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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현기증
-유안나 신작시 다섯 편에 대하여
김태선
필멸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반드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그에 대한 궁금함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죽음에 관한 이런 태도는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이루어졌을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현세의 삶을 보다 충만히 살기 위해 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은 살아 움직이는 자이고, 죽음은 지식으로 정복될 수 없는 대상이기에 문제가 된다. 유안나 시인의 시는 그런 죽음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해, 삶과 존재의 문제를 사유한다. 이번 신작 시 다섯 편은 존재의 운행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각각의 시편에서 시인의 사유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남자는 떠났고 빙어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아이들의 나무팽이가 얼음 위에서 키득키득 돌고 돌았다. 세월의 안과 밖을 굽이치던 강물이 얼음의 각질에 둘러쌓였다. 바지 밑단이 늘 짧았던 남자. 물속만 보던 남자. 여자의 남자.
-「얼음 붉새」 중에서
「얼음 붉새」는 “남자는 휘파람을 잘 불었다.”로 시작한다. 휘파람은 숨이 입술을 통해 마찰을 일으키며 새어 나오는 소리이다. 휘파람을 불기 위해선 숨을 쉬어야 한다. 첫 문장은 어딘가 미묘한 조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분다’가 아니라 ‘불었다’로 서술어가 끝나기 때문이다. 시의 목소리는 ‘휘파람’이라는 현존함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과거의 것으로 이야기한다. 즉, ‘남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얼음 붉새」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때문에 시의 문장들이 과거형으로 서술되고 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강둑을 걸었었다.”라는 표현 역시 과거 시제이다. 아마도 시의 목소리와 ‘남자’는 연인 사이였을 것이다. “기대고 싶은 남자.”라는 표현으로 볼 때 시의 목소리는 ‘남자’에게 크게 의지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자’는 “허우적거릴 것만 같은”이기도 하다. 기대고 싶지만, 기대기에는 그 남자의 “어깨는 살얼음처럼 위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자의 남자”이다. 시의 목소리는 이렇게 ‘남자’를 호명한다.
두 번째 연에서는 ‘남자’의 나이가 직접 언급된다. “스물두 살이었다.”라는 표현은, 시의 목소리가 전하는 이야기가 과거의 것임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단순한 묘사처럼 보이지만,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남자의 등 뒤에서 붉게 달아올랐던 해가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해는 사라지고 반달이 떴다.” ‘붉새’는 붉은 노을이다. 서녘으로 지고 있는 해이다. 그 앞에 ‘얼음’이 수식되어 있다. 차갑게 지고 있는 태양. 흔히 서쪽 하늘은 죽음을 가리킨다.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시에 나타나있지 않지만, ‘남자’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임을 알 수 있다. ‘남자’의 얼굴은 “반쯤 웃고 반쯤 슬픈” 모양새이다. 그리고 말이 없다. 이쯤 되면 ‘남자’를 읽어낼 수 있는 표지는 많지 않다. ‘남자’는 “몇겹의 어둠을 걷어내고서야 읽혀지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둠을 걷어내는 일은 쉽지 않으므로, 그를 제대로 읽어낸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 번째 연에서 “남자는 떠났고 빙어들이 휘파람을 불었다.”고 한다. 겨울이 찾아왔다. ‘남자’는 먼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나무팽이가 얼음 위에서 키득키득 돌고 돌았다.”고 한다. ‘남자’가 떠나고, 빙어들이 그 빈자리를 대신하는 추운 계절이 찾아왔어도 새 삶은 그렇게 팽이처럼 돈다. 연이 끝날 무렵 “여자의 남자.”가 다시 한 번 더 반복된다. 시의 목소리는 이렇게 현존하지 않는 존재를 소유격으로 호명함으로써 이 자리에 불러온다. 그러자 마치 초혼에 응답이라도 한 듯이 “남자가 얼음을 깨고 숲으로 날아갔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굴참나무 잎사귀를 만지면 얼음에 둘러쌓인 남자의 휘파람 소리가 새어나온다.”라는 말을 끝으로 시는 끝난다. 그 이전까지는 계속 과거형의 시제로 문장이 쓰였으나, 이 자리에서는 현재형 문장이다. ‘여자’의 부름에 ‘남자’가 응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밤
새알 같은 무덤이
조용히 열리고
어미 새가 둥지 속으로 들어가
새끼의 눈물을 닦아주는 시간이다
-「동지」 중에서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때를 일컫는 이름이다. 시의 목소리는 동짓날 팥죽을 먹고 있다. “새알을/ 입안에 굴리며/ 어미 잃은 어린 새를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팥죽에 들어 있는 새알과 새가 낳은 새알이라는 동음이의어에 의한 연상 작용일까. 같은 소리가 다른 뜻을 품은 채 독특한 은유를 형성하는 이 차원이 「동지」의 시 전체를 관활하고 있다. 시의 목소리가 “어미 잃은 어린 새를”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도 뭔가 잃어버린 대상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 상실에 관한 사유는 동짓날 깊은 밤에 이루어지고 있다. 밤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밤은 많은 것들을 감춘다.
