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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대구법회 법문>
반갑습니다
불교성전 367페이지 설하겟습니다.
4) 백팔삼매(百八三昧)와 사십이자문(四十二字門)
부처님은 다음에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시었다.
「보살(菩薩)의 대승(大乘)이란 수많은 삼매(三昧)이다.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 즉 씩씩한 전진의 삼매라 불리는 것, 또는 보인삼매(寶印三昧)라 불리는 것, 또는 사자유희삼매(師子遊戱三昧)라 불리는 것, 묘월삼매(妙月三昧)라 불리는 것, 이착허공불염삼매(離着虛空不染三昧) 즉 빈 공간에 붙거나 떨어지거나 때 묻는 일이 없다는 삼매에 이르기까지 열거되는 백팔의 삼매가 그것이다.
그리고 수보리(須菩提)야, 보살의 대승이란 각각 특정한 문자(文字)에 의하여 나타내는 수많은 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문자에 의해서 나타내는 수많은 문이란 무엇이냐. 대승(大乘)이 들어가는 것은 아자(阿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본래가 불생(不生․anutpda)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자(羅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진후(塵垢․rajas)를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자(波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의 제일의(第一義⋅paramrtha)는 공(空)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자(遮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사멸(死滅)과 생기(生起)를 진실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요, 사(死)도 생(生)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자(那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이름(名)을 떠나 있고 이름의 본성을 얻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잃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자(羅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세간(世間)을 넘고 인간생존의 사랑의 울(柵)이나 그 인(因)․연(緣)을 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陀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마음의 제어(制御)에 의해서 확립되기 때문에, 혹은 모든 법(法)은 시물(施物)의 성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자(婆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계박(繫縛)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자(茶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소란(騷亂)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沙字)의 문이다. 모든 법(法)은 여섯(六)의 감관(感官)을 억제함으로써 마음이 자재(自在)를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승(大乘)은 화자(和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화법(話法)과 언어가 단절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자(多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의 존재양식은 여(如)이면서 부동(不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자(夜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여실(如實)하게 있는 그대로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咤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에 있어서 억지(抑止)란 이러한 것이다. 라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자(迦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 작자(作者)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娑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 때(時)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모든 법(法)은 때를 의지해서 생기(生起)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자(磨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나의 것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삼매의 종류가 수많은 종류가 나온다
108가지 삼매이다
법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다
이게 아리송하다
왜?
법이라는 것은 형체가없기 때문에 믿지않는자는 없는것이요 의지하는자는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믿지 않는자와 의지하는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도 형상화로의 차이는 없다
마음 자리안에서 불법을 인정하는 사람과 불법을 인정하지않는 사람이있다.
여기서 차이가 난다
존재 자체라는게 법은 어떻게 해서 구성되는것인가 그 시점을 확실히 알아야하는데 법이라는 것은 빌면 법인 생긴다고 착각하고산다.
글속에 법이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다만 버리고 비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법은 힘든다고 이야기한다.
버리고 비우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
우리가 마음속에 갈구하는 것을 욕심이라고한다. 그런데 비우고 버리라는 것은 내가 집착하지마라 있고 없는데도 집착하지말고 있는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라
즉 내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는 것을 버린것이라고한다
내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욕심이라고한다
이렇게 나눌수가있다
마음속에 담고 비우는 것이 형체가 있는것인가 없는것인가?
형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대상도 없고 형체도없다
사생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 똑같다.
사생의 삶이나 비우지않는 인간의 삶이 똑같다. 한치 오차도 없이 똑같다.
우리마음속에 연연하고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 이세상 삶에 걸림이없다 자유롭다
왜?
마음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내 행동도 자유로워지고 마음의 묶임이 없으니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해결이된다.
