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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에브라다야 오신예수(2061.2020.12.25.성탄절설교문)
미5:2-5
할렐루야
2020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과 삶 속에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 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성탄절이 되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성탄절이 되면 성탄절을 신나는 기분으로 맞이합니다. 교회보다 거리에서 더 많이 들리는 것이 캐롤입니다. 거리에서 예수님이 오심을 환영한다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는 것을 보면 단적으로는 소망적이기도 하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의 마음으로 길거리에서 주님의 오심을 찬양하는 것이라면 춤추며 환영할 일이지만 상업주의와 향락 문화에 빠진 사람들이 놀자판으로 부르는 캐롤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심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서 기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절 문간의 현수막에 ‘예수님의 오심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종교가 폭 넓은 종교인의 아량을 보여 주는 관대한 종교임을 드러내려고 할지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알면 그렇게 쓰지는 못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으며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진정으로 환영하는 것은 그 절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인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큰 손님이 아니라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맞이하여야 합니다.
소선지서 12권 가운데 하나인 미가서가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익숙한 책이 아닙니다. 설교 본문으로 삼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미가서는 7장에 불과한 아주 얇은 책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책들이 그렇듯, 미가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도 분명합니다. 오늘은 미가서를 본문 삼아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오신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 증거하려고 합니다.
미가서를 기록한 미가에 대해서는 미가서 1:1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미가가 ‘모레셋’ 사람임을 밝힙니다. ‘모레 셋’은 미가서 1:14에 나오는 ‘가드모레셋’과 같은 지역입니다.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40km 지점에 있는 ‘가드’로 추정합니다. 역대하 11:8에서 르호보암 왕이 예루살렘 성을 방어하려고 쌓은, 여러 성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미가는 남 유다의 제11대 왕 요담 때로부터 12대 왕 아하스, 13대 왕 히스기야 때까지 선지자로 활동한 인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남 유다 백성들의 심판과 회개와 회복을 선포토록 하셨습니다. 그 당시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나라는 ‘앗수르’입니다.‘앗수르’는 아람 군대가 물러간 뒤, 평화를 누리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할 즈음,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가 남진정책을 편 거죠.결국 그 뒤를 이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 왕에게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합니다.남 유다는 멸망은 면했으나, ‘앗수르’의 침략으로 속국이 되거나, 전역이 초토화됩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남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대한 형식적인 신앙을 갖습니다. 이럴 때, 백성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지도해주어야 하는 자가 바로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조차도 자신의 편의와 유익을 따라 행동했는데요.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과 우상 숭배를 혼합시키고, 조장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야말로, 지역과 계층의 구분 없이, 전 사회에 걸쳐, 영적 타락이 만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영적 타락은 사회 정의와 도덕이 내팽개쳐지고, 양심이 마비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사회는 죄악이 팽배해졌고, 사회적 약자들은 절망과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회적, 정치적 배경 하에서 하나님은 미가에게 선지자 사명을 주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하기 전인 기원전 735년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남 유다에서 활동했고요.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인해 성취가 되었고요. 남 유다에 대한 심판도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남 유다의 회복과 메시야의 도래도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나라와 민족의 심판 예언에 대한 염려를 불식시켰고요. 나아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총과 궁극적 구원을 확신케 하여,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도 제시해 주었습니다.
