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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漁袋臣崔致遠奉敎撰幷書篆額
夫道不遠人人無異國是以東人之子爲釋爲儒必也西浮大洋重譯從學命寄刳木必懸寶洲虛往實歸先難後獲亦猶采玉者不憚崑丘之峻探珠者不辭驪壑之深遂得慧炬則光融五乘嘉肴則味飫六籍竟竟使千門入善能令一國興仁而學者或謂身毒與闕里之說敎也分流異體圜鑿方枘互相矛楯守滯一隅嘗試論之說詩者不以文害辭不以辭害志禮所謂言豈一端而已夫各有所當故廬峰慧遠著論謂如來之與周孔發致雖殊所歸一揆體極不兼應者物不能兼受故也沈約有云孔發其端釋窮其致眞可謂識其大者始可與言至道矣至若佛語心法玄之又玄名不可名說無可說雖云得月指或坐忘終類係風影難行捕然陟遐自□取譬何傷且尼父謂門弟子曰予慾無言天何言哉則彼淨名之黙對文殊善逝之密傳迦葉不勞鼓舌能叶印心言天不言捨此奚適而得遠傳妙道廣耀吾鄕豈異人乎禪師是也禪師法諱慧昭俗姓崔氏其先漢族冠蓋山東隋師征遼多沒驪貊有降志而爲遐甿者爰及聖唐囊括四郡今爲全州金馬人也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母顧氏嘗晝假寐夢一梵僧謂之曰吾願爲何阿方言謂母之子因以瑠璃甖爲寄未幾娠禪師焉生而不啼迺夙挺銷聲息言之勝牙也旣齔從戱必火賁葉爲香采花爲供或西嚮危坐移晷末嘗動容是知善本固百千劫前所栽植非可跂而及者自丱□弁志切反哺跬步不忘而家無斗儲又無尺壤可盜天時者口腹之養惟力是視乃裨販娵隅爲贍滑甘之業手非勞於結網心已契於忘筌能豊啜菽之資允叶采蘭之詠曁種□棘負土成墳迺曰鞠育之恩聊將力報希微之旨盍以心求吾豈匏瓜壯齡滯跡遂於貞元卄年詣歲貢使求爲榜人寓足西泛多能鄙事視險如夷揮楫慈航超截苦海及達彼岸告國使曰人各有志請從此辭遂行至滄州謁神鑑大師投體方半大師怡然曰戱別匪遙喜再相遇遽令削染頓受印契若火沾燥艾水注卑然徒中相謂曰東方聖人於此復見禪師形貌黯然衆不名而目爲黑頭陀斯則探玄處黙眞爲漆道人後身豈比夫邑中之黔能慰衆心而已哉永可與赤頿靑眼以色相顯示矣元和五年受具於崇山少林寺瑠璃壇則聖善前夢宛若合符旣瑩戒珠復歸橫海聞一知十茜絳藍靑雖止水澄心而斷雲浪跡粵有鄕僧道義先訪道於華夏邂逅適願西南得朋四遠參尋證佛知見義公前歸故國禪師卽入終南登萬仞之峯餌松實而止觀寂寂者三年後出紫閣當四達之道織芒屩而廣施憧憧者又三年於是苦行旣已修他方亦已遊雖曰觀空豈能忘本乃於大和四年來歸大覺上乘照我仁域興德大王飛鳳筆迎勞曰道義禪師曏已歸止上人繼至爲二菩薩昔聞黑衣之傑今見縷褐之英彌天慈威擧國欣賴寡人行當以東雞林之境成吉祥之宅也始憩錫於尙州露岳長柏寺毉門多病來者如雲方丈雖寬物情自隘遂步至康州知異山有數於菟哮吼前導避危從坦不殊兪騎從者無所怖畏豢犬如也則與善无畏三藏結夏靈山猛獸前路深入山穴見牟尼立像宛同事跡彼竺曇猷之扣睡虎頭令聽經亦未傳媺於僧史也因於花開谷故三法和尙蘭若遺基纂修堂宇儼若化成洎開城三年愍哀大王驟登寶位深託玄慈降璽書餽齊費而別求見願禪師曰在勤修善政何用願爲使復于王聞之愧悟以禪師色空雙泯定惠俱圓降使賜號爲慧昭昭字避聖祖廟諱易之也仍貫籍于大皇龍寺徵詣京邑星使往復者交轡于路而岳立不移其志昔僧稠拒元魏之三召云在山行道不爽大通棲幽養高異代同趣居數年請益者稻麻成列殆無錐地遂歷銓奇境得南嶺之麓爽塏居最經始禪廬却倚霞岑俯壓雲澗淸眼界者隔江遠岳爽耳根者迸石飛湍至如春谿化夏徑松秋壑月冬嶠雪四時變態萬象交光百籟和唫千巖竟竟秀嘗遊西土者至止咸愕視謂遠公東林移歸海表蓮花世界非凡想可擬壺中別有天地則信也架竹引流環階四注始用玉泉爲牓屈指法胤則禪師乃曹溪之玄孫是用建六祖影堂彩飾粉墉廣資導誘經所謂爲悅衆生故綺錯繪衆像者也