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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촌선생추록행장.(烟村先生追錄行狀){전주최씨세적록}
先生諱德之字可久號烟村一號存養堂諡文肅崔氏貫全州其先爲高麗望族傳而有門下侍中諡文成諱阿於先生爲高祖中郞將諱龍鳳司醞直長同正諱乙仁曾祖若大父也考諱霮號月塘仕本朝以戶曹參議集賢殿直提學賦歸桑鄕不求聞達今寒碧堂卽公之杖履所也妣全州朴氏仁夫女有四子長諱匡之提學次諱直之直提學次諱得之少尹季卽先生亦直提學世稱四提學家先生生而頴出倫類早負時望太宗朝由生員登第歷事世廟朝內而歷翰苑玉堂臺閣外而累典洲府皆居官守道一以古人自處待仕已無喜慍色嘗知靑道郡也疏言稅政之貢法與損實踏驗便否使國民遍被均賦之澤後以南原府使棄官而歸靈巖之永保村築書樓扁以存養進修正學使士類咸服文敎之化盖以主於存心養性之學而爲出處也存乎斯養乎斯而若將終身焉及文廟初載召拜藝文舘直提學亟被純實之獎且擬大用而在朝不二年上疏乞退上謂近臣曰曩於召對也見其爲人純實年未甚老子欲留之何如於是在廷臣僚之欲爲上留先生者如六臣及諸卿士交謁竸挽曰聖上圖任老成今又不欲其去先生年未七十旣强且健胡不少回遐心仰答聖意乎先生曰吾豈果於忘世者耶吾耄矣留則曠官矣去吾分也吾弊廬有一小堂存養庶復歸臥以終吾餘齡吾志決矣爲諸公別諸公留之旣不得則咸與載酒送之江之滸且爲詩文歌頌其德行而贐之馬先生乃浩然而歸杜門種學遯世不見知而不悔而終享年七十二葬于全州治之東所陽面粉土洞周德山負酉原崇禎三年庚午士林尊慕立祠俎豆於郡南月山下肅宗辛酉賜額鹿洞又享于全州西山院南原舟巖祠盖鹿洞引朱夫子白鹿洞之義也配淑夫人平壤趙氏中郞將安鼎女別葬于羅州元井面尺洞艮坐原有三男二女男長諱淍護軍次諱 司勇次諱淑生員女適忠贊金總通禮愼後庚護軍有四子司勇有四子生員以司勇第二子爲后今其后昆之盛殆遍於一省亦可以見餘蔭之未艾也鳴呼先生之學問大致出處本末昭載於遺集而被丁酉兵燹幾乎無徵至若其至道至德非知道者固難言而天之生賢亦將不泯有當時諸賢之親承觀感而述焉者存其曰存乎心兮養乎性天君泰然兮百體從令無求於世兮樂夫天命逍遙一室之內兮尙友千古之賢聖入有兒孫奉晨昏兮出有友朋可與觴詠鳴呼先生其流傳者盖永者樗軒李文康先生石亨筆也其曰有美人兮欲何之歲將闌兮霜雪飛山重水複兮路遲遲百駒翩翩兮不可維我思古人兮爵祿誰辭我觀今人兮爭利與名偃蹇今古兮惟有先生蒼眉脩鬢兮冰玉其情一朝棄官兮屣脫雲輕王曰爾賢兮士惜其去湖之南兮足逸豫泉之甘兮土又肥超逍遙兮樂無期欲往從之兮紅塵深愛莫留兮矢以音者柳先生誠源筆也其曰視軒冕於倘來寄功名於如浮富貴榮華皆無足以動其心高風餘韻足以使貪夫廉懦夫立一出一處大有關於名敎者時史官李文質先生芮筆也其曰人有功名富貴能動一世而不可以得匹夫匹婦之心者又有卑巽謙退若不自勝而有足以負天下後世之望者豈非人心不可以勢服而公議自有所在也耶今完山崔先生上書乞歸士林相稱道知與不知莫不欽慕夫使先生在朝其名聲爵位當不止此而人之欽慕者宜於是乎在今也退休田里己不與世相關而萬口咨嗟稱頌不己者何也其所以感人心而負物望者有不在彼而在此也者醉琴軒朴先生彭年筆也此皆當日諸賢之陪杖履親承警咳而得其心者也又有後賢之立言者澤堂李先生曰我朝有順德高節正學之士烟村崔先生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淳德也中歲納履遯跡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乎抑先生之退當景泰二年辛未越三年癸酉六年丙子國家禍故相繼搢紳多及焉則先生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尤稱其明智以余攷之顯陵賓天之促而魯山遜位之遽此天數也先生雖明智安能推測及此且先生在世廟朝己解帶方之印彼時又何難之可違耶易曰天道虧盈而益謙詩曰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謨自不蹈於大難豈規規焉審機逃禍者之足擬也閱其人物則安平節齊之事不可言也河東高靈泛翁四佳勳名雖盛而淸節或歉