그렇게 허기를 느끼지 않는다는것이다.
허기지지 않는것도 생리적으로 굉장한 잇점이다.
나는 라면을 대신해 다시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내 취향대로 가겠다는거지만 함께 걷는 동료들에게는 좀 미안했다.
오두막(캐논 5d mark II)이 재현한 하늘
걸어 온 능선길
나무가 모로 누워 하늘을 차단한 길에 빛도 향기도 없는 머뭇거림이 아쉬움을 달고 간당거린다.
세상 안이나 혹은 세상 밖 어디에도 스미지 못한 내가 보인다.
NBA의 불멸의 가드 레지 밀러는 공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보다 손에 공이 없을 때 즉 off the ball movement에서 더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직능인으로서의 나 직능외 인간으로서의 나 내 삶은 어디에 떠있는가?
내가 내 직업에만 골몰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것이다.
내가 비로소 나 다운것은 스스로 국외자를 자처했을 때이다.
직업은 삼시세끼의 끼니를 주었지만 산은 나에게 해방을 주었고 예술의 소중함을 일깨웠으며 독서의 즐거움을 주었다.
세상이 내린 가치를 외면했을 때 나는 더 나다왔다 레리 밀러의 손에서 공이 떠났을 때처럼 내 진료실 밖에서 나는 더 행복했다.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세계를 스스로 창조했고 그 가치들은 비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저마다의 가치가 다르다는것은 참 공평하다. 하지만 그것도 가치를 가치로 받아들일 때나 가능한 일이다.
초록빛을 안은 계단식 밭두렁이 꿈결에 듣는 음악처럼 감미롭다. 아니 저 선을 따라가다보면 저절로 음악이 만들어질것같다 가을의 한켠을 마치 봄에 떼어 준듯한 느낌. 얼마나 포근한가!
저 우련한 선의 싱그러움 물결치는 현의 세레나데.
오늘 이 길을 걸어간 산꾼들의 가슴은 차렴이불처럼 가벼워졌을것이다
비리재
11:06
밀짚으로 만든 초롱 속에 갖힌 여치처럼 숲에 그만 갇혀버렸다.
빼곡이 들어선 이름모를 나무숲 위로 샹들리에처럼 나뭇잎이 빛난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다는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도 잠시 숲에 갇히어 간당거리듯 달려있는 가을을 느껴본다
간다.
가는것이 비단 봄날만은 아닐진데 유독 봄날을 아쉬워하는것은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 때문이리라.
짧은 봄이라 보내기 아쉬운것도 사실이지만 가을이 지나가는 속도 또한 만만치는 않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명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사랑이 어떻게 변해!"
사랑은 변하는것이 아니다. '사랑이 변했다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얼마나 간단한 결론인가! 결국 변한것은 사람 몫인거다.
그렇다면 사람은 변하는것일까? 남자는 군대 갔다오면 변한다는데 그것도 한 석달정도... 결국은 도로아미타불인것이 현실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 마치 물고기의 혼인색처럼 사람은 "잠시" 변한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가 얼마던지 변해줄께라는 연애시절의 말들은 결혼 후에는 말짱 개소리가 되어 버리는것이 일반적이다.
사랑의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린다. 사람이 변한것이 아니라 제 모습으로 돌아 온 것이다.
12:13
실봉산
진주 시가지가 보인다
실봉산 아래에서 점심을 먹는 일행들을 만났다 우리는 실봉산 지나 경치가 좋은 정자에서 밥을 먹기로 하고 조금 더 걸어올랐다. 정자에 도착하니 사방이 확 트인것이 마치 산들의 중심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동쪽으로 의령 자굴산이 남쪽으로 와룡산이 북으로는 지리산 서쪽에는 금오산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경치에 빨려들어 사진을 담다가 일행들의 재촉에 못이겨 식사를 했다.
저 소나무가 좀 더 멋지게 자랄 몇년후가 된다면 반드시 사진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될것이다
남쪽 와룡산 방면의 풍경
12:25
맑은 하늘 아래 벌거벗은 나목. 거룩한 희생으로 보인다.
희생 안드레이 다르코프스키 이름만큼 난해했던 영화
멀리 지리산 아래 진양호가 품에 안긴듯 숨어있다
13:39
고속도로 진주 분기점
13:56
태봉산,실봉산에 이은 마지막 봉산 화봉산 진주의 비봉산을 비롯해 이렇게 봉황의 봉자가 들어간 산이 많은것은 이 지역이 봉황이 날개를 편듯한 낮은 구릉의 형세를 보이기 때문이리라고 짐작된다.
와룡산 아래 아름다운 대밭길
음악을 듣다보면 좋은 테크닉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산행도 마찬가지다. 잘 걷는 사람만이 산을 즐기는것은 아니다.
연주의 호불호는 분명히 있지만 요즘처럼 수많은 연주자가 명반을 쏟아내는 시대에 녹음이라는 테크닉으로 무장된 음악들을 통해 그 곡이 지니는 온전한 묘미를 다 느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음악도 산행처럼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음악이 되어야한다. 두발로 산길을 걸어 온전한 一喜를 만들어 내듯 음악이라는 쇠붙이를 나라는 용광로에 녹여야 비로소 나만의 음악이 된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만 음악이던 산행이던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에 온전히 도달할 수 있다.
