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으로 읽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 6편,마지막 해전-노량해전
아들아, 그동안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이야기를 손자병법에 기대어 풀어 보았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이야기를 하려고 해.
1598년 11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이야기를 할거거든.
그런데..이 노량해전에 관해서라면 아빠도 손자병법으로 풀어볼 도리가 없다.
그것은, 아들아..아빠가 보기에 노량해전은 가장 충무공 이순신 제독 답지 않은
그런 전투였으니까 말이다.
앞에서 얘기할 때 아빠는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승리방식과
상당히 다른 예외적인 전투라고 했었다.
그것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평소 이겨놓고 싸우는 그런 분이었기에, 모든 변수를
통제하여 놓고..그렇게 나가서 승리만 확인하는 식의 그런 전투를 했던 분이라..
그것에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전투라는 말이었단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
아빠가 앞에서도 얘기했었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7년 조일전쟁 기간 수행했던 그 수많은 해전들..무패의 기록을
뜯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원칙이 있다고.
첫째, 탐망(探望)과 여러 경로의 첩보를 통해..적의 위치와 군세를 미리 파악한다.
둘째, 전투는 적보다 아군이 많거나, 대등하거나..아니면 열세라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 규모의 적을 상대로 한다.
셋째, 전장(戰場)과 전투의 시기는 조선 수군이 결정한다.
넷째, 조선 수군은 항진도, 전투도 대형을 유지하고, 판옥선과 화포의 우월한 사거리와
화력이라는 이점을 살려서 원거리 함대함 포격전으로 전투를 수행한다.
다섯째, 아군의 규모가 일본군보다 열세이므로 유리한 지형과 좁은 물목을 선점하고
틀어막아 적의 움직임을 제어한다.
1597년 9월, 명량해전에서의 기적적인 승리 직후 조선 수군은 후퇴하여 서해 해상의
군산 선유도까지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충청도 직산회전에서 조명연합군에 패하고, 명량에서의 패전으로
보급과 길이 막혀 철수하며 남하하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수군도
서해상을 따라 내려와 목포 고하도에 임시 통제영을 설치하여 그해 겨울을 났단다.
이 과정은 조선 수군 재건의 과정이었다.
전선을 새로 건조하고 병기제작, 군량확보 그리고 전선을 움직이고 전투를 수행할
병력 확보까지..바쁜 나날이었지.
그리고 그 결과 어느 정도 전력을 회복하여 다시 통제영을 완도 옆 고금도로 옮기게
되었단다.
진린 도독이 이끄는 명 수군이 합류하여 조명 연합수군이 결성되고, 절이도 해전과
왜교성 전투를 거치며..고흥반도까지의 제해권도 찾아왔지.
이때의 상황은 일본군은 더이상 북진을 포기하고 남해안의 포구에 집결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하고, 일본으로의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어.
일본군의 주요 거점은 순천왜성(왜교성)의 고니키 유키나가, 울산왜성은 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사천왜성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버티며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치며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단다.
그런데 7년 조일전쟁을 일으킨 전쟁 범죄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죽고, 유언으로 조선의 병력을 철수시키라 했다는 것이야. 전쟁의 양상이
크게 변하게 되었지.
일본군의 철수는 명의 소극적인 전투와 명군과의 결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인데
딱 하나..걸림돌이 있었으니, 순천왜성을 봉쇄하고 버티고 있는 조선 수군과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었지.
일본군이 명과 결탁해서 뇌물을 바치고 협상으로 철군의 길을 열려고 했으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단호한 거부와 결의만 확인하였을 뿐이었어.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탈출해야 했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일본군을
봉쇄하여 끝까지 격멸하려 했고, 그 사이에 낀 명 수군 제독 진린은 어떻게 처신했는가.
명은 조선 수군과 연합군을 편성했지만, 사실 일본과 끝까지 피해를 감수해가며
싸울 이유는 없었을거야. 게다가 일본이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는 상황이니까.
