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밥으로 오신예수(2282.2024.12.25.성탄절)
눅2:8-2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4년이 시작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달마다 날마다 순간마다 좋은 것으로 역사하셨던 성탄절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으로 알만큼 충성된 삶을 살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고급호텔들은 이미 성탄트리로 불을 밝히고 아기예수 탄생을 알리는 발빠른 행보와 상술적 산업주의를 보면서 진심으로 저들에게도 구원의 예수탄생을 바라고 먼저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이 깊이 반성하고 각성하고 깨우침을 받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성탄을 맞이합시다.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고 내뜻대로 행동하는 교만함은 없었는가 생각해 봅시다. 내 중심에 오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곤욕을 치룰 때에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관용과 용서하심을 감사하고 감격하는 성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화해와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2024년도 성탄절의 아침에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전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난받는이들, 병원에 누워서 치료를 바라는 사람들, 우리 민족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개인과 가정과 직장위에도 예수님의 탄생이 희망이 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천년 전,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 헤롯은 피의 성탄을 맞이했고,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무관심의 성탄을 지냈으며, 베들레헴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매정한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몸이 만삭이된 한 여인이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애기를 낳을 것만 같아서 몹시 힘들고 불편해 보입니다. 따뜻한 방에 몸을 녹이고 싶습니다. 며칠 동안 여행길에 몸이 한없이 지쳐 천근 만근 무게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빈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 자리 잡고 있어서 어디에서도 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참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너무 너무 힘든 모습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이 바로 그 여인의 몸과 마음이 되었다고 묵상해 보세요. 너무나 야속하고 슬프고 답답하겠지요. 살다가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깝고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만삭이된 여인이 빈방을 찾지 못하는 그런 상황을 만날 때가 참 많지요! 우리들도 지난 한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아, 아, 여러 가지 힘겨운 상황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일들속에서 ‘주님은 그런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오늘 이시간 찾아 오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만나주고 있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구원얻은 성도답게 힘과 용기를 내어 담대하게 신앙생활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성탄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진실한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밥이라는 것을 반드시 먹고 살아갑니다. 밥맛이 없을 때가 있다고도 하지만 입을 까다롭게 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밥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매일 하루 세끼 밥먹고 살 듯이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세상의 밥으로 오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2천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어떤 ‘병원’이나 ‘여관’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 분을 알아보는 표이다’이 말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큰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이 구유에 누워있는 갓난아기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구유’가 무엇입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구유는 가축이 먹는 음식을 담는 여물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셨다는 말씀은 그분이 밥통에 누우셨다는 말입니다. 밥통에 누우신 예수님! 밥통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인데, 그럼 예수님이 밥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6:35절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밥’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밥이란 무엇입니까? 보관해두기 위해서 있습니까, 아니면 먹기 위해서 있습니까? 당연히 먹기 위해서 있습니다. 밥을 안 먹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그러니까 밥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서 밥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우리 뱃속에 들어가서 없어져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밥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고, 우리를 살게 하려고 자신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밥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스스로 죽임을 당하신 그런 분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생각해보십시다. 이보다 더한 감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살 수 있도록 내 먹이가 되어주신 예수님’이렇게 말하는 것 보다 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실은 우리 삶의 윤리의 기저가 무엇이어야 하는 지도 아울러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죽는 일입니다. 뭇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먹이가 되어 죽어야 하는 것이 삶입니다. 주님은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올 한해를 돌아보며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누구의 죽음, 즉 누구의 희생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왔는지? 우리는 자기가 잘나서 혼자 힘으로 산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내가 먹는 음식, 내가 입고 있는 옷, 이 모두가 다른 사람의 수고와 희생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런 희생적 삶을 살 수 있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상당히 겸손한 태도 같지만, 사실은 매우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나는 남의 주검을 먹고살면서, 나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죽지 않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너는 신이니까 자꾸 죽어라, 그래서 내 먹거리가 되어라. 하지만 난 인간이기에, 신이 아니기에 그럴 수 없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천사의 모습이나 불붙는 떨기나무 같은 상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친히 인간이 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나도 인간이다. 인간인 내가 그렇게 희생했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선물은 바로 ‘세상에 밥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듯이, 예수님을 먹어야만,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야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은 ‘남을 살리고 자신은 죽는, 그래서 영원히 사는 그런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본 받아서 우리도 나 자신 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받은 큰 선물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사시는 복된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특별한 장소에 오셨습니다. 특별한 사람들로 오셨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다 은혜를 받으면 갑자기 분노와 걱정과 적대감과 수치심과 망설임과 경쟁과 미움과 체념과 불안과 권태와 삶의 슬픔같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올무에서 해방과 자유와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순간에도 그분의 사랑의 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결코 닫힌 적이 없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십니다. 여기 사건이 있습니다. 여기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눅4:18-19‘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이번 성탄에 나를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누어 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이번 성탄에 나눔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물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여덟 가지 성탄절 선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요즈음은 일반 사람들도 성탄절이 다가오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끼리 축하 카드나 전자메일을 보내고 선물을 교환하는 일이 보편화 된 듯 싶습니다. 선물이란 감사와 정을 표시하는 일이니 하나도 탓할 일이 아니지만 물질 위주의 선물주고 받기와 함께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린 오늘의 세태는 결코 그대로 방치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크리스찬들은 상업적인 성탄절 분위기에 무턱대고 휩쓸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찬들만이라도 성탄절의 의미에 맞는 선물을 주고 받았으면 하는 것이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한자로 선물의 앞글자인 ‘선’자의 새김은 반찬을 의미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이 호박 가지 두부 등을 재료로 하여 짐과 같이 만드는 음식입니다. 말하자면 선물이란 반찬의 역할에 그쳐야지 만약 반찬이 밥의 행세를 하게 되면 선물의 본질이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선물의 한계도 지키면서 무엇보다 오염되어 가는 성탄절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돈 한 푼 들지 않는 성탄절 선물을 몇 가지 소개 하려고 합니다.
