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 사회에서 유력 대선주자와 관련된 풍수는 진부하긴 해도 여전히 세인의 관심을 끄는 주제다. 풍수전문가 김두규 교수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수위권을 형성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해 풍수를 연구했다. 김 교수는 이를 책으로 엮어 출판(랜덤하우스)할 예정인데, 김 교수와 출판사의 양해를 구해 주요 내용을 미리 소개한다.
풍수 호사가들은 항상 바쁘다. 4년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선거가 있고, 5년마다 대통령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풍수 연구자들은 선영(先塋)과 생가(生家)의 지세를 보면 누가 당선하고 누가 낙선할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언론에서 유력 대선후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지지도가 요동을 칠 때마다 풍수 호사가들의 행선지도 바뀐다. 2002년 대선 때도 이인제 의원, 한화갑 민주당 대표, 이회창 전 총리, 정몽준 의원, 노무현 대통령의 선영과 생가에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요즘에는 여론조사에서 ‘빅3’ 구도를 이루는 고건 전 총리,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선영과 생가가 풍수 호사가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필자는 최근 3인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했다. 물론 이들뿐 아니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강금실 전 장관, 유시민 장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천정배 전 법부무 장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생가와 선영도 다음 대선과 관련해 풍수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긴 하다.
제왕(帝王)을 가려내는 풍수
‘왜 또 풍수타령이냐’고 힐난할지 모르겠다. 그 답은 ‘대통령이나 제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는 것’이라는 풍수관(觀) 때문이다. ‘밥 굶지 않고 자손 끊이지 않는 땅이야 사람의 힘(풍수실력)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제후가 나올 큰 명당은 주로 기형괴혈(奇形怪穴)에 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지리오결)라는 것이 풍수의 주장이다. 그래서 풍수를 ‘제왕의 술(術)’이라 했다. 물론 풍수에서도 ‘땅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렇다고 하여 땅을 아무렇게나 선택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붙인다.
큰 지도자를 내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말을, 큰 지도자는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대정신(天時)’에 부합하는 자에게 ‘지리의 이점(地利)’이 주어지며 그것은 그들이 태어난 생가와 선영을 통해 발현된다고 보는 게 맞다.
땅은 저마다 쓰임이 다르며, 같은 땅이라도 시대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다. 이 점에서 ‘노마디즘(고정된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현상)’과 풍수는 유사한 사고체계를 갖는다. ‘특정시점, 특정공간에서 유목민(노마드)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라는 가설이 도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요 대선주자의 생가와 선영에 발현되는 땅의 기운(地氣)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2005년 9월2일부터 5일까지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서 열린 ‘2005년 세계생명문화포럼(이사장·김지하)’은 ‘한류(韓流)’와 함께 ‘풍수’를 특별주제로 다뤘다. 발표자의 한 분인 암도(巖度) 스님(전 백양사 주지)은 “사람이 성웅이나 걸물이 되려면 ‘탯자리 땅(태어난 곳, 생가)’이 좋아야 하고 그런 곳에서 살아야 생체리듬이 좋고 지성리듬이 좋다”고 말했다.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려면 부부가 합궁하는 잠자리가 좋은 땅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한글학자 유희(柳僖)의 어머니 사주당(師朱堂) 이씨가 쓴 ‘태교신기(胎敎新記)’는 “선생이 10년 가르치는 것이 어머니가 열 달 키우는 것만 못하고, 어머니가 열 달 키우는 것이 아버지가 하루 만드는 것만 못하다(師敎十年, 未若母十月之育, 母育十月, 未若父一日之生)”고 하여 잉태하는 순간과 장소, 어머니 뱃속에서의 가르침,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 순으로 그 중요도를 매겼다.
조선시대 지관 선발 시험 과목인 ‘지리신법’은 “땅의 기운에 따라 인간의 청탁(淸濁), 현우(賢愚), 선악(善惡), 귀천(貴賤), 빈부(貧富), 요수(夭壽)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농경사회에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나온 곡식을 먹고 살았다. 이때 물과 곡식은 그 땅의 특성에 따라 맛과 질이 달라지는데, 이렇게 몇 세대가 지나면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체질이 형성된다. 좋은 땅에서 살면 좋은 체질로 바뀌고 나쁜 땅에서 살면 나쁜 체질이 되는 것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이러한 까닭에 생겨난 말이다.
풍수와는 전혀 무관한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가 쓴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라는 글도 재미있다. 그는 자신이 영리해진 요인 중 하나로 장소와 풍토, 즉 풍수를 언급했다.
“어느 누구도 아무 곳에서나 살 수는 없다. 자기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제로 이 점에 있어 선택을 제한받지 않을 수 없다. ‘풍토’가 신진대사에 미치는 영향, 즉 그 부정적인 영향과 긍정적인 영향, 이 모두가 너무나 커서 장소와 풍토를 선택할 때 한번 실수를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안되기 일쑤이며 실제로 그 과업과도 동떨어지게 된다. 더욱이 장소와 풍토 선정에 실수한 자는 자신의 과업에 접해볼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 이 때문에 장소와 풍토 선택이 잘못된 자는 결국 동물적 ‘활력’이 부족하여 가장 정신적인 영역으로 밀려오는 저 자유, ‘이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깨닫는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된다.”
풍수에서는 생가뿐만 아니라 부모를 모신 선영도 중요시한다. 유력 정치인들은 심심치 않게 부모 묘를 이장했다. 2004년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는 선친 묘를 이장했다. 2005년엔 이인제 전 대선후보의 선영이 이장됐다. 그보다 앞서 한화갑 민주당 대표와 김종필 자민련 전 총재(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선영을 이장한 적이 있다(1995년). 과연 풍수와 전혀 무관하게 이장한 것일까.
서양인과 달리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산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사람으로 인식한다. 산 사람에게 거주할 집이 필요하듯, 죽은 사람에게도 거주할 집이 필요하다. ‘산 사람’이 사는 집을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을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산 사람이 이사를 하면 마시고 먹는 물과 곡물이 달라진다. 이것을 장복하면 체질에 변화가 온다. 또 만나는 사람과 접하는 문화가 달라진다. 이사를 함으로써 몸과 마음이 바뀌게 되는데, 이로써 한 집안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바꿔보려는 것이 ‘양택 풍수’의 목적이다.
‘음택 풍수’도 필요하면 이장(移葬)을 해야 한다고 권한다. 죽은 사람의 집인 음택(묘지)이 안 좋으면 죽은 사람의 가족인 ‘산 사람’에게도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조대왕, 흥선대원군, 명성황후도 선영을 이장한 바 있다.
정조대왕은 선친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서울시립대 터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는데, 그 후 원하던 왕자를 얻었다. 이 왕자가 순조 임금이 됐다.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선친 남연군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 이후 아들 고종이 왕이 되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명성황후는 좋은 자리를 찾아 친정아버지의 묘를 몇 번이나 이장했다(경기도 이천, 충북 제천, 경기도 광주, 충남 보령 등). 이 모두가 조상을 좋은 땅에 모시고자 하는 묘지 풍수 때문이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주요 정치인들이 선영을 이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생사관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생사관은 중국 성리학의 대가 정자(程子)가 쓴 풍수논문 ‘장설(葬說)’에 나타난다.
“땅이 좋으면 그곳에 안장된 조상의 영혼이 편안할 것이며 그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무의 뿌리를 북돋워주면 줄기와 잎들이 무성해지는 이치와 같다.”
이러다보니 전통적으로 묘지 풍수가 중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상의 무덤도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5대조… 10대조 등 거슬러 올라가면 한둘이 아니다. 이 모두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후손들은 불안해서 못살 것이다. 또 조선시대 풍수를 관장한 관리인 지관들은 이 많은 무덤을 어떻게 다 살필 수 있었을까 의문도 든다. 이에 대해서 ‘지리신법(호순신)’은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
“고조, 증조 이래의 무덤들을 차등화해 판단해야 한다. 촌수가 멀고 소원하면 그 길흉화복이 반드시 완만하게 나타나며, 가깝고 친하면 그 길흉화복이 반드시 빠르게 나타난다.”
즉 먼 조상의 무덤보다는 부모, 조부모 등 가까운 조상의 무덤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생가가 선영보다 중요
집터에 관한 풍수서로 그 역사가 1000년 넘는 고전이 ‘황제택경(黃帝宅經)’이다. 이 책은 둔황(敦煌) 석굴에서 발굴되어 그 진위가 고증된 주택 풍수서이다. 이 책에 주택과 조상의 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다룬 부분이 나온다.
‘묏자리가 흉하고 집터가 좋으면 자손은 벼슬길이 좋다.
묏자리가 좋고 집터가 나쁘면 자손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란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좋으면 자손이 영화를 누린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나쁘면 자손이 타향살이에 손이 끊긴다.’
여기서 집터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하는데, 결국 집터의 영향이 조상의 무덤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고건 전 총리,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시장의 생가와 선영을 살펴보기로 한다.
▼ 고건 전 총리 생가 (서울 종로구 청진동 종로구청 부근)
역대 대통령이나 유력 대통령후보 가운데 출생지가 서울인 사람은 없다. 고건 전 총리는 서울 태생이다. 다만 그의 선친 고형곤(高亨坤·1906∼2004) 박사의 출생지는 전북 옥구다. 고 전 총리의 생가는 종로구 청진동 206-3으로, 현재 재개발을 기다리며 폐가로 방치된 상태이다. 종로구청 맞은편 뒷골목에 있는데, 생가 옆은 한정식집 ‘미락(美樂)’이 영업 중이다.
이곳은 서울의 도심이어서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랑물길은 복개됐다. 도로 또한 확장됐다. 그렇다고 땅의 본래 형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변의 지형지세를 살펴보면 땅이 높은 부분이 있고 낮은 부분이 있다. 이 높은 부분들을 계속 이어가면 본래의 산줄기를 복원할 수 있다. 이곳 산의 전체적 흐름은 다음과 같다.