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告門人曰萬法皆空吾將行矣一心爲本汝等勉之無以塔藏形無以銘紀跡言竟坐滅報年七十七積夏四十一于時天無纖雲風雷欻起虎狼號咽杉栝變衰俄而紫雲翳空空中有彈指聲會葬者無不入耳則梁史載褚侍中翔嘗請沙門爲母疾祈福聞空中彈指聖感冥應豈誣也哉凡志於道者寄聲相弔未亡情者銜悲以泣天人痛悼斷可知矣靈函幽隧預使備具弟子法諒等號奉色身不踰日而窆于東峯之冢遵遺命也禪師性不散樸言不由機服煖縕黂食甘糠麧芧菽雜糅蔬佐無二貴達時至曾不異饌門人以墋腹進難則曰有心至此雖糲何害尊卑耋穉接之如一每有王人乘馹傳命遙祈法力則曰凡居王土而戴佛日者孰不傾心護念爲君貯福亦何必遠汚綸言於枯木朽株傳乘之飢不得齕渴不得飮吁可念也或有以胡香爲贈者則以瓦載煻灰不爲丸而焫之曰吾不識是何臭虔心而已復有以漢茗爲供者則以薪爨石釜不爲屑而煮之曰吾不識是何味濡腹而已守眞忤俗皆此類也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效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禪師泥洹當文聖大王之朝上惻僊襟將寵淨諡及聞遺戒愧而寢之越三紀門人以陵谷爲慮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內供奉一吉干楊晉方崇文臺鄭詢一斷金爲心勒石是請獻康大王恢弘至化欽仰眞宗追諡眞鑑禪師大空靈塔仍許篆刻以永終譽懿乎日出暘谷無幽不燭海岸植香久而弥芳或曰禪師垂不銘不塔之戒而降及西河之徒不能確奉先志求之歟抑與之歟適足爲白珪之玷嘻非之者亦非也不近名而名彰蓋定力之餘報與其灰滅電絶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使聲震大千之界而龜未戴石龍遽昇天今上繼興塤篪相應義諧付囑善者從之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爲名所累衆耳致惑將俾弃同卽異則宜捨舊從新使目示其寺之所枕倚則以門臨複澗爲對乃錫題爲雙溪焉申命下臣曰師以行顯汝以文進宜爲銘致遠拜手曰唯唯退而思之頃捕名中州嚼腴咀雋于章句間未能盡醉衢罇唯愧深跧泥甃況法離文字無地措言苟或言之北轅適郢第以國主之外護門人之大願非文字不能昭昭乎群目遂敢身從兩役力效五能雖石或憑焉可慙可懼而道强名也何是何非掘藏鋒則臣豈敢重宣前義謹札銘云
杜口禪那歸心佛陀根熟菩薩弘之靡它猛探虎窟遠泛鯨波去傳秘印來化斯羅尋幽選勝卜築巖磴水月澄懷雲泉寄興山與性寂谷與梵應觸境無□息機是證道贊五朝威摧衆妖黙垂慈蔭顯拒嘉招海自□蕩山何動搖無思無慮匪斲匪雕食不兼味服不必備風雨如晦始終一致慧柯方秀法梀俄墜洞壑凄凉煙蘿憔悴人亡道存終不可諼上士陳願大君流恩燈傳海裔塔聳雲根天衣拂石永耀松門
光啓三年七月日
建僧奐榮刻字
전 서국(당나라)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으로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臣) 최치원, 삼가 왕명을 받들어 음기를 짓고, 전액도 함께 씀
무릇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고, 또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는데 동방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불제자나 유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야만 한다.
