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갑래(노동부 고용정책심의관)
노사저널 2003.02.14자(vol.595호)
세계화와 근로기준법 개정 논의
‘근로기준법 옷 갈아 입히기’는 1992년 2월에 대통령이 주재하고 노·사·공익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노사관계 사회적 합의 형성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후 약 5년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1997년 3월에 마무리된다. 이 시기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단어는 아마도 ‘세계화’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외국에 다녀와서 화두로 던진 ‘세계화’라는 말은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학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학문적인 체계가 마련되고, 국정철학이 되고, 수많은 책자나 보고서가 되어 그야말로 우리 사회 모두를 지배하는 이념이 되었다.
‘세계화’의 질서 아래서는 무엇보다도 국제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따라서 기업은 자신에게 투자하고 있는 국제자본이 철수하지 않도록 인건비 절감과 노동유연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아울러 ‘세계화’는 흔히 무한경쟁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이 무렵에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해야 산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를 행동 강령으로 삼는 기업도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우리나라에서는 최고로 쳐주는 재벌그룹의 총수가 ‘기업은 2류’이고 ‘정부는 3류’라고 몰아붙이면서 ‘마누라를 빼고는 다 바꿔라’ 는 사자후를 토한 일이 있다. 그러자 정부는 중앙 부처의 과장, 국장이라는 사람들을 모두 재벌 그룹 회사 강당에 몰아 넣고 옛날 군사정권 시대의 새마을 교육과 크게 다름없는 교육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 재벌이 어떠한 집단인가? 사카린 밀수 사건 등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출발해서 소비재 산업에 치중하면서 돈이 된다면 중소기업과 구멍가게 영역까지 마다하지 않았다는 의혹도 없지 않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긴 주인공도 바로 그 재벌그룹의 총수다. 그러한 재벌 기업에서 일하는 대리나 부장들이 고위 공직자들을 무더기로 앉혀 놓고 멋진 차트로 급조된 경영철학을 전개해나가면서 자기네 기업의 목표가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다는 말로 교육을 마무리하던 대목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재벌 그룹이 ‘아침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 원칙을 발표하자 마치 경영혁신적인 제도라도 도입한 것처럼 신문들이 일제히 대서특필하고 나선 점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그러한 방침이 휴게시간을 포함하여 1일에 8시간을 근로시키고 연장근로를 시키지 않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기업이 뒤늦게 근로기준법을 지키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 대단한 뉴스로 취급되다니 그야말로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출발한 ‘근로기준법 옷 갈아입히기’에 대해 노사합의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1996년의 개정
‘세계화’의 화두 속에서 노동관계법 개정에 대한 논란은 점점 더 무성해지는데도 노·사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자 정부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1996년 4월에 ‘대통령의 신노사관계 구상’이 발표되었으며, 그 다음달에는 노·사·공익의 대표가 참여하는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이후 6개월 동안 14번의 회의를 통해 노동관계법 개정방안을 논의하였으나 복수노조 인정,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등 핵심적인 쟁점에 대해 노·사간의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 채 논의 결과를 정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노동부 등 14개 부처 장관이 참여하는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를 구성한 후 1996년 12월 초에 노동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며 1996년 12월 말에 국회가 이를 심의·의결함으로써 개정 근로기준법이 탄생되었다.
개정법의 내용
이 때 개정된 내용을 보면 ‘단시간 근로 보호 조항의 신설’, ‘경영상이유에 의한 해고 제한 조항의 신설’, ‘퇴직금 중간정산제의 도입’, ‘휴업수당 지급 한도를 통상임금으로 한정’, ‘탄력적근로시간제의 도입’, ‘선택적근로시간제의 도입’, ‘간주근로시간제의 도입’, ‘공익성 사업에 있어 근로시간 특례 제도 도입’, ‘ 연·월차 휴가 대체 제도 도입’, ‘최저취업연령을 15세로 상향 조정’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개정은 노사합의를 전제로 하여 근로시간을 기업실정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리해고에 대해 법적인 제한을 가하였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근로기준법이 약 45년 만에 그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산업사회의 규모와 구조가 크게 변하였으며 근로자의 소득이나 근로조건도 상대적으로 많이 좋아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경영상 해고를 법에 규정한데 대해 근로조건을 많이 후퇴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그 동안 축적된 판례를 법에 반영한 것으로서 오히려 무분별한 정리해고에 대해 그 절차와 요건을 법적으로 명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경영상 해고 조항이 마련된 이후에 정리해고가 많이 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법 개정 무렵에 이미 ‘세계화’와 무한경쟁시대라는 논리로 경영계에서 강하게 추진하였던 노동시장 유연화 작업과 법이 확정된 후 1년도 못되어 맞이한 IMF 외환위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근로시간을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제도도 노사합의를 비롯한 여러 전제 조건을 설정해 놓음으로써 남용을 방지하고 있다.
개정법에 대한 반발과 재 제정
당초에 ‘근로기준법 옷 갈아입히기’가 세계화니 뭐니 하면서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너무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출발된 점은 되짚어 볼 만하다. 정부가 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사·정 3자 협의 기구를 통해 노동계와 경영계가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부분적이기는 하나 공감대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노·사 모두 정부의 법 개정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불만은 있었으나 전면적으로 반대할 지에 대해서는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개정안은 국회의 심의 과정에서 변화된 내용과 의결 절차 때문에 노동계와 야당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먼저 내용 면에서 볼 때 특히 집단적 노동관계조정법과 관련하여 ‘상급노동조합의 복수노조 인정 3년 유예’ 등 당초의 정부안에 비해 근로자의 요구가 소극적으로 반영되었다. 다음으로 야당의원들에게 국회출석 통보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당의원들만의 출석으로 의결하였다. 특히 절차 위반의 문제는 법원에 의해 헌법소원이 제기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어났으며 노동계가 대규모 파업을 하게 하는 빌미를 주는 한편 정국을 경색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우여곡절은 결국 여·야 합의로 4개 노동관계법안을 재심의하게 함으로써 1997년 3월에 제정 형태의 근로기준법이 탄생되었다. 새로 제정된 법의 내용과 문제가 되었던 개정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비교할 때 ‘경영상 해고’ 관련 조항의 적용을 2년간 유예한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동관계법을 개정함에 있어 추진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