우리는 지금 다 없어도 집은 있어야한다
다없어도 돈은 먹을거는 있어야한다고 규정지어놓았다
이 중생의 삶에는 대상이 있어야하고 대상을 향해서 나아가야한다 즉 노력을 해야한다
이렇게 배워왔다
그런데 부처님이 가르치는 것은 그와 정반대로 가르친다
대상을 쫓아간다는 것은 집착에 의해서 욕심에 의해서 추구하게된다
그 대상이 어딘가 내 마음이 묶여있을 때 내 행동에 자유를 잃게되고 또 욕심에 의해서 새로운 욕심이 일어나고 그 욕심에 또 일어나 파생되어나간다
우리는 하나를 버리면 다버린다
하나를 버리지못해서 파상은 계속 고요한 물에 돌을 던지는것과 같다.
돌은 던지면 여울이 일어난다
그것이 파상이다
그 파상은 잠재워지는 듯 하면서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
그와같이 우리마음자리는 욕심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하나를 버리면 다 버리는것이된다.
그래서 이것을 생기라한다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 지우는 것이 전부다
모든 물질은 보이는 것은 그냥 그 자리에 두고 그 대상을 쫓지말고 내 머릿속에서 지워라
부처님은 우리에게 주는법을 가르쳤다
보시 지계 육바라밀
여기서는 단한가지도 얻을 수 없다
최종 지워야할 것은 형체가 없는 그림자 마음속에 일으키는 갈등의 파상을 지워라
이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림자는 해가 있을 때 나오는것이고 빛이있을 떄 나온다
그런데 없는 것을 있다고 구상하고 있는것에 연연하고 살아가니 문제가된다
일생동안 살아온 것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 나를 괴롭히고 살아왔다
그 그림자는 업식이다
업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내가가지고있는 그림자의 욕심이다. 내 가족에 대한 그림자 내 남편에 대한 그림자 자식에 대한 그림자 부모 형제 이웃에 대한 그림자가 끊임없이 자신을 압박해오고 조여온다
이게 업식이다
이 업식을 우리는 인연에 의해서 맺어진다
그 인연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에 악연이던 선연이던 똑같이 만들어진다.
이 삼매는 최종 내가 모든 그림자가 지워졌을떄 이삼매가 만들어진다.
그 그림자는 나의 욕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그림자를 두고 아지랑이 무지개 신기 파초와 같다고 했다.
형상은 없는데 형상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 형상을 쫓아서 끊임없이 살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없다
내가 가져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지구상에 내가 쓰던 것을 하나도 가져가지않는다
내 욕심 집착만 가져간다
그것이 업식이고 업연이다.>>
그리고 가자(伽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어디로 가는(gacchat) 것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존재하는것도 아니고 존재하지않는것도 아니다했다 그런데 법을 수없이 논하고 있다
이게 말장난이다
그리고 타자(他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어디 있는 (stha) 것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闍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 발생(發生)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안녕(安寧)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馱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의 법성(法性)
은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적정(寂靜)을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자(?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허공(空)같아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자(叉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 멸진(滅盡)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자(哆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 존재(存在)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자(若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것을 아는 지혜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拖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 의의(意義)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자(婆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에는 파멸(破滅)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자(車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것에 대한 의욕(意慾)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는 오온(五蘊)은 그림자(chaya)와 같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자(摩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것을 잊지 않는 억념(憶念)을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火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칭명(稱名)을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자(嗟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기쁨을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자(伽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견고함(ghana)을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확립(確立)을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자(拏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에는 번뇌(rana)가 없고 가는 것도 아니요, 오는 것도 아니요, 서는 것도 아니요, 앉는 것도 아니요, 눕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분별을 초월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자(頗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그 과(果)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자(歌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많은 것이 모여서 임시(假)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모임(skandha)도 사실은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자(醝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분별을 가지고 그것은 낙(樂)이 아니라고 파악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자(遮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咤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은 분별을 가지고 그것을 고(苦)라고 파악해서는 안되며, 구극(究極)에 이르러면 죽는 것도 없고, 태어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자(茶字)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법(法)을 완전히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문자(文字)의 문(門)은 다자에서 끝난다. 그 이상 더 말해야 할 문자는 없다.