그런데..우군인 조선 수군을 이끄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명군의 그런 지시를
거부하며 강경하고, 다른 조선군 장수들과는 달리 말도 잘 듣지 않아서 중간에서
좀 난감하였겠지.
명 수군 제독 진린
그렇다고..명 수군제독 진린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뜻을 무시하고 깔아 뭉갤
입장도 못되고.
그런데..일본이 끈질기게 화의요청하며 매달리고 있고, 뇌물공세를 펼쳐서,
그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어..
명 수군제독 진린의 머릿 속은 이런 생각으로 가득했을거야.
결국, 명 수군제독 진린이 사고를 쳤단다.
일본의 뇌물에 매수되어서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천왜성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와 연락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지.
이 두 일본장수가 연락해서 무엇을 얘기했을까.
그건 구원군 요청, 협공이었을 것이다.
순천에서 그리고 사천, 남해 창선, 고성 지역의 일본 수군전력을 총집결시켜 병력과
함선의 수적 우세를 이용해 조명연합수군의 봉쇄를 돌파한다는 전략이었을거야.
사천왜성의 주장, 시마즈 요시히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이를 알고..분노했겠지. 또 배신감도 느꼈겠지.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다음에 펼쳐질 행보를 그려보고, 대책을 수립하는 수 밖에.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을거야.
눈 앞으로 다가온 전투를 따져봤을 때, 이 전투는 불리한 요소가 많아 정상적인
경우라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피했을 해전일지도 모르겠다.
왜냐?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조선 수군이 안고 있는 위험요소가 너무나 컸거든.
첫째, 조명연합수군과 일본 수군의 전력차가 너무 컸어.
순천과 사천, 남해 창선, 고성 등지에 포진한 일본 수군의 함선 수만 5백 여척이 넘고,
조선 수군은 최대 80척 정도, 명 수군을 합쳐도 일본 수군의 절반도 채되지 않았어.
둘째, 우리 군 내부의 무시할 수 없는 불안요소가 있었지.
조명연합수군은 서로 품은 뜻도 다르고 손발도 맞지 않아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어.
게다가, 명 수군은 냉정히 말해 없는 것보단 낫지만 있어도 큰 도움이 안되는 존재라
믿을 수 없었어.
셋째, 조명연합수군이 아니라 일본 수군에게 전장과 전투의 시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도 안좋았고
마지막으로 조선 수군은 순천과 사천의 적, 사이에 끼어 협공당할 공산이 크다는
불리한 지리적 위치도 컸단다.
하동과 남해 사이 좁은 물길..노량(露梁)
충무공 이순신 제독도 이 불리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
이에 대한 그의 대책은..
첫째, 명 수군 제독 진린을 만나 돌출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도록 다짐을 단단히
받아두고,
둘째, 전쟁 개시 일시는 선택할 수 없으나 사천과 남해 창선, 고성지역의 일본 수군이
통과할 지역은 하동 노량이 명확하니..전장을 하동 노량으로 설정하고, 그 지역을
선점하여 미리 합당한 전술,전략을 수립하는 것.
셋째, 순천과 사천지역의 일본 수군의 합류를 최대한 저지하여야 한다.
넷째, 일본 수군을 특정한 지역으로 유도하여 가두고 섬멸한다.
이를 위해..탐망을 통해 끊임없이 일본 수군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내려 하였고,
순천 왜성에는 명 수군과 조선 수군 일부 병력으로 허장성세로 일본 수군을 기만하여
봉쇄하고, 최대한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한다.
조선 수군 주력함대는 노량을 중심으로 하동과 남해의 각 해안선과 도서를 이용해
매복하여 사천지역에서 넘어오는 일본 수군을 매복기습전으로 저지하고 섬멸한다.
그리고 겨울철 바닷가 거센 바람을 이용해..화공(火攻)으로 적함을 태운다.