2절에 보시면‘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 예수님의 탄생과 그가 행하실 구원 사역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남서쪽, 약 8km지점에 있는 곳이죠. 해발 777m의 산악지대고요. 벌집처럼, 동굴이 많은 석회암 언덕 비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비옥하여, 각종 실과들이 무성하게 자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고요. 신앙적 전통을 비롯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야가 오심으로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매우 영광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다’라고 본문 2절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의미한 ‘베들레헴’에 ‘에브라다’라는 단어를 붙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브라다’는 어디죠? 창48:7에 나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더욱이, 에브라다 또한 베들레헴의 특성과 유사하게 ‘열매를 맺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더욱 같은 지역임을 알 수 있죠? 그럼에도, 미가 선지자가 굳이 베들레헴과 에브라다를 중복해서 기록한 이유는 뭘까요? 본문2절의 베들레헴이 여호수아 19:15에 나오는 스불론 지파가 차지한 베들레헴과 다른 곳이며, 다윗의 집에서 나온 메시야와 연관된 장소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무튼, 본문2절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며 ‘작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작다’는 ‘차이르’인데요. ‘미천하다’, ‘보잘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본문2절은 ‘열매를 맺는 풍요로움과 미천함’, 그리고, ‘영원함과 보잘 것 없음’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미천한 곳에 성육신하시지만, 구원 사역과 영적 승리로 인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메시야 예수님이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고 증거 합니다. ‘메시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탄생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목적을 밝혀 주시는 장면이죠?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탄생하신다’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즐거움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탄절이 분명히 즐겁고 기쁜 날이라고 말합니다. 성탄절은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기쁘고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대신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기뻐하여야 할 이유는 알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준 사건입니다. 이는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던 인간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준 사건입니다. 나아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섭리가 정점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맞는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찬양함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오신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신앙의 모토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세상에 전파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은혜 받은 자로서 당연한 의무요,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12월 25일 성탄절은 마치 백화점이나 선물 가게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그날의 주인공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물 꾸러미를 들고 다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만큼 요즈음의 성탄절은 상업주의, 물질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성탄절은 우리에게 단지 선물을 주고받는 날, TV 앞에서 하루를 즐기는 공휴일로만 의미가 있습니까? 성탄절은 우리 인생에게 가장 귀한 분이 오신 참으로 복된 날입니다. 우리 각자는 성탄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바른 성탄절 보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이면 꼭 생각나는 동네가 있습니다.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에서 아주 작은 동네입니다. 지리적으로 그리 발전할 수 있는 동네는 아니었습니다. 한 때는 아랍에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가 6일 전쟁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이 소유하게 될 정도로 유명한 동네가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 별로 유명하지 않은 동네를 향한 예사롭지 않은 예언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오래 전에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미가 5:2절‘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예언의 말씀을 귀담아 듣거나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당시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을 향해서 특별한 예언을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귀담아 들었을 것이고, 또 후세들도 그 예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는 그렇게 특별한 예언에 어울리는 동네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특별한 예언을 해도 그냥 흘려듣게 될 정도로 베들레헴은 그렇고 그런 동네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비록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언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하신 것을 때가 되자 정확하게 이루셨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해서 어쩌면 베들레헴과 같은 우리교회,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곳이 복된 곳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오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그 사랑하신 백성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시고 계십니다. 그곳이 바로 영적인 베들레헴인 오늘의 교회를 통해서 주님은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저 세상에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세상에 빛으로 어두움을 밝히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오실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되어서 세상에 잠들어있는 영혼들은 구원해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베들레헴 에브라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2절‘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에는 앗수르라는 나라와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압박을 해와서 이스라엘은 심히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베들레헴이라는 고을은 너무나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스라엘 땅에서 유명한 도성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다라고 말한 것은 그 고을이 작은 곳이지만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다시 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보잘 것 없는 곳에서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그 작은 고을에 온 우주를 회복하시고 인류의 생명을 새롭게하실 왕을 보내시기로 하나님은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동네지만 왕이 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왕이 탄생하기에는 적합한 마을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기에 적합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에 적합한 곳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지구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에 적합한 곳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이 작은 동네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우리 예수님은 동네에 의해서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조건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동네가 메시아이신 예수님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영향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베들레헴은 너무나도 작은 동네 였습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변방에 불과한 그런 땅이었습니다. 무덤으로나 쓰이던 땅이었고, 흉년이 들어 황폐화되어 그곳을 떠나야만했던 폐허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위협 속에서 급작스레 기름부음을 받고 도망쳐야 했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은 옛부터 작은 마을, 보잘 것 없는 마을로 여겨졌던 동네입니다 .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미가 선지는 그러한 과거의 인식들을 불식시키면서 ‘유대 땅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아니한 동네’라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스라엘의 목자, 곧 메시야가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미가 5:2절에 무엇이라고 선언 합니까? 유대땅‘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선언 합니다 이는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 즉 ‘개천에서 용’난다는 선언입니다. 바로 그 선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났습니다. 메시야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벧엘도 아니고 세겜도 아니고 브엘세바도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시야가 태어난 베들레헴은 ‘떡집’또는 식당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동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떡집 식당 리이라고 하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 에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양식을 주는 메시야 생명의 양식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내가 곧 생명의 떡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친히 말씁합니다.
그런데 이 베들레헴이 ‘에브라다’라는 이름과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이 속해 있던 지역의 이름입니다. 베들레헴에 정착한 에브랏 집안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약한 존재, 작은 존재, 보잘 것 없는 존재,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에브라다는 예루살렘, 여리고, 세겜, 벧엘, 브엘세바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도시들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아주 작고 초라한 촌락입니다. 그래서‘작다’는 것이 강조하고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합니다.