<<글로 부처님이 우리 삼매의 뜻을 해석하려고하면 이렇게 밖에 해석할수가없더라
그것도 문자일뿐이다
실상은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문자는 실제로 인식(認識)의 대상이 되지 않고 거기에 이름 붙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는 말할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須菩提)야, 모든 법(法)은 공허한 하늘과 같은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보리야, 이것을 다라니(陀羅尼)라고 한다.
즉 앞에서 말한 아자(阿)의 뜻이 그것이다. 만약 보살이 이 수많은 문자의 문, 그 귀결처(歸結處)인 아자문(阿字門)의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이고, 독송(讀誦)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한다면 이십종(二十種)의 공덕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명확하게 설명해놓았다
무슨 삼매 무슨삼매 108가지의 삼매를 두고 듣는사람마다 자기 논리대로 아집을 피워 인식해간다
그것을 송두리째 부숴라
없는 것이다
다 말장난이고 글장난이다 그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냥 한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한길로 가면 20종의 공덕을 얻는다
20종의 공덕은 적은 것이다. 우리가 그냥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까지 이어오다보니 얻은 공덕이 몇가지나 되나?
내가 수행하여 경전을 맹목적으로 읽었던 공덕이 28가지 나도 모르게 얻었다
내 소리를 듣는 내 가족이 10가지를 얻게되더라
그리고 내 뿌리인 조상이 내 소리를 듣고 7가지를 얻게되더라
전부 45가지의 공덕을 자연적으로 얻었는데 그 얻은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어떤 것이 얻었는가 하고 하면 이것이 얻은것이다라고
현실이 있었다
첫째 내 마음이 편해졌고 내 가족이 편해졌고 셋째 부족함이 없고 모든 것이 풍족해젔다
넷째 가족이 화합한다
나열을 하면 아주 많다
거기에 집착하면 또 잃어버리다
내가 얻고자하면 잃어버린다
얻고자 하지마라 그냥 누려라 그냥 감사해하라
이것은 중생이 누리는 자리이다
45가지는
중생으로서 욕심세계에 빠져살다가 그 욕심을 하나 내려놓고보니 45가지는 저절로 얻고 누리게되더라
깨달은게 아니다
꺠달음은 거기서 시작되는게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지었던 알게 모르게 지은 죄
살아온 뒤안길을 잊어버리고 산다
그 뒤안길을 내가 지나온 뒤안길이 어느거 하나 죄아닌 것이 없다
그죄를 하나씩 하나씩 참회하고 뉘우쳐야한다.
이 숙제가 풀려야 이제 나머지 수행이 부가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 이상 진도가 안나가는 이유가 과거세 업식이 제대로 지워지지않았다
그 악연의 인과가 나를 짓눌러서 내가 더 이상 진보해나갈수가없더라
그래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을 묻어놓고는 절대 수행자가 될 수 없다
과거에 얽매인 것은 빚진자리이고 갚아야할 자리이다
그 빚진자리 그 빚쟁이가 묻어놓고 내눈에 안보이고 남의 눈에 안보인다고 해결되었다고 착각을 한다
여기서 혼돈하고산다
과거의 업연을 빨리지워야한다
참회해야하나
우리는 엉거주춤 참회를 한다
내가 일생동안 법을 만나기전에 내 죄라는 것은 모르고 산다
지은죄는 수미산보다 높은 죄를 매일 참회해도 매일 수백가지를 참회해도 안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자기 죄가 보인다
눈만 떠면 먹어야살고
눈만 떠면 중생고 부딪혀서 살아야한다
그 중생과 부딪히면서 지은죄를 여러분들의 눈에 보입니까?
과거세
그러니 묻어버린 것이다
고양이 똥 묻듯이 묻어놓고 나는 그죄 안지으면 되거든 한다
사생육도를 윤회한다
돌고돈다
그러면 전겁의 사생은 지금현재 어떤몸을 받아있을까?