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宛名當何如也論其世尙其人亦可以見先生之不可及矣尤庵宋先生曰余於先生上言中窃有感焉其所謂損實踏驗履見於朱夫子大全集此實夫子所嘗拳拳者而至於所謂業去稅存四字則夫子當時又極其痛歎必欲變通而遂爲吳禹圭所中傷者也豈謂五百年之後復見於先生文字間耶澤堂李公謂先生爲正學者於此亦可見其一端也諸序跋中澤老最詳而其所稱引者亦甚重矣只以知幾云者爲小而似若不足以稱先生者然然則易何以曰知幾其神也耶澤老必有深意矣問於其胤子也其胤子畏齋公復曰朱夫子解易知幾之義只以言行中節纔過些子便不是知幾爲訓而臨川吳氏乃以穆生劉柳於去就之際能見幾與否爲說未知果合於易之本義而朱子又釋詩明哲保身之義曰明哲只是曉天下事順理而行自然灾害不及其身今人以邪心讀詩謂明哲是見幾知微先占便宜如揚雄說以此而觀先生且觀先君子所以發明先生心事者世雖稱先生炳幾保身然先生急流勇退道與神謨自不蹈於大難云者正與朱夫子易詩兩說相符然則先君子深意其在斯歟尤翁是之曰則先訓所稱之微意果似如此矣大槩先稿中論義十分精當雖於零碎處亦不放過況烟村所遭之時所處之義實關國朝大關節則其秉筆遣辭之際必有所稱停者矣玄石朴先生曰國家禮樂人文莫盛乎英顯之際先生年未七十乃懇請致仕程朱之學猶不大顯於時而先生輒得以存養掲號則其後所値雖或否泰相乘酬酢萬變而先生素履固浩然而自在也雖謂之至德範世亦可矣農巖金先生製書院請額疏曰自古以來朝廷之士人而不出懷祿耽寵以失其世者多矣其能決然勇退不爲富貴所沒溺者厪可指數然考論其世又皆遭時衰亂怵迫禍患思所以自全而不者以名位己極無所覬於後耳若乃處明聖之世嚮用未艾而能從容自引去者千百無一焉况不以一節自喜而志乎大道不以閒散自適而力於實踐豈不益卓絶難覯哉本朝治化莫盛於世文兩朝經學文章之士瑰瑋卓犖比肩立朝咸以功名自奮蓋亦千載一時也以某之賢翶翔其間展布所藴則其功菐亦可以爛然矣而顧乃棄而不取高蹈遠引捿遯山野以沒其身此非審乎內外之辨超乎榮辱之境者不能也且自古退遯之士類皆自標其高而優㳺放曠無所用心是雖賢於沒溺富貴終身不返者而其去道遠矣今某之歸也乃取孟氏所稱存心養性者名其所居之室而留心正學不忘進修則其踐履之實㮣可見矣昔宋臣朱某有言曰取舍之分明然後存養之功密存養之功密則其取舍之分益明矣若某者其庶乎此矣盖其言論事蹟載在國承又有著述文字刊行于世其所立之高所存之正誠有遠過於人而足爲後來之師範矣鳴呼先生之道之德之贊揚在當世則李文康柳太初李文質朴醉琴諸先生親承警咳者若曰天君泰然百軆從令若曰偃蹇今古氷玉其情若曰貪廉懦立有關名敎若曰萬口咨嗟莫不欽慕其所實現得而極意撰述道妙者也在後學則李澤堂宋尤齋朴玄石金農巖諸先生追慕令德者若曰高節正學師範百世若曰言行中節道與神謀若曰所履浩然至德範世若曰存心養性不忘進修其所宗仰所立極意稱道者也鳴呼先生遺文六丁下收而遺事掇拾堇堇一冊其於先生實德實行烏足以明千百之一二也但諸賢敍述是爲千萬世不朽之蹟曠世之下論其時想其像則橫渠之精思力踐先生之實學也明道之渾然天成先生之德器也伊川之規圓矩方先生之出處也晦菴之全軆實踐先生之存養也噫心性天三者鄒聖之所深造乎至極也後之尙論先生有云雖未及聖過賢遠矣者恐不爲過語也今以銓九之不肖述先生行惡乎可哉追慨先蹟之寂寥尙闕狀德之文謹收諸先生所爲說者尾附宋賢數段事極知僣妄罪固難赦然以此數語質鬼神而俟百世亦不肖之至願也
後孫銓九謹撰
선생의 휘는 덕지(德之)요, 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연촌(烟村)인데 또 다른 호는 존양당(存養堂)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최씨의 본관은 전주로 그 선조는 고려에서 명망 있는 가문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문하시중으로 시호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가 선생의 고조할아버지이며, 중랑장 휘 용봉(龍鳳)과 사온서 직장 동정 휘 을인(乙仁)이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이다.