밤은 동시에 빛에 의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죽었던 것들이 이승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한 해 중 밤이 가장 깊은 동짓날에는 귀신들이 찾아온다 하여, 우리는 그것을 막기 위해 피와 색이 같은 팥죽을 먹는다. 두 번째 연에서 볼 수 있듯이 “새알 같은 무덤이 조용히” 열린다. 앞서 소리에 의해 형성되었던 은유가 여기서는 시각적인 이미지에 의해 나타난다. 새알의 모습은 무덤을 닮았다. 닫혀 있던 무덤이 깊은 밤 열린다. 그리고 “어미 새가 둥지 속으로 들어가/ 새끼의 눈물을 닦아”준다. 인간은 귀신을 쫓기 위해 팥죽을 먹지만, 어미 새는 새끼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무덤을 열고 나오는 시간이다.
깊은 밤, 이 시간은 시의 목소리에게 “빙수 같은 달빛이 흘러내리는 밤”이다. 이처럼 이 시를 관통하는 건 유사성을 통해 이어지는 차이들의 은유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그 안에 품고 있는 동일한 것들로 서로 묶여있다. 이 동일성은 맹목적인 하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단독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로가 결속되어 있음을, 혼재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 연에 이르면 은유적 결속의 양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꽁꽁 언 새알 같은 달이/ 새 둥지를 지나간다/ 무덤 위를 지나간다” 여기서 ‘새알’은 ‘달’로 연결되고 다시 ‘새 둥지’와 ‘무덤’으로 연결된다. 동지 팥죽에 들어 있는 새알은, 새의 새 생명을 잉태한 ‘새알’이기도 하고, 동지 밤에 뜬 ‘달’이기도 하다. 그것이 동지와 음이 유사한 ‘둥지’ 위를 지나가고, 모습이 비슷한 ‘무덤’ 위를 지나간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푸른 잎에 이름 새겨놓고
노을을 건너가는 너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다시 너를 잉태할 것이다
나비는 웅크리고 앉아
햇빛 속에 반짝이는 너의 울음을 본다
-「배꼽」 중에서
「배꼽」은 하나의 연으로 구성된 시이지만, 우선 앞부분의 8행까지는 ‘간다’라는 술어로 끝나는 행이 많아 나머지 부분과 구분이 된다. 첫 행은 “뒤돌아보며 간다”이다. 여기서 미묘한 균열이 감지된다. ‘간다’라는 말이 지시하는 방향은 ‘앞’이지만, 그 행동을 하는 주체는 뒤를 돌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의 움직임이 서로 다른 방향을 지시한다. 이를 시간에 비유하자면, ‘간다’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되고 ‘뒤돌아보며’는 과거를 향한 시선이 된다. 이는 움직임 자체의 분열뿐만 아니라 행동의 주체 역시 분열시키는 이중화된 언어이다. 이런 이중화된 주체와 행동은 4행의 “네가 너의 등을 밀고 간다”에서도 나타난다. ‘너’가 자신의 등을 밀고 간다는, 한 쪽에는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지만 다른 한 쪽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할 수밖에 없기에 등을 미는 주체가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단서는 그 뒤에 이어진 “만장처럼 펄럭이며/ 달빛같이 아릿하게 간다”에 있다. 만장은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을 기로 만든 것으로, 상여 뒤에 들고 따라가는 것을 일컫는다. ‘처럼’이라는 말로 직유를 만들었으나, 이 두 행에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의 움직임을 그린 것이기에 “달빛같이 아릿하게 간다”고 쓰였다. “계절 밖으로 달려 나간다”도 그와 유사하게 읽힌다.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의 이행을 그린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네가 수태한 너를 안고 간다”는 앞서와 같이 이중화된 언술이지만, ‘수태’라는 말로 인해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너’를 이 세상에 없는 자라면, 어떻게 “네가 수태한 너를 안고 간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아마도 시의 목소리는 죽음을 단순히 한 생의 단절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서로 묶여 있으며 교차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만장’ 뒤에 ‘수태’가 그리고 “네가 앉았던 자리에는/ 푸르게 잎이 돋아서”라는 표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일 테다.
