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금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만,
교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를 둘러싸고 교회 안에서도 대립이 일어났고,
로마 제국의 황제가 그 문제에 개입하면서 분열은 심각해졌지요.
그 상황을 바라보면서 대 바실리오 성인은 깊이 고뇌하게 됩니다.
“… 이런 일들을 보면서 이토록 악한 일이 어디서 생겼으며
왜 일어나는지 자문하는 동안 처음에 나는 짙은 어둠 속에 있어서
마치 저울 위에 놓인 추처럼 이쪽으로 기울었다 저쪽으로 기울었다 하였다.
어떤 때는 인간사에 경험이 많은 사람의 말에 이끌렸다가,
나중에는 잘 알고 있던 거룩한 성서의 진리에 이끌렸다 하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면서 이유를 찾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판관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각자가 어떻게 제 눈에 바르다 여기던 것을 행하였는가를 이야기하며,
그런 일이 벌어진 이유까지 설명하는 구절이었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판관 21,25)”(도덕규칙서, 서문 2, 대 바실리오)
판관기에는 이 말이 두 번 나옵니다.
판관기 시대 이스라엘에서와 같이 바실리오의 시대에도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모시지 않고 각자 자기 뜻대로 살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스스로가 왕, 즉 하느님인 것처럼 살았기 때문에
이 모든 어려움이 생겨났다는 깨달음입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는 묻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간명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18,36)
예수님이 ‘내 나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빌라도는 다시 캐묻습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18,37)
빌라도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임금인가, 누가 나의 힘과 권력을 위협하는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다르고 그 나라의 왕도 다른 분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가장 큰 사람”(마태 18,4)이며,
모든 이의 종으로서 섬기는 사람이 첫째 가는 사람입니다.(마르 10,43-44 참조)
그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이며 사랑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려고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바실리오 성인의 시대나 우리 시대나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소식들이 들려오는 지금,
나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으며 어떤 왕을 섬기고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하는 사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나라를 희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
황인수 이냐시오 신부 | 성바오로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