북악산 좌측의 산→삼청동(금융연수원)→팔판동→소격동→한국일보→연합통신→이색 사당(조계사와 인접)→석탄공사 (서쪽으로 90도 방향을 틀어서)→종로구청 앞 도로→청진동 생가→청계천
경복궁과 청와대를 감싸는 낮은 능선이다. 이를 풍수에서는 ‘좌청룡(左靑龍)’이라 한다. 역대 대통령 생가가 대부분 좌청룡 끝자락에 있었는데, 고 전 총리의 생가 풍수도 이와 비슷하다. 북악산에서 생가까지 이어지는 지세의 흐름이 마치 쌀을 이는 ‘조리’ 모양이다. 풍수 전문용어로는 와혈(窩穴)이라 한다. ‘닭 둥지’ ‘오므린 손바닥’ ‘등잔’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1 고건 전 총리 생가의 지세. 서울 북악산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기세가 생가를 지난다. 2 고건 전 총리의 선친이 생전 자신의 묏자리를 직접 정해 이를 풍수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메모. 3 서울 종로구청 부근 고전 전 총리 생가터. 4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마을에 있는 고건 전 총리 선친(고 고형곤 박사)의 묘.
북악산이 베개, 종로구청이 뒷마당
북악산이 생가의 중심축을 형성하며 베개 구실을 한다. 종로구청은 이 혈의 뒷마당(後場)에 해당하는데 생가에 지기(地氣)가 모이게끔 뒷받침을 해준다. 흔히 이와 같은 형세를 풍수 전문용어로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으로 표기하는데, 북악산 정기의 한 줄기가 생가에 뭉쳐 있다는 증거다.
흥미로운 것은 종로구청 부근이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였다는 사실이다(현재 종로구청에 이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음). 정도전은 유학자이자 혁명가로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있어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신권(臣權)정치’를 꿈꿨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왕권 강화를 추진한 이방원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3월28일 기자들과 북악산을 오르며 이 터의 풍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삼봉 정도전이 자기 집터가 천자만손할 터라고 했는데 맞아죽는 봉변을 당하고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500년 뒤 그 자리에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서 후손을 교육하는 곳이 된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세란 고립적으로 불변의 기운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른 기운하고 맞아서 변하는 것 같다.”
노 대통령도, 정도전도 이 터를 잘 봤다. 그러나 좀더 세밀하게 본다면 정도전 집터는 지세가 불안할 뿐만 아니라 지기가 뭉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종로구청 앞의 도로보다 약간 낮다. 능선의 중심선이 아니라 그 기울어지는 사면(斜面)에 붙은 흙덩어리(鬼星)이다. 흘러가는 지기가 특정한 장소에서 멈추어 모이게 하기 위해 뒷받침을 해주는 부분이다. 지기가 흘러가는 땅에 터를 잡으면 쉽게 흥했다가 쉽게 망하는 이른바 ‘속성속패(速成速敗)’의 땅이라고 한다. 잠시 머물다가 갈 땅이다.
조선시대 지관 선발에 채택된 풍수서 ‘장서(금낭경)’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재앙과 복은 천리의 차이를 가져온다”고 했는데, 바로 정도전 집터가 그 경우이다. 고건 전 총리의 선친 고형곤 박사가 이곳에 집터를 마련할 때 풍수를 고려했을까. 개연성은 충분하다.
▼ 고건 전 총리 선영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마을 뒷산)
2004년, 99세의 고형곤 박사가 작고하자 풍수계가 크게 술렁였다. 그의 묘 때문이었다. 고 박사는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전북대 총장, 국회의원, 학술원 원로회원을 지냈으며 말년에 내장산 암자에서 선(禪) 수행과 집필 작업을 하다 작고했다. 고 박사는 사후 당연히 화장(火葬)할 것으로 예상됐다. 아들인 고 전 총리가 1998년 민선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면서 장례문화를 화장으로 바꾸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을 뿐만 아니라 고 전 총리의 모친이 87세로 작고했을 때도 모친을 화장해 용미리 납골당에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 박사는 매장(埋葬)을 유언으로 남겼다. 고 박사는 정교한 풍수지리에 입각해 자신이 직접 무덤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무덤의 깊이며 좌향(坐向)까지 적시해 메모로 남겼다. 더구나 그 위치도 조상 묘가 있는 전북 옥구가 아니라 경기도 남양주에 잡은 것이다. 정확한 지점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마을 뒷산으로, 300평 규모이다. 화장주의자인 고 전 총리라도 부친의 유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 박사는 풍수지리설을 선호했으며, 자신의 묘가 아들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믿고 자신의 묏자리를 직접 선택한 것이다. 유력 정치인의 집안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매우 흥미있는 사안이라 풍수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바위 많아 강퍅하고 氣 세다”
고형곤 박사의 풍수 신봉은 그의 철학관에 기인한다. 고 박사는 후설과 하이데거에서 출발했지만 말년에는 선(禪) 사상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70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 정읍 내장산 도덕암 뒤에 암자를 짓고 10년 이상 선 수행을 했을 정도였다.
고 박사의 철학에 대해 소광희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분야로는 존재론이요, 방법론으로는 직관”이라고 평했다. 서양 철학자 베르그송이나 후설의 직관이 아닌 선(禪)의 세계에서 말하는 직관이라고 한다.
물론 선의 직관과 풍수의 직관은 전적으로 같을 수는 없지만, 인간과 대지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풍수사상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풍수가 중에는 불가 출신이 많다(도선, 의상, 묘청, 신돈, 무학 등). 이 점을 고려하면 고 박사의 풍수 신봉은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풍수에서는 ‘땅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고 박사는 하이데거를 인용해 “대지를 보면, 여타의 셋인 하늘, 인간, 신적인 것을 그 네 가지의 단일에서 이미 동시에 본다”고 했다. 결국 고 박사의 묏자리는 그의 철학의 마지막 완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고 박사의 묘가 들어선 터에 대해 풍수 호사가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그의 묘에는 풍수 호사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풍수사이트에서는 이 터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시중 술사들의 중론은 ‘바위가 많고 천광자리에도 돌이 나와 마땅한 터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기가 지나치게 세다는 얘기다.
반면 고 전 총리 집안의 전북 옥구 묘 풍수는 ‘원만함’ 그 자체다. 다음은 필자가 한 출판물에서 평가한 내용이다.
“역대 대통령의 선영은 용(龍·무덤 뒤에 이어지는 산 능선)과 혈장(무덤을 쓰는 지점)이 분명한데다 풍수설을 좇은 흔적이 뚜렷한데, 전북 옥구의 선영은 사방의 산들이 편안하게 감싸고 있는 곳에 수십 기의 조상 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내룡과 혈장보다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아름답다. 많은 사람이 도와줄 터이다. 역대 대통령이나 다른 대권후보들의 선영에서 편벽됨과 자기 독단이 강하게 드러나는 땅의 성정을 느낀다면, 이곳은 원만하면서도 완벽한 성정의 땅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고형곤 박사는 이렇게 편안한 옥구의 선영에 안장되기를 거부하고 고향과 먼 경기도 남양주 땅, 그것도 강퍅한 땅에 묻히기를 원한 것이다. 이곳은 지나치게 많은 바위가 무덤까지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무덤 주변에도 바위가 비치니 옥구와는 대조적인 땅이다.
풍수에서 바위는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믿어 신중하게 다뤄진다. 잘 쓰면 엄청난 규모의 발복을 가져다주지만, 나쁜 돌일 경우 큰 재앙을 일으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큰 권력과 재물 얻는다”
조선시대 ‘명산론’은 “흙은 살이 되고, 돌은 뼈가 되고, 물은 피가 되고, 나무는 모발이 된다”고 하여 돌줄(石脈)이 나타나면 매우 귀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돌은 원래부터 박힌 돌이어야 하고 지표면에 너무 심하게 노출되어서도 안 되고, 깨지거나 금이 간 돌이어서도 안 된다. 또 돌줄이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고 좌우로 균형을 이뤄야 하며, 그 생긴 모양이 둥글거나 반듯해야 한다. 비록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볼품없다 할지라도 전체 모양이 아름다우면 또한 귀한 것으로 여긴다.
다시 고형곤 박사의 무덤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 자리를 두고 풍수술사마다 극단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를 좋은 돌줄로 보고 어디까지를 나쁜 돌줄로 봐야 할지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대다수 풍수 호사가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데 반해 이와는 다른 평을 내놓은 이도 있다.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장은 이 터를 이렇게 극찬했다.
“힘이 있고 생기가 넘치는 자리다. 용의 비늘처럼 가지런한 바위의 행렬이 살아 있는 듯 꿈틀꿈틀 생기 넘치는 변화가 인상적이다. 보통사람들은 바위를 관재수에 비유해 두려워하지만 큰 권력과 재물을 표현한다. 큰일 속에는 작은 말썽도 있게 마련이고 그 정도의 관재수는 유명세라 생각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 경쾌하고 기분좋은 자리다.”
1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가 지세. 대구 앞산(대덕산)의 기운이 생가에 뻗치고 있다. 2 대구시 중구 삼덕동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가자리엔 현재 편의점이 들어서 있다. 3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명당이라는, 경북 구미시 박 전 대통령 할머니의 묘. 4 박근혜 전 대표의 선영인 국립현충원 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
다른 대권주자의 선영, 생가의 풍수와 비교하지 않으면 대선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이어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가와 선영을 살펴보자.
▼ 박근혜 전 대표 생가 (대구시 중구 삼덕동)
영남에서 지금까지 4명의 대통령이 나왔지만 모두 시골 출신이다. 그러나 영남 출신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대도시인 대구의 중심지에서 태어났다. 박 전 대표의 출생지는 대구시 중구 삼덕동 5-2이다. 이곳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해 이정우씨 집에서 처음 셋방살이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박 전 대표는 1952년 2월2일(양력) 태어났다. 군인이던 박 전 대통령의 근무지가 이리저리 바뀌어 가족의 거주지가 바뀌긴 했지만, 육 여사가 박 전 대표를 회임하여 낳아서 키운 곳이 이곳임은 분명하다.