삶과 죽음, 혹은 얻는 것과 잃는 것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속성이 한 몸으로 구현되는 모습은 시의 제목 ‘배꼽’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배꼽은 포유류에겐 탄생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그 삶을 가능케 한 어머니와의 분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곧 세상으로 삶을 얻어 나온다는 사건은 잃어버림을 통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삶은 항상 죽음을 예비하고 있다. “나비 역시 어딘가로 날아갈 것 같은데/ 푸른 잎에 이름을 새겨놓고 건너가는 너”처럼 온 것은 가야 한다. 그러나 떠나감은 다시 돌아옴을 상기시킨다. “다시 봄이 오면” 잎이 푸르게 돋듯이 “너는 다시 너를 잉태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존재의 순환 과정은, 나비가 “햇빛 속에 반짝이는 너의 울음을” 보는 것처럼, 고통을 수반한다.
꽃이 피고 난 후인지 꽃이 지고 난 후인지
알 수 없는 빛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가 다시 돌아가네
나는 어디서 기다릴지 망설이네
-「숨의 재구성」 중에서
존재의 순환에 대한 움직임은 「숨의 재구성」에서 더 구체화된 사유로 나타난다. 「숨의 재구성」에는 ‘초에니 바르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티벳 사자의 서에서 ‘바르도’는 죽음과 환생, 혹은 고통의 바다와 영원한 열반 사이에 위치한 과도기적인 머묾의 장소를 일컫는다. 그리고 ‘초에니 바르도’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라고 한다. 부제에 쓰인 것처럼 「숨의 재구성」에서는 현 세계가 아닌 곳에서의 독특한 체험이 나타난다.
첫 연에서 “무언가 휘도네”라고 하지만 그것은 얼굴을 만져보아도 “얼굴이 없네/ 통증도 갈증도 없네”라고 묘사된다. 심지어 “익숙한 숨소리를” 찾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소리를 질러 “누구, 나 아는 숨소리 없어요”라고 물어도 “아무도 듣지 못하네”라고 한다. 시의 목소리가 있는 공간은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도 없고, 고통도 허기짐도 없는 독특한 공간이다. 그곳에선 어떤 쾌락이나 기쁨, 혹은 편안함 같은 것도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바르도’의 공간에서는 시간의 관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시의 목소리는 “꽃이 피고 난 후인지 꽃이 지고 난 후인지”라고 말한다. 시의 목소리가 “숨소리를” 찾는 이유는, ‘숨’이 곧 생명임과 동시에 존재자가 존재함을 나타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도’에선 존재와 비존재의 구별이 없다.
3연에 이르러 국면이 바뀐다. “알 수 없는 빛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가 다시 돌아가네”라는 부분인데, 여전히 시의 목소리가 거주하는 곳은 ‘바르도’이지만, 그를 찾으러 온 “알 수 없는 빛들”은 그 앞선 장면과 구별되는 징표이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이, 그 빛들은 다시 돌아간다. 때문에 시의 목소리는 “나는 어디서 기다릴지 망설이네”라고 말한다. 그가 거주하는 공간은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곳이다. 장소를 정할 수 없으므로 방황 중이다.