아버지 휘 담(霮)의 호는 월당(月塘)으로, 조선에서 호조 참의, 집현전 직제학을 지내셨는데,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출세하여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지금의 한벽당은 바로 월당공(月塘公)의 자취가 남아서 전해 오는 곳이다.
어머니 전주박씨는 박인부(朴仁夫)의 딸로 아들 4명을 두었으니, 장남 휘 광지(匡之)는 제학이고, 차남 휘 직지(直之)도 직제학이며, 그 다음 휘 득지(得之)는 소윤이고, 막내는 바로 선생으로 역시 직제학이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4제학가문(1)에서 선생은 태어나셨다.
선생은 동료들 사이에서 특출하게 뛰어나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태종 때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까지 대(代)를 이어 모셨는데, 내직으로는 한림원과 옥당, 대각을 역임하시고, 외직으로는 여러 주(州)와 부(府)를 다스리며, 모든 곳에서 관리로서 소임하기를 옛 성현들과 같은 도리로서 하셨으며, 주어지는 직책에 대하여서는 그곳이 좋은 자리라고 해서 기뻐하거나 나쁜 자리라고 해서 화난 표정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청도 군수로 재직하시면서 세법에 관하여 올린 상소문 <논공법답험편부소>를 통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두루 세금 부담이 공평해 질 수 있는 혜택을 누릴 방안을 제안하시었다.
뒤에 남원 부사로 계시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영암에 있는 영보촌(永保村)에 서루를 지으시고 편액을 존양루(存養樓)라 걸어 놓고 올바른 학문을 닦아 나가니 선비들로 하여금 모두 감복하게 만들면서 문화와 교육을 이끌어 나갔으니, 이는 모두 존심양성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상이 선생의 출처(出處)이다.
“존(存)이냐? 양(養)이냐?”만 가지고 일생을 마치고자 하였으나, 문종 초년(1450)에 국왕의 부름을 받아 예문관 직제학이 되시었는데, 순실한 품성이 곧바로 들어나서 앞으로 크게 쓰일 것이 확실했지만, 조정에 나간 지 2년이 채 되지 못하여 상소를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주상께서 도승지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접때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사람됨이 순실하고 아직 그다지 늙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으므로 더 머물게 하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고 말했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선생을 조정에 더 머물게 해 달라고 주상께 말씀 올렸다.
사육신 같은 이들을 포함한 많은 대신들, 그리고 공(公)과 가까웠던 선비들이 서로 다투어 만류하며 이르기를;
임금께서 노성한 사람을 조정에 두고자하시어 지금도 선생께서 물러나시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선생의 나이도 아직 70세가 되지 않았으며 또한 강건하시므로 조금만 마음을 바꾸어 주상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떠하오?
하였다.
선생이 이르시기를;
내 어찌 세상을 잊을 수야 있겠소마는 나는 이미 늙었소.
내가 계속 머문다 하더라도 관직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다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니 떠나는 것이 나의 분수일 것이요.
나의 집에는 존양루라 부르는 조그마한 서재가 한 채 있으니 이제 돌아가 그곳에 누워 여생을 마치고자 하오.