이것을 모른다. 이게 대상이다
그 대상은 끊임없이 조아온다
오달국사처럼 수행을 잘할때에는 묻혀있는데 어느땐가 방심할때에는 오달국사처럼 당하게된다
잊어버리고 묻어갈수가없다
이 업을 닦고 가는 기간이 수천만억겁이다.
우리가 한생에 성불할 수 있다 성불할 수 없다 이말장난에 놀아난다
한생에 성불할 수 없다
낱낱이 자기업을 닦지못하기 때문이다
수행의 척도로 삼아서 업식을 끊어나가라
업식을 끊어나가면 모르고 지은죄를 참회해나갈 수 있다.
한 살짜리 내 모습이 보인다
그때 나와 접했던 모든 중생들 일일이다 열거해서 내가 참회해야하것
두 살때 세 살때 네 살때 ~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다 보아야만 된다
그래서 타자의 문이고 가자의 문이다
내 업식을 덮어놓고는 절대 진보는 없다
머물러있다.
편한데 빠지면 안락이라고한다
안락이라는 단어에 안주를하게된다
나아가지도 멈출수도없고
딱 그 자리에 머물러서 안주하게된다
이 안주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장보살님은 우리에게 10지를 가르쳤다
보살십지
법을 처음 만나면 일어나는 것이 최초에 느끼는 환희지
이 환희지가 없다면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입문할사람도 아무도 없다
무덤덤한 감정으로서는 내가 열성을 보일수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 수행을 입문해서 시작하면 최초로 오는 것이 환희지이다
보살 10지중에 제1지 환희지가 온다
그 환희지에 들면 이세상에 미운사람이 하나도 없어지고 누구나 보면 다 좋은 사람 이쁜사람 그리고 마음이 그렇게 한없이 주는 것 없이 받는 것 없이 즐겁다
이 자리에 올 때 아 더 수행을 열심히 해야겠구나하고 다잡아야하는데 그게 빠져버린다
언제까지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살수있을까 하고 빠져버린다.
짧다
짧은 사람은 사흘밖에 못가고 긴사람은 1년도 가고 2년도 가고 10년도 간다
이차등의 차이는 한계가 없다
이 환희지가 오면 반드시 그 다음 단계가 오게 된다.
환희지가 오면 빨리 잃어버리는사람은 생각이 안비운사람이다
그러면 그것을 자기것으로 소화를 못시키고 그냥 오다가 중도에 그친다
그러면 멍청해진다 그냥 무덤덤하게 수행을 한다 좋다하니 그 좋은 것을 신바람이 나도록 좋아야만 열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잠시오다가 말아버리기때무에 무덤덤해진다
무덤덤한 것은 그냥 넘어갈수있는데 이구지에 떨어지면 멍청해진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
그러니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 반면 그 멍청해진 자리가 좋은자리가 될 수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더 멍청해진다.
안 잊을려고 기를 쓰고 살았는데 멍청해지니 기억도 안나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멍청해지니 더 이상 죄를 안짓게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행운이다
그런데 발광기 까지 올라갈려면 무척 힘이든다
이구지에서 발광지에 올라갈려면 환희지처럼 새로운 지혜가 열려야한다
무엇이던지 보면 안잊어버린다
발광지에 들어가면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된다
이세계가 완전히 달라진다
발광지에서 여매지로 올라가야한다
여매지로 올라가면 위에 삼매 자기죄를 다 타파하러 가게된다.
자기 업식의 죄를 타파하러 가야한다.
그러니 뿌리까지 뽑아내야 면경알처럼 맑아진다.
이 여매지에 올라가야 정정이 제대로 된다
이런 순서로 부처님은 식으로 글로 풀어놓고 글에서 해답을 찾을려고하니 머리가 터져도 답이 안나온다.
아이러니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문자의 문은 문이 아니다
그래서 식을 버려라
타자 전부 없애라
가자 타자가 계속 나온다
식을 빨리 버려라
글자에 꽂혀있으면 식자일뿐이지 법과는 멀어진다. 그래서 배타시키는 방법을 부처님은 108가지로 글로서 풀어놓은 것이다.>>
식을 버리면 업식의 문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다.
