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한자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한문은 고립어입니다.
고립어의 특성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조 말에 일본의 이또오 히로부미가 조선의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일본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어떠냐는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총리 대신 한규설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한규설은 '불가불가(不可不可)' 네 글자로 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가 불가라고 끊으면, 안돼 안돼라는 뜻이 됩니다.
또 불가불 가로 끊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불 가불가로 끊으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어중간한 뜻이 됩니다.
고립어의 특성은 이처럼 같은 말인데도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립어에는 어미 변화가 없고, 고정된 품사도 없습니다.
아울러 조사가 별로 없으며, 문장 부호도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선비들은 10년을 공부해야 한문의 이치를 터득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경험적인 부분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동양 철학이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지적받는 근본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원인입니다.
당시는 혼란기였습니다.
혼란시란 옳고 그름의 혼란을 의미합니다.
제후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이웃을 침략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말 잘하는 사람(辨士)이나 사정을 잘 살피는 사람(察士)을 우대했습니다.
당시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제나라는 많은 예물을 주면서 학자들을 모아들였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대부로 예우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을 직하라고 불렀는데,
직하는 기원전 357년에서 301년까지 57년간이나 문화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직하에 머물렀던 명가 사상가들이 송경, 유문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명가 이전에 명의 문제를 다룬 사상가들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공자입니다.
공자는 명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그 영향이 말과 행동에까지 미치고, 나아가 정치, 문화, 형벌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며,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이 입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려면 먼저 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명을 문제삼은 또 다른 사상가로는 노자가 있습니다.
노자는 <노자> 1장에서 '이름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 없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노자가 더 높이는 것은 이름 없음(無名)입니다.
노자의 사상은 유명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에 명가 이후에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밖에 묵가 사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묵가 집단은 초대 지도자인 묵자가 죽자 세 파로 갈라졌습니다.
이 세 파를 후기 묵가라고 하는데, 그들은 서로 자신이 정통을 이었다고 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이 논리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또 묵가와 유가의 다툼에서 나온 영향도 있습니다. 묵가의 유가 비판은 매우 엄격합니다.
묵가는 유가 사상의 중요 부분인 천명, 상례, 예와 악 등을 비판했습니다.
유가 또한 묵가의 비판을 받으면서 그냥 있지는 않았습니다.
자연히 두 사상 사이에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궤변과 논리가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명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상가는 혜시와 공손룡입니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명가 사상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혜시는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습니다.
송나라 사람으로 양혜왕 밑에서 재상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혜시는 장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장자가 자기 부인의 시체에 걸터앉아 항아리를 두르리며 노래를 부르는 대목에서도 혜시가 등장합니다.
장자와 혜시가 다리에 서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느냐 없느냐 하면서 논쟁을 벌인 것은 여러분도 기억할 것입니다.
이처럼 <장자>에는 혜시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까닭에 혜시를 도가 사상가로 보기도 합니다. 혜시는 또 전쟁 반대와 박애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묵가 사상가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혜시가 전쟁을 반대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언젠가 양나라와 제나라가 우호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가 그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양나라는 공격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혜시는 자기가 추천한 대진인을 만나 양혜왕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진인은 혜시의 생각을 가지고 양혜왕을 만났습니다.
br> "왕께서는 뿔이 양쪽으로 달린 달팽이를 잘 아시지요?"
"잘 압니다."
"옛날에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는 촉씨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고
오른쪽 뿔 위에는 만씨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한번 전쟁이 벌어지면 20일씩이나 싸우다가 물러나고는 했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만 명씩 되었습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양혜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거 참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지어낸 얘기지요?" 대진인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지어낸 얘기라니요. 임금께서는 동서 남북이나 위아래가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끝이 없겠지요."
"임금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끝없는 우주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시지요.
끝없는 우주 속에서 양나라와 제나라는 달팽이 뿔 위에 있는 만씨의 나라와 촉씨의 나라보다 과연 얼마나 클까요?"
br> 혜왕은 대진인의 말에 감복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설득한 사람은 대진인이었지만 설득의 논리는 혜시의 생각이었습니다.
혜시는 양나라로 하여금 제나라, 초나라 등과 연합하여
당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진나라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혼란을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br> 이러한 혜시의 생각은 당시 국가간의 외교에서 큰 이름을 떨치던 장의의 생각과 부딪쳤습니다.
장의는 진나라를 도와서 작은 몇 나라와 힘을 합치게 하여 꽤 큰 세력들을 무너뜨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혜시는 정적 장의의 모함을 받아 정치적 기반을 잃고 초나라, 송나라 등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br> 혜시는 비유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상대의 논리를 가지고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맹자의 제자인 광장이 양혜왕에게 다음과 같이 혜시를 비난했습니다.
"왕께서는 농부들이 왜 메뚜기떼를 없애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분명 농작물을 해치기 때문이겠지요.
지금 혜시에게는 수레를 타고 따라다니는 사람, 걸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합해 수백 명이나 됩니다.
바로 혜시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일은 안 하면서 말솜씨만으로 밥을 먹고 있으니,
메뚜기떼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br> 곰곰이 생각해 본 양혜왕은 광장의 말이 옳은 듯하여 직접 혜시를 불러 스스로 해명해 보도록 했습니다.
혜시는 전혀 굽히지 않고 광장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성을 만들고 있다고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성 위에서 돌을 쌓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성 밑에서 흙을 나르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설계도를 들고서 여러 일을 감독하기도 합니다.
나 혜시는 바로 설계도를 들고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메뚜기라니요.
만약 실을 짜는 여공이 실이 되어 버린다면 다시는 실을 짤 수 없지 않을까요?
나무를 다루는 목수가 나무가 되어 버리면 그 목수는 나무로 된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성인이 농부와 함께 밭을 일군다면 그 성인은 농부를 다스릴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농부들과 같이 일하지 않는 까닭은 농부들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처럼 할 일이 많은 나를 가리켜 감히 메뚜기떼라고 하다니요.
" 일찍이 맹자는 공동체 노동을 강조한 허행의 제자들로부터 농부들과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맹자는 다스리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은 서로 할 일이 다르다는 분업의 논리를 폈습니다.
지금 혜시는 광장의 스승인 맹자의 논리를 빌어다가 광장을 비판한 것입니다.
언젠가 혜시의 뛰어난 비유를 문제삼아 양혜왕에게 혜시를 헐뜯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양혜왕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했습니다.
"혜시는 말할 때 항상 비유를 씁니다.
임금께서 혜시에게 비유를 쓰지 말고 말하라고 하신다면 아마도 혜시는 한 번도 입을 열 수 없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한 양혜왕은 다음날 혜시를 불러 말했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비유를 즐겨 쓰는데, 앞으로는 비유를 쓰지 않고 말 할 수 있겠소?"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번도 활을 본 적이 없다고 해보지요.
그 사람이 임금께 활이 무어냐고 물었다고 합시다.
임금께서 활은 활처럼 생겼다고 하신다면 그 사람이 활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야 물론 알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활은 대나무를 구부려서 그 양쪽 끝에 줄을 맨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알 수 있겠지요."
"우리가 말을 하는 까닭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잘 설명해서,
아직 모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제게 비유를 쓰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말을 꺼낼 필요도 없겠지요."
"그대의 말이 맞소. 비유를 쓴다는 것은 옳은 일이요."
양혜왕과의 대화에서 혜시는 벌써 활로 비유를 들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튼 혜시는 뛰어난 말솜씨로 양혜왕을 설복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항상 논쟁을 해 온 혜시로서는 이런 정도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