나의 뜻은 이미 정하여 졌으니 이제 여러분들과 헤어지고자 하오.
하고 말씀하셨다.
여러 대신들은 선생을 더 이상 머물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모두 술을 가지고 한강 가에 나가 선생을 떠나보내면서 시(詩)와 글을 지어서 선생의 덕행을 노래하며 전별하였다.
선생은 호연하게 돌아와서 속세를 등지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을 닦으며 세상에 들어나지 않게 후회 없이 살다가 일생을 마치니 향년 72세라 전주 감영 동쪽 소양면 분토동에 주덕산(周德山)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장사지냈다.
1630년(인조 8)에 사림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그리워하여 영암 군청 남쪽 월출산(月出山)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셨는데, 1681년(2)에 녹동서원(鹿洞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이 내려지고, 또 전주에 있는 서산서원(西山書院)과, 남원에 있는 주암서원(舟巖書院)에도 배향되셨는데, 녹동(鹿洞)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이 내려진 이유는 주자(朱子)가 부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그 뜻을 따른 것이다.
배(配) 숙부인 평양조씨는 중랑장 조안정(趙安鼎)의 딸인데, 따로 나주 원정면 척동(尺洞)에 서남쪽을 향하여 장사지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휘 주(淍)는 호군이요, 차남 휘 창( )은 사용이요, 그 다음 휘 숙(淑)은 생원이며, 딸은 충찬위 김총(金總) 그리고 통례 신후경(愼後庚)과 혼인하였다.
호군공은 아들이 넷이고, 사용공 또한 아들이 넷이며, 생원공은 아들이 없어서 사용공의 둘째 아들로 뒤를 이었는데, 지금 그 후손이 왕성하여 한 도(道)를 구석구석까지 다 채우고 있으니 역시 조상의 공덕으로 자손이 받는 복(福)이 아직 그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오호라! 선생의 학문에 관한 대강과 출처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록하여 전해오는 문집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전쟁으로 불타버려 증거가 없어지고 말았으므로 그처럼 지극한 도학과 덕(德)을 갖추신 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무어라 말하기 어렵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하늘이 어진 사람을 낼 때는 그 철학이 아무렇게나 묻혀버리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인즉, 당시 여러 어진 이들이 친히 눈으로 보고 느낀바가 있어서 저술한 내용이 전해오고 있다.
이르기를;
존오심, 양오성 함이여
마음이 태연하니 모든 것이 따르는 도다.
세상에서 헛되이 구하지 않으니 무릇 천명이 즐겁도다.
방 안에서 노닐면서 책 속에서 옛 성현과 벗하도다.
집에 서는 어린 손자가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봉양 받고
밖에 나가면 친구가 있어서 함께 술 마시고 시를 읊으니
오호라! 선생이 전한 모든 것이 어찌 영원하지 않으리오.
라고 한 것은 저헌 문강공 이석형(李石亨) 선생의 글이다.
또 이르기를;
어여쁜 사람아 어디로 가시려는가?
한 해가 저물어 눈보라가 휘날리지 않는가!
산 겹겹 물 굽이굽이 더디고 더딘 길을
흰 망아지 가자 우니 어찌할 수 없건마는
생각하니 작록을 마다한 옛 사람은 누구던가?
지금 보니 사람들은 명리를 놓고 다투는 구나
고금을 통틀어 우뚝한 이 오직 선생뿐
푸른 눈썹 거친 귀밑머리에 얼음 알 같이 맑은 정신
하루아침에 다 버리니 구름처럼 가벼워라
임금은 어질다 칭찬하고 선비들은 아쉬워하네.
호남으로 가시면 넉넉하고 즐거우리
다디단 샘물 있어 땅 또한 기름지고
여유를 넘어서 즐거움에 끝없으리.
따라 가고 싶지만 홍진이 너무 깊구나
더는 말리지 않으리니 소식이나 전하소
라고 한 것은 유성원(柳誠源) 선생의 글이다.
또 이르기를;
높은 벼슬자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 공명을 뜬구름 같이 하찮게 보시기 때문에 부귀와 영화가 모두 선생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그 높은 기풍과 여운이 족히 탐욕스런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이 뜻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만드셨도다.