이중 삼중으로 통역을 거쳐 타국에서 유학할, 때 목숨은 조각배에 걸었으나 마음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했는데 빈(虛) 것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서(實) 돌아왔고, 먼저 어려움이 있은 다음에야 큰 소득을 얻었으니, 옥(玉)을 캐는 사람이 곤륜산 높은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구슬(珠)을 얻으려는 사람이 검은 용(龍)이 잠든 물속(驪壑)이 깊은 것을 피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도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어 빛이 오승에 통하고 아름다운 음식을 얻어 그 맛이 육경에 배불러,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올바른 가르침을 얻으려 하므로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어질고 올바른 나라로 일어서게 하였도다.
학자들이 혹 말하기를 불교와 유교의 진리 사이에는 흐름이 나누이고 몸이 달라, 둥근 구멍에 네모난 나무를 박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어 각기 서로 한쪽 모퉁이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가 시험 삼아 논(論)하건대 시(詩)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글로서 사(辭, 논술)를 해치지 아니하고, 사(논술)로서 그 뜻(志)을 해치지 아니할 것이니,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부분 뿐 이리요. 대개 각기 마땅한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산의 혜원이 논문을 지어서 말하기를 “석가모니와 주나라 공자가 출발한 것은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바는 한 가지”라 했으니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여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는 것은, 사물이 능히 겸하여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약이 말하기를 “공자는 발단을 말하였고 석가는 극치를 말하였다”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것을 아는 이로서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道)를 말할 수는 있다 하겠도다.
부처가 말한 마음의 법(心法)은 까마득하고(玄) 또 까마득하여 이름으로 이름 할 수 없고, 이야기하려 하여도 이야기할 것이 없어서, 비록 달(月)을 얻었다 이르나 손가락을 혹 잊어버려 마침내 바람을 매고 그림자를 포착하기 어려움과 같도다.
그러나 멀고 높은 데로 오르자면 가깝고 낮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글로써 표현한들 무엇이 말을 하리요 하였으니 곧 저 유마힐이 침묵으로써 문수보살을 마주한 것과, 부처님이 비밀리에 가섭에게 전한 것은 혀를 놀리지 아니하고 능히 심인에 맞은 것이니 하늘이 말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을 어디에 가서 얻으리요.
미묘한 도(道)를 멀리 전하여 우리 고장에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리요 선사가 바로 그분이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요, 속성은 최씨이다.
그 선대는 한족으로 중국 산동의 명문출신이었는데 수나라가 요동을 칠 때 예맥(고구려)에서 많이 죽고 뜻을 굽혀 그곳의 백성이 된 사람이 있었으니, 당나라에 이르러 네 군(郡)을 점령하매 지금은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창원인데 비록 재가신자 이지만 출가자와 같은 행실이 있었다.
