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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원문이 원체 길어 임의로 편집했습니다....ㅡㅜ 한 페이지에 뭔 내용이;;;
원문>>> http://blog.daum.net/nero1003/160
일단 서론 형식으로 본문중에 민족사학자에 대한 개요와 밑에 이어지는 내용을
첨부합니다.
글: 대수맥
[신채호]
그는 우리 민족의 시원적 흐름을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골>에서 잡고 있다.
동방으로 이동하여 백두산과 길림성 송화강 근처인 합이빈(哈爾賓)을 중심으로 터전을 삼고
난하(灤河) 연안까지 영역을 이룬 것으로 보고 있다. [제2편 수두시대]
1) 우리 민족의 옛 이름은 조선(朝鮮)으로 광명을 뜻한다.
조선족은 최초에 파미르고원 혹은 몽고(蒙古)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진출,
백두산 일대와 그 부근에 자리 잡았는데 그 터전을 조선이라 불렀다.
조선 고대문화는 압록강*대동강*두만강......은 물론 길림성 송화강*봉천성 요하*영평부 난하 연안
에서 발생하여......한국 문화의 원시시대 [수두]의 발원지는 만주 송화강 연안 합이빈(哈爾賓)
부근이다(수두시대 개요-고조선 全盛 半千年, 조선고대 총론의 조선족의 東來와 조선 최초 개척한
부여扶餘).
2) 그 뒤 周나라가 흥하자 단군(壇君)을 天으로 받들며 도산신서塗山神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신봉하는 殷나라 왕족 기자(箕子)가(天乃錫禹 洪範九疇 천내석우 홍범구주......제 환공(齊 桓公) 때
관중(管仲)과 성부(城父)가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함에 따라 중원의 광대한 강역을 잃는 비운을
맞이하였다(수두시대 개요-고조선 全盛 半千年).
3) 또 초사(楚辭)에 거(據)하여 <동황태일東皇太一> 곧 단군왕검을 제하는 풍속이 호북*절강 등지
에 많이 유행하였으므로 보면 대개 하우(夏禹)가 형산(衡山)에서 天에 祭하고 도산(塗山)에서 부루
(夫婁)에게 신서(神書)를 받은 곳인 고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니라(제2편 수두시대
-수두의 홍포弘布와 문화의 발달-기자의 동래).
이어 제2편 수두시대-조선 전성시대 項에서는 하북*산동(부鳧○)*산서(卑耳)*섬서*회대(淮岱)
지방을 모두 조선족이 점유하고 있음을 단언한다.
1) 기원전 10세기 경으로부터 그 후 대략 5-600년 동안은 곧 대단군조선의 전성시대니라.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국(孤竹國)은 조선종이라 한바......고대 지나(支那)의 강江*회淮 域에
조선인이 많이 이식(移植)하여 다수한 소왕국을 건설하더니 서 언왕(徐 偃王)이 그 중에 굴기
(崛起)하여 仁義를 行하여 支那 36국이 조공하였다.
2) 불리지(弗離支)란 자가 조선의 병을 이끌고 今 직예(直隸)*山東*山西 등 省을 정복하고 대현
(代縣) 부근에 일국을 建하여 자기의 명으로 國名을 삼아 <불리지국>이라 하니 <주서周書>에
<불령지弗令支>와 <사기史記>의 <이지離支>가 다 이를 가리킨 것이며......
하지만 민족의 시원으로 자주 인식되어지는 환국(桓國)이나 환인(桓因) 그리고 환웅(桓雄)에
대해서는 부연하는 정도에 그치고 별장(別章)에 따로 설명을 하는 태도를 볼 수 없어 아마도
단군조(檀君朝)를 강조하는 견지를 주안(主眼)으로 삼는 듯하기도 한다.