한 번 벼슬에 나오고, 한 번 물러나 집에서 머무는 것이 명교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될 것이니
라고 한 것은 당시 사관이었던 문질공 이예(李芮) 선생의 글이다.
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비록 부귀와 공명이 한 세상을 움직일 만하다고 하더라도 필부필부의 마음마저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여 자기 자신의 한 몸마저도 가눌 수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천하 후세의 인망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마음을 세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으며 공의는 억지로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전주 최 선생이 글을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사림이 서로 칭찬하고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흠모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
선생을 조정에 계속 머물게 한다면 그 명성과 벼슬이 당연히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허나 지금 시골로 돌아가서 세상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칭송하여 마지않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물망을 받는 이유가 조정에 머물러 높은 벼슬에 오르는 곳에 있지 않고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 것은 취금헌공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글이다.
이 모든 것은 당시에 여러 어진 선생들께서 선생의 자취를 친히 보고 남긴 글이며 마음속으로 느낀바가 있어서 적은 글이다.
또 후세의 어진 이들이 남긴 글도 있다.
택당공 이식(李植) 선생이 이르기를;
우리 조선에 순덕하고 고절한 정학지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연촌(烟村) 최 선생으로 선생의 순실한 행적은 임금께서 몸소 하신 말씀에 들어날 정도로 순덕하였고, 중년의 나이에 여장을 꾸려 산(山)과 바다로 숨었으니 절개가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존심양성을 자경문으로 내 걸었으니 정학지사이다.
이러한 일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성취하였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스승으로 삼을 만 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하물며 그 모두를 겸하지 아니하였는가?
돌이켜 보면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신 것은 1451(문종 1)인데 3년이 지난 1453년(단종 1)과 6년이 지난 1456년(세조 2)에 나라에 재앙이 연달아 일어나 서로 뜻을 같이하던 많은 벼슬아치들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선생께서 취하신 행동은 매우 적당한 시기에 벼슬을 버리므로, 신체와 명예를 함께 보전할 수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일컬어 밝은 지혜로 미래를 미리 알고 닥쳐오는 환란을 피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 보건대 문종은 너무 일찍이 승하하였고, 노산군(魯山君)이 갑자기 왕위를 내어 주게 된 것도 모두 하늘이 내린 운수이다.
선생이 비록 밝은 지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여기까지야 추측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이미 세종 때도 남원 부사의 도장 끈을 풀었던(3)적이 있는데 그때 나라에 무슨 변고가 있기나 했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의 도(道)는 이지러지고 차고 하면서, 차지 않은 것을 보태어 준다.”하였고, <시경>에 이르기를 “단아한 군자는 하늘이 위로해 준다.”고 하였다.
선생이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용감하게 물러난 것은 그야말로 천지자연의 도리와 신통한 재주로 저절로 큰 난리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인데 어찌 눈치 빠르게 기미나 살피다가 도망치는 것에 견줄 수 있겠는가?
함께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안평대군이나 김종서(金宗瑞)의 경우는 차마 평가하기 어렵지만, 정인지(鄭麟趾)와 신숙주(申叔舟), 서거정(徐居正) 등 여러 사람은 남긴 업적이나 공로는 비록 크지만 절개를 지키는 측면에서는 약간 부족함이 있었고, 성삼문(成三問) 등 여러 사람은 스스로는 깨끗하게 몸을 지켰으나 규족을 지켜 내지는 못하였다.
이에 비해 선생을 살펴보면 좋은 복(福)과 완연한 명예를 모두 온전하게 유지하였으니 어떠하다고 생각되는가?
세태를 논한 것이나 그 사람(단종)을 향한 충정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암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이르기를;
나는 선생께서 임금님께 올린 상소문에서 크게 감동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이른바 <논공법답험편부소>라는 제목의 상소문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주자대전>에 나오는 내용과 같다.
그 말은 주자가 간곡하게 말 한 바가 있는 것으로 이른바 업거세존(業去稅存) 네 글자이다.
주자는 당시 이를 매우 통탄하게 여겨서 반드시 개혁하고자했으나 오우규(吳禹圭)의 중상모략으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500년이 지난 후 선생의 글에서 다시 이 네 글자를 볼 수 있을 줄 짐작이나 할 수가 있었겠는가?