어머니 고(顧)씨가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스님이 와서 이르기를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유리 항아리로서 표적을 삼더니 얼마 아니 되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나면서 울지 아니하였으며 곧 일찍부터 소리 없고 말없는 깊은 도(道)의 싹을 타고났던 것이다.
7~8세가 되자 놀 때에도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서 향(香)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삼았으며, 혹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시간이 지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착한 뿌리가 실로 백 천 겁(劫) 전에 심어진 바이요, 배워서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10여세로부터 20세에 이르기 까지 부모를 봉양하기에 뜻이 간절하여 잠깐도 잊지 아니하였으나 집에 재산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또 농사를 지을만한 땅도 없어서 부모의 봉양은 오직 자기의 노동으로만 해야 되었기 때문에 생선을 팔아 부모를 모셨다.
그러나 손으로는 그물을 맺지 아니하였으며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는데 부합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다가 상(喪)을 당하자 스스로 흙을 져다가 묘(墓)를 만들고는 말하기를
길러준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미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 내가 어찌 박(匏)이나 오이(瓜)가 덩굴에 매인 것처럼 젊은 나이에 촌구석에 박혀 있으리오.
하고 드디어 804년(애장왕 5) 당나라로 가는 세공사에게 찾아가서 뱃사람이 되기를 청하여 몸을 의탁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널 때 고된 일을 많이 하고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겼다.
자비의 배에 노(櫓)를 저어서 고해를 가로질러 건너 피안에 도착하자 책임자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뜻이 있는 것이니 나는 여기서부터 하직 하겠소” 하고 드디어 떠나서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뵈옵고 절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장난삼아 이별한지가 멀지 아니하였는데 두 번 서로 만남이 기쁘구나.” 하고 문득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히고 심인과 계(戒)를 함께 주고 마른 쑥에 불을 붙이고 하는 것(1)이 마치 낮은 데로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무리들 가운데서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이에 다시 보겠도다.” 하였다.
선사의 얼굴빛이 검으므로 모두가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지목하여 “흑두타”라 했으니,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묵묵히 행함이 진정 얼굴이 새카만 도인(漆道人)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읍중(邑中)의 검은자가 능히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길 것이랴.
영원토록 수염이 붉은 불타야사 및 눈이 푸른 달마와 함께 색깔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리라.
810년(헌덕왕 2) 구족계를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 곁에서 받으니 어머니가 지난날 꾼 꿈이 완연히 이루어졌다.
이미 불교의 교리에 밝았으나 다시 불경을 배웠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매 진홍색이 꼭두서니에서 나왔으나 꼭두서니 보다 붉었고, 청색이 쪽(藍)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푸르렀다.(2)
비록 고인 물처럼 맑은 마음이나 조각구름같이 떠다니는 자취였다.
고향 신라에서 스님 도의가 먼저 중원으로 도(道)를 물으러 왔었는데 뜻밖에 서로 만나 기뻐하며 친구가 되어 사방으로 멀리 참례하고 찾아다니며 불도를 증득하였다.
도의는 먼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선사는 바로 종남산에 들어가 만길 봉우리에 올라가서 소나무씨를 따먹으며 적적하게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의 실상을 관찰하기를 3년이요, 뒤에 자각으로 다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 당하여 짚신을 삼아 보시를 널리 하여 왕래하기 또 3년이었다.
이리하여 고행을 닦기를 이미 닦았으매, 다른 곳으로 다시 놀기도 하였으매, 비록 공(空)을 공부한다 할지라도 어찌 근본을 잊어서 될 것인가.
드디어 830년(흥덕왕 5년) 돌아오매 대각의 상승이 우리의 어진 강토(신라)를 비쳤다.