1) 王姓을 해(解)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함이요, 王號를 <불구래>라 함은 태양의 광휘(光輝)에서
뜻을 취함이요, 天國을 桓(桓國)이라 함은 광명에서 뜻을 취함이니......(제2편 수두시대 조선족의
동래)
[정인보]
그의 진면목은 동양사를 전공하고 우리 문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국학의 기틀을 마련한 학자라는
사실에서 집중 발휘되었다.
위당은6·25 동란 당시 납북되어 생을 마감하기까지 오직 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계승하고 회복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호(號)의 하나인 담원(○園)에는 일제치하의 삶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마음으로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한다.
특히 〈동아일보〉에 연재한 〈5천년간 조선의 얼〉에서 조선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조선역사는 곧 한민족의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으며 1946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조선사연구〉를 펴냈다.
여기에서 강력하게 표출되는 <얼 사관>은 단재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의 한 전형으로서
일제의 식민사관을 거부하고 이러한 사관에 대한 실증적인 반박을 겸한 비판을 하기 위한 실제적인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위당>이 왜 양명학적인 사상을 역사적인 얼 사관으로 전환해 나간 직접적인 이유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우리 역사와 민족성을 왜곡해 나가자 이에 대한 저항과 분노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된다.
<조선사연구>는 1946년에 발간된 책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시조단군부터 신라까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민족사적 관점에서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서술한 개설서이다.
주요내용은 <1장에서 6장 단군조선 8장 위만의 고조선 강탈 9장 한사군의 연혁 10장 삼국의 성립
을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기술 11장 마한의 멸망 12장과 13장은 고구려와 신라의 발흥>으로서
서문에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얼`을 제시하여 이를 통해
정신사적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1) 시조단군 편에서는 단군의 연원을 天과 연결시키려는 의식의 강력한 반영으로 단군의 발상지를
백두산으로 국도(國都)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으로 보아 신채호의 입장과 비슷하다.
2) 2장부터 6장까지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전개를 고찰하였고 부여의 기원과 왕통을 기술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는 볼 수 없다.
3) 하지만 주로 정신사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문헌고증에 있어서의
한계와 일제강점기 식민지상태에 대한 민족사적 관점에서 서술되어 주관적인 입장이 크게 반영된
아쉬움이 있다.
[안재홍]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안목, 날카로운 필치로 1920~30년대에 대중을 깨우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8·15해방 후에는 민주독립국가를 구현하고자 언론과 정계를 뛰어다닌 대표적인
대논객(大論客)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민족주의 이론>을 전개하여 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민족사관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한민족의 기본노선〉등이 있다.
그는 1920년대 중반 자치론이 고개를 들자 이에 대항하여 민족협동전선체로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비타협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합작을 통하여 1927년 2월에 탄생시킨
것이다. 나아가 조사연구부 간사로 민족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1929년 11월에는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피체되어 재차 고초를 겪었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고 만주침략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정치운동이 불가능해지자
국사와 국어 그리고 고전 연구에 심혈을 쏟았다.
이윽고 1930년 〈조선상고사관견〉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 역사학에 관심을 보여 8·15해방
때까지 한국고대사연구에 몰두하여 이 기간 동안 연재된 논문들 대부분을 수록한 <조선상고사감>
을 저술하고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면서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정기를 사수하고 선양
하는데 진력을 기울였다. 내용 구성은 <상권>에 [1.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 2.아사달(阿斯達)과
백악(白岳), 평양, 부여변 3.고구려건국사정고, 고구려직관고 4.신라건국사정고, 신라직관고략
5.삼한국과 그 법속고(法俗考) 6.육가라국소고] <하권>에서는 [1.부여조선고 2.밝**ㅣ어 원칙
과 그의 순환공식 3.고구려와 평양별고 4.백제사총고 5.조선상대지리문화고] 등으로 되어 있다.