택당 이식(李植) 공(公)이 선생을 일컬어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한 것도 여기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여러 서문이나 발문 중에서 택당의 글이 가장 상세하고 사례를 들어가며 칭찬한 것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다만 그 중에서 “기미를 알고 어쩌고”하는 택당의 말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여 선생을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어찌 <주역>에서 “기미를 아는 것은 신(神)이다.”라고 했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택당에게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택당의 아들에게 물어보라.
라고 했는데, 택당공의 아들 외재공 이단하(李端夏)가 이르기를;
주자(朱子)가 <주역>을 해석한 것에 의하면 지기(知機)는 다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 구절에 적절하게 맞추어서 사용한 것일 뿐 그것을 가르침의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또 임천(臨川)의 오일(吳鎰)이 목생(穆生)과 유유(劉柳)의 나아가고 물러감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도 “능히 기미(幾微)를 미리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또 그것이 <주역>의 원래 뜻에 합치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주자가 <시경>을 해석할 때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의미를 설명하기를 “명철이란 오직 천하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일을 순리대로만 행한다면 저절로 재해가 몸에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사특한 마음을 가지고 <시경>을 읽기 때문에 누군가가 명철하다고 말하면 하늘의 비밀을 미리 알아 미래를 점칠 수 있을 것이므로 마치 양웅(揚雄)과 같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생께서 취(取)하신 행동을 보거나, 나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선생의 마음 씀씀이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선생을 두고 말하기를 밝은 지혜로 하늘의 비밀을 미리 알아 스스로 몸을 지켰다고 말하지만, 선생이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용감하게 물러난 것은 그야말로 천지자연의 도리와 신통한 재주로 저절로 큰 난리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인데, 이것이야 말로 주자가 <주역>과 <시경>을 통하여 설명한 두 가지 학설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고, 우리 아버지의 깊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암공께서 그에 관해 외재공께 이르기를;
즉 아버님(이식)의 가르침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세한 뜻 또한 이와 같은 것이므로 대개 아버님께서 지으신 글 속에서 말씀하신 뜻은 충분히 정밀하고 자세하며 또 당연하다.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연촌(烟村)을 소조(所遭)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면, 평가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이것은 자칫 조선 성리학의 기둥이 되는 큰 절의와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붓을 잡고 글을 적어 남길 때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칭정(稱情)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현석공 박세채(朴世采) 선생께서 이르기를;
국가의 예악이나 인문이 가장 왕성했던 때는 세종, 문종 때인데 선생은 아직 나이 70도 되기 전에 퇴임을 간청하였다.
당시는 아직 성리학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시점이건만 선생은 문득 존양의 기치를 내걸었으니 그 후에 주위에서 불행과 행복이 서로 어울려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수만 가지 변화를 일으켰으나 선생께서는 조금도 변함없이 호연함을 굳게 지킬 뿐이었으니 매우 높은 덕행으로 세상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농암공 김창협(金昌協) 선생이 지으신 <서원청액소>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조정에서 벼슬한 사람들 중에는 일단 벼슬에 한 번 오르고 나면 물러나지 아니하고 녹봉을 탐내고, 임금님의 총애를 탐내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지만 스스로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생각해 보면 그 들 또한 기울어가는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화를 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보전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을 버린 경우이거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미 명예가 최고조에 달하고 가장 높은 벼슬까지 올랐기 때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서 그리 한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어진 임금의 시대를 만나 임금께서 크게 등용할 의향에 변함이 없는 데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물며 절조 하나 만으로 자족하지 아니하며 대도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학문의 실천에 힘쓴 경우가 있다면 어찌 더욱 뛰어나서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내기란 매우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정치와 교화는 가장 왕성 했던 시기가 세종, 문종 두 임금 때인데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나아가 모두 공명을 떨쳤으니 이는 10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아무개(연촌공)도 그 훌륭한 재주로 그 사이에 많은 업적을 세우고 뜻을 펼쳤으니 그대로 관직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그 공훈과 업적이 역시 찬란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아니하고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하여 멀리 떠나 변방의 산야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과 가벼운 일을 잘 구분할 줄 알고 영욕의 경계를 넘어 선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옛날부터 물러나 은둔한 선비란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 고상함만을 내세워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영화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물러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하겠지만 그들의 행동 역시 도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개는 시골로 낙향하여 맹자의 가르침인 이른바 존심양성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자신이 사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는 올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 덕(德)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실행으로 보여 준 것을 통하여 이로써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 때 주아무개(주자)가 이르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존심) 본성을 함양하는(양성) 공부가 치밀해 진다.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 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 진다.”고 하였는데 아무개(연촌공)야 말로 그것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말하고 논평한 여러 일들이 국가의 역사기록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또 저술이 글자로 기록되어 책으로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오고 있어서 그가 세운 높은 뜻과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오호라! 선생의 도(道)와 덕(德)을 그 시대에 찬양하였는데 이(李) 문강공, 유(柳) 태초공, 이(李) 문질공, 박(朴) 취금헌공 등 여러 선생들이 친히 따라서 깨우쳐 경계하여 이르기를;
마음이 안정되어 태연하니 모든 것이 그 영(令)을 따른다.
