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혼자만의 상처 풀어내기, <엘리펀트 송>을 보고
1.
이번 학기 마지막 대학원 강의가 학생들의 요청으로 휴강되면서 본의 아니게(?) 봤다. 영화의 내용도 모르고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고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그냥 별달리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단지 예술영화 전문 상영관에서 하기에 봤다. 처음에는 며칠 동안 쌓인 피곤이 몰려와 잠시 졸았다. 어느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몰입하게 되었고, 끝날 무렵에는 살짝 감탄을 했다. 찰스 비나메 감독의 캐나다 영화인 <엘리펀트 송>에 관한 이야기이다.
2.
한참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는 정신병원에서 정신질환자 마이클(자비에 돌란)의 주치의 로렌스가 흔적도 없이 행방불명된다. 로렌스의 동료이자 병원장인 그린박사(브루스 그린우드)는 그의 마지막 행방의 유일한 목격자인 마이클을 통해 찾으려고 한다. 그린박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환자를 대하듯이 마이클에게 접근했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감추고 있는 소년 마이클의 마음을 열기란 쉽지 않다. 알 수 없는 말만 쏟아내는 마이클과 그의 말속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 그린박사의 팽팽한 신경전이 시종일관 관객의 긴장감을 사로잡아 놓는다.
그린박사가 마이클을 대면한 곳은 실종된 로렌스 박사의 방이다. 그린박사가 로렌스박사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이클은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 마이클에게 그린 박사는 진실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하지만 마이클은 비밀을 밝히는 대신,
"난 진실을 말했어요.
당신이 제대로 듣지 않았을 뿐..."
이라고 말하면서 그린 박사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건다.
‘자신의 진료기록을 보지 말 것,
초콜릿을 줄 것,
그의 전 부인이자 간호사 피터슨(캐서린 키너)을 이 대화에서 배제할 것’
마이클은 자신의 진료기록을 보면 선입견이 생길 것이고, 로렌스 박사가 실종된 이후로 초콜릿을 받지 못했다고 그 이유를 말한다.
마이클은 정보를 캐내야 할 사람은 상대방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비교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안다. 마이클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을 적절히 잘 이용한다. 그는 처음부터 그린 박사를 감정적으로 자극한 뒤 알쏭달쏭한 코끼리 이야기로 변죽만 울린다. 그린 박사는 마이클로 인해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의 거짓말 속에 드러날 진짜 정보를 기대하며 심문을 계속한다.
마이클은 어린 시절은 상처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얼굴은 온화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구도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났다, 사냥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딱 한번 만나 함께 아프리카를 여행한 게 전부였다. 그때 아버지가 코끼리를 사냥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그에게 오랫동안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된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는 늘 바빴다. 어린 마이클은 누구의 사랑도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컸다. 그런 마이클에게 딱 한번 행복의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엘리펀트 송’을 자장가로 불러주었을 때이다.(그때 어머니가 마이클에게 준 선물이 코끼리 인형이다.) 마이클은 그린박사에게 어머니는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때 단 한번 이후로는 그에게 좋은 엄마의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 준 적이 없다.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지 말았으면.....’
마이클은 어머니를 살해한 것으로 정신병원에 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이클은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시도한 어머니를 살리려고 하지 않아서 죽게 만든 것이다. 마이클은 왜 음독한 어머니를 살리려고 하지 않고 죽어가는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어머니가 불러주었던 ‘엘리펀트 송’을 불러주었을까. 그 답은 죽어가는 어머니가 마이클에게 한 말이 사랑해도 아니고 행복하라는 것도 아닌 단지 그녀가 공연 중에 노래를 부를 때 세 군데가 틀렸다는 것이라는 극 중 마이클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의 관심사항이 아들 마이클이 아니라 그녀의 노래라는 사실은 마이클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이 부분에서 나는 마이클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 함께 여행한다는 것에 즐거워하는 아들, 아버지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코끼리의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울부짖는 아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아버지......) 마이클에게 있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평생을 무관심으로 방치하다가 한순간의 부질없는 희망만을 심어준 존재였다. 마이클이 그린박사에게 ‘어머니와 가까웠던 때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아홉 달이었다’고 한 말은 이 모든 상황을 대변해주는 한 마디인지도 모른다.
3.
<엘리펀트 송>은 하루 동안에 일어나 일을 한정된 공간에서 100% 대화로만 그리고 있다. 자칫 따분하고 지루할 수도 있지만, 체스게임을 하듯이 서로의 원하는 것을 알아가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자못 흥미롭게 이어진다. 어떻게 보면 서로 동문서답하듯이 서로 다른 것을 묻고 답하고 있지만 이들의 수수께끼 같은 대화는 점점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마이클 역을 한 자비에 돌란의 연기이다. 20대 젊은 나이지만 그의 연기는 이 영화를 떠받치고 빛나게 하고 있다. 사실 자비에 돌란은 19세에 칸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감독이고 25세에 최연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감독이고, 26세에 칸영화제 심사위원이 된 1989년생의 젊은 천재 감독이다. 그가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은 “이 영화는 내가 해야만 한다. 누가 감독을 하든 간에 나에게 이 역할을 맡겨 달라. 정말 간절하게 내가 하고 싶다.”라느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렬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이 영화는 남다른 영화이다.
영화 <엘리펀트 송>은 미스터리한 사건을 통해 진실을 밝히려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심리전을 다루는 듯하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상처를 마이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애초부터 아무도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항상 일 때문에 바쁜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자란 마이클은 외로움과 상처로 가득해 어머니를 죽였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린박사 또한 자식의 죽음과 이혼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일에 철저한 간호사 피터슨이 가지 아픈 과거까지 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는 하나 같이 상처를 품고 있다. 저마다 트라우마로 가득한 이들이 얼마나 거짓과 진실에 뒤덮여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있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혼자 지고 있는 상처를 바라보게 만든다.
이 영화처럼 주로 말에 의존한 고도의 심리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캐릭터의 대결구도가 선명해야 한다. <양들의 침묵>(1991)의 카리스마 넘치는 한니발 박사와 당찬 클라리스 요원처럼...... <엘리펀트 송>은 어떤 면에서 <양들의 침묵>의 역할 관계를 역전한 것처럼 보인다. 자비에 돌란은 마이클을 얄밉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그린 역의 브루스 그린우드는 연륜으로 자신의 마음을 적절히 감추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이클에게 흔들리는 속내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4.
시간이 지날수록 마이클의 죽음이 슬프게, 그러면서도 여운 깊게 다가온다. 그의 자살이 가슴 아프지만 공감된다. 그것만이 그가 편안해질 수 있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가서 졸다가 본 영화지만 생각할수록 꽤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다. 시간 되면 다시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이다.
첫댓글 집에서 장르를 가리지않고 영화를 봅니다...
절대적으로 영화관만 못합니다...
이 영화 함 봐야 겠네요...
언제 영화 함 같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