소설가 김하인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형상화한 소설 ‘내 마음의 풍금소리’에서 삼덕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집집마다 담장이 높았고 대문이 꽉 닫힌 한옥과 양옥들은 철옹성 같았다. 삼덕동은 부자 동네다. 대구 시내 한복판, 시립도서관을 끼고 있었다.”
삼덕동이 있는 대구 중구청은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던 자리며 관찰사가 상주하던 곳이다. 삼덕동은 대구가 대한민국 3대 도시로 성장한 근원지다. 이곳은 주요 공공기관이 밀집된 정보, 금융, 유통의 중심지로서 대구의 심장부 기능을 수행했다.
대구 앞산 정기 받은 비범한 지형
삼덕동은 그 이름부터 비범하다. 천덕(天德), 지덕(地德), 인덕(人德) 세 가지 덕의 기운이 합쳐진 땅이란 의미이다. 지명은 그 땅의 기운을 반영한다. 이름에서부터 보통 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덕동 남쪽이 봉산(鳳山)동인데, 봉산의 다른 이름은 연구산(連龜山)으로 대구의 실제 주산이다. 연구산은 다시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대구의 명산 대덕산(大德山)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삼덕동의 지맥은 봉산과 대덕산으로 이어진다. 그 이름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다. 박 전 대통령은 비록 셋방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맨 처음 신혼집을 장만했을 때 풍수를 고려한 듯하다. 그의 가족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외할아버지 육종관(1893∼1965)씨는 충북 옥천군 능월리에서 대지주 육용필씨의 막내로 태어났다. 육종관씨는 미곡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을 해서 번 돈으로 대구 교동의 ‘삼정승집’이라 불리던 집을 사들인다. 1600년대의 김 정승, 이어서 송 정승, 그리고 민 정승이 나온 집으로, 육종관씨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민 정승의 후손 민 대감으로부터 2만500원에 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집 구입자금으로 쓴 돈은 재산의 절반이었다. 즉 그는 많은 돈을 들여 정승이 나올 집터를 골라 의도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훌륭한 자손을 두기 위한 풍수적 신념에서다. 이곳에 이사해 처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육영수 여사였다(1925년). 육 여사가 태어날 때 육종관씨가 맨 처음 물은 것이 ‘아들이냐 딸이냐’였다. 딸이라고 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시인 박목월이 쓴 육 여사 전기). 육종관씨는 육 여사 외에 무려 22명의 자손을 뒀으나(소실들과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포함) 삼정승집에서 태어난 이는 육 여사와 동생 육예수뿐이다.
육 여사는 대구 중심지에 셋방을 얻어 살 때 친정어머니 이경령, 여동생 육예수와 함께 생활했다. 셋방이기는 하지만 입지 선정에서 친정의 자문이나 조언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또한 육 여사 본인도 풍수에 관심이 많아 당대 이름을 날리던 풍수가 지창룡(1922∼99)씨와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표의 생가인 삼덕동 5-2번지 집은 한옥이었으나 지금은 재개발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그 자리에는 ‘유 플러스’라는 고층 건물이 서 있다. 그 가운데 ‘삼덕동 5-2’였던 지점에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들어서 있다. 부근에 ‘금융결제원 대구경북지역본부’가 있다.
위기의 시대에 승승장구
이 터를 살펴보자. 대구의 진산(할아버지 산)은 북쪽 팔공산이 아닌 남쪽 대덕산(660m)이다. 대구 사람들은 대덕산을 ‘앞산’이라고도 하는데 남향을 선호하는 전통 공간배치에서 창문을 열거나 대문을 나설 때 앞쪽에 보이는 가장 큰 산이 바로 대덕산이기 때문이다. 대덕산은 문자 그대로 큰 덕을 갖춘 산인데, 풍수적으로는 지기(地氣)가 강하고 크다는 의미다. 바위가 많은데다가 불꽃 모양의 생김새 때문에 불기운(火氣)이 강하다고도 한다.
이렇게 강하고 큰 기운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화기가 탱천하는 산이 없어서도 안 된다. ‘불꽃 모양의 강한 기운의 할아버지 산이 없으면 그 아래에 큰 명당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 ‘감룡경’에도 기록돼 있다.
대구 남쪽의 강한 기운은 북쪽으로 뻗어 내려가면서 부드럽고도 순한 기운으로 바뀐다.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봉우리를 맺는데 그곳이 바로 봉산(연구산)이다. 대덕산의 강하고 뜨거운 지기가 연구산에 이르러서도 제대로 제어가 안 되자 대구사람들이 이를 좀더 가라앉히기 위해 거북바위를 세워놓았다. 거북바위는 물의 신(水神)으로, 불기운(火氣)를 중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게 순화된 지기는 여러 작은 지맥을 따라 대구 전역으로 퍼지는데, 그 가운데 중심 지맥은 봉산문화사거리에서 삼덕동을 거쳐 신천에 이르러 멈춘다. 신천은 대구의 명당수로 서울의 청계천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능선을 제대로 살펴보기 힘들다. 도시개발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물줄기는 복개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로의 높고 낮은 지점을 연결해 보면 그 산의 흐름과 모양새를 알 수 있는데, 연구산에서 삼덕동으로 이어지는 지맥은 후덕하면서도 느릿느릿 좌우로 방향을 돌리면서 신천과 만난다.
고건 전 총리의 생가가 서울의 중심지 북악의 기운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한양의 명당수 청계천을 만나 멈추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고 전 총리 생가는 북에서 남으로 산줄기가 흘러내려옴에 반해, 박 전 대표의 생가는 방향이 그 반대이다. 그러다보니 지기의 흐름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나 홀로 거센 바람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이다. 험난한 시대, 위기의 시대에 거친 광야에서 깃발을 들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양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자의 땅이다. 박 전 대표의 부친 박 전 대통령도 이곳에 터를 잡은 후 6·25전쟁 중임에도 승승장구했다. 실제 박 전 대표는 위기에 강하다. 2004년 탄핵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을 구한 사람도 박 전 대표였다.
▼ 박근혜 전 대표 선영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박근혜 전 대표의 선영은 두 군데를 살펴야 한다. 하나는 부모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영면하는 동작동 국립묘지이다. 다른 하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구미 상모동 선영이다.
우선 구미 상모동 선영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당발복을 받아 대통령이 됐다고 소문이 나 있다. 이 자리는 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성빈씨가 다른 형제들(박용빈, 박일빈)과 공동 출자해 잡은 자리로 알려져 있다(박정희생가보존회 김재학 회장의 증언).
그런데 이 터에 대해서는 천하의 명당이기는 하지만 그 특이함 때문에 명당발복이 다하면 오히려 재앙을 입는다는 설이 있다. 박 전 대표의 증조모 묘는 풍수지리에서 요구하는 명당의 여러 조건을 모두 갖췄을 뿐만 아니라, 전망이 좋아 구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구미시의 명산인 천생산(天生山)이 이 무덤을 향해 절을 하는 산(조산(朝山))인데, 일자(一字)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묘가 명당이고 앞에 일자 모양의 산이 비칠 경우 제왕이 태어난다고 명나라 때 발간된 풍수서 ‘인자수지’는 적고 있다.
무덤 하단 부분은 큰 암석 덩어리들로 이뤄져 있다. 3m가 넘는 거대한 직사각형 암괴로서 이는 권력을 상징하지만 시효가 끝나면 후손이 이금치사(以金致死·쇠로 인해 죽임을 당함, 즉 총이나 칼에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한다고 풍수가들은 말한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쓴 ‘한국의 풍수사상’에서는 ‘혈전(穴前)에 노구(老?) 모양의 복암(伏岩)이 있으면 상패(喪敗)가 빈번하다’는 문장이 있는데 바로 이런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박정희 형제의 피살, 우연일까?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평범하지 않았다.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1925년 박 전 대통령의 넷째형 박한생씨가 사망했는데 원인은 정신질환이었다. 좌익이던 셋째형 박상희씨는 1946년 경찰에 죽임을 당한다. 1948년 국군 내 남로당계 소령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체포됐다가 가까스로 처형의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1974년 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됐고 1979년엔 박 전 대통령이 시해 당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군대에서 승승장구하여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사실 확률적으로는 매우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6·25전쟁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격변 상황이 없었다면 그의 군대 복귀 자체가 어려웠다. 또한 거듭되는 승진도 있을 수 없었다. 한때 좌익이던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고 할 만하다. 달리 말하면 조상의 선영 덕이 아니면 불가했다는 생각도 충분히 들 수 있다. 풍수가들은 ‘명당발복’을 가장 강력하게 받고서도 그 시효가 끝남과 동시에 비참한 몰락을 겪은 인물로 흔히 박 전 대통령을 꼽는다.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왜 박정희보다 더 똑똑했다고 알려진 셋째형 박상희씨는 권력을 잡지 못했는가’이다. 풍수는 이런 곤란한 질문에 대해 “명당은 그 자리를 쓰고 난 직후 태어난 사람에게 가장 확실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피해간다. 1917년 4월 할머니가 그 자리에 묻히고 그해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은 할머니 무덤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혈의 형태상 큰아들보다는 막내가 그 덕을 보게 되어 있다고 한다. 즉 혈의 상단보다는 하단 부분에 기가 응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큰아들이 아닌 막내가 명당의 수혜자였다는 것이다.
이곳 상모동 선영은 박 전 대통령보다는 한 세대가 뒤인 만큼 효과는 떨어지겠지만 워낙 명당이기에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다고 한다.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 소장의 평을 들어보자.