베들레헴도 아주 작은 마을이고 그작은 마을 가운데서도 에브랏 가문 또한 보잘 것 없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생명의 떡인신 생명의 열매인신 예수님이 태어나다는 것입니다. 베드레헴 에브아다야 합니다. 배들레헴은 떡집 에브라다가 많은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 에브아다야 하는 것은 아주 작고 초라한 그 동네에서 생명의 떡 생명의열매 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그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겁니다. 왜니까? 바로 그 땅에서 예수님이 탄생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메시야를 잉태케 하시고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곳을 기독교의 발원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않은 겁니다. 세계보다 크시고 우주보다 크신 분이 나오신 동네를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크다 하고 무엇을 작다 하십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크고 작은 것을 구별하십니까? 물량? 수량? 사이즈?... 크고 작은 것은 결코 그런 것으로 가늠되는 게 아닙니다. 키 작은 사람이 거인일 수도 있고 키 큰 사람이 소인일 수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외형도 아니고, 소유도 아니고, 수치도 아닙니다. 바로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무엇을 드러내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베들레험 비록 그 땅은 작지만 그 담고있는 것이 크기에 즉 예수님의 탄생을 담고 있기에 그 동네가 큰 동네가 유명한 동네가 되엇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유명해진 동네 되었습니다.예수님을 모신 여러분의 자녀들 때문에 냉림동이 유명한 동네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이전까지 베들레헴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여야 할 만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골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곳에서 탄생하심으로 인해 마을의 크기와 상관없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사역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의 삶은 늘 귀한 동리가 된 베들레헴을 연상시킵니다. 사람들이 알아줄 이유가 전혀 없던 하찮고 외진 시골 마을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도시로 떠올라,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머무는 존귀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의 삶의 이치도 이러합니다. 사도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오시고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자, 그들이 의미적 가치있는 인물들이 된 것처럼 인간이 진정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셨야합니다. 그럴때에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미적으로 가치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품은 사람으로 살게 될 때, 하찮은 베들레헴이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베들레헴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하찮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하게 쓰임 받고, 사람들에게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 없는 그런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신 내 마음은 아름다운 향기가 만연할 것입니다. 예수님 모신 내 가정은 화목의 꽃이 만발할 것입니다. 예수님 모신 내 작은 일터에 군고구마 맛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 모신 우리의 공동체는 새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언제나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가 A.D. 2020년입니다. 여기서 A.D.를 사용하기 전에는 B.C.를 사용했습니다. B.C.는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이란 뜻이며, A.D.는 ‘anno Domini’= (라틴어) ‘그리스도 안에’란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영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지구촌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이 로마제국을 변화시켰고, 영국을 변화시켰고, 대한민국도 변화시킨 줄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라에도 영향을 주시고, 역사에도 영향을 주시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영향이 나의 삶에 변화를 주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영향이 나의 인격에 영향을 주고, 나의 영혼에 영향을 주고, 나의 육신에도 영향을 주고 있어야 합니다.
베들레헴처럼 작고 유명하지 않았던 우리의 삶에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곳이 영광스러운 곳, 축복된 곳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영향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는 그런 영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고, 그것도 마구간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장 초라하게 탄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왕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왕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왕권보다 현실의 조건을 더 잘 믿습니다. 현실의 조건이 불리하면 그 불리함을 믿어 버립니다. 그곳에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임하시면 어떻게 될 것인지 예언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래 전에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베들레헴에 메시아께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했지만, 베들레헴은 절대 그런 동네가 아니라는 확신이 더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과 같은 작은 동네에 메시아께서 탄생하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실제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음에도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의 현장이 베들레헴과 같이 유명하지 않고, 유리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 예수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복된 곳으로 변화가 될 것을 믿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 성도님들의 삶의 현장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곳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환경을 탓하거나, 조건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임하시도록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이 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작은 고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영적인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찾고 계십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세상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는 또 다른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이 상주지역에 생명의 기쁨을 전하는 약속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놀라운 하늘의 영광이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귀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베들레헴 에브라다는 형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세상에서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내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일이고, 두 번째가 남의 돈을 내 주머니에 넣는 일입니다. 첫 번째 일을 하는 사람을 선생님이라 부르고, 두 번째 일을 하는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다하는 사람을 마누라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은 배우기 싫은 것이고, 사장님에게 대드는 것은 돈 벌기 싫다는 것이고, 마누라에게 대드는 것은 살기 싫다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찾아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장에는 동방박사들이 등장을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별들을 관찰하다가 특별한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서 온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 별은 왕이 탄생할 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2:2절‘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처음부터 유대의 현재 왕인 헤롯을 바로 찾아갑니다.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정도면 현재 왕인 헤롯 왕이 분명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서 왔지만 그들은 계속 별을 보고 따라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별이 자꾸만 이상한 동네로 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왕이 탄생하는 것을 알려주는 별인데 예루살렘 정도 도시에서 태어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가지 않고 큰 도시였던 예루살렘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도 헤롯이 머무는 궁궐로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서 산다고 하지만 얼마나 내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내 생각에는 베들레헴이 아니면 성경에서 베들레헴이라고 예언을 했음에도 가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예루살렘이 맞는 것 같으면 성경에 없어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예수님 만나지 못하는 삶의 현장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비로소 목적 있는 삶을 살 수 있는데, 내 생각을 따라가다가 보니 예수님 없는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곳에 열심히 달려왔음에도 그곳은 공허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방황하고, 우리 삶이 공허한 것입니다. 분명 베들레헴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유명한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예수님 없는 곳은 결코 만족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다시 별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별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별이 향하는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갈수록 시골입니다. 갈수록 초라한 마을입니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세상적 기준, 자기 기준,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자기들 생각과 전혀 맞지 않았지만 별이 인도하는 베들레헴으로 따라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곳,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지 않으면 베들레헴은 찾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는 순간 그곳에 메시아께서 탄생하신다는 것이 보여집니다.
