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1.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서 만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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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 |
사진설명: 8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의 땅'으로 변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엔 수많은 이슬람 관련 유적이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유적들이 징기스칸에 의해 파괴됐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14세기 이후 티무르가 건립한 것들이다. |
지난해 3월4일부터 5월8일까지 인도·네팔·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 인도아대륙 답사를 마친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지난해 9월6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으로 날아갔다. 인도에서 탄생된 불교가 간다라 지방과 ‘중앙아시아’(부하라·사마르칸트·타쉬켄트 지역)를 거쳐 중국·우리나라로 전래됐기 때문이다. 본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우즈베키스탄으로 곧장 넘어가려 했으나 ‘아프간 전쟁’으로 통행이 불가(不可), 어쩔 수 없이 돌아서 우즈베키스탄에 갔다.
지난해 9월6일 오후 5시30분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취재팀이 타쉬켄트에 도착한 시간은 9월6일 저녁 9시10분(한국시간 9월7일 새벽 1시10분). 처음으로 맡은 타쉬켄트, 아니 중앙아시아 공기는 상당히 건조했다. 갑작스레 건조한 지방으로 와 그런지 목이 칼칼했다. 다음날 다소 적응이 됐으나, 칼칼함은 여전했다. 타쉬켄트 재래시장을 둘러본 취재팀은 지난해 9월8일 사마르칸트로 이동했다.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난 도로는 그런대로 좋았다. 도로변 곳곳에 뽕나무 가로수들이 서 있었다. 이름그대로 ‘비단길’이었다. 2시간을 달려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실크로드의 서쪽 기착지 사마르칸트. 중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던 중심도시이자, 8세기 중반 이전까지 불교가 번성했던 곳.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주민들은 불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인도에서 탄생된 불교가 간다라 지방과 수칸다리아 지역(우즈베키스탄·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을 지나 중앙아시아로 퍼져 부하라·사마르칸트까지 전래된 것이다. 반면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에서 전해졌다. 기원전 7세기 이란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는 광명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악신을 물리치면, 신의 왕국이 도래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불에 대한 숭배를 바탕에 깔고 있기에 중국에서는 ‘배화교’(拜火敎)로 불렸다.
당의 西域 총독에 고선지 장군
중앙아시아 부하라·사마르칸트 지역, 다시 말해 아무다리아(옥서스강)와 시르다리아(야그잘티스강) 사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속디아나’(sogdiana)라 불렸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란계 주민들이 ‘속드인’인데, 그들은 ‘속드어’를 사용하고 불교·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며, 상업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상업에 종사하며 나름대로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8세기 중반 이슬람 세력이 서서히 동진(東進)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이슬람교로 개종을 강요한다는 정보가 속디아나 지역에 전해지자, 주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상업에 주로 종사했던 속드인에게 싸움은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의 동점(東漸)이 가시화되자, 속디아나 지역 사람들은 동쪽의 강대국이며, 같은 불교를 믿고 있던 당(唐)에 의존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는 태종 이세민이 죽은 후 고종과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들은 태종과 달리 대외문제에 소극적이었고, 중종 때가 되자 더욱 대외문제에 무관심해졌다. 천산산맥이나 파미르고원 넘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지원할 상황이 아니었다. 속디아나 지역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돼 갔다.
바로 이 무렵(서기 750년) 이슬람 제국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칼리프(정교일치의 수장)를 배출하던 우마이야 가문이 몰락하고 압바스 가문이 새롭게 정권을 잡았다. 당나라에서는 아랍과 그 주민들을 대식(大食, 아랍)이라고 불렀는데, 우마이야 왕조를 ‘백의대식’(白衣大食), 압바스 왕조를 ‘흑의대식’(黑衣大食)으로 구분했다.
주지하다시피 이슬람교 창시자 무하마드(570~632) 사후 이슬람의 칼리프는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됐다. 초대 칼리프는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 제2대 칼리프는 우마르(재위 634~644), 제3대 칼리프는 우스만(재위 644~656)이었다. 여기까지는 무하마드와 혈연관계가 없었다.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은 우마이야가(家) 출신으로, 무하마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가 암살된 후 제4대 칼리프가 된 인물이 바로 알리. 알리는 무하마드의 사촌이자, 무하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했다.
우마이야 가에서는 알리의 칼리프 취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알리는 다마스쿠스에서 별도로 칼리프를 선언했지만, 암살당하고 말았다. 우마이야 가문이 결국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프는 추대형식으로 선출됐는데, 우마이야 가문은 세습을 통해 칼리프를 이양했다. 이에 반기를 든 사파흐(무하마드의 숙부 아바스의 4대손)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대신 칼리프를 세습했다. 이 정권이 바로 ‘압바스 왕조’다.