그런데..이런 대책에도 문제점이 있다면,
역시 순천 왜성을 저지하는 병력이 얼마나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과
좁은 전장에서 많은 전선이 엉켜 싸우는 형태의 전투로, 판옥선이란 전선이 가지는
장점과 우수한 화포의 위력에서 오는 화력의 우세라는 강점이 있으나
야간 접근전은 필히 우리 군의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양면의 적을 모두 맞아 싸우려면 우리도 병력을 둘로 나누어
대응해야 하는데 적이 너무 많아.
아들아, 7년 조일전쟁의 마지막이 될 전투, 노량해전을 앞두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적을 섬멸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결의를 다지고 출전을 명했지.
1598년 11월 18일 밤에 일본 대규모 함대가 노량을 통과하자 매복한 조선 수군이
발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단다. 한참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중,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함대가 빠져나와 참전하고, 다시 명 수군함대가 전투에
가세하면서 전투는 점점 더 가열되었단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일본 수군 함대 대부분이 깨어지고 나포되며 전력을
상실하게 되고, 쫓기다가 남해의 서북방 관음포 해역에 일단의 함정이 갇혀 포위되어
조명연합수군이 섬멸하던 중..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유탄에 맞아 순국하셨고,
그의 죽음을 숨긴채로 적선을 격멸하여 적선 5백여 척중 450척 정도를 깨뜨리고
나포하였으며, 탈출한 것은 약 50척 정도였단다.
적을 참한 것도 최소 수천 이상이었지.
7년 조일전쟁 마지막 전투이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은..
조명연합수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단다.
아들아, 노량해전은 다른 전투와는 달랐다.
전투 결과, 대략 조선 수군 사상자는 3백, 명 수군 사상자는 5백 정도이고,
함선 피해는 명 수군 소속의 판옥선 1척 정도이면,
450척을 격파하고 최소 수천 이상의 일본군을 참했으니 확실히 대승이긴 한데..
다른 전투와 차이점이라면..일단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지휘한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3백이나 잃은 사례는 없다는 것과, 무리를 감수하고 벌인 접근전으로 인해
조명 연합수군 지휘장수의 피해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 걸린다.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포함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 나주목사 남유,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군관 이언량 제독이 전사했고,
나대용과 류형, 송희립 제독은 적탄 여러발을 맞고 큰 부상을 입고 싸웠으며
명 수군은 부총병 등자룡이 전사했다.
전례없는 피해상이었지.
게다가 뼈아픈 것은..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소 요시토시 등 일본군
주요장수들, 일본군 50여 척이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니..노량해전의 모든 전술, 전략적
목표를 이루는 것은 실패했다고 생각된다.
노량해전의 주전장..하동 금남면과 남해 서북단 고현면 사이의 바다
아들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병법을 몰라서 이해득실을 따질줄 몰라서
이렇게 위험한 전투를 무리하게 강행했겠느냐?
아니다.
아들아..노량해전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철수하는 일본군의 길을 막아서
최대한의 타격을 주어 우리의 한을 풀고, 앞으로 또다시 일본이 재침할 엄두를
못내도록 하는 당위성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냉정하게 이해득실을 따지고, 오직 승리만을 추구하는게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 속성이라 하지만..
그럼에도 당위성을 목적으로 한 그런 전투도 있는 것이다.
꼭 싸워야 하는 당위성이 이해득실이나 승리라는 목표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할
시점이 있고, 무리이고 힘든 줄 알아도, 때론 죽을 줄 알아도 해야만 하는 전투가 있다.
왜냐하면 당연히 해야하고, 그게 정의니까.
남해 관음포 (이 충무공 순국공원, 이락사, 첨망대)
노량해전은 아빠가 보기에는 그렇게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행보와 다른 해전을 손자병법으로 풀어서 얘기했지만..
이 노량해전 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들아, 어쩌면 말이다..
이래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더 오래도록 기억되고 성웅으로 추앙받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단순히 병법을 따르고 적용시키는 것을 넘어..아니 그것을 초월한 장수이다.
장수로서 이런 경지라면, 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느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이란 평가도..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남해 이락사(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한 이 충무공의 유해를 처음 모신 터)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