마2:4-6절‘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헤롯 대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성경에서 찾아보게 합니다. 그랬더니 미가 선지자께서 오래 전에 예언한 말씀을 찾아냅니다. 그곳이 어디였습니까?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말씀 속에서 찾지 않으면 베들레헴은 메시아의 탄생하실 곳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곳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똑바로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똑바로 만나기 위해서는 역시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헛갈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 헛갈립니다. 오늘날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부 경험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면 모든 것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별을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화려하고 유명하고 내 생각에 괜찮은 예루살렘이 아닌, 말씀이 가리키는 베들레헴으로 갈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베들레헴은 순종으로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세상적 기준과 내 판단을 내려놓을 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진정 우리 성도님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우리 성도님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3절‘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대한 위대한 약속을 하신 것은 그 형제 남은 자를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세상의 모든 영혼들이 멸망의 길에 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약속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게 하라’ 애절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담겨있는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딤전2:4절‘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저 세상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서 오늘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베들레헤메 에브라다에 담겨진 하나님의 약속일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이 시대의 베들레헴 에브라다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우리의 영원한 평강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본문 4절‘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대하여 담대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실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요14:27절‘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6:33절‘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늘 염려하고 걱정하고 문제를 만들고 또 그 문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오늘도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주님의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도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실 만큼 주님은 언제나 문제가 문제되지 않는 평안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을 바로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랄프 W. 쇼크만 은 말하기를 ‘역사의 중심점은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은 오직 역사 가운데 한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사건은 오늘도 구원의 역사로 계속되어 우리 상주감리교회가지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시는 복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주시는 영원한 평안이 오늘 성탄을 맞기 위하여 기다리는 상주감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하셔서 베들레헴 에브라다~! 이 시대의 구원의 약속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로서 위대한 하나님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들레헴은 원래 조용한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당시에는 로마 황제가 피지배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다시 호적을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호적을 두었던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호적하러 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방 하나 구하지 못하여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출산하였습니다. 원래 조용하던 곳이 너무 바쁘고 시끄러워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구간에서 들려오는 갓난아기 예수님의 울음소리를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너무 바쁘고 사람의 일로 시끄럽고 세상의 일로 시끄러우면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바쁘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정말 바쁘게 열심히 사는 우리 성도님들이 진정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쁘게 열심히 살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동네가 호적하는 사람들로 분주하고 시끄러웠듯이 또 하루 종일 바쁘고 소란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양들을 이끌고 양의 울음소리 속에서 분주하게 살았던 목동들입니다. 이들은 목축업이기 때문에 열심히 양을 돌보아야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목동들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고요하고 거룩한 밤을 맞이합니다.
베들레헴은 분주하고 시끄러웠지만, 들판은 고요했습니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 목동들은 천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시간이 있습니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들려오는 아기 예수님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수 있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시간이 있습니까? 천사들이 예수님 탄생의 소식을 전할 때 그 천사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영적인 시간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우리의 베들레헴인 가정과 삶의 현장에 예수님의 인기척이 들릴 수 있는 고요하고 거룩한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베들레헴인 가정과 삶의 현장에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고요하고 거룩한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도 꼭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하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찾아와 주셨지만, 베들레헴은 우리가 믿음으로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곳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의 믿음이 전통으로서의 성탄절에 그치지 말고, 꼭 첫번 크리스마스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찾아가서 만나고 경배하는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명하지 않던 베들레헴이 예수님 때문에 영광스러운 곳이 된 것처럼, 우리 성도님들의 삶도 예수님 때문에 영광스러운 곳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과 하시는 일들에 더 복된 곳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