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熱國誌) (33) 태자 부소와 장군 몽염의 사사(賜死)
본문 기타 기능
태자 부소(扶蘇)는 학덕이 높고 효성이 지극한 선비형 청년이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하여 아버지인 시황제가 무고한 선비들을 함부로 살해
하는 분서 갱유(焚書坑儒)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간언(諫言)을
올렸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서 멀리 북방으로 정배 된 바가 있었다.
태자의 정배지는 만리장성 축조 공사 현장과 가까운 관계로, 부소는 날마다 공사 현장을
찾아가 몽염 장군과 함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을 그날그날의 일과로 삼아 오고
있었다.부소와 몽염은 20여 세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아서, 두 사람은 간담 상조(肝膽相照 :간과 쓸개를 드러내 보이는, 서로 마음
을 터놓고 격의 없이 친하게 사귐)하는사이였다.
부소가 태자의 몸으로 정배지에서 생활을 계속한 지도 어느덧 4년 째가 지나는 어느
여름날.
이날도 부소는 황제의 안강(安康 :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함양을 향해 요배(遙拜)를
올리고,
우울한 심정을 달래며 책을 읽고 있노라니까, 돌연 몽염 장군이 찾아왔다.
"장군께서 바쁘신 중에 어인일로 여기까지 왕림해 주셨소?"
몽염 장군은 부소에게 큰절을 올리고 나서 말한다.
"황제 폐하께서 칙사(勅使)를 보내셨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부소는 놀라면서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 ? 무슨 일로 소자에게 칙사를 보내신 것일까요?"
"모르기는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태자 전하의 유배를 푸시고 함양으로 불러 올리시려고
칙사를 보내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자 전하께옵서 어느덧 유배 생활이 4년이나
되었으니, 귀하신 몸으로 그동안 고초가 너무도 많으셨사옵니다."
"죄지은 몸으로 벌받는 것을 어찌 고생이라고 할 수 있겠소.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몽염
장군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 나는 무엇보다도 기쁘오."
"말씀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영광이옵니다. 후일에 태자 전하께서 등극하시면, 소장은
신명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태자 부소는 몽염 장군의 손을 다정하게 움켜잡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등극하는 날이 오거든, 우리 두 사람은 선정을 베풀어 태평 성대를 이루어
보기로 하십시다 .... 그러나 그런 날이 과연 오기나 할 것인지, 나는 얼른 믿어지지가
않는구려."
"태자께서는 무슨 불길한 말씀을 하오십니까. 태자께서 등극하실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옵니다."
그때 멀리서 요령(搖鈴) 소리가 들리더니, 종자(從者)가 문 밖에서 달려 들어와 급히
아뢴다.
"태자 전하 ! 함양에서 황제 폐하의 칙사가 오셨사옵니다."
태자와 몽염은 부랴부랴 예복을 갖춰 입고, 정중히 조서(詔書)를 받들려고 방 한복판에
서안(書案)을 내놓았다.
이윽고 당도한 칙사는 서안 위에 조서를 올려 놓으며 서슬 퍼런 소리를 했다.
"황제 폐하의 조칙(詔勅)이오. 태자와 몽염은 조칙을 봉독하고 즉시 어명대로
거행하시오. 지체 말고 분부대로 거행하라는 폐하의 특명이오."
태자에게 이렇게 호령한 칙사는, 실상인즉 조고의 심복 부하인 염락(閻樂)이라는
불한당패였다.
태자 부소는 옷깃을 바로잡으며 무릎을 꿇고 조서를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시황 37년 7월 13일, 짐은 일찍부터 일러 오기를 경세(經世)의 대본(大本)은 효(孝)를
근본으로 삼아 윤리(倫理)를 확립해 나가야 한다고 항상 일러 왔느니라.
그러므로 자식된 자는 마땅히 아비를 공경하고 아비에게 복종하여야 옳은 일이거늘,
진황실(秦皇室)의 장자인 너 부소는, 자기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황제인 짐에게 방자스러운 국정 비방(國政誹謗)의 상소문까지 올려 국가의
기강을 크게 문란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조종지법(組宗之法)으로 보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로다. 이에 짐은 호해를 태자로 책립함과 동시에, 그대를 태자에서 폐위(廢位)
하고 서인(庶人)으로 격하고, 사약(賜藥)을 내리니 그대는 스스로의 죄를 깨닫고 마땅히
자결(自決)의 길을 택하라.
그리고 몽염은 만리장성 공사를 책임 맡은 지 이미 7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완공을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변방에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날마다 가렴 주구(苛斂誅求)만 일삼고
있어서 그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 몽염도 그대와 함께 자결하기를 명한다.
군명(君命)은 추상 같은 법이니, 지체 말고 실천에 옮겨라.>
부소는 조서를 읽어 보고 눈물을 흘리며, 옆에 앉아 있는 몽염 장군에게 말없이 조서를
넘겨 주었다.
몽염은 조서를 자세히 읽어 보고, 침착한 어조로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 전하 ! 이 조서는 태자와 소장을 죽여 없애려고 거짓으로 꾸며 보낸 가짜
조서(詔書)임이 분명하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변방을 순시중이시므로,
여행중에 이러한 조칙을 내리셨을 리가 만무하옵니다. 소장 휘하에 있는 30만
대군으로 태자 전하를 끝까지 수호해 드릴 것이오니, 조금도 염려 마시옵소서."