고 하였고, 이르기를;
고금을 통틀어 우뚝한 얼음 알 같이 맑은 정신
이라 하였고, 이르기를;
이익을 탐내어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도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도 분기하여 떨치고 일어나도록 만드니 명교와 크게 관계있다.
했으며, 이르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했으니 이와 같은 실제를 보여 주어 그 뜻의 극치를 나타내는 찬술의 묘한 이치이다.
후학들의 경우에도 이(李) 택당공, 송(宋) 우재공, 박(朴) 현석공, 김(金) 농암공 등, 여러 선생들이 추모는 아름다운 덕(德)을 보였으니, 이르기를;
절개 높은 바른 학문을 가진 영원한 스승
이라 했으며, 이르기를;
언행 속에서 절도와 함께 귀신같은 재주가 있다.
고 했으며, 이르기를;
호연한 발자취와 높은 덕행은 세상의 모범
이라 했으며, 이르기를;
존심양성을 잊지 못하고 수행해 나아감이 숭상하여 우러러볼 만하다.
하였으니 지극한 마음은 칭찬할 만하다고 하겠다.
오호라! 선생께서 남기신 글이 불타고 남은 유사(遺事) 일부를 주워 모아 겨우 책 한 권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은 선생께서 실제로 베푼 은덕과 실천한 행실에 비추어 볼 때, 새까만 까마귀의 발에서 흰 점을 찾는 것처럼 겨우 1~2%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다만 여러 어진 사람들께서 남기신 글들을 영원토록 불후하게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그 때를 논(論)하고 그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횡거(橫渠) 선생의 정밀한 사고에다가 힘써 실천하는 선생의 실학이 더하였으며, 정호(程顥)의 모나지 않은 원만함에다 하늘이 내린 선생의 덕기가 더하였고, 정이(程頤)의 규범에다가 반듯한 선생의 출처가 있었고, 주자(朱子)의 전체에다 실천하는 선생의 존양이 있었다.
아! 심(心), 성(性), 천(天), 세 가지는 맹자의 깊은 이론인데 지극 하구나! 후세의 상론이 선생을 가리켜 이르기를;
비록 성인에 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현인보다는 훨씬 위에 계신다.
라고 했으니 황공하지만 과한 말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불초한 전구(저자)가 선생의 행장을 기록할 수야 있을까 만은, 돌이켜 볼 때 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상의 사적이 고요하고 덕(德)을 찬양하는 글도 찾아 볼 수 없으므로, 삼가 여러 선생들께서 지으신 글들의 뒤에 송나라 현인들 이야기를 몇 단계로 나누어 붙여 매우 분수에 넘쳐 지나치고 망령되며, 죄(罪)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와 같은 몇 글자를 남겨서 귀신에게 질문하고 후세의 평가를 기다리는 것 또한 불초한 후손이 바라는 바이다.
후손 전구(銓九) 삼가 지음.
* 각주 ----------------------
(1) 1523년(중종 18) 11월 27일 송애공, 송파공이 집현전 제학, 연촌공이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으로 추증되어 월당공에 합하여 4제학이라고 부른 것이다. 추증은 송애공파가 추진했지만, 19세기까지 연촌공파는 추증 벼슬을 인정하지 않았다.
(2) 肅宗辛酉. 진사 김창협이 지은 청액소를 생원 유장옥 등의 명의로 제출한 해 이다. 저자의 착각으로 보인다. 사액은 1713년(숙종 39)에 내려 졌다.
(3)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은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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