1) 특히 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의 한국고대사연구태도를 계승하고 비교언어학 방법론을
고대사회사 연구에 적용했는데 이에 따르면 우리 상고사는 여계사회인 아사달사회에서 출발하여
남계중심의 부족사회-부족연합국가(단군조선·부여조선)-봉건귀족사회(삼국시대)로 발전하면서
씨족공동체의 수장(首長)*대인(大人)을 가리키는 <기·지·치> 계급이 족장-지방제후-공경(公卿)으
로 변화한다고 파악했다.
2) 상고사에서 땅의·용어가 <달(達·岳·岡)불(市)나(壤·耐)>로 바뀌었으므로 아사달·백악·백아강·신시
·불나·평양 등은 모두 같은 곳을 이른다고 하여 신채호의 입장과 그리 다르지 않다.
3) 또 [밝**ㅣ어 원칙]은 우리 민족이름의 변천과정이자 국명·지명·직명까지 확산된 것으로
발국(發國)·부여국(夫餘國)·태백국(太白國)·환국(桓國)·단국(檀國) 등은 모두 조선(朝鮮) 즉
'밝주신'의 이칭이며 한(韓)은 만주어의 '한'(汗)과 대후(大侯)·대공(大公)의 뜻인 거서간(居西干)
·마립간(麻立干)·이벌간(伊伐干)·서불감(舒弗邯) 등과 같다고 했다.
또 '한'은 진(辰)과도 뜻이 통하여 삼한은 곧 진국이 되며 그 맹주는 마한(馬韓)이고, 변한(弁韓)
·진한(辰韓)은 마한을 보좌하는 신왕적 존재라고 보았다.
4) 하지만 이 책은 식민사학을 극복하려는 문화적 저항뿐만 아니라, 저자의 신민족주의가
한민족 고유의 이념에 근거하여 당시의 극좌·극우 이념보다 우월한 보편적 가치임을 증명하기 위한
저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헌고증에 입각한 실증에서 엄밀하지 못했고 언어학에 너무 의존했다는
한계를 내포했다.
<조선상고사감>에서 大人國(大人首長)*大人之市*君子國*大公朝鮮*기자조선 등을 표현한
기*크치(큰치)*신크치*신치*기*지*치 등의 용례는 확실히 <신채호>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왜냐하면 <신채호>는 신지(神誌)를 <신치>로 읽어 <신크치>의 略字라 하였으며 <신가>의 별칭이라
단정 짓기 때문이다.
이제 어느 정도 감을 잡았으니 본격적으로 <이유립>과 [환단고기]의 세계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이유립의 많은 기고문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역사관과 상고조선사에 대한 기본 태도를
발췌하여 분석했다.
[이유립]
다음의 몇 가지 주장에서 분명히 보여 지는 맥락을 잡아낼 수 있다.
가장 먼저 우리 민족사의 흐름을 카올 海(天海-바이칼 湖)에서 백두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는데 여기에서 신채호등의 <파미르나 몽골설>과 약간 다르다. 또한 민족의 시원이 환국(桓國)에
있으며 환웅의 존재를 분명히 하여 이를 단군조선에서 찾던 신채호 등과는 매우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근거로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왕검조(昔有桓國석유환국)를 들고 있다).
허나 단군조선 부분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한 사고관을 가졌음을 명백히 한다.
1) 우리 민족의 정통성은 환국(桓國)에서 이주해 온 환웅천왕의 배달 건국으로부터 비롯하여
단군조선-북부여(원시 고구려)-고구려(본 고구려)-대진국(大震 중 고구려)-고려(후 고구려)
-조선-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2) 민족사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있었던 환웅천왕의 태백산 천강과 함께 이룩된
신시개천에서 찾아야 한다.
3) 단군조선은 엄연히 실존했던 역사이며 아사달 시대(1048년)-백악산 아사달 시대(860년)
-장당경 시대(188년)를 통해 2096년의 역년을 셈할 수 있고 통치방법으로 신한(진한)*말한(마한)
*불한(변한)의 삼신일체 원리를 본 뜬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적용되었다.