“선영 끝부분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험석은 마치 사자처럼 보인다. 뭇 짐승의 왕 모습이라고 할까. 특히 이곳은 우측 산(백호)이 발달한데다가, 선영 끝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전체적으로 막내와 여자에게 발복을 줄 수 있는 자리다. 이런 면에서 박 전 대표에게도 박 대통령만큼 강력한 지기의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박 전 대표에게는 그 부모, 즉 박 대통령 부부 묘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내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묘는 풍수적으로 어떨까. 동작동 국립묘지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 곳이다. 원래 이곳은 ‘동작릉(銅雀陵)’이라는 왕릉이 있던 자리다. 동작릉의 주인은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昌嬪安氏·1499∼1549)다. 몇 년 전 TV에서 방영된 사극 ‘여인천하’에 ‘창빈’이 등장하기도 하여 시청자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풍수가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왕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장흥 땅에 모셨다. 그러나 그곳 터가 좋지 않아 이듬해 이장했다. 이어 능의 이름을 동작릉이라 불렀다. 동작릉에 창빈을 안장한 후 창빈의 손자 하성군이 태어났다(1552년). 당시 임금은 문정왕후 소생인 명종이었는데, 명종은 아들이 없었다. 명종은 하성군을 총애하여 자주 궁궐에 불러들였다. 명종이 죽자 하성군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그가 바로 선조다. 이렇게 후궁의 막내 손자가 임금이 되자 동작릉의 명당발복이 소문난 것이다.
1 이명박 전 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함으로써 풍수적으로는 서울 강북에 ‘명당수’를 새로 열었다는 평이다. 2 경북 포항시 신광면 고주산 부근 이명박 전 시장의 할머니 묘. 3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영일목장 내 이명박 전 시장의 부모 묘.
박정희 묘에 물이 찬다?
동작동 국립묘역 전체가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러한 동작동 국립묘지 내에서 육 여사의 무덤자리를 소점한 지관은 지창룡(작고)씨였다고 한다. 그는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이후 저명인사들의 터 잡기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천하의 명당 안에서 정작 박 전 대통령 부부가 영면하는 자리(사진)는 불행하게도 가장 안 좋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풍수술사 손석우(작고)씨는 ‘터’라는 책에서 “육 여사 무덤자리는 머리카락이 자라고 손발톱이 자라는 냉혈(冷穴)로 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손씨는 1995년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선영을 용인에 잡아주면서 ‘남북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올 터’라고 예언하기도 한 사람이다.
이에 대해 지창룡씨는 “나는 육 여사와 친분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이곳 국립묘지에 터를 잡아달라는 청와대의 부탁을 받고 도착했을 때는 다른 지관의 지시에 의해 광(壙)을 파고 있어 관여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임응승 신부(은퇴)도 저서 ‘수맥과 풍수’에서 “광중(壙中)에 물이 찼다”고 적었다. 필자 또한 수년 전 이곳 관리인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 부부 묘의 봉분 잔디를 1년에 한 번씩 바꿔주는데, 그 까닭은 광중에 물이 차서 잔디가 녹아버리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덤에 물이 찬다는 것은 풍수의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땅 밑의 일은 파보지 않는 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 실제로 물이 차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육안으로 이곳 형세를 살펴보면 지맥이 연결되지도 않았고(현재 무덤 뒤는 보토(補土)된 것임) 좌우를 가까이서 감싸주는 것도 없다. 이에 대해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 소장은 “배경도 없고 등을 기댈 곳도 없는 외로운 자리다. 다만 무덤 앞의 장군묘역이 안산(案山)의 몫을 아름답게 하는데, 이들의 조회를 받을 뿐이다”라고 평한다. 구체적인 지지나 후원 세력보다는 그저 손님들의 지지나 조회만을 받을 뿐이라는 것이다.
▼ 이명박 전 시장 생가 (일본 오사카 소재 미상지)
누대의 가난을 딛고 한국의 명문가로 성장한 집안이 더러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집안도 이중 하나다. 이 전 시장뿐만 아니라 그의 형 이상득 국회부의장(4선 의원)도 이 시장 못지않은 입지전적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전 시장의 또 다른 형은 대학교수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고,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집안에서 자란 형제들이 이렇게 성공하자 풍수가들은 태어난 집터와 조상 선영의 영향일 것이라고 예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고향으로 알려진 포항시 흥해읍 덕실마을은 사실 이 전 시장 아버지의 고향이다. 이 전 시장은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이 전 시장이 일본에서 태어난 것은 식민지 국민의 불행 탓이다. 이 전 시장이 쓴 ‘신화는 없다’를 토대로 그의 출생지와 어린 시절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이명박 전 시장의 선친(이충우)은 1935년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일시 귀국해 결혼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이 시장 부모는 여섯 남매를 낳아 키웠는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그해 11월 오사카에서 짐을 꾸려 귀국했다. 그때 이 전 시장은 네 살이었다. 이후 그는 포항의 달동네, 서울 이태원의 판자촌 등을 전전하며 그 누구도 겪지 못한 가난과 힘든 세월을 극복해 나간다.’
일본 오사카가 유년시절의 이명박에게 영향을 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이태원으로 오기 전까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곳은 포항시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오사카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 이 전 시장의 경우 현재로서는 생가를 풍수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다만 이 전 시장과 그의 형제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과정을 미뤄 짐작건대 오사카의 생가는 길지(吉地)였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 이명박 전 시장 선영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목장)
선영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모 묘이며, 그 다음이 조부모, 증조부모 묘이다. 여기선 역순으로 이 전 시장의 증조부모 묘, 조부모 묘, 부모 묘 순으로 살피기로 한다.
이 전 시장의 증조부모 묘와 조부 묘는 포항시 신광면 만석2리에 있다. 근처에 ‘신광온천’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증조부모 묘와 조부모 묘는 이 전 시장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부터 풍수가가 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학원을 경영하는 주민 편경도(48)씨는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답사객이 더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선영에 대해서는 ‘지기를 받기는 했으나 약하고, 우백호 끝부분이 등을 돌린 바람에 수구가 벌어졌다’는 것이 여러 풍수 호사가의 종합된 의견이다. 그저 양지바른 곳에 편안하게 안장됐다는 것이다.
“지기를 받기는 했으나 약하고…”
그러나 증조부모 묘와 조부모 묘가 특이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풍수술사도 있다. 지종학 풍수지리연구소 소장은 증조모 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증조모 묘는 봉우리 정점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맥선(脈線)의 정중심에 앉아 있으며, 비록 주변은 군인 참호 등으로 파헤쳐져 어수선하지만 묘가 있는 지점만큼은 통통하고 깨끗한 덩어리 땅이다. 이전까지의 추하고 지저분한 용세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곳이다. 좌측의 작은 가지는 묘를 향해 깊숙이 감아주며, 우측은 길고 큰 능선이 되어 골바람을 막아준다. 묘의 전면에는 널찍한 명당을 형성했으며, 주변은 비학산(飛鶴山)의 군봉(群峰)들이 그림같이 늘어서 있다. 만일 나의 판단이 맞는다면 일절(一節)로서 혈을 맺은 것이니, 이곳은 진흙 속의 보석일 것이다.”
이런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가난한 이명박 형제들의 성공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증조모 묘의 영향은 부모 묘나 조부모 묘의 영향보다는 약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풍수 호사가 민영삼씨는 이곳 산(고주산·347m) 정상 가까이에 있는 할머니 묘를 극찬하며 대권(大權)을 잡을 수도 있는 땅이라고 말한다.
“이 전 시장의 할머니 남평문씨 묘는 청룡백호가 마치 꽃게가 두 다리를 포개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감싸고 있다. 백호는 길게 아래까지 내려와 있으며 청룡작국이어서 그 국세가 가히 잠룡(潛龍) 중에서 최고이다. 묘터의 국세로 본다면 한국 정치의 큰 획을 그을 만한 그릇이다. 뿐만 아니라 무덤에 쓰이는 당판의 형태 역시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증조묘소나 경남 지수면의 LG그룹 조상묘터 국(局)안에서의 혈(穴)에서 보듯이 60~70도 경사진 곳에 위치한 특이한 괴혈(怪穴)이다.”
세종, 정종의 업적에 비견
그러나 이 같은 평은 대다수 풍수술사가 땅을 보는 보편적 방법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게 중론이다. 비록 주변 전망이 좋을지라도 지기가 흐르지 않는 산비탈 가파른 곳에 쓴 것으로, 혈장도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전 시장의 부모 묘(사진)는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송갈1리 영일목장 안에 있다. 정기 풍수답사에 수십명의 호사가를 인솔하는 지종학 풍수연구소 소장의 의견이다.
“규칙과 질서가 전혀 없는 중구난방의 요란한 모습이다. …이곳의 묘는 그렇듯 무질서한 능선의 옆구리에 쓰였는데, 매우 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편 청룡은 달아나고 물은 수습하지 못하는 지세인데, 그 모습이 흉하였는지 묘 앞에 작은 저수지를 조성해 물을 가두어뒀다. 그러나 그 물빛 또한 누런빛으로 탁하기 그지없다. 무엇 하나 이로움이 없다 하겠다.”
풍수술사들의 눈에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고인들에게는 편안하고 양지바른 땅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이 전 시장 집안이 풍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김두규 ● 1959년 전북 순창 출생 ● 한국외국어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독일 뮌스터대 박사(독문학)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2000~2001) ● 現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 저서 : ‘민중성과 리얼리즘’, ‘권력과 풍수’
이처럼 이 전 시장이 풍수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한국의 풍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청계천 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청계천은 한국의 중심인 서울의 명당수(明堂水)이다. 이 전 시장은 콘크리트로 덮여 있던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서울의 명당을 되살렸다. 이는 조선시대 세종, 정종이 직접 청계천을 보존한 것에 비견될 만한 업적이다.
송나라 성리학의 대가 주자(朱子)의 제자이면서도 거꾸로 스승인 주자에게 풍수를 가르친 이가 채원정(蔡元定)이다. 채원정이 쓴 풍수서 ‘발미론’은 조선조 사대부들이 금과옥조로 여긴 책인데, 이 책에 “음지호, 불여심지호(陰地好, 不如心地好)”란 말이 있다. “무덤(陰地)이 제아무리 좋아도 마음(心地) 좋은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대통령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 사회에서 유력 대선주자와 관련된 풍수는 진부하긴 해도 여전히 세인의 관심을 끄는 주제다. 풍수전문가 김두규 교수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수위권을 형성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해 풍수를 연구했다. 김 교수는 이를 책으로 엮어 출판(랜덤하우스)할 예정인데, 김 교수와 출판사의 양해를 구해 주요 내용을 미리 소개한다.