업식의 문을 출입해야만 내 죄를 닦을 수 있다. 어두움은 사라지고 광명의 빛이 오게된다
우리는 참회하는 방식을 반드시 육하원칙이어야한다
육하원칙은 내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와 어떻게 하고 육하원칙이 들어가지않으면 묻어지게된다.
내가 한 살때 두 살 때
한 살 되기이전으로 돌아갈려면 너무 깜깜하다 70년전 60년전 50년전 ~
그래서 역순하라
작년에 한 것은 다 보인다
이렇게 역순으로 돌아보면 내죄가 면밀히 보인다 그래서 그 업식을 반드시 지장보살님과 조상님들께 용서를 빌고 참회를 해야한다.
왜?
내가 추구했던 사생의 생명체들이 내 조상이 아닌사람이 없었다
이게 답이다
그분들이 그몸을 받아 연을 맺기위해서 나를 불러서 찾아다닌다
내 마음에 들어서
내마음에 들어서
지금도 여러분은 시장바구니를 들고가면 내마음에 드는 물건들을찾고 있다
우리는 좋은거 찾아다닌다
썩어자빠지는 중생을 구제해야하는데
그것은 버리고 너는 더 돌아라 나는 좋은 것을 찾겟다한다.
업식의 대상은 내 욕심에 비롯된다.
모든 것은 생각없이 해라
좋아하는 것을 버려라
업식을 짓지않는 자리가 바로
대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고 대상이 나를 찾아 오도록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살행이라고한다.
지금까지도 여러분들은 수많은 세월을 스님과 연을 맺으면서도 안 변하는게 이것이다
왜 좋아하는 것을 버리지않으니까
버렸다해도 세분화가 안되었다
남편 버렸다
이제 남편 생각안하거든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은 버렸다 그런데 보이지않은 대상까지 버려야한다
이게 타파이다>>
5) 십지(十地)에 있어서의 실천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공(空)이다. 그것을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분별해서 파악할 수는 없다.
즉 불가득(不可得)이다 하는 입장에 서서, 모든 보살은 그 수행의 단계인 십지(十地)중의 제일지(第一地)에서 다음의 열 가지 사항을 실천한다.
첫째, 마음의 작용은 실로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의향(意向)을 가지고 도(道)에 뜻을 둔다.
둘째, 중생은 실로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을 갖는다.
<<쉽고도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실천이 안된다
모든 중생이라고하면 대상이 누구인가?
사생이다
사생의 대상은 나와똑같다 그런데도 나와 똑같이 보는 눈이없다
그러니 제도를 놓치고 한번씩 당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분이 내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였다면 여러분들이 뜯어먹을 수 없다
아직 분별이 안끊어졌기 때문이다
나와 똑같이 보라>>
셋째, 보시(布施)하는 물건도 보시하는 사람도, 그것을 받는 사람도 실은 불가득이기 때문에 힘써 보시한다.
넷째,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높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선우(善友)에게 친근(親近)한다.
다섯째, 모든 법(法)은 실로 불가득이기 때문에 법을 구한다.
여섯째, 집(家)은 실로 불가득이기 때문에 항상 출가생활을 한다.
일곱째, 부처님 신체의 훌륭한 모습은 실로 불가득이기 때문에 불신(佛身)을 애경(愛敬)한다.
여덟째, 법(法)을 분별해서 이해하는 것은 실로 불가득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을 사람들에게 설하여 가르친다.
아홉째, 법(法)의 바른 존재는 불가득이기 때문에 아만(我慢)을 떠난다.
열째, 말은 실로 불가득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보살은 또 그 수행의 제이지(第二地)에서 항상 여덟 개의 사항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잊지 않는다. 여덟이란 무엇이냐.
<<여기의 십지 내용과 지장보살의 십지의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여기 제 1지는 1지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1지않에 또 10가지가 있다>>
첫째, 일상의 행위에서 바른 습관을 드리고 그 행동에 조심성을 잃지 말 것.