몽염의 추측은 과연 정확하였다.
그 조서는 조고가, 이미 서거한 시황제의 이름으로 조작해 보낸 가짜 조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소는 워낙 고지식한 인물인 지라,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한다.
"누가 감히 황제의 이름으로 가짜 조서를 꾸며 보낼 수 있겠소. 그런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오."
몽염은 부소가 고지식한 것이 하도 안타까워서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했다.
"태자 전하 ! 이 조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호해 공자를 태자로 옹립하려는 간신배들이
거짓으로 꾸며 보낸 조서임이 틀림없사옵니다. 그러니 의연히 대처하시고 사람을 함양에
보내어 황제 폐하의 진의(眞意)를 확인하셔야 하옵니다."
그러나 부소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조서에는 황제 폐하의 옥새가 분명하게 찍혀 있는데 어찌 가짜라고 의심할 수
있겠소. 나는 아바마마의 명에 따라 자결하기로 결심하였소."
"자결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황제 폐하 전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시고
자결하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자결하라는 어명을 받은 몸이, 조서의 진가(眞假)를 문의해 본다는 그 자체가 효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건 ....."
"나는 불효의 죄를 또다시 범할 수는 없는 일이오. 몽염 장군은 나의 자결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오."
부소는 이미 결심한 바 있어서, 즉석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어 버렸다.
몽염은 부소의 시체를 부등켜 안고 통곡을 하며 한탄했다.
"아아,어떤 간악한 무리가 성인 군자 같으신 태자 전하를 이꼴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냐. 황제께서 천신 만고로 천하를 통일하신지 불과 10여 년, 태자께서 등극하시면 태평
성대를 이루시게 되리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태자께서 이미 불귀의 객이 되셨으니
대진제국이 망할 날도 이제는 멀지 않은 것 같구나. 나라가 이 꼴이 될진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가며 만리장성을 쌓을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
몽염은 시체를 부등켜안고 한바탕 울고 나서, 칙사 염락을 노려 보며 말했다.
"칙사는 돌아가서 이렇게 전해 주시오. 내가 이 조서가 진짜라고 판단 했다면 나도 어명
에 따라 서슴치 않고 자결했을 것이오.그러나 나는 이 조서가 진짜라고 믿지 않기에 자결
을 하지 않겠소. 나는 황제 폐하로 부터 변방을 수호 하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몸인 까닭
에, 금후에도 변함없이 변방 수호에 만전을 기하기로 하겠소."
염락은 몽염 장군의 명석한 판단에 간담이 서늘해 왔다. 그러나 칙사의 위신상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장군은 어명을 끝까지 거역하겠다는 말씀이오?"
그러자 몽염은 염락을 분노의 눈으로 노려보며 호통한다.
"내가 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다만 기군 망상(欺君罔上)하는 간신배들의
속임수에 놀아나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이 이상 잔말을 하게 되면 그대가 비록 칙사일 망정,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니 당장 돌아가시오."
가짜 칙사 염락은 그 소리를 듣자 오금이 저려 와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고 황급히
돌아가 버렸다.
칙사 염락이 변방에서 돌아와 조고에게 사실대로 고하니, 조고는 일희
일비(一喜一悲)하면서 승상 이사와 상의했다.
"부소가 자결했다니,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공이옵니다. 그러나 몽염은 <어느 놈이
이같은 가짜 조서를 만들어 보냈냐>며 호통을 치면서, 자기는 절대로 자결을 하지
않겠노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사는 그 말을 듣고 당황해 하면서 물었다.
"뭐라구요? 몽염이 그 조서를 가짜라고 호통을 치더라고요? 그렇다면 몽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한테 덤벼 올지도 모를 일이 아니오?"
"소인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만약 몽염이 의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온다면, 우리들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승상께서는 목숨을
보존하시기 조차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조고는 사태의 위급성을 느끼자 이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사는 본디 몽염과 함께 시황제에게는 쌍벽을 이루는 충신이었다. 그러기에 그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조고와 결탁하여 태자를 죽여 버린 지금에는 누구 보다도 두려운 사람은 몽염
장군이었다.
그러기에 몽염 장군까지 죽여 없애 버리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이사는
결연히 말했다.
"몽염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태자의 심복이오. 태자가 우리 손에 죽은 줄 알면
몽염은 절대로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소인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인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몽염을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오."
"어떤 수단을 써야 몽염을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
이사는 한동안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며,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객(刺客)을 보내 죽일 수 밖에 없을 것 같구려. 몽염이 30만 대군을
휘몰아쳐 올지 모르니 자객을 급히 보내야 하오."
"좋으신 생각이시옵니다. 그러나 자객을 보내더라도 몽염이 만나 주지 않으면 실효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이 아니옵니까. 승상께서는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음 ....."
이사는 또다시 심사숙고하다가,
"내가 몽염에게 보내는 친서(親書)를 써 줄 테니, 자객을 시켜 가지고 가게 하시오.
나의 친서를 가지고 가면 몽염은 자객을 반드시 만나 줄 것이오."
하고 말했다.
"명안이시옵니다. 그러면 친서를 곧 써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객은 이사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몽염 장군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몽염 장군은 이사를 믿고 자객을 만났다가 그 자리에서 자객의 손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조고는 이사의 지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대진제국의 실권을 사실상 한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