풍수 호사가들은 항상 바쁘다. 4년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선거가 있고, 5년마다 대통령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풍수 연구자들은 선영(先塋)과 생가(生家)의 지세를 보면 누가 당선하고 누가 낙선할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언론에서 유력 대선후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지지도가 요동을 칠 때마다 풍수 호사가들의 행선지도 바뀐다. 2002년 대선 때도 이인제 의원, 한화갑 민주당 대표, 이회창 전 총리, 정몽준 의원, 노무현 대통령의 선영과 생가에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요즘에는 여론조사에서 ‘빅3’ 구도를 이루는 고건 전 총리,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선영과 생가가 풍수 호사가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필자는 최근 3인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했다. 물론 이들뿐 아니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강금실 전 장관, 유시민 장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천정배 전 법부무 장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생가와 선영도 다음 대선과 관련해 풍수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긴 하다.
제왕(帝王)을 가려내는 풍수
‘왜 또 풍수타령이냐’고 힐난할지 모르겠다. 그 답은 ‘대통령이나 제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는 것’이라는 풍수관(觀) 때문이다. ‘밥 굶지 않고 자손 끊이지 않는 땅이야 사람의 힘(풍수실력)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제후가 나올 큰 명당은 주로 기형괴혈(奇形怪穴)에 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지리오결)라는 것이 풍수의 주장이다. 그래서 풍수를 ‘제왕의 술(術)’이라 했다. 물론 풍수에서도 ‘땅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렇다고 하여 땅을 아무렇게나 선택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붙인다.
큰 지도자를 내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말을, 큰 지도자는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대정신(天時)’에 부합하는 자에게 ‘지리의 이점(地利)’이 주어지며 그것은 그들이 태어난 생가와 선영을 통해 발현된다고 보는 게 맞다.
땅은 저마다 쓰임이 다르며, 같은 땅이라도 시대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다. 이 점에서 ‘노마디즘(고정된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현상)’과 풍수는 유사한 사고체계를 갖는다. ‘특정시점, 특정공간에서 유목민(노마드)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라는 가설이 도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요 대선주자의 생가와 선영에 발현되는 땅의 기운(地氣)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2005년 9월2일부터 5일까지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서 열린 ‘2005년 세계생명문화포럼(이사장·김지하)’은 ‘한류(韓流)’와 함께 ‘풍수’를 특별주제로 다뤘다. 발표자의 한 분인 암도(巖度) 스님(전 백양사 주지)은 “사람이 성웅이나 걸물이 되려면 ‘탯자리 땅(태어난 곳, 생가)’이 좋아야 하고 그런 곳에서 살아야 생체리듬이 좋고 지성리듬이 좋다”고 말했다.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려면 부부가 합궁하는 잠자리가 좋은 땅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한글학자 유희(柳僖)의 어머니 사주당(師朱堂) 이씨가 쓴 ‘태교신기(胎敎新記)’는 “선생이 10년 가르치는 것이 어머니가 열 달 키우는 것만 못하고, 어머니가 열 달 키우는 것이 아버지가 하루 만드는 것만 못하다(師敎十年, 未若母十月之育, 母育十月, 未若父一日之生)”고 하여 잉태하는 순간과 장소, 어머니 뱃속에서의 가르침,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 순으로 그 중요도를 매겼다.
조선시대 지관 선발 시험 과목인 ‘지리신법’은 “땅의 기운에 따라 인간의 청탁(淸濁), 현우(賢愚), 선악(善惡), 귀천(貴賤), 빈부(貧富), 요수(夭壽)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농경사회에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나온 곡식을 먹고 살았다. 이때 물과 곡식은 그 땅의 특성에 따라 맛과 질이 달라지는데, 이렇게 몇 세대가 지나면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체질이 형성된다. 좋은 땅에서 살면 좋은 체질로 바뀌고 나쁜 땅에서 살면 나쁜 체질이 되는 것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이러한 까닭에 생겨난 말이다.
풍수와는 전혀 무관한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가 쓴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라는 글도 재미있다. 그는 자신이 영리해진 요인 중 하나로 장소와 풍토, 즉 풍수를 언급했다.
“어느 누구도 아무 곳에서나 살 수는 없다. 자기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제로 이 점에 있어 선택을 제한받지 않을 수 없다. ‘풍토’가 신진대사에 미치는 영향, 즉 그 부정적인 영향과 긍정적인 영향, 이 모두가 너무나 커서 장소와 풍토를 선택할 때 한번 실수를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안되기 일쑤이며 실제로 그 과업과도 동떨어지게 된다. 더욱이 장소와 풍토 선정에 실수한 자는 자신의 과업에 접해볼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 이 때문에 장소와 풍토 선택이 잘못된 자는 결국 동물적 ‘활력’이 부족하여 가장 정신적인 영역으로 밀려오는 저 자유, ‘이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깨닫는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된다.”
풍수에서는 생가뿐만 아니라 부모를 모신 선영도 중요시한다. 유력 정치인들은 심심치 않게 부모 묘를 이장했다. 2004년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는 선친 묘를 이장했다. 2005년엔 이인제 전 대선후보의 선영이 이장됐다. 그보다 앞서 한화갑 민주당 대표와 김종필 자민련 전 총재(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선영을 이장한 적이 있다(1995년). 과연 풍수와 전혀 무관하게 이장한 것일까.
서양인과 달리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산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사람으로 인식한다. 산 사람에게 거주할 집이 필요하듯, 죽은 사람에게도 거주할 집이 필요하다. ‘산 사람’이 사는 집을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을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산 사람이 이사를 하면 마시고 먹는 물과 곡물이 달라진다. 이것을 장복하면 체질에 변화가 온다. 또 만나는 사람과 접하는 문화가 달라진다. 이사를 함으로써 몸과 마음이 바뀌게 되는데, 이로써 한 집안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바꿔보려는 것이 ‘양택 풍수’의 목적이다.
‘음택 풍수’도 필요하면 이장(移葬)을 해야 한다고 권한다. 죽은 사람의 집인 음택(묘지)이 안 좋으면 죽은 사람의 가족인 ‘산 사람’에게도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조대왕, 흥선대원군, 명성황후도 선영을 이장한 바 있다.
정조대왕은 선친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서울시립대 터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는데, 그 후 원하던 왕자를 얻었다. 이 왕자가 순조 임금이 됐다.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선친 남연군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 이후 아들 고종이 왕이 되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명성황후는 좋은 자리를 찾아 친정아버지의 묘를 몇 번이나 이장했다(경기도 이천, 충북 제천, 경기도 광주, 충남 보령 등). 이 모두가 조상을 좋은 땅에 모시고자 하는 묘지 풍수 때문이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주요 정치인들이 선영을 이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생사관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생사관은 중국 성리학의 대가 정자(程子)가 쓴 풍수논문 ‘장설(葬說)’에 나타난다.
“땅이 좋으면 그곳에 안장된 조상의 영혼이 편안할 것이며 그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무의 뿌리를 북돋워주면 줄기와 잎들이 무성해지는 이치와 같다.”
이러다보니 전통적으로 묘지 풍수가 중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상의 무덤도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5대조… 10대조 등 거슬러 올라가면 한둘이 아니다. 이 모두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후손들은 불안해서 못살 것이다. 또 조선시대 풍수를 관장한 관리인 지관들은 이 많은 무덤을 어떻게 다 살필 수 있었을까 의문도 든다. 이에 대해서 ‘지리신법(호순신)’은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
“고조, 증조 이래의 무덤들을 차등화해 판단해야 한다. 촌수가 멀고 소원하면 그 길흉화복이 반드시 완만하게 나타나며, 가깝고 친하면 그 길흉화복이 반드시 빠르게 나타난다.”
즉 먼 조상의 무덤보다는 부모, 조부모 등 가까운 조상의 무덤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생가가 선영보다 중요
집터에 관한 풍수서로 그 역사가 1000년 넘는 고전이 ‘황제택경(黃帝宅經)’이다. 이 책은 둔황(敦煌) 석굴에서 발굴되어 그 진위가 고증된 주택 풍수서이다. 이 책에 주택과 조상의 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다룬 부분이 나온다.
‘묏자리가 흉하고 집터가 좋으면 자손은 벼슬길이 좋다.
묏자리가 좋고 집터가 나쁘면 자손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란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좋으면 자손이 영화를 누린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나쁘면 자손이 타향살이에 손이 끊긴다.’
여기서 집터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하는데, 결국 집터의 영향이 조상의 무덤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고건 전 총리,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시장의 생가와 선영을 살펴보기로 한다.
▼ 고건 전 총리 생가 (서울 종로구 청진동 종로구청 부근)
역대 대통령이나 유력 대통령후보 가운데 출생지가 서울인 사람은 없다. 고건 전 총리는 서울 태생이다. 다만 그의 선친 고형곤(高亨坤·1906∼2004) 박사의 출생지는 전북 옥구다. 고 전 총리의 생가는 종로구 청진동 206-3으로, 현재 재개발을 기다리며 폐가로 방치된 상태이다. 종로구청 맞은편 뒷골목에 있는데, 생가 옆은 한정식집 ‘미락(美樂)’이 영업 중이다.
이곳은 서울의 도심이어서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랑물길은 복개됐다. 도로 또한 확장됐다. 그렇다고 땅의 본래 형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변의 지형지세를 살펴보면 땅이 높은 부분이 있고 낮은 부분이 있다. 이 높은 부분들을 계속 이어가면 본래의 산줄기를 복원할 수 있다. 이곳 산의 전체적 흐름은 다음과 같다.