둘째, 사람들이 내게 해 준 일에 대해서 은혜를 알고 그에 보답하려고 노력할 것,
셋째, 항상 인욕(忍辱)하는 마음을 가질 것.
넷째, 마음속에 기쁨을 품을 것.
다섯째, 어떠한 중생도 버리지 말 것.
여섯째, 부처님의 큰 자비심(慈悲心)으로 들어갈 것.
일곱째, 스승을 신뢰하고 공경하여 의문을 밝히고, 가르침을 받을 것,
여덟째, 모든 바라밀(波羅蜜)을 구하여 정진할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그 수행의 제 삼지(第三地)에서 제 구지(第九地)에 이르는 사이에서도 많은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그리고 수보리야, 제 십지(第十地)에 이른 보살은 실로 부처님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러한 십지의 단계에서 좋은 방편(方便)을 가지고 수많은 수행 즉 육바라밀(六波羅蜜)⋅사념처(四念處)⋅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등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행(行)을 실수(實修)한다.
십지의 단계란 건혜지(乾慧地)⋅성지(性地)⋅팔인지(八人地)⋅견지(見地)⋅박지(薄地)⋅이욕지(離欲地)⋅이작지(已作地)⋅독각지(獨覺地)⋅보살지(菩薩地)⋅불지(佛地)라 불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십지와 지장보살님의 십지는 하늘과 땅이다
한단계 한단계 계율이 포함되어있다.
말은 십지이지만 80여종이된다
이와 같은 것이 보살이 대승(大乘)에 뜻을 일으켜 나아가는 단계이다.」
6) 반야바라밀의 모습
착한마음 나쁜마음이 모습이있어요?
그런데 형상을 여러분들이 만들어라고했지요
그래야만 묶어놓을 수 있다
그러면 모습이 있다
모습이 있는데 또 모습이 없다
우리가 일으키는 분별은 앞전에는 전부 없다로끝났지만 이제 있다로 나온다 그러니 헷갈린다>>
부처님께서는 또 천상(天上)의 세계(世界)중 하층에 속하는 욕계(欲界)의 신들과 중층에 속하는 색계(色界)의 신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신들아, 허공과 같은 모습이 심원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런 모양이 없는 모습과 아무런 작용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허공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는 모양이 곧 심원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가지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부처님이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여기 읽은 내용에는 형상이 하나도없다 마음으로 일으킨 갈등이다
천상세계 하층에 욕계 색계 무색계이냐?
욕계도 색계도 분별에서 마음에서 일으키는 갈등이다
무색계도 우리마음으로 일으키는 갈등은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는 그놈을 잡고 날아가는 방귀잡고 시비를 거는것과 같다
자기 감정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산다 분별은 자기 생각이 일으킨 흔적일뿐이다 거기에 우리는 울고 웃으면서 미치면서 산다
누가 괴롭혓나
남이 생각을 일으킨것인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한다
아무도 너 생각하며 살아라하고 가르친게 없는데 혼자 수많은 생각을 일으키고 괴로워하고 산다.
대상은 없다
대상은 니가 요래해서 내말안듣고 너 고집대로 살제 이것도 생각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 기준대로 편할대로 살면되는데 내 뜻에 기분에 맞춰주지않는다고 미워한다
미워할게 없다
자기 편할대로 각자 산다
그러면 대상이 미워질게없다
간단하다
그런데 간단한 그게 못한다>>
부처는 다만 중생을 위해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는 이러이러한 모습이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승의(勝義) 즉 구극(究極)의 의미에 있어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그와 같은 모습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형상이 있는게 아니다 고요하고 두마음 착한 마음과 나쁜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은 자리가 반야라한다
반쪽 반쪽 저울질해서 어딘가에 기울지마라 이게 반야이다>>
부처님은 또 수보리에게 물어 시었다.