흥덕대왕이 친히 수레를 타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 선사가 지난날에 돌아왔더니, 지덕을 갖춘 불제자가 잇달아 이르매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검은 옷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더니 지금에 누더기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에서 내려온 미륵의 자비로운 위세를 온 나라가 통틀어 기쁘게 의지 하겠도다.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경주)에다가 길상의 집을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석장을 멈췄는데 의원 문 앞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사람이 구름 같았고, 절간이 비록 넓었으나 사람들이 자연 군색했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진주) 지리산에 이르렀는데 몇 마리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함이 유순한 말(馬)과 다르지 않았으며 따르는 사람들도 두려워함이 없어 마치 기르는 개(犬)처럼 여겼다.
곧 선무외삼장이 영산에 하안거를 하는데 맹수가 길을 앞서 깊이 산속 굴로 들어가매 석가모니의 입상을 본 것과 사적이 완연히 같으니 저 축담유가 자는 호랑이를 두드려 경(經)을 듣게 한 일, 그것만이 홀로 스님들의 역사에 미담이 될 수는 없다.
화개 골짜기에 옛 삼법화상의 절터에 절을 지으니 엄연히 화성이 같았다.
838년(민애왕 1)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오르자 깊이 자비(불교)에 의탁하려고 어명을 내려 공양할 물자를 보내고 특별히 기원할 것을 청했는데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정사를 닦으면 되는 것인데 기원은 해서 무엇하리요
하고 사신이 돌아가 왕에게 복명하니 왕이 듣고 부끄러워하고 깨달아서 선사가 색(色)과 공(空)이 함께 사라져 없어지고 정(定)과 혜(惠)가 모두 원만하다 하여 사신을 보내 호(號)를 주어 혜조(慧昭)라 하니 소(昭)자는 성조(황제)의 어휘이므로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이리하여 선사의 관적(3)을 대황룡사로 옮기게 하고 서울(경주)로 오라고 불렀는데 사자의 왕래가 길게 고삐를 이었으나 산악처럼 꿋꿋하여 그 뜻을 옮기지 않았다.
옛날 스님 조(稠)가 원위의 세 번 부름을 거절했다 했으니 산(山)에 있어 도(道)를 행하매 대통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며, 깊숙한데 살아서 고상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달랐으나 자취는 한가지다.
몇 해를 머물매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벼(稻)나 삼대(麻)처럼 늘어서고 성(城)같이 에워싸서 거의 송곳 꽃을 틈조차 없었다.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쪽 고개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
절(禪廬)을 세우는데 뒤로는 노을 끼는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 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구멍에서 쏟아지며 나르는 여울이 있다.
더욱이 봄에 피는 시내의 꽃과 여름에 그늘지는 길옆의 소나무며 골짜기를 비추는 가을의 달과 봉우리를 덮는 겨울의 눈들이 사철 변하고 모든 것의 빛을 번갈아 백가지 울림소리가 어울려 읊조리고 수천 개의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서토(중국)에 놀았던 자들이 와서는 보고 모두 깜짝 놀라 이르기를
혜원의 동림사를 바다건너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는 보통 사람의 상상으로 비겨 볼 바 아니로되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더니 정말인가?
라고 하였다.
대(竹)로 홈을 만들어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에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 비로소 이름하여 “옥천사”라고 현판을 붙였다.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4)의 현손이다.
이에 육조의 영당을 세워 분바른 벽에 단청으로 채색하여 널리 신도를 귀의시키는 데에 이바지 하니 경(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무늬를 섞어 여러 형상을 그린다.” 함이었다.
850년(문성왕 12) 정월 9일 이른 아침에 제자에게 말하기를
만 가지 법(法)이 다 공(空)이니 내 장차 가련다.
하나의 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니라.
탑(塔)으로서 형해(사리)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비석)으로써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않아서 열반에 드니 향년 77세요, 스님 된지 41년이었다.
그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 소리가 혼연히 일어나며 호랑이는 슬피 울부짖고, 삼나무와 잣나무는 변하여 시들더니 이윽고 자주 빛 구름이 하늘에 자욱하고,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사를 치르려고 모인 사람은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양나라 역사책에 “시중 저상이 일찍이 스님을 청하여 어머니 병환을 위해 복을 빌 즈음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났다”했으니 성자의 영감으로 명응하는 것이 어찌 헛되다 할 것인가.