북악산 좌측의 산→삼청동(금융연수원)→팔판동→소격동→한국일보→연합통신→이색 사당(조계사와 인접)→석탄공사 (서쪽으로 90도 방향을 틀어서)→종로구청 앞 도로→청진동 생가→청계천
경복궁과 청와대를 감싸는 낮은 능선이다. 이를 풍수에서는 ‘좌청룡(左靑龍)’이라 한다. 역대 대통령 생가가 대부분 좌청룡 끝자락에 있었는데, 고 전 총리의 생가 풍수도 이와 비슷하다. 북악산에서 생가까지 이어지는 지세의 흐름이 마치 쌀을 이는 ‘조리’ 모양이다. 풍수 전문용어로는 와혈(窩穴)이라 한다. ‘닭 둥지’ ‘오므린 손바닥’ ‘등잔’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1 고건 전 총리 생가의 지세. 서울 북악산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기세가 생가를 지난다. 2 고건 전 총리의 선친이 생전 자신의 묏자리를 직접 정해 이를 풍수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메모. 3 서울 종로구청 부근 고전 전 총리 생가터. 4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마을에 있는 고건 전 총리 선친(고 고형곤 박사)의 묘.
북악산이 베개, 종로구청이 뒷마당
북악산이 생가의 중심축을 형성하며 베개 구실을 한다. 종로구청은 이 혈의 뒷마당(後場)에 해당하는데 생가에 지기(地氣)가 모이게끔 뒷받침을 해준다. 흔히 이와 같은 형세를 풍수 전문용어로 귀성(鬼星)과 낙산(樂山)으로 표기하는데, 북악산 정기의 한 줄기가 생가에 뭉쳐 있다는 증거다.
흥미로운 것은 종로구청 부근이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였다는 사실이다(현재 종로구청에 이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음). 정도전은 유학자이자 혁명가로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있어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신권(臣權)정치’를 꿈꿨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왕권 강화를 추진한 이방원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3월28일 기자들과 북악산을 오르며 이 터의 풍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삼봉 정도전이 자기 집터가 천자만손할 터라고 했는데 맞아죽는 봉변을 당하고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500년 뒤 그 자리에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서 후손을 교육하는 곳이 된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세란 고립적으로 불변의 기운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른 기운하고 맞아서 변하는 것 같다.”
노 대통령도, 정도전도 이 터를 잘 봤다. 그러나 좀더 세밀하게 본다면 정도전 집터는 지세가 불안할 뿐만 아니라 지기가 뭉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종로구청 앞의 도로보다 약간 낮다. 능선의 중심선이 아니라 그 기울어지는 사면(斜面)에 붙은 흙덩어리(鬼星)이다. 흘러가는 지기가 특정한 장소에서 멈추어 모이게 하기 위해 뒷받침을 해주는 부분이다. 지기가 흘러가는 땅에 터를 잡으면 쉽게 흥했다가 쉽게 망하는 이른바 ‘속성속패(速成速敗)’의 땅이라고 한다. 잠시 머물다가 갈 땅이다.
조선시대 지관 선발에 채택된 풍수서 ‘장서(금낭경)’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재앙과 복은 천리의 차이를 가져온다”고 했는데, 바로 정도전 집터가 그 경우이다. 고건 전 총리의 선친 고형곤 박사가 이곳에 집터를 마련할 때 풍수를 고려했을까. 개연성은 충분하다.
▼ 고건 전 총리 선영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마을 뒷산)
2004년, 99세의 고형곤 박사가 작고하자 풍수계가 크게 술렁였다. 그의 묘 때문이었다. 고 박사는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전북대 총장, 국회의원, 학술원 원로회원을 지냈으며 말년에 내장산 암자에서 선(禪) 수행과 집필 작업을 하다 작고했다. 고 박사는 사후 당연히 화장(火葬)할 것으로 예상됐다. 아들인 고 전 총리가 1998년 민선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면서 장례문화를 화장으로 바꾸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을 뿐만 아니라 고 전 총리의 모친이 87세로 작고했을 때도 모친을 화장해 용미리 납골당에 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 박사는 매장(埋葬)을 유언으로 남겼다. 고 박사는 정교한 풍수지리에 입각해 자신이 직접 무덤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무덤의 깊이며 좌향(坐向)까지 적시해 메모로 남겼다. 더구나 그 위치도 조상 묘가 있는 전북 옥구가 아니라 경기도 남양주에 잡은 것이다. 정확한 지점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마을 뒷산으로, 300평 규모이다. 화장주의자인 고 전 총리라도 부친의 유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 박사는 풍수지리설을 선호했으며, 자신의 묘가 아들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믿고 자신의 묏자리를 직접 선택한 것이다. 유력 정치인의 집안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매우 흥미있는 사안이라 풍수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바위 많아 강퍅하고 氣 세다”
고형곤 박사의 풍수 신봉은 그의 철학관에 기인한다. 고 박사는 후설과 하이데거에서 출발했지만 말년에는 선(禪) 사상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70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 정읍 내장산 도덕암 뒤에 암자를 짓고 10년 이상 선 수행을 했을 정도였다.
고 박사의 철학에 대해 소광희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분야로는 존재론이요, 방법론으로는 직관”이라고 평했다. 서양 철학자 베르그송이나 후설의 직관이 아닌 선(禪)의 세계에서 말하는 직관이라고 한다.
물론 선의 직관과 풍수의 직관은 전적으로 같을 수는 없지만, 인간과 대지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풍수사상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풍수가 중에는 불가 출신이 많다(도선, 의상, 묘청, 신돈, 무학 등). 이 점을 고려하면 고 박사의 풍수 신봉은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풍수에서는 ‘땅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고 박사는 하이데거를 인용해 “대지를 보면, 여타의 셋인 하늘, 인간, 신적인 것을 그 네 가지의 단일에서 이미 동시에 본다”고 했다. 결국 고 박사의 묏자리는 그의 철학의 마지막 완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고 박사의 묘가 들어선 터에 대해 풍수 호사가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그의 묘에는 풍수 호사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풍수사이트에서는 이 터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시중 술사들의 중론은 ‘바위가 많고 천광자리에도 돌이 나와 마땅한 터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기가 지나치게 세다는 얘기다.
반면 고 전 총리 집안의 전북 옥구 묘 풍수는 ‘원만함’ 그 자체다. 다음은 필자가 한 출판물에서 평가한 내용이다.
“역대 대통령의 선영은 용(龍·무덤 뒤에 이어지는 산 능선)과 혈장(무덤을 쓰는 지점)이 분명한데다 풍수설을 좇은 흔적이 뚜렷한데, 전북 옥구의 선영은 사방의 산들이 편안하게 감싸고 있는 곳에 수십 기의 조상 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내룡과 혈장보다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아름답다. 많은 사람이 도와줄 터이다. 역대 대통령이나 다른 대권후보들의 선영에서 편벽됨과 자기 독단이 강하게 드러나는 땅의 성정을 느낀다면, 이곳은 원만하면서도 완벽한 성정의 땅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고형곤 박사는 이렇게 편안한 옥구의 선영에 안장되기를 거부하고 고향과 먼 경기도 남양주 땅, 그것도 강퍅한 땅에 묻히기를 원한 것이다. 이곳은 지나치게 많은 바위가 무덤까지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무덤 주변에도 바위가 비치니 옥구와는 대조적인 땅이다.
풍수에서 바위는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믿어 신중하게 다뤄진다. 잘 쓰면 엄청난 규모의 발복을 가져다주지만, 나쁜 돌일 경우 큰 재앙을 일으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큰 권력과 재물 얻는다”
조선시대 ‘명산론’은 “흙은 살이 되고, 돌은 뼈가 되고, 물은 피가 되고, 나무는 모발이 된다”고 하여 돌줄(石脈)이 나타나면 매우 귀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돌은 원래부터 박힌 돌이어야 하고 지표면에 너무 심하게 노출되어서도 안 되고, 깨지거나 금이 간 돌이어서도 안 된다. 또 돌줄이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고 좌우로 균형을 이뤄야 하며, 그 생긴 모양이 둥글거나 반듯해야 한다. 비록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볼품없다 할지라도 전체 모양이 아름다우면 또한 귀한 것으로 여긴다.
다시 고형곤 박사의 무덤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 자리를 두고 풍수술사마다 극단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를 좋은 돌줄로 보고 어디까지를 나쁜 돌줄로 봐야 할지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대다수 풍수 호사가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데 반해 이와는 다른 평을 내놓은 이도 있다.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장은 이 터를 이렇게 극찬했다.
“힘이 있고 생기가 넘치는 자리다. 용의 비늘처럼 가지런한 바위의 행렬이 살아 있는 듯 꿈틀꿈틀 생기 넘치는 변화가 인상적이다. 보통사람들은 바위를 관재수에 비유해 두려워하지만 큰 권력과 재물을 표현한다. 큰일 속에는 작은 말썽도 있게 마련이고 그 정도의 관재수는 유명세라 생각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 경쾌하고 기분좋은 자리다.”
1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가 지세. 대구 앞산(대덕산)의 기운이 생가에 뻗치고 있다. 2 대구시 중구 삼덕동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가자리엔 현재 편의점이 들어서 있다. 3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명당이라는, 경북 구미시 박 전 대통령 할머니의 묘. 4 박근혜 전 대표의 선영인 국립현충원 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
다른 대권주자의 선영, 생가의 풍수와 비교하지 않으면 대선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이어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가와 선영을 살펴보자.
▼ 박근혜 전 대표 생가 (대구시 중구 삼덕동)
영남에서 지금까지 4명의 대통령이 나왔지만 모두 시골 출신이다. 그러나 영남 출신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대도시인 대구의 중심지에서 태어났다. 박 전 대표의 출생지는 대구시 중구 삼덕동 5-2이다. 이곳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해 이정우씨 집에서 처음 셋방살이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박 전 대표는 1952년 2월2일(양력) 태어났다. 군인이던 박 전 대통령의 근무지가 이리저리 바뀌어 가족의 거주지가 바뀌긴 했지만, 육 여사가 박 전 대표를 회임하여 낳아서 키운 곳이 이곳임은 분명하다.