「수보리(須菩提)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의 마음이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여(如)의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그는 모든 사물의 구극(究極)의 진실상(眞實相) 즉 실제(實際)를 실증(實證)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짤라버렸다
실제를 구분할 수 없다
내 마음이 일으키는 것을 저울질해서 포박할수있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자체가 전부 말장난 글장난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여(如)는 심원한가, 심원하지 않은가.」
「심원합니다. 세존이시여, 지극히 심원합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여(如)가 곧 마음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如)를 떠나서 따로 마음이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如)가 여(如)를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보살이 이처럼 도(道)를 실천한다고 한다면 그는 심원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이겠느냐.」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실천한다고 한다면 그는 심원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했는데 왜 아니다했을까?
그것을 들어 내 놓고 확인시켜줄수없으니 아니다고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두마음이 우리를 괴롭히고 번갈아가면서 이러쿵 저러쿵하면서 마음에갈등을 일으키며 산다
모든 사생은 그렇게 산다
그 마음이라는 존재는 형상이 없으니 무색계라한다
색계는 우리 육안으로 보이는형체가있는 것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색계라한다
욕계는 마음으로 욕심을 부리고 원하는 것을 취하고자하는 행을 욕계라한다
무색계는 내가 원하는것을추구하는 욕심을 비우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비우는 것을 무색계 탐심을 버린다
색계와 욕계를 다버렸다
색계와 욕계를 다버리니 무색계
두마음이 갈등을 일으키고 두마음이 번갈아가면서 동서팔방을 쫓아다니면서 고민거리를 물고온다
서울에 살고있는 아들은 잘있는가 손자는 건강한가 이렇게 번갈아가면서 그놈이 제비처럼 고민거리를 물고온다
색계 욕계를 버리면 그 제비처럼물고 오는게 없어진다
제비처럼 물고오는게 없으니 머릿속에 활동범위가 좁아졌고 내 감정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볼수잇는 내가된다
이게 수행자의 길이다
이것역시 내가 이렇게 햇노라하고 보여줄수있는게 아니고 내 행동으로 그것을 지켜나가고 영위해나갈뿐이다
이것이 법이다할수있는 것은 없다>>
7) 육바라밀의 행(行)과 원(願)
부처님은 다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닦고 있을 때, 기한(飢寒)에 시달리고 의식(衣食)에 궁핍한 중생을 보면, 바로 다음과 같은 서원(誓願)을 일으켜야 한다.
즉 『나는 그 곳에 따르고, 그 때에 따르는 방법으로 보시바라밀을 닦아야겠다. 그래서 내가 이윽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내 불국(佛國)의 중생에게는 절대로 이와 같은 궁핍이 있게 하지는 않겠다.
<<여러분들이 이세계를 하나씩 알게되면 나의 세계 그세계가 저 우주밖에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 가정이다
내 가정이 내세계이다
내 가정에 일어나는 모든 분별을 모두버리고 아픔과 괴로움과 갈등을 일으키지않는 불국정토를 만들어야한다
우리는 지금 대상을 광범위하게 지어놓고 광범위한데 맞출려니 아무것도 되는게 없다
내 세계는 내가사는 내 울타리안의 가정이다
나의 세계안에는 어떤불행도 병마도 아픔도 용납하지않는 것이다
내 만 닦아나가면 불국정토가된다.
아야 아야 아야한다
누가 아야하나?
내 몸이 아야하는게 아니라 내 마음이 아야한다
내가 불러들여 즐기고 있다
나의 세계를 축소하고 축소하고 또 줄여라
내 불국토 안에는 어떠한 재앙도 용납하지않겠다
전부 내가정이
절에가서 우리가족 건강하게 살게해주십시오
돈벌게 해주십시오 만날 돌아다녔다
그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내 부처님믿고 닦고간다한다.
참 부처님이 글을 이렇게 해석하고 포장해놓을 수 있는 지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지식도 있었고 지혜도 열려있으니 식을 활용할수있었다.>>
의식(衣食)이나 생활용품은 충족하여 모자람이 없고, 마치천상계(天上界)와 같이 만들어야겠다.』라고.