【우리 신시개천경에는 나반과 아만의 두 남녀가 삼신하나님의 몽교에 의하여 저물게 만나는
예를 이룬 후로부터 九皇六十四民이 이루어지고 자식들의 마을(서자촌庶子村)에 환웅님께옵서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탐스럽게 인간다운 세상을 찾아내려하거늘 그때 아바지(안파견安巴堅-
天父)께옵서 밑으로 삼위와 태백(오늘의 백두산)을 살펴보시고......환웅님께옵서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밑으로 내려오시니 이를 神市라 이르니 이가 환웅천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천상세 또한 여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며 배달민족과 배달 역사의 존립 또한 여기
에서 그 동기를 찹아야 하며......<사관정립을 위한 접근방법>】
【김일연의 삼국유사로 볼 때 <환단桓檀>古記를 인용하여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라 하고 홍익인간이란 개천이념을 밝히고 왕침의 위서를 전재하여 단군왕검께옵서 아사달
홀빈(忽濱)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했다 하고 단군의 역년이 백악산과 아사달 두 서울
역년으로 1908년이라고 제시한 것은 높이 평가하지만......<사관정립을 위한 접근방법>】
아울러 중국 땅=한국 땅이라는 기본적인 역사의식 또한 일관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사관정립을 위한 접근방법>이란 기고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支那 민족사는 그 기원이
사실상 우리 겨레(桓族)가 동서 두 갈래로 나뉘어서 서로간의 대결에서 한번 東으로 하고
(아승我勝) 한번 西로 하는(피진彼進) 주도권 쟁패전이 연속되는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1)......카올 해에서 큰 이민운동이 일어나......더 앞으로 나아가 삼위산으로 일단 모였다가
다시 갈려진 겨레는 황하*회수의 물길을 따라 산서*산동*하남*강소*절강 등지로 옮아가 지나사
에서 말하는 동이족이 됩니다. 그런데 그 중 <자식들의 마을(서자촌)>에서 출발한 환웅일족은
홍익인간이란 인간 기본의 가장 높은 천부주의 사상과 하늘의 세 개 부인(符印)을 가지시고
천제님의 견왕(遣往)하신 동기에 의하여 비로소 배달민족과 배달 역사가 존립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우리나라는 한때의 광대한 회대(淮岱)와 만몽(滿蒙)의 평원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한동반도(韓東半島)의 한 모퉁이로 줄어든......오늘날 이러한 한국의 실상 그것이 마치 육천년
역사의 전부인양 그릇 알고 있기 때문에......
3) ......설원(說苑)에 9夷의 사(師)는 곧 우리 번조선이 인정할 때 하의 걸은 정권을 유지했고
그렇지 않을 때 드디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은탕이 또한 동이계에서 일어났으나 武乙때에
쇠폐하게 되자 우리 겨레들이 회淮*대岱 일대를 휩쓸고 점차로 중부 일대를 차지했으며......
4) 엄왕 박고는 무경의 은사회복운동을 적극 원조했으며 서언왕은 주와의 반벽태세를 완전히
갖추고 황지(개봉開封)이동의 제후 36국을 조공 받았으며 회(淮=예濊)라는 우리 겨레는 주의
서울을 점거하여 사상 처음 14년간의 공화정치를 계속 주도했으며산융*영지*고죽을 포함한
불조선(管子曰八千里之發朝鮮 관자왈팔천리지발조선)이 연(燕)을 넘어 오패의 두목 제소백
(제환공齊桓公)과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것이 우리 조선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하편>을 보면 첫머리부터 <신채호>등의 세계관과 크게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역사의 발원을 <사백력斯白力>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동경로에서의 정착지를
黑水*白山이라 밝히고 그 뿌리를 명백하게 桓國에 두고 있는 것이다.
1) ......한 神이 있어 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神이 되시니......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群)으로서 天界에 계시면서......