명연 명반은 결국 내가 만든것이지 객관적인 실체가 있는것이 아님을 나는 산길을 걸으며 깨닫았다.
길을 갑니다 당신을 잊으려한 시간이 벌써 몇년째입니다.
나는 길을 가다말고 무수히 돌아가려 망설였습니다.
이 나비와 같은 망설임은 언젠가는 만나게될 우리들의 장소에 기인한 것이지만 나는 말간 하늘 아래 서있는 저 우직한 나무들을 보며 그리움을 다독입니다.
그해도 올해처럼 유난히 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팔월의 거친 햇살을 받은 뒤란의 과수들도 이미 너무 많은 결실을 달아 열매 하나 하나에 당신이 달린듯 상념을 건듭니다.
이래서 벌써 몇달째 당신을 붙들고 나는 괴로와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산을 내려가면 꼭 그때 그날처럼 하루 내 라벨의 피아노협주곡을 듣고 싶습니다.
문산으로 이어지는 고개
15:41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참 탐스러운 감이다. 만유인력을 기대하며 언제까지난 기다릴 기세다.
감농사가 대풍이지만 워낙 일 손이 모자라 나무에 달린 감들은 그냥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고있다.
따먹고 싶은 유혹을 견딘다는것은 예쁜 여자를 돌아 볼 수 없는것만큼 힘들다.
땅에 떨어진 감을 주워먹는 동료들을 보며 공짜의 위력을 느낀다.
아무튼 이번 산길은 여러모로 풍성해서 좋다.
사람들이 숲을 지나간다 마른 나뭇잎을 밟으면서도 마치 고양이처럼 아무런소리도 남기지 않고...
숲을 걷는것이 아니라 숲에 스며들듯 걷는다.
하늘을 밟듯 어둠 속에 빛이 들듯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듯 석가가 가섭에게 법을 전하듯 그렇게 걷는다.
계리재
16:13
- 후 기-
돼지머리를 누르는 力石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내 두다리에게 나는 물었다 "너는 뭐냐?"
벨벳처럼 부드러운 늦가을의 햇살이 바람이 없는데도 살랑 살랑 나를 건드린다.
色과 戒의 미묘한 경계 사이로 브람스의 유명한 인터메조가 흘러나왔다. 좋은 산길을 걸어서 얻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이겨 낸 기쁨이 더 컸다. 나는 오늘도 고통과 화해했다.
NO2 in B Falt major (Andante non tro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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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폴님 맞습니다 맞고요!! 대간길은 대간길 답게 힘이있고 용틀임 하는 자체가 기가 엄청 살아있는것을 느껴나이다 또한 정맥길은 여성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맛을 보았나이다 폴님께서도 지적하여주신바 빨래판 능선 (영알 92km) 실크로드 밀양쪽 초입에 빨래판능선의 위력이 대단합지요 이왕 시작한 거시기 9정맥도 완주 하십시다 홧~팅!!
저는 겁납니다 ㅠㅠ
이번에도 무릎이 말썽을 일으켜 아침에 주사 맞았습니다.
나이를 무색케하는 준마님의 체력이 무한히 부럽습니다^^*
어릴적 수도없이 뚸어 다니면서 노는 뒷동산 놀이터
동무들과 하루종일 뒤어다녀도 피곤 한줄 모르고 소 풀 먹이면서
놀던 자그마한 산 그 산이 정맥길이고 이제서야 걸어 보니 힘이 많이 드네요.
생각이 달라서일까. 나이가 들어서일까?
하지만 지금이나 예나 걷는다는 것은 같다.
앞으로 계속 걸을 것이다. 고통을 친구삼아 동료들의 위로와 함께...
특히 형님과 함께라면....
아 ~~
이번 사진이 저의 어릴적 옛 향수에 젖게하네요.
나그네님 다음 산행 때는 아예 그림같은 집도 지읍시다.
워낙 잘 걸으셔서 고통을 친구삼을것도 위로 받을것도 없으시더만 ㅋㅋ
저야말로 한결같이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폴행님
행님의 글을 읽고나면 제아무리 성질급한이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거라 생각됩니다
오늘도 저는 비록 산행은 함게하지 못했지만 산행 그이상의 의미를찾고갑니다
폴행님 항상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십시오~~~ㅎㅎ
아우님도 늘 건강 잘 챙기세요.
원기 왕성한 대간길의 봉팔님처럼^^*
두서없는 글이나마 잘 읽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한가하실 때 언제던 넘어오세요.
삼계탕 사드릴께^^*
비록 함께하진 못했지만 산행 후기를 보면서.
같이 걸었던 백두대간을 다시 생각 나게 합니다.
항상 좋은글.좋은경치. 잘 보곤 합니다.
감사 합니다.
어느산 어느재를 넘든 문경공파님의 빈자리가 제일 큽니다.
내일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