그리고 수보리야, 보살이 계바라밀(戒波羅蜜)을 닦고 있을 때, 만약 중생이 과거에 살생(殺生)을 범하고, 혹은 그 밖의 열 가지 나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단명(短命)하거나, 다병(多炳)하거나, 안색이 나쁘거나, 몸에 위의(威儀)가 갖추어지지 않았거나, 신분이 낮은 집안에 태어나거나, 모양이 보기 흉한 사람을 보면 바로 다음과 같이 서원(誓願)을 일으켜야 한다.
즉『나는 그곳에 따르고 그 때에 따르는 방법으로 계바라밀을 지킬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윽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내 불국(佛國)의 중생에게는 절대로 이와 같은 불행이 있게 하지는 않겠다.』라고.
그리고 수보리야, 보살이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닦고 있을 때,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칼이나 몽둥이나 와석(瓦石)등으로 상처를 입히고 서로 죽이는 중생을 보면 바로 다음과 같이 서원(誓願)을 일으켜야 한다.
즉『나는 그 곳에 따르고 그 때에 따르는 방법으로 인욕바라밀을 닦겠다. 그래서 내가 이윽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내 불국(佛國)의 중생에게는 절대로 이러한 일이 없고 서로 부모처럼 형제처럼 친구처럼 따뜻한 배려를 갖는 마음을 갖도록 하겠다.』라고.
그리고 수보리야, 보살이 정진바라밀(忍辱波羅蜜)을 닦고 있을 때,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고 성문승(聲聞乘)⋅독각승(獨覺乘)⋅불승(佛乘)의 세 가지 가르침의 어느 하나도 돌아보지 않는 중생을 보면 바로 바로 다음과 같이 서원(誓願)을 일으켜야 한다.
즉『나는 그 곳에 따르고 그 때에 따르는 방법으로 정진바라밀을 닦겠다. 그래서 내가 이윽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내 불국(佛國)의 중생에게는 절대로 이와 같은 게으름이 없고, 모든 중생이 노력하도록 해서 삼승(三乘)의 도(道)에 의하여 각각 미혹을 떠나게 하리라』라고.
그리고 수보리야, 보살이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을 닦고 있을 때, 탐욕과 미움과 마음의 해이(解弛)와 마음의 부침(浮沈)과 의혹(疑惑)등 다섯 가지 번뇌로 마음이 덮이어 사선(四禪)⋅사무량(四無量)⋅사무색(四無色)등의 선정(禪定)에 의한 마음의 안정(安靜)을 잃어버린 중생을 보면 바로 다음과 같이 서원(誓願)을 일으켜야 한다.
즉『나는 그 곳에 따르고, 그 때에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바라밀을 닦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윽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내 불국(佛國)의 중생에게는 절대로 이와 같은 일은 없게 하겠다.』라고.
<<전부 내불국토가 나온다
내 불국토의 범주를 좁혀라
여러분들이 내가 일으키는 갈등이 생길 때 가족이 불행해진다 내가족이 불행해지는 것은 나의 수행척도이다
병이온다던가 나쁜 악연이 온다든가 나쁜 재앙이 온다든가 모든 것은 수행의척도이다
그런데 전부 남탓으로 돌린다
처사가 어느날 나갔다가 사고를 쳐서 자빠졌다 당신 술을 먹어서 자빠졌다 한다
종분이 잘들어라
내가 수행을 잘했더라면 그런 재앙이 안올것인데 참회를 해야한다
이게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차이가 여기에있다
전부 내탓이다
전부 남탓으로 돌리고 살았다 전부 내탓이다
거기에 미워하는 마음까지 일으킨다
마음이 죄악이다
행동은 죄악이 아니다
부처님이 성죄와 차죄를 가르친 것이다
생각은 짓는죄는 무서운 것이다 용서받을수없는죄가 성죄이다
생각을 굴려서 우리는 몸으로 행을 했을 때 성죄와 차죄가 하나가된다
이지구상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성죄가 없이 차죄는 일어나지않는다
내 생각이 들어가지않는 행동은 불가항력적이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