이를 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2) 파나류산(波奈留山)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 리이니 통틀어 말하면
桓國이요......
西土내에 우리 민족들이 들어가 땅을 개간하고 정착을 이루어 三韓의 관경(管境)으로 정립되어
가는 지속적인 과정들을 추정해 낼 수 있는데 예컨대 <삼성기전 하>에서 <밑으로 三危와 太白>
이라 하여 이동정착지인 감숙성 삼위산 지역을 알려주며 치우천왕이 구환(九桓)을 하나로 모아
관경으로 다스리는 과정과 三韓에 통솔되어 나라 안의 天帝의 아들로서 <檀君>의 위상이 정립
되어가는 흐름이 일목요연하다.
1) 환국의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三危와 太白을 내려다보시며......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
니 오가(五加) 모두 대답하기를 <庶子 환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삼성기전 하편)
2)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때에 九桓은 모두
三神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蘇塗)를 관리하고 관경(管境)을 관리하며......이때부터
九桓은 모조리 三韓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天帝의 아들은 <檀君>이라고 불렀다(삼성기전 하편).
3) 天海*금악(金岳)*三危*太白은 본디 九桓에 속한 것이며 구황(九皇)의 64民은 모두
그 후예이다(태백일사 삼신오제 본기)
-위 환단고기와 민족사학자들에 대한 앵무새=매식자의 궤변:
◀ 환단고기 삼성기 상편을 보면 <한 신이 斯白力 하늘에 있어 홀로 신이 되어...어느 날 동녀동남
8백 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내려 보냈다> 저 사백력을 임승국이 시베리아라고 주장해서 본인의
무식을 만방에 자랑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점을 떠나 이유립 역시 사백력을 시베
리아에서 착안했을 거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동녀동남 8백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 땅은 물론 만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흑수란 흑룡강이고 백산이란 백두산이다. 즉 이유립이 삼성기 상편에서 하고자 한 이야기는
시베리아 땅에서 만주로 환인이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앵무새]
[반론]먼저 우리는 여기에서 桓族의 이동경로에 대하여 면밀한 기초적인 배경지식과 편향이 없는
판단으로 착시(錯視)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목해야 한다.
기록으로 살펴보면 이는 더 명백해진다. 지금까지 이에 대하여 많은 석학들의 연구와 논의가 시도
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몇 가지 통설들을 소개한다.
1) 이 시기의 민족적 분포와 흐름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논리적으로 짚어낸 권위 있는 고고학자
P. P. Schmidt와 S. M. Shirokogorov 그리고 M. G. Levin 등에 따르면 이른바 퉁구스족은 바이칼 호
동쪽 및 북부 시베리아에 이동한 흔적이 없다. 흔히 이들과 알타이족이 알타이 산맥 쪽에서 이동해
왔다고 하지만 지도를 보면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지역을 거쳐 와야 하는 까닭에 동쪽으로 이동
할 필연성을 느끼지 않는다(적합한 사냥지대도 못되는 사막 및 목초지라는 이동상 장애물과 더욱이
기후조건이 훨씬 좋은 서남방면을 두고 굳이 만주 쪽으로 방향을 잡을 이득이 없다)
-백산학보 1967. 117~140 P
2) 북방 민족을 중심으로 <유목민족 제국사>를 쓴 록 콴텐이나 라이샤워(동양문화사 9 P)가 정곡을
찌른 것처럼 <중국이란 거대한 땅의 북쪽에는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사막과 초원이 위치하고 있는데
보다 춥고 거칠어 초기 시기 말과 낙타라는 이동수단을 지닌 유목족들이 나타나기까지 거의 통과
가 어려웠다> 화하족(華夏族)의 북방진출 움직임도 불가능하였다는 말이다.