소설가 김하인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형상화한 소설 ‘내 마음의 풍금소리’에서 삼덕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집집마다 담장이 높았고 대문이 꽉 닫힌 한옥과 양옥들은 철옹성 같았다. 삼덕동은 부자 동네다. 대구 시내 한복판, 시립도서관을 끼고 있었다.”
삼덕동이 있는 대구 중구청은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던 자리며 관찰사가 상주하던 곳이다. 삼덕동은 대구가 대한민국 3대 도시로 성장한 근원지다. 이곳은 주요 공공기관이 밀집된 정보, 금융, 유통의 중심지로서 대구의 심장부 기능을 수행했다.
대구 앞산 정기 받은 비범한 지형
삼덕동은 그 이름부터 비범하다. 천덕(天德), 지덕(地德), 인덕(人德) 세 가지 덕의 기운이 합쳐진 땅이란 의미이다. 지명은 그 땅의 기운을 반영한다. 이름에서부터 보통 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덕동 남쪽이 봉산(鳳山)동인데, 봉산의 다른 이름은 연구산(連龜山)으로 대구의 실제 주산이다. 연구산은 다시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대구의 명산 대덕산(大德山)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삼덕동의 지맥은 봉산과 대덕산으로 이어진다. 그 이름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다. 박 전 대통령은 비록 셋방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맨 처음 신혼집을 장만했을 때 풍수를 고려한 듯하다. 그의 가족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외할아버지 육종관(1893∼1965)씨는 충북 옥천군 능월리에서 대지주 육용필씨의 막내로 태어났다. 육종관씨는 미곡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을 해서 번 돈으로 대구 교동의 ‘삼정승집’이라 불리던 집을 사들인다. 1600년대의 김 정승, 이어서 송 정승, 그리고 민 정승이 나온 집으로, 육종관씨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민 정승의 후손 민 대감으로부터 2만500원에 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집 구입자금으로 쓴 돈은 재산의 절반이었다. 즉 그는 많은 돈을 들여 정승이 나올 집터를 골라 의도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훌륭한 자손을 두기 위한 풍수적 신념에서다. 이곳에 이사해 처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육영수 여사였다(1925년). 육 여사가 태어날 때 육종관씨가 맨 처음 물은 것이 ‘아들이냐 딸이냐’였다. 딸이라고 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시인 박목월이 쓴 육 여사 전기). 육종관씨는 육 여사 외에 무려 22명의 자손을 뒀으나(소실들과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포함) 삼정승집에서 태어난 이는 육 여사와 동생 육예수뿐이다.
육 여사는 대구 중심지에 셋방을 얻어 살 때 친정어머니 이경령, 여동생 육예수와 함께 생활했다. 셋방이기는 하지만 입지 선정에서 친정의 자문이나 조언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또한 육 여사 본인도 풍수에 관심이 많아 당대 이름을 날리던 풍수가 지창룡(1922∼99)씨와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표의 생가인 삼덕동 5-2번지 집은 한옥이었으나 지금은 재개발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그 자리에는 ‘유 플러스’라는 고층 건물이 서 있다. 그 가운데 ‘삼덕동 5-2’였던 지점에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들어서 있다. 부근에 ‘금융결제원 대구경북지역본부’가 있다.
위기의 시대에 승승장구
이 터를 살펴보자. 대구의 진산(할아버지 산)은 북쪽 팔공산이 아닌 남쪽 대덕산(660m)이다. 대구 사람들은 대덕산을 ‘앞산’이라고도 하는데 남향을 선호하는 전통 공간배치에서 창문을 열거나 대문을 나설 때 앞쪽에 보이는 가장 큰 산이 바로 대덕산이기 때문이다. 대덕산은 문자 그대로 큰 덕을 갖춘 산인데, 풍수적으로는 지기(地氣)가 강하고 크다는 의미다. 바위가 많은데다가 불꽃 모양의 생김새 때문에 불기운(火氣)이 강하다고도 한다.
이렇게 강하고 큰 기운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화기가 탱천하는 산이 없어서도 안 된다. ‘불꽃 모양의 강한 기운의 할아버지 산이 없으면 그 아래에 큰 명당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 ‘감룡경’에도 기록돼 있다.
대구 남쪽의 강한 기운은 북쪽으로 뻗어 내려가면서 부드럽고도 순한 기운으로 바뀐다.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봉우리를 맺는데 그곳이 바로 봉산(연구산)이다. 대덕산의 강하고 뜨거운 지기가 연구산에 이르러서도 제대로 제어가 안 되자 대구사람들이 이를 좀더 가라앉히기 위해 거북바위를 세워놓았다. 거북바위는 물의 신(水神)으로, 불기운(火氣)를 중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게 순화된 지기는 여러 작은 지맥을 따라 대구 전역으로 퍼지는데, 그 가운데 중심 지맥은 봉산문화사거리에서 삼덕동을 거쳐 신천에 이르러 멈춘다. 신천은 대구의 명당수로 서울의 청계천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능선을 제대로 살펴보기 힘들다. 도시개발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물줄기는 복개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로의 높고 낮은 지점을 연결해 보면 그 산의 흐름과 모양새를 알 수 있는데, 연구산에서 삼덕동으로 이어지는 지맥은 후덕하면서도 느릿느릿 좌우로 방향을 돌리면서 신천과 만난다.
고건 전 총리의 생가가 서울의 중심지 북악의 기운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한양의 명당수 청계천을 만나 멈추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고 전 총리 생가는 북에서 남으로 산줄기가 흘러내려옴에 반해, 박 전 대표의 생가는 방향이 그 반대이다. 그러다보니 지기의 흐름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나 홀로 거센 바람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이다. 험난한 시대, 위기의 시대에 거친 광야에서 깃발을 들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양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자의 땅이다. 박 전 대표의 부친 박 전 대통령도 이곳에 터를 잡은 후 6·25전쟁 중임에도 승승장구했다. 실제 박 전 대표는 위기에 강하다. 2004년 탄핵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을 구한 사람도 박 전 대표였다.
▼ 박근혜 전 대표 선영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박근혜 전 대표의 선영은 두 군데를 살펴야 한다. 하나는 부모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영면하는 동작동 국립묘지이다. 다른 하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구미 상모동 선영이다.
우선 구미 상모동 선영의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당발복을 받아 대통령이 됐다고 소문이 나 있다. 이 자리는 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성빈씨가 다른 형제들(박용빈, 박일빈)과 공동 출자해 잡은 자리로 알려져 있다(박정희생가보존회 김재학 회장의 증언).
그런데 이 터에 대해서는 천하의 명당이기는 하지만 그 특이함 때문에 명당발복이 다하면 오히려 재앙을 입는다는 설이 있다. 박 전 대표의 증조모 묘는 풍수지리에서 요구하는 명당의 여러 조건을 모두 갖췄을 뿐만 아니라, 전망이 좋아 구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구미시의 명산인 천생산(天生山)이 이 무덤을 향해 절을 하는 산(조산(朝山))인데, 일자(一字)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묘가 명당이고 앞에 일자 모양의 산이 비칠 경우 제왕이 태어난다고 명나라 때 발간된 풍수서 ‘인자수지’는 적고 있다.
무덤 하단 부분은 큰 암석 덩어리들로 이뤄져 있다. 3m가 넘는 거대한 직사각형 암괴로서 이는 권력을 상징하지만 시효가 끝나면 후손이 이금치사(以金致死·쇠로 인해 죽임을 당함, 즉 총이나 칼에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한다고 풍수가들은 말한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쓴 ‘한국의 풍수사상’에서는 ‘혈전(穴前)에 노구(老?) 모양의 복암(伏岩)이 있으면 상패(喪敗)가 빈번하다’는 문장이 있는데 바로 이런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박정희 형제의 피살, 우연일까?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평범하지 않았다.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1925년 박 전 대통령의 넷째형 박한생씨가 사망했는데 원인은 정신질환이었다. 좌익이던 셋째형 박상희씨는 1946년 경찰에 죽임을 당한다. 1948년 국군 내 남로당계 소령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체포됐다가 가까스로 처형의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1974년 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됐고 1979년엔 박 전 대통령이 시해 당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군대에서 승승장구하여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사실 확률적으로는 매우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6·25전쟁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격변 상황이 없었다면 그의 군대 복귀 자체가 어려웠다. 또한 거듭되는 승진도 있을 수 없었다. 한때 좌익이던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고 할 만하다. 달리 말하면 조상의 선영 덕이 아니면 불가했다는 생각도 충분히 들 수 있다. 풍수가들은 ‘명당발복’을 가장 강력하게 받고서도 그 시효가 끝남과 동시에 비참한 몰락을 겪은 인물로 흔히 박 전 대통령을 꼽는다.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왜 박정희보다 더 똑똑했다고 알려진 셋째형 박상희씨는 권력을 잡지 못했는가’이다. 풍수는 이런 곤란한 질문에 대해 “명당은 그 자리를 쓰고 난 직후 태어난 사람에게 가장 확실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피해간다. 1917년 4월 할머니가 그 자리에 묻히고 그해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은 할머니 무덤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혈의 형태상 큰아들보다는 막내가 그 덕을 보게 되어 있다고 한다. 즉 혈의 상단보다는 하단 부분에 기가 응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큰아들이 아닌 막내가 명당의 수혜자였다는 것이다.
이곳 상모동 선영은 박 전 대통령보다는 한 세대가 뒤인 만큼 효과는 떨어지겠지만 워낙 명당이기에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다고 한다.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 소장의 평을 들어보자.