압바스 왕조가 등장할 즈음 당(唐)의 서역(西域) 총독이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이었다. 고선지 장군은 부도호로 있던 시절인 747년, 1만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소발률국(小勃律國. 길기트 등 파키스탄 북부에 있던 나라)을 정복했다. 소발률국은 원래 당나라에 복속해 있었으나, 티벳 왕이 자기 딸을 그곳 왕비로 보낸 후부터 당에 반기를 들었다. 소발률국은 비록 규모가 작으나, 중앙아시아 20여 개국이 당으로 조공을 바치러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런데 당으로 가야 될 조공품들이 티벳으로 들어가는 일들이 생겼다. 당으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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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영웅 티무르 무덤내부> |
이에 고선지 장군에게 명해 소발률국을 정복토록 했다. 소발률국 정복이 성공리에 끝나자 고선지는 절도사로 승진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750년 석국(石國. 타쉬켄트)을 정복했다. 다음해인 751년 탈라스에서 이슬람 세력(압바스 왕조)과 당나라 군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탈라스 전쟁이 그것인데, 여기서 고선지 장군은 동맹을 맺은 ‘카를루크족의 배신’으로 전쟁에 지고 말았다. 탈라스 전쟁 이후 중앙아시아 종교도 크게 바뀌었다.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이 공존하던 이 지역이 이슬람 일색으로 변모됐다. 당나라도 이후 다시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밟지 못하게 된다.
‘역사적 상념’에서 벗어나 사마르칸트 시내를 활보했다. 청아한 하늘색 돔과 섬세한 모자이크 무늬가 아로새겨진 ‘레기스탄 광장’, 우즈벡의 영웅 티무르가 잠들어있는 ‘무덤’도 참배했다. 오늘날 중소도시로 전락해버렸지만, 한때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최대의 도시였던 사마르칸트는 징기즈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파괴 이후 사마르칸트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현존하는 건축물들은 14세기 이곳에서 제국을 일으킨 티무르가 도시를 새로 건설하며 세운 것들이다.
탈라스 전쟁 후 중앙亞 이슬람 일색
티무르 무덤에 참배한 뒤 우리나라 사절(使節)을 그린 벽화가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유적지’를 찾았다. 우리나라 사절을 그린 벽화는 아프라시압 박물관 별관에 보관 중이었는데, 직접 그림을 대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 옛날 이곳까지 어떻게 걸어왔을까. 멀고 먼 서역 길, 험하고 험한 사막을 넘어 여기에 왔을 사절(使節)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왔을까. 그들이 원했던 목적은 달성됐을까. 그리고 살아 다시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갔을까. 여러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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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부하라 시내에 있는 성> |
다음날(지난해 9월9일). 역경승(譯經僧) 안세고 스님의 고향 부하라를 찾았다. 오아시스 도시 부하라. 카라한조(朝)와 부하라 한국(汗國)의 수도였던 곳. 부하라는 옛 레닌광장을 경계로 북쪽의 ‘구 시가지’와 남쪽의 ‘신 시가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교외 신흥주택 지구’로 구분된다. 도시중심부에는 구 레닌광장이 있고, 광장의 남쪽엔 10월 혁명 40주년 거리가 있다. 구 시가지는 징기즈칸의 침공을 전후로 두 개의 지구로 나뉘어졌는데, 침공 이전 땅을 구 시가지로 부른다. 부하라의 중심은 칼랸 미나레트, 아르크성, 생명의 물이 가득한 하우즈(연못)가 있는 곳인데, 이 주변에 있는 메드레세(이슬람 신학교)와 모스크(이슬람사원), 타키라는 둥근 지붕의 시장, 미나레트(첨탑)가 순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부하라 성 맞은편에 있는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 시내를 일별했다. 시내 곳곳엔 청아한 하늘색 돔과 섬세한 모자이크 무늬가 아로새겨진 모스크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8세기 중반 이전엔 불교가 성세(盛勢)를 자랑했던 곳인데, 이제는 이슬람의 땅이 되고 말았다니. 안타까움만 가득 안고 전망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아프라시압 궁전유적 벽화의 주인공은 ==
당나라에 파견된 사절로
신라. 고구려인 두가지說
1965년부터 3년간에 걸쳐 발굴된 아프라시압 궁전 유지(遺址)(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벽화가 발견됐다. 벽화엔 한국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두명 있어 관련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새 깃털 같은 것을 두 개 꽂은 모자를 쓰고, M자형 장식을 단 칼집에 들어있는 환두도(環頭刀)를 찬 두 명의 남자 사절(使節)이 문제의 주인공. 이들은 신라인일까, 고구려인일까.
학설은 양분(兩分)된 상태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실크로드상의 신라사절상’이란 논문에서 “657년부터 670년 사이 당(唐)에 파견된 상주사절이 일시적으로 사마르칸트까지 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벽화에 나오는 인물은 신라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서울대 노태돈교수는 〈고구려사 연구〉(사계절)에 수록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인’이라는 글을 통해 “궁전 벽에 있는 명문을 분석해 보면 그림에 나오는 사마르칸트 왕은 당의 영휘 연간(650~655) 강거도독으로 책봉된 불호만과 동일인”이라며 “그렇다면 사절들은 고구려인들”이라고 설명한다.
우즈베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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