이무렵 천진과 산동지역의 국지적 빙하지대와 히말라야계가 진출한 신강*산서*운남에서 사막과
스텝지형을 뚫고 북상할 이유가 없는 것이 남부 중국이란 무진장하고 훌륭한 지역을 두고 굳이
방향을 틀 필요성이 느끼기 않았기 때문이다(한창균 제4기의 지질 및 자연환경 한국사론
12 1983 87 P).
3) 아울러 서쪽 유럽에서의 이동의 족적도 발견되지 않는다(고고학의 세계적 권위자 Okladnikov는
시베리아 구석기 문화는 서유럽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며 오히려 북중국이나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문화와 닮은 양태가 많다고 역설한다) -한국사론 12 국사편찬위원회 1983 238 P
4) chard의 글을 인용한 <김정학 -한민족의 원류 문헌 및 고고학적 고찰 1983. 6 제1회 한국사학술회
의 9P>도 유럽인종과 몽골 선주민의 혼혈이 최초로 이루어진 때는 목축이 생활화된 아파니시에보
문화권에서부터인데 미누신스크(Minusinsk)지역의 많은 발굴 유물의 편년으로 BC 3000-2000년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5) <최무장>은 중국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시베리아*몽골*만주*한반도는 그쪽과는 전혀 다른
동일문화권으로 보는 게 세계적 경향이라고 한다 -한국의 구석기 문화 1986. 11 P
즉 시베리아에서의 이동의 흐름이 감지되는 시점과 바이칼지역 등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역사적인 첫 장면의 막이 올려 질 무렵 몽골로이드계 종족들은 이미 전 지역에 걸쳐 견고한 집단들
을 이루고 있었다(동양문화사 13 P).
우린 이를 환국연맹(桓國聯盟)과 12개 부족집단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쯤에서 [환단고기]의 환국 12연방을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인가? 상상인가? 가 판가름 나는
분기점이 된다.
참고로 일부 학설에 [타림분지]에서 시베리아지역으로의 北上 흐름이 감지된다고 하는데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동현상은 BC 65-60C 를 내려오지 못한다.
다음의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BC 65C부터 후빙기 최적기후 시대(後氷期 最適氣候 時代)가 도래하여 기온이 평균 2~3°상승하는
바람에 고산지 빙하․적설의 용해로 하천범람과 건조지역의 이상 집중호우로 홍수지대화가 급격히
이루어졌다. 때문에 타림분지는 BC 3145년까지는 커다란 민물호수로서 내륙의 호수 주위에서 겨우
거주를 이어가는 상태였는데 당시 고비사막은 비옥한 평원으로 거대한 호수의 연안에 위치했으며
곤륜산맥이 이 호수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어 호수에서 발원한 타림강이 흐르고 있었다
<DAVID. H. CHILDRESS 중국*중앙아시아*인도의 잃어버린 도시들>
시베리아와 바이칼 그리고 滿蒙지역의 이동흐름을 알려주는 주목할 만한 분석이 서울대 박물관장
<임효재>의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즉 BC 6000년대의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유적의 흑요석이 X선
형광분석으로 백두산 원석임이 증명되면서 서울대 동물학교수 <김훈수>의 <함북과 강원의 포유류
*담수 어류*해안지역 어류가 시베리아 지역과 같다>는 설명이 힘을 얻는다.
또한 세계적으로 공인된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쿠샹툰*츄차유황*타투샤*체레무슈니크*베루호
렌스크*쟈라이 놀의 유물과 유적이 석장리 유적과 전남 주암(住岩)댐 수몰지구인 新平里 금평유적
의 박편세석기와 동일하다는 확인(한국일보 1987. 6. 23 7면)도 우리 민족의 이동 흐름이란 사실을
역으로 밝혀준다.
※ 중국과 한반만주(韓半滿洲)의 중석기 문화유물의 분포도에서도 중국의 것은 상한이 산정동
청수하(山頂洞 淸水河)에 그쳐 우리 민족의 흐름과 완연하게 구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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