4연에서 “여러 휘황한 빛의 기둥이 다가오네”라며 다시 빛이 찾아옴을 시의 목소리가 말한다. 앞서는 “알 수 없는 빛들”이었으나 이번엔 “여러 휘황한 빛의 기둥”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은 더 구체화된 모습이다. 그로 인해 “나는 한 통로로 들어가네”라고 시의 목소리가 말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한 여자가 봄이 오네 라며/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네”라고 쓰인 연이 이어진다. 어느 것도 구분되지 않는 곳에서 이제 ‘한 여자’가 나타나는 이것과 저것이 구별되는 세계로 ‘나’가 진입한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삶을 얻었다. 그러나 삶을 얻는다는 것은 다시 고통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나’는 “등이 서늘하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손이 솟아나 머리를 만지네”라며 형체를 얻게 된 표현을 쓰고, “땀에 젖은 몸통이 무겁네”라며 되살아난 감각에 대해 말한다. 영원한 열반에 이를 수 있음에도 다시 고통으로 가득한 삶으로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치마 끝에서 할머니가 지워집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어린 내가 지워집니다
빙글빙글 도는 불꽃만 남습니다
-「현기증」 중에서
춤은 인간이 중력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고유한 몸짓을 일컫는 이름이다. 「현기증」에서 우리는 춤추는 집시 여인과 ‘나’를 볼 수 있다. 시의 첫 행 “집시 여인이 춤을 춥니다”에서 시의 목소리가 ‘집시 여인’을 택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집시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유목민처럼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이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들에게는 고정된 거주 공간이 없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의 중심점에 속박되기를 거부하는 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2연에서는 집시 여인이 춤을 추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는 “누가 내 머리카락을 끌고 갑니다”로 표현되어 있다. 집시 여인이 춤을 추는 자유로운 몸짓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3연에서 시의 목소리도 춤을 춘다. “어깨가 들썩입니다” 혹은 “풀쩍 풀쩍 솟구칩니다 엉덩이가 실룩거립니다”와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춤은 집시 여인의 춤과 미묘하게 다르다. 집시 여인은 태생적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자이지만, ‘나’는 어딘가에 얽매여 있는 이처럼 보인다. 어깨‘를’ 들썩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깨‘가’ 들썩입니다”라거나, ‘풀쩍 풀쩍 솟는’ 게 아니라 “솟구칩니다”라는 표현은 ‘나’가 자발적으로 행하는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는다. “발을 구르자/ 혼령들이” 달려와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혼령들의 모습은 “떡 광주리를 인 여인”이거나 “피를 흘리는 젊은 남자” 그를 쫓는 “젊은 여자” 그리고 “소스라치게 우는 아이”들로 나타난다. 어딘가 결박되어 있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다. 그런 혼령들이 ‘나’의 치맛자락에 달라붙는다. ‘나’는 혼령들을 애써 떼어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 같이 뜁시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여전히 집시 여인의 춤과는 다르다. ‘나’는 혼령들에게 속박되어 있다. “치맛자락을 잡고 맘껏 흔드시지요”라는 말처럼 자조적인 어조가 보인다. “껑충껑충 발은 질린 듯 뛰어오릅니다”라는 표현도 있다. 6연에 이르면 죽은 것들에 이어 이제는 “손가락 끝으로 방울방울 피가 모입니다”라는 표현처럼 살아있는 것들이 모인다. ‘나’를 끌어당긴다. 아직 춤은 자유로워지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끌어 모으는 몸짓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7연에 이르면 ‘나’가 추는 춤의 양상이 변한다. 앞서 ‘나’의 춤은 죽은 것과 산 것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했다. 이제 “치마 끝에서 할머니가 지워집니다”라는 표현을 시작으로 “아버지가 어머니가 어린 내가” 지워진다는 표현이 이어진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는 “빙글빙글 도는 불꽃만 남습니다”라고 한다. 이제 ‘나’의 춤은 존재함의 속박, 무거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위한 움직임을 표현한다. 과거의 것이라는 이름의 속박은 현기증처럼 돌고 도는 춤으로 인해 사라지고 현재 그 자체만을 드러내는 불꽃만 남는다. 시인은 좀 더 가벼워질 것이다. 존재의 무거움을 떨쳐내더라도 현세의 삶은 중요하다. 「숨의 재구성」에서 시의 목소리가 다시 현세의 삶으로 돌아오듯, 잘 죽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 이것이 유안나의 윤리이다.
2011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중