무릇 도(道)에 뜻을 둔자는 글을 보내어 멀리 조상하고, 정(情)을 잊지 못하는 이는 슬픔을 머금어 울었으니 하늘과 사람이 애도함을 단연히 알 수 있다.
관곽과 묘혈을 미리부터 준비 했으매 제자 법량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셔서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산봉우리에 장사 지내니 유명을 좇음이었다.
선사는 성품이 산만하지도 아니하며 투박하지도 아니하고 말은 꾸미지 않았으며 옷은 헌 솜과 굵은 삼베도 따스했고, 밥은 겨와 귀리도 달게 먹었다.
도토리와 콩(豆)에 섞인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으며 귀한 손님이 가끔 왔으나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으매 제자들이 깨끗지 못한 음식을 귀한 손님에게 드리기 어려워하면 곧 이르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까지 왔으니 추한 음식인들 어찌 상관하랴”라고 말했다.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한결같이 대접했으며 가끔 임금의 사신이 역마를 타고 와서 왕명을 전하여 멀리 법력을 빌면 곧 말하기를
무릇 임금께서 다스리는 땅에 살고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자로서 임금께서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한결같은 마음에, 마음을 기울여 왕을 위해 복(福)을 쌓지 않으리오.
무엇하려 마른 나무 썩은 등걸 같은 나에게 멀리 윤언을 욕되게 할 것인가.
사람과 말 일행이 굶주릴 때 먹지 못하고 목마를 때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하였다.
어떤 이가 호향을 선물하니 기와에다 잿불을 담아 환(丸)을 짓지 않은 채로 태우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뿐이다.
했으며 다시 중국에서 온 차(茗)로 공양하는 이가 있으니 섶으로 돌솥에 불을 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로 끓여 마시며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아지 못한다.
창자를 적실뿐이다.
했으니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다 이런 것들이었다.
평소부터 범패를 잘 불렀으니 그 목소리가 금옥 같아서 곁들인 음조와 날아가는 소리가 상쾌하고 가련하며 어여뻐서 능히 제천으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만들고 길이 먼 곳까지 흘러 전했으며,
배우는 사람이 교당에 가득 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지금껏 신라에서 범패의 묘한 곡조를 익히는 자가 다투어 손으로 코를 가리고 옥천(절 이름)의 남긴 음향(소리)을 본뜨려 하니 어찌 성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리오.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이 문성대왕 때였는데 왕이 마음이 측은하여 장차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가 그 유계를 듣고는 부끄러워 그만 두었다.
3년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세월이 오래되면 언덕이 골짜기로 변할 것을 염려해서(5) 법(法)을 사모하는 제자들에게 길이 불후하게 전해지게 할 인연을 의논했더니 내공봉 일길찬이 굳게 합심하여 돌에 새기기를 주청했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로 넓히고 진종을 흠앙하여 진감선사라 추시하고 대공령탑이라 이름하고 그리하여 앞의 새김을 허락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영구히 하도록 했다.
거룩하다 해가 양지바른 골짜기에서 떴으매 깊숙한 데까지 비치지 않음이 없고 향(香)을 바닷가에 심었으니 오랠수록 더욱 향기롭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선사가 탑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남겼는데 지금에 제자들이 능히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네들이 구했던가?
아니면 위에서 주었던가?
실로 백규의 티가 될 뿐이로다.
라고 말했다.
슬프다 그르게 여기는 자 또한 그르다.
이름을 가까이 않으려는데 이름이 떨쳐진 것은 원래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고 마음을 한곳에만 쏟는 힘의 남은 보답이니, 저 재(灰)처럼 사라지고 번개처럼 끊어지기 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대천세계에 떨치도록 함과 어느 것이 낫다 하겠는가.