1)선물은 경청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진정으로 마음을 기울여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중간에 끼어 들지 않으며 다른 생각이나 대답할 말을 준비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일입니다. 고아원이나 이런데를 방문하면 말도 조심해야 하고 들어주는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면 너나 잘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누구나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2)선물은 관심의 선물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포용하며 등을 두드려 주고 손을 잡아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일입니다. 이런 작은 행동은 백마디 말보다 큰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3)선물은 웃음의 선물입니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만화나 삽화 그리고 짤막한 이야기들을 ‘당신 또는 너랑 같이 웃고 싶다’는 쪽지와 함께 전하는 일입니다.
4)선물은 쪽지 선물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간단한 쪽지라든지 마음에 와 닿는 시 한편을 적어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마음이 담겨 있는 손수 쓴 쪽지는 평생동안 기억되고 어쩌면 받는 사람의 인생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전 집사람의 생일 되기전에 편지 한장을 받았는데 감동을 먹어서 아이구 세상에---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하 선물은 이런 쪽지 하나라도 주면 감동을 먹는 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에는 많은 쪽지를 썼습니다.
5)선물은 칭찬의 선물입니다. 짤막하지만 진지하게 ‘정말 잘 했어요’ 혹은 ‘정말 맛있습니다’ 등의 칭찬은 받는 사람의 하루를 넉넉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 동기를 부여하고 의욕을 북돋아 줄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하면 왜 그렇게 했어라고 따지듯이 하지말고, 아이구 내가 못하는것인데 너무 잘했습니다라고 칭찬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칭찬하는 사람의 인격이 넢아집니다. 칭찬많이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6)선물은 친절의 선물입니다. 매일 매일 작은 친절하나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려고 노력한 다면 여러분은 물론 받는 이의 삶이 훨씬 풍요해 질 것입니다.
7)선물은 고독의 선물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대방을 혼자 있게 해주는 일입니다. 누구나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빨리 알아차려 혼자있도록 배려하는 일은 다른 것 못지 않게 소중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8)선물은 명랑한 기분을 만들어 주는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는 친절한 말을 건네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고미안수입니다. ‘고맘습니다, 미안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기쁘게 상대방에게 건네는 일입니다. 이런 것은 돈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여덟 가지 선물은 요즈음 같은 물질 만능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번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실행하기만 한다면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제일 먼저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공사간에 인연을 갖게 된 사람들, 본의 아니게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게, 나를 전도해 준 고마운 분들에게 앞에 소개한 여덟 가지 선물 중에 하나 혹은 두 세 가지를 골라 선물해 볼 것을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에게 감히 권유해봅니다.
오늘 성탄을 맞는 이 날에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역사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홀로 계신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훌륭한 분이시라도 우리와 관계를 맺지 못하면 무슨 소용 이 있겠습니까? 요1: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나하고 관계를 맺어야 그것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죄가 많습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많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질고가 있습니다. 말못할 고민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금년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고생 육신의 고생을 많이 하신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러 오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우리의 근심과 고통이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피곤하기도 하셨고 목마르기도 하셨습니다. 가난도 체험하였습니다. 배가 고프기도 하셨고 슬픔을 체험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우리 같은 몸을 입으시고 오신 날이 성탄절 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의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왕으로 자리잡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맡기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날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까? 한마디로 속죄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마1:21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막10:45절‘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악이 속죄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행전 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우리의 죄악이 속하였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 찬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나심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진노 받아 마땅한 불쌍한 사람들인데 예수님의 나심으로 우리들의 죄가 속죄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하신 예수님을 마음껏 찬양을 하십시다. 속죄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십시다. 속죄하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들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성결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성탄절은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날입니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한대로 우리의 죄악을 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요3:16절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이것이 최대 사건이요 최대 뉴스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신 것은 천하를 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우리들을 위하여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명이 풍성하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들의 생명이 부요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부요한 생명을 우리들의 부요함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말 구유에 나신 것도 우리들은 그 가난을 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성탄의 주님을 모실 때에는 풍성한 삶을 약속 받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을 목숨을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까지 주시고 우리들을 살려 주셨는데 살려주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의. 식. 주.문제를 해결하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맞이하고 걱정스러운 가운데 맞이한 다 할지라도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선물로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면 이제 우리들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특히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어두운 구석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훈훈한 사랑의 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면, 결식 어린아이들을 도우는 운동을 메스컴에서 벌이고 있는데 아주 호응이 좋은 것 같습니다. 700-1004번으로 전화하면 한 통화 1,000원으로 결식아동의 식사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인데 많은 분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참된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성탄의 선물을 받기만을 원하지 말고 나보다도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다. 우리는 많은 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모에게, 남편과 아내에게, 스승과 제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소박하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나누고 베풀어주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탄 역시 받는 날이 아니라 주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멸망에서 질병에서 낙심과 좌절과 절망에서 살리기 위하여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내어주신 섬김의 모습이 성탄절입니다.
성경은 이웃을 향하여 관심을 가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신15:7-8절‘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팍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행20:35절‘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마10:8절에는‘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동안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고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 되어지시기를 이 귀한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