“선영 끝부분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험석은 마치 사자처럼 보인다. 뭇 짐승의 왕 모습이라고 할까. 특히 이곳은 우측 산(백호)이 발달한데다가, 선영 끝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전체적으로 막내와 여자에게 발복을 줄 수 있는 자리다. 이런 면에서 박 전 대표에게도 박 대통령만큼 강력한 지기의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박 전 대표에게는 그 부모, 즉 박 대통령 부부 묘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내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묘는 풍수적으로 어떨까. 동작동 국립묘지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 곳이다. 원래 이곳은 ‘동작릉(銅雀陵)’이라는 왕릉이 있던 자리다. 동작릉의 주인은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昌嬪安氏·1499∼1549)다. 몇 년 전 TV에서 방영된 사극 ‘여인천하’에 ‘창빈’이 등장하기도 하여 시청자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풍수가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왕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장흥 땅에 모셨다. 그러나 그곳 터가 좋지 않아 이듬해 이장했다. 이어 능의 이름을 동작릉이라 불렀다. 동작릉에 창빈을 안장한 후 창빈의 손자 하성군이 태어났다(1552년). 당시 임금은 문정왕후 소생인 명종이었는데, 명종은 아들이 없었다. 명종은 하성군을 총애하여 자주 궁궐에 불러들였다. 명종이 죽자 하성군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그가 바로 선조다. 이렇게 후궁의 막내 손자가 임금이 되자 동작릉의 명당발복이 소문난 것이다.
1 이명박 전 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함으로써 풍수적으로는 서울 강북에 ‘명당수’를 새로 열었다는 평이다. 2 경북 포항시 신광면 고주산 부근 이명박 전 시장의 할머니 묘. 3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영일목장 내 이명박 전 시장의 부모 묘.
박정희 묘에 물이 찬다?
동작동 국립묘역 전체가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러한 동작동 국립묘지 내에서 육 여사의 무덤자리를 소점한 지관은 지창룡(작고)씨였다고 한다. 그는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이후 저명인사들의 터 잡기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천하의 명당 안에서 정작 박 전 대통령 부부가 영면하는 자리(사진)는 불행하게도 가장 안 좋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풍수술사 손석우(작고)씨는 ‘터’라는 책에서 “육 여사 무덤자리는 머리카락이 자라고 손발톱이 자라는 냉혈(冷穴)로 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손씨는 1995년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선영을 용인에 잡아주면서 ‘남북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올 터’라고 예언하기도 한 사람이다.
이에 대해 지창룡씨는 “나는 육 여사와 친분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이곳 국립묘지에 터를 잡아달라는 청와대의 부탁을 받고 도착했을 때는 다른 지관의 지시에 의해 광(壙)을 파고 있어 관여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임응승 신부(은퇴)도 저서 ‘수맥과 풍수’에서 “광중(壙中)에 물이 찼다”고 적었다. 필자 또한 수년 전 이곳 관리인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 부부 묘의 봉분 잔디를 1년에 한 번씩 바꿔주는데, 그 까닭은 광중에 물이 차서 잔디가 녹아버리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덤에 물이 찬다는 것은 풍수의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땅 밑의 일은 파보지 않는 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 실제로 물이 차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육안으로 이곳 형세를 살펴보면 지맥이 연결되지도 않았고(현재 무덤 뒤는 보토(補土)된 것임) 좌우를 가까이서 감싸주는 것도 없다. 이에 대해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 소장은 “배경도 없고 등을 기댈 곳도 없는 외로운 자리다. 다만 무덤 앞의 장군묘역이 안산(案山)의 몫을 아름답게 하는데, 이들의 조회를 받을 뿐이다”라고 평한다. 구체적인 지지나 후원 세력보다는 그저 손님들의 지지나 조회만을 받을 뿐이라는 것이다.
▼ 이명박 전 시장 생가 (일본 오사카 소재 미상지)
누대의 가난을 딛고 한국의 명문가로 성장한 집안이 더러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집안도 이중 하나다. 이 전 시장뿐만 아니라 그의 형 이상득 국회부의장(4선 의원)도 이 시장 못지않은 입지전적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전 시장의 또 다른 형은 대학교수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고,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집안에서 자란 형제들이 이렇게 성공하자 풍수가들은 태어난 집터와 조상 선영의 영향일 것이라고 예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고향으로 알려진 포항시 흥해읍 덕실마을은 사실 이 전 시장 아버지의 고향이다. 이 전 시장은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이 전 시장이 일본에서 태어난 것은 식민지 국민의 불행 탓이다. 이 전 시장이 쓴 ‘신화는 없다’를 토대로 그의 출생지와 어린 시절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이명박 전 시장의 선친(이충우)은 1935년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일시 귀국해 결혼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이 시장 부모는 여섯 남매를 낳아 키웠는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그해 11월 오사카에서 짐을 꾸려 귀국했다. 그때 이 전 시장은 네 살이었다. 이후 그는 포항의 달동네, 서울 이태원의 판자촌 등을 전전하며 그 누구도 겪지 못한 가난과 힘든 세월을 극복해 나간다.’
일본 오사카가 유년시절의 이명박에게 영향을 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이태원으로 오기 전까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곳은 포항시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오사카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 이 전 시장의 경우 현재로서는 생가를 풍수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다만 이 전 시장과 그의 형제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과정을 미뤄 짐작건대 오사카의 생가는 길지(吉地)였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 이명박 전 시장 선영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목장)
선영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모 묘이며, 그 다음이 조부모, 증조부모 묘이다. 여기선 역순으로 이 전 시장의 증조부모 묘, 조부모 묘, 부모 묘 순으로 살피기로 한다.
이 전 시장의 증조부모 묘와 조부 묘는 포항시 신광면 만석2리에 있다. 근처에 ‘신광온천’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증조부모 묘와 조부모 묘는 이 전 시장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부터 풍수가가 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학원을 경영하는 주민 편경도(48)씨는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답사객이 더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선영에 대해서는 ‘지기를 받기는 했으나 약하고, 우백호 끝부분이 등을 돌린 바람에 수구가 벌어졌다’는 것이 여러 풍수 호사가의 종합된 의견이다. 그저 양지바른 곳에 편안하게 안장됐다는 것이다.
“지기를 받기는 했으나 약하고…”
그러나 증조부모 묘와 조부모 묘가 특이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풍수술사도 있다. 지종학 풍수지리연구소 소장은 증조모 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증조모 묘는 봉우리 정점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맥선(脈線)의 정중심에 앉아 있으며, 비록 주변은 군인 참호 등으로 파헤쳐져 어수선하지만 묘가 있는 지점만큼은 통통하고 깨끗한 덩어리 땅이다. 이전까지의 추하고 지저분한 용세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곳이다. 좌측의 작은 가지는 묘를 향해 깊숙이 감아주며, 우측은 길고 큰 능선이 되어 골바람을 막아준다. 묘의 전면에는 널찍한 명당을 형성했으며, 주변은 비학산(飛鶴山)의 군봉(群峰)들이 그림같이 늘어서 있다. 만일 나의 판단이 맞는다면 일절(一節)로서 혈을 맺은 것이니, 이곳은 진흙 속의 보석일 것이다.”
이런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가난한 이명박 형제들의 성공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증조모 묘의 영향은 부모 묘나 조부모 묘의 영향보다는 약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풍수 호사가 민영삼씨는 이곳 산(고주산·347m) 정상 가까이에 있는 할머니 묘를 극찬하며 대권(大權)을 잡을 수도 있는 땅이라고 말한다.
“이 전 시장의 할머니 남평문씨 묘는 청룡백호가 마치 꽃게가 두 다리를 포개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감싸고 있다. 백호는 길게 아래까지 내려와 있으며 청룡작국이어서 그 국세가 가히 잠룡(潛龍) 중에서 최고이다. 묘터의 국세로 본다면 한국 정치의 큰 획을 그을 만한 그릇이다. 뿐만 아니라 무덤에 쓰이는 당판의 형태 역시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증조묘소나 경남 지수면의 LG그룹 조상묘터 국(局)안에서의 혈(穴)에서 보듯이 60~70도 경사진 곳에 위치한 특이한 괴혈(怪穴)이다.”
세종, 정종의 업적에 비견
그러나 이 같은 평은 대다수 풍수술사가 땅을 보는 보편적 방법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게 중론이다. 비록 주변 전망이 좋을지라도 지기가 흐르지 않는 산비탈 가파른 곳에 쓴 것으로, 혈장도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전 시장의 부모 묘(사진)는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송갈1리 영일목장 안에 있다. 정기 풍수답사에 수십명의 호사가를 인솔하는 지종학 풍수연구소 소장의 의견이다.
“규칙과 질서가 전혀 없는 중구난방의 요란한 모습이다. …이곳의 묘는 그렇듯 무질서한 능선의 옆구리에 쓰였는데, 매우 습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편 청룡은 달아나고 물은 수습하지 못하는 지세인데, 그 모습이 흉하였는지 묘 앞에 작은 저수지를 조성해 물을 가두어뒀다. 그러나 그 물빛 또한 누런빛으로 탁하기 그지없다. 무엇 하나 이로움이 없다 하겠다.”
풍수술사들의 눈에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고인들에게는 편안하고 양지바른 땅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이 전 시장 집안이 풍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김두규 ● 1959년 전북 순창 출생 ● 한국외국어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독일 뮌스터대 박사(독문학)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2000~2001) ● 現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 저서 : ‘민중성과 리얼리즘’, ‘권력과 풍수’
이처럼 이 전 시장이 풍수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한국의 풍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청계천 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청계천은 한국의 중심인 서울의 명당수(明堂水)이다. 이 전 시장은 콘크리트로 덮여 있던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서울의 명당을 되살렸다. 이는 조선시대 세종, 정종이 직접 청계천을 보존한 것에 비견될 만한 업적이다.
송나라 성리학의 대가 주자(朱子)의 제자이면서도 거꾸로 스승인 주자에게 풍수를 가르친 이가 채원정(蔡元定)이다. 채원정이 쓴 풍수서 ‘발미론’은 조선조 사대부들이 금과옥조로 여긴 책인데, 이 책에 “음지호, 불여심지호(陰地好, 不如心地好)”란 말이 있다. “무덤(陰地)이 제아무리 좋아도 마음(心地) 좋은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