귀석에 빗돌을 얹기 전에 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니 형체가 서로 잔 했으매 유촉에 따라 착한 일을 계승하였다.
근처 산에 절이 있어 옥천사라 불렀으니 이름이 중복되어 듣는 사람이 분간하기 어려웠다.
장차 같은 것을 버리고 든 것을 취하자면 마땅히 옛것을 떠나서 새것을 지어야 했으므로, 그 절의 앞뒤를 둘러보게 한바 문간 이두갈래의 시내에 다달아 있다고 복명했으므로 이에 “쌍계사”라는 이름을 주었다.
신(臣)에게 명(命)하여 이르기를 선사는 행적으로 나타났고, 너는 글로써 출신했으니 마땅히 명(銘)을 지으라 하셨다.
치원(저자)이 손들어 절한 다음 “네네”하고 대답했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초년에 중원에서 이름을 얻어 글을 지어 아름답고 맛난 것을 맛보았으나, 미처 거리에 둔 술 항아리를 마시어 취하지 못했으매(6) 오직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림이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음 문자를 떠났으매 말은 부칠 곳이 없으니 혹 말한다면 수레 채를 북(北)으로 하여 영(郢) 땅에 가려는 것이 된다.(7)
그러나 국왕의 외호함과 문인(門人)의 큰 바램은 문자가 아니면 뭇 사람의 눈에 소상하게 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몸은 두 가지 일을 겸하고, 힘은 오능을 본받으려 하노니 비록 돌이 혹 말을 한다면 부끄럽고 두려우나 도(道)란 것은 억지로 이름 한 것이니,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인가 붓을 꺾고 만다는 것을 신(臣)이 어찌 감히 할 수 있으랴, 앞에 말한 뜻을 거듭 논술하여 삼가 명(銘)을 짓는다.
선정으로 입 다물고 불타(부처)에 귀심했네
뿌리가 익은 보살이 이 도를 넓혔도다
담 크게 호랑이 굴을 더듬었고 멀리 경파를 넘었구나
가서는 비인을 전해 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깊은 승지(勝地)를 찾아 골라 바위 벼랑에 절을 지었네
물과 달에 마음 밝히고 구름과 샘물에 흥(興)을 부쳤네
산(山)은 바탕(性)과 함께 적연하고 골은 범패로 메아리쳤네
경계 닿는 곳마다 걸림 없고 기심을 끊었으니 이가 곧 증독이다
도(道)는 다섯 왕조를 험찬 했고 위엄은 모든 요귀를 꺾었네
묵묵히 자비 음덕 드리우면서도 겉으로는 부름을 물리쳤네
바다야 제대로 표탕하나 산이야 어찌 동요될까
사려가 없었으매 다듬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았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않았으며 옷은 갖추어 입지 않았도다
바람비가 그믐밤 같은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빼어난데 법의 동량이 갑자기 꺾였구나
골과 구렁이 처량도하고 연하와 등라가 초췌하도다
사람은 가도 도(道)는 남았으니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
윗사람이 소원을 진달했으매 큰 임금이 은덕을 베풀었네
등불은 동해에 전해왔고 탑은 구름 속에 솟구쳤네
천의가 돌을 스치도록 영원히 소나무 문짝에 빛나도다
887년(진성여왕 1) 7월
중(僧) 환영이 새기다.
* 각주.
(1) 불제자로 맞아들이는 의식을 치루는 것을 말한다.
(2) 제자가 가르친 스승보다 뛰어났음을 말함.
(3) 貫籍.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본관에 관한 기록이다.
(4) 중국 선종 제6조 혜능(慧能, 638~713)을 말한다.
(5) 흔적이 사라져 알 수 없게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함.
(6) 중국에서는 많은 글을 지어 남겼으나, 신라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을 말함.
(7) 영(郢)은 남쪽에 있는 초나라의 수도. 의도한 바와 반대로 행동함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