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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에서 온 청년] 해동씨가 성창기업에 입사한 해는 1966년이다. 1947년생인 그는 대구농림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5년에 실습생으로 처음 이곳에 왔다. 청송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는 집의 4남 4녀 중 장남인 그는 홀로 대구까지 유학을 왔다가 실습을 하러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성창기업의 회장님이 대구농림고등학교 선배라고 하셨다. 농림고 학생이니 나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목재 회사로 실습을 가는 것이라 부산으로 오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이 직접 면담을 하셔서 3학년 학생 중에서도 몇 명만 특별히 뽑혀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때 우리가 처음에 올 때 부산역이 아니라 부산진역에 대구서 와가, 여 실습하러 올 때 교장 선생님하고 같이 인솔해가 왔는데. 우암동까지 가는 버스가 마땅치 않아가꼬 뭐 오래 기다리가 마이크로버스 같은 거 타고 그래가 겨우겨우 왔지.” 열아홉 어린 학생 7~8명과 교장 선생님까지 기차를 타고 힘들게 내려왔다. 우암동 회사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거의 1시간은 길에서 보내다 겨우겨우 도착한 회사. ‘적기동 4가 7에 2’ 5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또렷이 기억하는 옛 회사의 주소이다. 당시에는 우암동을 적기동이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 그 골짜기를 적기동이라고 불렀는데 1960년대 그가 내려올 당시만 해도 일본말로 ‘아카사키’라고 불렀다. 회사에 처음 도착해서 회장님에게 인사 먼저 드렸다. 그는 지금은 돌아가신 노회장님을 처음 대면한 날의 감격을 떠올린다. 실습생으로 멀리 대구에서 와줬다며 실습 기간 동안 특별 대우를 받았다. 실습생들은 일반 기숙사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 일본 기술자들이 지내는 숙소에서 묵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 기술자들이 직접 한국으로 와서 기계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숙소가 별도로 있었다. 사택처럼 단독 주택에 마련된 일본인 숙소에서 실습생들도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우가 상당히 좋았다. 실습 당시에는 나무에 대한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서 여기저기 기록도 많이 하고 다녔다. 몸을 쓰는 일보다 공장 안을 돌아다니며 배우는 경우가 많아서 편하게 있었다며 웃는다. 그는 성창기업에 1966년 2월 1일 정식으로 입사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인 1965년부터 실습생으로 성창기업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근속 기간을 물어보자 사원이 된 날을 정확하게 말한다. 스무 살 젊은 청년이 부산에 터를 잡은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원이 된 이후 우암동 기숙사로 들어왔다. 워낙 기숙사 생활을 하는 직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셋방에서 지내면서 기숙사에 자리가 생길 때까지 대기자 순번을 올려두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오래도록 위원장을 했다. 기숙사에 사감이 있었지만 기숙생을 대표하는 위원장도 따로 있을 만큼 규모가 컸었다. 남자 기숙사보다 여자 기숙사는 그 규모가 더 컸었다. 남·여 기숙생의 대표로 위원장을 하면서 어린 나이였지만 꽤 열심히 활동을 하였다. 합판 공장의 현장직에는 여직원들이 무척 많았다. 요즘은 그런 경우가 없지만 당시에는 현장직 여직원을 부산 이외의 먼 지역에서 많이 데리고 왔다. 원래 회사가 경상북도에서 만들어졌고 회장이 경상북도 봉화 출신이다 보니 경상북도 지역에서 젊은 아가씨들이 많이 왔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어린 아가씨들이 통근 버스에 가득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온 여직원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잠 잘 곳이 없는 여공들에게 회사가 해줄 수 있는 혜택이었다. 명절이면 경상북도 봉화나 전라남도 순천까지 30대가 넘는 회사 버스가 귀경길을 떠났다. “군대를 좀 늦게 갔어요. 1972년도에 갔다가 1975년도에 돌아왔지. 입사 해가 5~6년 근무하다가 군대 갔고 또 인사하러 오니까 회사 들어오고 싶어 하는 기색이다 싶으니까 시골 가 좀 쉬고 있으니까 서류 보내라고 하대. 마땅한 자리도 없으니까 그래 또 꾸역꾸역 왔습니다.” 기숙사에서 이십대를 모두 보냈다. 그곳에서 군대를 갔고, 제대 후에 다시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의 이십대는 군대에 있는 기간 이외에는 성창기업과 기숙사, 위원장 생활이 전부였다. 해동씨는 서른 살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이제 기숙사 생활을 벗어나는가보다 생각했지만 어림없었다. 결혼한 새 신부를 청송 시골집에서 시집살이를 좀 살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새신랑인 그는 또다시 혼자 기숙사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집사람과 같이 못 살았어. 고 떼놨다가 기숙사 생활을 어느 정도 하면서 6개월인가 1년인가 했지. 그라고 셋방을 얻어가 이사를 하게 됐고.”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