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退溪는 風水에 대해 상당히 好意的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退溪集』「陶山雜詠 倂記」에는 도산서당의 입지를 선정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風水理論의 핵심이면서도 주공격대상인 同氣感應論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形勢등 풍수적인 용어를 사용한 다양한 詩와 散文을 남기고 있어 풍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陶山雜詠 倂記」에 도산서당 입지를 선정하는 과정을 노래한 詩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집 땅 자주 옮기니. 寒栖屢遷地
간들간들 곧 기울고 허물어졌네. 草草旋傾壤
비록 골짜기 그윽한 것 사랑스러우나 雖憐泉石幽
형세는 끝내 막히고 좁네. 形勢終嫌隘
탄식하며 곧 고쳐 보고자 喟然將改求
높고 깊은 경계 다 가보았네. 行盡高深界
퇴계의 남쪽에 도산 있는데 溪南有陶山
신비한 곳 가까이 있어 좋고도 괴이하네. 近秘良亦怪
어제는 우연히 혼자 찾았는데 昨日偶獨搜
오늘 아침에는 함께 오기로 하였다네. 今朝要共屆
이어진 봉우리는 구름 등으로 오르고 連峰陟雲背
잘리운 산기슭은 강 언덕을 바라보고 있네. 斷麓臨江介
푸른 물은 겹 모래섬 두르고 있고, 綠水遶重洲
아득한 봉우리는 천개의 상투로 이어져 있네 遙岑列千髻
아래 한 동네 살피어 구하니 窺尋下一洞
묵은 바람 이에 보상받게 되었네 宿願玆償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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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이룬 땅덩어리 신기하게 느껴지네 辨此感大塊
퇴계는 도산을 얻고 “산수가 맑고 기이하여 내가 구하는 바에 꼭 맞는다.”고 하여 상당히 만족해한다. 그러면서 도산은 양쪽의 산이 합쳐져서 긴 골짜기가 되었는데, 산이 별로 높지 않고 경치가 훌륭하며 산 뒤와 시내 남쪽은 모두 좋은 밭과 평평한 밭골이라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학문을 탐구하며 살고자 하였던, 그의 생각은 서원 터를 정하는데 있어서 교본처럼 자리하게 된다.
퇴계는 학문을 논하는 장소는 물론 본인이 삶터로 정한 곳이 살기 편안한 명당터가 아니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맘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번에 걸쳐 옮겨다니는 모습을 위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현재 종택에서 좌측 사선방향에 자리한 한서암이다. 이곳에서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데, 물은 반배하고 곧장 치고들어오는 곳이라 명당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